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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TOPIC
Hwanghyunsoo
budongsancanada
2024-05-09
투자처로 각광받던 토론토 소형 콘도 '인기 시들'

    고이율 모기지 압박에 매물 늘고 일부는 50만불 이하에 거래   토론토 다운타운 소형 콘도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다. 글로브앤메일 보도에 따르면 최근 시장에 나온 대부분의 콘도 매물이 고층타워가 밀집한 다운타운에 있는 500평방피트 이하의 침실 1개짜리다. 리맥스 부동산의 한 중개인은 "많은 경우 더 높은 이자율로 모기지를 갱신해야 하는 집주인들이 유닛을 매물로 내놓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 관계자는 "매물로 나오는 1베드룸 콘도의 수는 압도적"이라며 토론토의 콘도 공급이 2023년 3월과 비교해 올해 55.3%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매물이 늘면서 월 임대료도 내리막길이다. 투자용으로 소형 콘도를 보유한 소유주들은 막대한 운영비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부동산 중개인은 "한때 인기를 모았던 소형 콘도가 현재로는 훨씬 덜 매력적인 옵션이 되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최근 토론토의 콘도 가격은 작년보다 소폭 하락하거나 지역에 따라 제자리걸음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다운타운에서는 60만 달러 미만의 유닛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킹 스트리트 이스트(King Street East)와 팔러먼트 스트리트(Parliament Street)에 테라스가 딸린 침실 1개짜리 콘도는 49만9,000달러에 겨우 팔렸다. 그럼에도 일부 인기 콘도는 시장에 나오자 마자 팔리는 경우도 있다. 글로브앤메일과 인터뷰한 중개인은 Berczy Park가 보이는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유닛의 거래 사례를 예로 들었다. 67만5,000달러에 매물로 나왔는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입찰가보다 높은 68만 달러에 거래가 성사됐다. 중개인은 "탁 트인 전망이 결코 차단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신속하게 거래를 성사시켰다"고 전했다.   반대로 말하면 오로지 투자용으로 콘도 내부 인테리어나 층수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구입한 콘도들이 자칫 애물단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그럼에도 토론토 콘도시장이 완전히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단독주택 다운사이징 등으로 콘도를 원하는 실수요자가 있고, 이들은 좋은 조건의 80만~180만 달러 수준의 콘도 매물을 눈여겨 보고 있다고 밝혔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ywlee
2024-05-09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Editor’s Note   -난생처음 체험한 성지순례  -잠시나마 속세 탈출의 청량제                                                               외부에서 본 알람브라 궁전      남유럽에 위치한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에 걸쳐져 있으며,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아프리카와 육지상 국경이 있는 나라다.   서유럽과 유럽연합(EU)에서는 영토가 두 번째로 넓으며 유럽 국가 전체에서는 네 번째로 넓다. 0…스페인의 역사는 35,000년 전 이베리아 반도에 호모사피엔스가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페니키아, 고대 그리스, 켈트, 카르타고 문화와 이베리아 고유의 문화가 발달했고, 기원전 200년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히스파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여러 왕국들이 건국과 정복, 멸망 등을 반복하다가 8세기 초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됐다.  0…그 후 약 7세기 동안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가 일어나 레온,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르 왕국 같은 기독교국가들이 등장했고, 1492년 이 국가들 대부분이 마침내 가톨릭 군주라는 이름 하에 스페인으로 통합됐다.  스페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콩키스타는 711년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뒤 약 800년간 기독교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왕조를 축출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재정복 과정을 뜻한다.   0…근대에 이르러 스페인은 세계 최초의 제국(帝國)이 되었고 많은 문화적, 언어적 유산을 남겼다. 오늘날 스페인어 사용자는 약 5억 7,000만 명에 달해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모국어가 됐다.  스페인 문화의 황금시기엔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뛰어난 예술가들이 등장했고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이때 출판되었다.   이런 배경 등으로 오늘날 스페인은 세계에서 11번째로 많은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국가다. 0…스페인은 한때 무적함대(Armada)를 앞세워 바다를 정복했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후 넘쳐나는 금은보화(金銀寶貨)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흥청대던 때도 있었다.  세계 곳곳에 가장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며 영국보다 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하지만 그런 황금시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영화(榮華)는 오래 누리지 못했다.   넘쳐나는 부를 산업역량 배양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소비와 귀족들의 향락 수단으로 소모해버렸다. 식민지에서 쉽게 들여온 재화는 그저 행운이었을 뿐이고 그래서 고맙고 소중한 줄을 몰랐던 것이다.       스페인 곳곳에 산재한 엄청난 규모의 대성당들을 짓는데 재물을 탕진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지금은 그 덕에 전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후손들이 먹고 살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0…스페인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문화가 지배하는 유럽 국가이면서도 이슬람 문화가 진하게 혼재(混在)돼 있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Granada)지역에 위치한 알람브라 궁전이다. 