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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TOPIC
Hwanghyunsoo
budongsancanada
2024-10-10
작가 한강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광주항쟁 다룬 '소년이 온다' 등 대표작     스웨덴 한림원은 10일(현지시간)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우리나라 소설가 한강(54) 작가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지난 2000년 평화상을 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다. 한강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2014년작 장편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세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낸 2021년작 '작별하지 않는다' 등으로 한국 현대사의 깊은 어둠과 상처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그 밖의 대표작으로는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그대의 차가운 손', '검은 사슴',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1천100만 크로나(약 13억4천만원)와 메달, 증서가 수여된다.   한강은 1970년 11월 전라남도 광주(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올라온 한강은 풍문여고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는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 '추사', '다산의 삶' 등을 펴저명한 소설가 한승원이다.  1993년 대학 졸업 뒤 이후 잡지 '샘터'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습작을 하기 시작해 그해 계간 문예지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 등 시 4편을 실으며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붉은 닻'이 당선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한강은 이후 다양한 소설집과 장편소설들을 발표하며 한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한다. 마츠 말름 한림원 상무이사는 노벨상 수상자 발표 이후 "한강과 전화로 얘기할 수 있었다"며 "그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과 막 저녁 식사를 마친 참이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말름 이사는 그러면서 "그는 (수상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서 한강과 오는 12월 열릴 노벨상 시상식 준비에 대해 논의했다고 덧붙였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관련서 주문이 폭주하면서 한국의 대형서점 사이트가 한때 마비되는 혼란이 빚어졌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사이트에 잘 접속되지 않고, 되더라도 래그(Lag)가 걸려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다는 불만이 접수됐다"고 말했다. 교보문고와 함께 서점계를 양분하고 있는 예스24 측도 "사이트를 열 때 조금 지연이 되고 있다는 불만을 들었다"며 "다만, 모바일은 지금 순조롭게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johnnyyoon48
2024-10-10
상식

<상식; Common Sense (1776. 1)>이라는 주장을 한 권의 책에 담아 펴낸 이는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 1737~1809)이다.  그는 영국 세관의 관리로 일하던 중에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하게 운영되던 당시의 지배구조를 이 책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때마침 들끓던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가 결국 세관원이라는 ‘밥자리’에서 쫓겨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다. 재물과 권세를 거머쥔 기득권 세력은 그들이 누리는 ‘살기 좋은 이곳’에 근접하는 모든 존재를 지독한 의심과 혐의를 씌워 경원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군주제가 상식이 아니고 공화제가 상식이다”는 토머스 페인의 주장은 삶에 치어서 좀체 머리를 쳐들지 못하던, 신대륙의 거류민들을 깨우치는 촉매가 되었다. 그것은 ‘아메리카’라는 신천지에서 종교적 박해도 없고, 머리 위에 군림하면서 무위도식하는 ‘군주와 귀족 집단’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혁명적 깨우침이요, 자유인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몸부림이었다.  지금 보면 당연한 말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수천 년 지속되던 군주제 아래에서 펼친 그런 주장이, 당시의 통치 세력에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으로 인식되었을지 짐작은 된다.   아메리카의 독립운동에 앞장선 아버지들은 신교의 박해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나아가서 모든 행위에서 건전한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추구하기에 이른다. 인간 집단의 조직화한 규율과 질서유지에 관한 전례(前例)가 없었던 신대륙 위에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보다 자유롭고 바람직한 사회 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궁리에 바빴다. 페인 자신은 새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한 사상(이론적 기조)을 제공한 게 빌미가 되어 말단 공직에서 쫓겨났지만, 그의 이론은 그 후 ‘아메리카의 독립’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주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북극성 같은 좌표가 되었다.   그로부터 248년이 흐른 2024년, ‘상식’을 기준으로 한국의 정국을 일별한다. 수만 리 먼 곳에 이민 보따리를 푼 처지에서 고국의 복잡다단한 사정을 시시콜콜 논하자는 게 아니지만, 이민 1 세대로서 아직도 영어보다는 한국어가 자연스럽고 양식보다는 한식을 먹을 때 속이 더 편한 걸 어쩌리오. 빨라지는 교통, 통신 등이 우리의 생활과 의식을, 더 쉽게 조국의 움직임에 연결 짓는 것까지 떨쳐낼 수는 없다. 그곳에서의 일들이 사리(事理)에 맞게 돌아간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만, 논쟁이 심한 일도 최소한 상식(건전한 상식)에 어긋나지 않게 처리할 줄 아는 나라가 되면 다행이겠다는 소망까지 숨길 수는 없다. 그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공개적으로 묻고 싶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국민의 주권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권한을 부여해 뽑은 통치자이다. 그는 국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할 책무를 진 사람이다. 최근 여야 대치 정국에서 대통령이 직접 행하는 시행착오 중에서 두드러진 사건들을 보자. 그의 국정 지지도가 20% 아래로 헤매 돌자, 그는 KBS, MBC, YTN 등 공영 언론을 장악하여 자기를 칭송하는 나팔수로 만들려는 유혹에 빠졌나 보다. 방송통신위원장에 이동관, 김홍일을 추천했다가 실패하니, 이번엔 이진숙을 밀어붙이다가 중도에 멈춰 섰다. 그들의 인품이나 삶의 족적이 국민의 상식 기준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자들이었다. 취임 전부터 현재까지 정권, 아니 나라의 위신을 지저분하게 추락시키는 대통령 부인의 문제가 한국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지만, 그녀의 남편은 거짓된 말로 둘러댈 뿐 실질적 개선에 노력하지도 않는다. 타국의 언론들이 모진 말로써 김 씨에게 창피를 주었고, 그것이 건전한 상식을 가진 한국인의 위신과 한국의 존엄성에 먹칠을 하는 데도,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그들 부부는 괜찮은지 몰라도 국민의 심정은 전혀 그렇지가 않고, 거의 미칠 지경이다. 김 씨의 비위 사실은 몇 해 동안 소환 조사를 하지 않다가, 최근에 한 번 했다는 것이 요상한 방식이었다. 세계의 모든 법률은 ‘이 법으로, 여당 측 거물이나 대통령 가족을 조사하는 경우를 예정해서 조사 방법 또는 장소를 예외적으로 임의 변경할 수 있다.’ 같은 부대조건을 지닌 조항이 없다. 법률이 만인이 평등하게 적용되는 일반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법률을 특수적 불공평한 조건으로 적용한다면 그것은 법률의 자격을 포기한 문구요, 법이라 부를 수조차 없다는 건 상식이다.   박정희 정부에서 경제개발을 추진한 이래 수십 년간, 경제성장률에서 한국은 세계 최선두 그룹을 유지했다. 전두환 정부나 노태우 정부에서도 경제성장에 다소 기여는 했지만, 그들은 국민 입을 틀어막고, 양민을 살육했으며, 엄청난 금전적 부정을 저질러서 민주적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는 하나회를 척결해 30년 군부 통치를 종식함으로써 정치의 권한을 국민의 손에 돌려주었다. 동시에 금융실명제와 공직자의 재산 등록을 법제화하여 민주주의와 선진 자본주의 체제로 나아가는 대도(大道)를 활짝 열었다. 그의 “세계로 나가자!”는 호소에 군부 정권 추종자들이 “나라의 문을 성급히 열어젖혀서 큰일 났다”라며 계속 딴지를 걸었다. 한국의 눈부신 성장을 질시한 서방 세력과 일본 투기꾼들이 합세해, 한국에 투자된 자금을 의도적으로 동시에 일본 증권시장으로 빼돌리며 몰매를 준 것이 IMF 외환 위기였다. 그러나 그네가 때려잡으려던 한국의 산업 능력은 이미 그들의 턱 밑에까지 이르렀고, 자력으로 민주 정치를 이룩한 한국 국민의 자존심과 애국심이 이미 선진국 수준에 있었음을 간과한 큰 실수를 범했다.  외환 위기를 조기에 종식한 김대중 정부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급속히 개선하였고, IT산업을 중심으로 미래 먹거리를 개척하고, 문화예술의 세계 진출을 지원하여 한국이 선진국 문턱을 넘게 하였다. 이에 한국인의 자부심, 자존감이 되살아났으며, 세계에 떨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앞의 지도자들은 한 때의 오해나 모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국가 사회를 고양(高揚)하려고 분골쇄신한 당당한 처신을 보였다. 그들이 큰 일을 하여 역사에 기록된 것은 자신의 영광이요, 동시에 국민의 행복이었다. 미국이 탄생하던 240여 년 전에 실시한 민주주의를 21C의 한국에서 시행하지 못하고 자꾸 후진하려는 잡음만 요란한 건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 싸움판을 지저분하게 끌어가는 집권 세력의 말과 행동이 몰상식하고, 무례하여 못 봐주겠다. 훗날 역사서에 그들의 이름 앞에 ‘조선조의 유자광 같은 간신배’ 따위의 칭호가 붙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2024. 10)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daekim
2024-10-10
다윗의 생애(11)

-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시킨 다윗 -                                                   “그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그들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사람들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들이니라.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그들을 쳐서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셋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죽이고, 다윗이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이 하닷에셋의 신복들이 가진 금 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또 다윗 왕이 하닷에셋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삼하 8:1-8)    예루살렘을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한 후 다윗은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다윗은 블레셋을 공격하여 그들의 수도 가드를 점령하고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는 모압을 쳐서 정복한 후 포로들을 그들의 능력에 따라 3분의 2는 죽이고, 3분의 1은 살려주었다. 살아남은 모압 사람들은 다윗의 종이 되어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는 그 옛날 발람이 한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민 24:17) 남쪽의 블레셋과 모압을 제압한 다윗은 마병 1,700명과 보병 20,000명을 생포하고 전차 100대를 위한 말을 제외한 모든 말들의 힘줄을 끊어버렸다.  그는 또 하닷에셋을 도우러 온 시리아 군 22,00명을 죽이고 그곳에 주둔군을 배치했다. 그때부터 시리아는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이스라엘의 종속국이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해주셨다.(삼하 8:6) 다윗은 하닷에셋의 신하들이 사용하던 금 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으며, 하닷에셋이 통치하던 베다와 베로데에서 많은 양의 놋도 가져왔다. 다윗이 하닷에셋과 싸워 크게 이겼다는 소식을 들은 하맛 왕 도이가 그의 아들 요람 편에 많은 양의 금과 은과 놋 제품을 선물로 보내며 승전을 축하했다. 하닷에셋과 도이는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죽이고 돌아온 후 백성들의 다윗을 향한 신뢰와 존경심은 더욱 높아졌으며, 에돔 전 지역에 주둔군을 둔 이후 에돔 사람들도 그의 종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가는 곳마다 동행하시며 그로 하여금 적군을 격파하게 해주셨다.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그가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에서 얻는 모든 전리품들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가 거둔 모든 승리는 그가 잘 싸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싸워주셨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께 드린 모든 전리품들은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다윗은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만을 행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왕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남쪽의 블레셋과 모압을 굴복시키고, 북쪽에 자리 잡은 소바 왕국을 쳐서 영토를 확장한 것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겠다.”(창 15:18)라 하신 약속을 이루어드린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한 목적중의 하나를 주위의 이방민족들을 제압하고 국토를 넓힘으로 성취시킨 것이다.    그는 전쟁을 할 때도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략으로 싸웠으며,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처리했다. 소바 왕 하닷에셋를 물리치고 마병 1,700명을 사로잡았지만 다윗은 그들이 탔던 말들로 그의 기병을 강화하지 않고 전차 100대를 끌 말을 제외한 나머지 말들은 모조리 그 힘줄을 끊어버렸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여 그의 이름으로 싸우면 아무리 막강한 무장을 한 군대라도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신한 다윗이었던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내와 사랑으로 공평하고 정의롭게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온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때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나라를 지키고, 보호하고, 번영시켜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성군으로서의 다윗의 진면목은 그가 사울의 손자를 선대한 데서 선명하게 들어난다. 다윗은 엘라 계곡의 전투에서 적장 골리앗을 죽임으로 사울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그의 정적으로 간주하여 그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적대시하지 않았으며, 그를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고,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에게 패하여 자결하자 그와 요나단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했다.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다윗은 사울을 섬겼던 시바를 통해 사울의 장남이며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절뚝발이가 되어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윗은 즉시 므비보셋을 불러드렸으며, 므비보셋은 두려운 마음으로 다윗 앞에 섰다. 자신이 사울의 손자이기에 다윗이 그를 처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다윗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아버지 요나단으로 인해 너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한다. 너의 할아버지 사울이 소유했던 땅을 모두 네게 돌려주고 또 너를 항상 내 식탁에서 먹게 하겠다.”라 말한다. 그러자 므비보셋은 “이 종이 무엇인데 왕께서 죽은 개 같은 제게 이런 은혜를 베푸십니까?”라며 감격한다.    다윗의 므비보셋에 대한 호의와 사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울의 종이였던 시바로 하여금 그를 주인으로 섬기도록 함으로 므비보셋은 평생을 왕자처럼 다윗 왕과 한 식탁에서 먹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진 것도 없고 불구의 몸이 된 상황에서 평생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내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그를 어둠과 절망의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도록 은혜를 베푼 것이다. 이 같은 다윗의 너그럽고 진실한 인품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째서 그를 그처럼 사랑하시며, 그의 귀중한 도구로 사용하셨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에겐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가진 것을 주위의 사람들과 나눈다는 것은 그들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 우리들 자신이 풍성한 삶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allellu
2024-10-10
나뭇잎 치마와 가죽옷

  처음으로 눈이 밝아진 사람들이 있었다. 아담과 하와다. 그들이 에덴에서 살고 있을 때, 뱀이 찾아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물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기서 ‘모든’이란 단어는 선악과 나무에 관한 이야기로 끌고 가기 위한 사탄의 교묘한 ‘빌드업’이었다.   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답했다. 구약성경 창세기 3장 초반부의 이야기다.   하지만 하와의 대답은 정확하지 않았다. 앞서 2장에서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마는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꼬드겼다.   결국 하와와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악마의 말처럼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눈이 밝아진 것이다.   정리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악마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고, 선악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은 맞다. 다만 악마는 선악을 아는 것이 반드시 죽음으로 귀결될 것이란 점은 교묘하게 감췄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진 뒤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자신들이 벗었다는 사실이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그들은 똑같이 벗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먹은 후에는 무화과나뭇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었다. 눈이 밝아져 자신의 상태를 보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해, 수치를 피하려는, 즉 악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문제는 왜 선악을 아는 것이 죽음의 문제와 연결되는가 하는 데 모아진다. 그 이유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는’이라는 구절에 숨어 있다. 선악 판단의 주체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하와와 아담은 “선악을 아는”, “하나님처럼 되는” 탐욕적 선택을 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한 것이며,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경계를 넘어 창조주의 자리를 탐낸 것이다.   타락 이전의 모습을 보면 벗었으나 수치스럽지 않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스스로 판단을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 때문에 나타난 병적 증상이다.   아담과 하와 속에는 모든 인류가 담겨 있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선과 악, 잘잘못을 따지고 평가한다. 하루 종일 입으로 떠들어댄 말이나,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을 가만히 정리해 보면 알 수 있다. 그 평가의 기준은 또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아니, 하나님마저도 인간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 평가하려 한다.   예외가 있다. 육신을 입고 태어난 존재 가운데 유일한 분,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은 유일한 존재는 그리스도 예수뿐이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절)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2장49절에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하셨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빌립보서에서 다시 설명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장5~8절).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하나님처럼’ 되기를 포기하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 그것이 십자가다. 성경은 첫 머리부터 십자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아담과 하와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인간의 대표로, 유대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항상 사람들을, 심지어 하나님이신 예수를 저울대에 올렸다.   이들에 대해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한복음 8장44절) 라고 하셨다. 창세기 3장의 에피소드를 풀어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이제 눈이 밝아진 인간, 선악 판단을 내리는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벗기시고,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들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직접 만들어 입었던 나뭇잎 치마 대신 짐승의 가죽 옷을 여호와께서 만들어 입히신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의 선악지식을 동원해 만들어 입은 나뭇잎 치마는 수치를 가리는데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아담과 하와의 자리에서 어떤 짐승이 대신 죽는 것이다. 짐승의 무고한 죽음이 그들의 수치를 가려줄 가죽을 남겼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짜 놓으신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시간의 역사는 아담과 하와를 시작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만을 증거한다. 선악과 사건 이후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뱀을 향한 저주에도 그것이 들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3장14~15절). (사장/편집인)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youngho2017
2024-10-10
'두 여인(Two Women)' (3)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I) 두 모녀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양면성 묘사, 연기자 소피아 로렌의 진면목 보여준 작품 (지난 호에 이어)    그 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미켈레가 어느 날 나타나 체시라의 뒤를 밟는다. 별 대화 없이 나란히 걷던 둘은 독일군을 피해 마을 부호집으로 찾아가는데 거기서 예기치 않은 독일군 중위와 맞닥뜨린다. 뭐 하느냐고 묻는 중위의 물음에 막 대학을 졸업했다고 대답하는 미켈레. 전공은? 문학이라고 답하자 중위는 로마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 말한다.     이에 비위를 맞추려고 부호영감이 "그러면 이탈리아인들이 철학을 싫어하는 이유도 당연히 아시겠군요?"라고 거든다. 중위는 엉뚱하게도 "당신 같은 계층은 진수성찬이지만 농부들은 먹을 것도 없다"며 따지자 "보통은 이렇게 안 먹어요. 이건 중위님을 위한 특별한 점심이지요"라며 쩔쩔매는 부호영감님이 "그들이 그렇게 사는 건 그들의 선택이에요"라고 강변하자 "이탈리아의 지도계층인 당신들의 잘못"이라며 "점심 한끼 먹이고 내 입을 다물게 하려는 거요? 난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소"라며 격앙되어 소리치는 독일군 중위.        이때 부엌에서 부호마님과 함께 있던 체시라가 이 고함소리를 듣고 뜨끔해 하는데 부호마님이 말한다. "저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야 해. 토요일마다 식사하러 오거든" "저라면 수프에 독약을 넣겠어요"라고 말하는 체시라.     딸에게 줄 음식을 싸가도 괜찮다는 호의에 체시라는 설탕, 밀가루 등 닥치는 대로 바구니에 싸 담는데. 이때 칸초네 노랫소리가 들린다. 중위가 부호영감에게 노래를 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마님 할머니.    이때 부호마님이 깜빡했다며 커피를 갈아달라고 부탁하자 커피를 갈며 노랫소리가 들리는 거실로 가보는 체시라. 담배 연기가 자욱한 거실에서 영감이 노래를 하고 있는 가운데 중위와 미켈레의 대화가 이어진다.        중위: 당신들은 선천적으로 전쟁을 좋아하지. 전쟁은 남자의 필수경험이죠. 전쟁 없이는 남자도 없어요.    미켈레: 차라리 거세를 하겠어요.      중위: 역시 이탈리아인답게 감상적이군요. 오늘도 독일의 소중한 병사들은 당신들 대신 피를 흘리고 있어요.    미켈레: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당신들은 출발부터 잘못됐어요.    중위: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보시오. 냉철한 머리로! 당신과 이탈리아 사람들은 패배를 해야 정신을 차릴 거요. 당신들 자식들도 피눈물로 그 대가를 치를 거요!        독일군 중위가 점점 핏대를 올리자 이를 엿듣던 체시라가 불쑥 나타나 "애들이 무슨 상관이에요? 어서 말해봐요!"라며 "여기 오다가 당신들 때문에 미친 여자를 봤어요. 어디 나한테도 한번 해봐요"라고 삿대질을 하며 대들자 부호영감이 "여자 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말리는데 그때 공습사이렌이 울려 모두들 방공호로 대피한다.     체시라가 두고 온 바구니를 챙기러 부엌으로 갔다 오니 무시무시한 공습이 이어지고, 경황(驚惶) 중에 안경도 쓰지 못해 앞이 보이지 않는 미켈레를 이끌고 나오다 둘은 풀밭에 쓰러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풀잎에 예쁜 무당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다. 체시라의 몸을 안고 쓰러진 미켈레는 은연중에 그녀를 더듬고 키스를 한다. 경보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방공호에서 나오던 부호 부부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 그때서야 안경을 찾아 쓰는 미켈레. 쏟아진 밀가루를 말없이 주워담는 두 사람.    그러나 이만한 평화마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독일군 패잔병 6명이 마을에 들어와 총으로 위협하며 물과 먹을 것을 요구하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길잡이를 요청한다. 마을사람들이 이를 구경하기 위해 다 모였는데 결국 가장 젊은 미켈레가 험악한 산악지대의 길잡이로 잡혀가게 된다.       •한편 연합군의 진격이 시작되고 무솔리니와 독일군의 패망이 가까워지면서 식료품 부족과 더 잦은 폭격 등으로 이 시골이 도시보다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옛 거처로 복귀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미켈레의 부모도 여기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들과 합류한다.    가는 길에서 미군 탱크부대를 만난 사람들은 군인들이 던져주는 껌과 초콜릿 등을 챙기기에 바쁘다. 마치 우리 6•25전쟁 때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탱크 위에 있던 사진사가 체시라를 보고 "다리를 보여주면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하자 "네 누이 다리나 찍어라!"며 야유하는 사이에 독일 전투기 한 대가 아군들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바로 코앞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독일 전투기가 사라지고 평온을 되찾자 사람들은 폰디로 가는 것도 위험하다며 미군이 더 진군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의견과 미켈레 부모는 아들을 찾으러 그래도 폰디로 가겠다고 하고, 체시라는 미켈레를 보러 폰디로 가려고 하는 딸 로세타를 끌다시피 하여 모녀는 로마로 향하는데….        뙤약볕 길가에서 모녀가 잠깐 쉬며 싸온 빵을 먹고 있는데 머리에 터번을 두른 무장군인들이 탄 트럭행렬이 지나간다. 그냥 지나간 것으로 보아 연합군인 것 같은데… 암튼 모녀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성당에 들어가 벤치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쉰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갑자기 들이닥친 프랑스 식민지 군대인 모로코 군인들에 의해 집단 강간을 당할 줄이야! 엄마는 금쪽같은 딸의 이름을 부르짖지만… 이때 신성함과 숭고함의 상징인 교회의 성모상 앞에서 윤간 당하는 로세타의 얼굴을 클로스업된 정지화면으로 보여줌으로써 강렬한 충격을 준다.[註: 그런데 정작 이 장면은 당시 '성적 노출 금지' 규정에 대한 무언(無言)의 항변으로 일부러 정지화면으로 처리했다는 후문인데 아무튼 데 시카 감독은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신을 차린 엄마가 딸에게 다가가 부둥켜 안고 눈물로 머리를 빗겨주고 입가에 흘린 피를 닦아준다. 그러나 로세타는 이 처참한 충격으로 더 이상 순진하고 사랑스런 '소녀'가 아닌 '여자'로 바뀌었고, 어머니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간다.     모녀가 다행히(?) 친절한 젊은 트럭운전사 플로린도(레나토 살바토리)를 만나 차로 이동하게 된다. 플로린도는 "정말 모로코 놈들과 아무 일 없었냐?"고 물으며 "오늘 아침 근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놨어요. 내 동생을 건드렸으면 다 죽여버렸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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