보통 알함브라 라고 쓰는 경우가 많지만 Alhambra라는 이름은 스페인어로 ‘알람브라’라고 읽는다.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던 이슬람계 무어(Moor)인들이 지은 이 궁전은 아랍 군주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아랍어로 ‘붉은 곳’이란 뜻이다.  0…이곳은 특히 ‘통일 스페인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사벨라 1세 여왕이 1492년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이슬람 세력의 항복을 받아낸 곳으로 유명하다.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극도로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받는 건물이며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의 건축이 절충된 예이기도 하다.   지금은 전형적인 기독교 문화권이 된 도시에서 이슬람의 흔적이 듬뿍 담긴 궁궐을 보는 기분이 묘하다.  0…르네상스식 건물이 카를로스 1세 때 추가됐고 현재는 이슬람 건축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밤이 되면 건물 외벽에 불이 켜져 더욱 아름답다.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가인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이 궁전을 여행한 후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음악을 작곡해 더 유명해졌다.  “영토를 빼앗기는것보다 궁전을 떠나는 것이 더 슬프다.” 나스르 왕조 마지막 왕이 페르난도 2세에게 항복한 후 궁전을 바치고 떠나면서 남겼다는 독백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0…그동안 말로만 듣던 스페인 성지순례(聖地巡禮)를 다녀왔다.  열흘여의 짧은 기간에 무엇을 얼마나 보고 느끼고 왔을까만, 잠시나마 머리를 비우고 고고한 정신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성지순례는 일반 관광과 차이가 있다. 단순히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찾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대성당과 수도원 등을 찾아 미사와 기도를 바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나처럼) 신앙심이 깊지 못한 사람은 조금 지루할 수도, 경우에 따라서는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니 방문지의 역사와 문화, 현대적 의미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일반관광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        0…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번 순례여행의 성격도 제대로 모르고 따라갔다. 처음 가는 나라이니 알람브라 궁전이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 대성당 같은 곳에만 호기심이 있었다.   특히 시간여유가 없어 스페인 성지순례의 하이라이트인 산티아고(El Camino de Santiago) 순례에 참여하지 못한 점은 핵심을 빠트린 것이다.          하지만 함께 간 성당 교우분들과 특히 성지순례 30년 경력의 노련한 가이드 덕분에 점차 순례의 본질을 깨닫게 됐다.   0. 아무튼 엉겁결에 따라 나선 순례길이었지만 조용히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온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해서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은 딱 아는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사장)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chungheesoo
2024-05-09
The Japan-ROK-U.S. Summit: Yoon's Initiation Party to the Anti-Asia and Pro-West Club(2)

  (지난 호에 이어)   To do that, they had to keep control the South Korean people through the perpetual government. But, they knew that they could never get the power through democratic way. Only way was the dictatorship.   As a matter of fact, South Korea was oppressed and exploited by the merciless and criminal military dictatorship for 25 years from 1962 to 1987. General, Park Chung-hee ruled from 1962 to 1979, while General Chun Doo-hwan ruled from 1980 to 1987.   After 1987, General Rho Tae-woo governed South Korea from 1987 to 1993 followed by Kim Yong-sam from 1993 to 1998. During this 10-year period, the PJCSK continued to strengthen their power through well organized system of the embezzlement of tax payers' money.   In 1998, something happened. Kim Dae-jung was elected as president of South Korea. Kim was the leader of the LNSK. Kim's victory was the results of the LNSk's sustained fight against the PJCSK. Kim's victory was also the results of his remarkable plans of handling of the foreign currency crisis of 1997 caused by the corruption of the traitors.   Kim's government(1998-2003) was succeeded by the government of Rho Moo-hyun(2003-2008). Kim and Rho, leaders of the LNSK, did two things which alarmed the PJCSK.   One was the increase allocation of tax payers' money for the welfare of all the citizens. This meant less money to be stolen by the traitors.   The other was something which threatened the future of the PJCSK, because Kim and Rho were able to produce the North-South peace process.   They also produced North-South joint statements for peaceful unification and economic cooperation. Kim Dae-jung produced it on the 15th of June 2000; Rho Moo-hyun produced it on October 4, 2007.   It must be pointed out that the peaceful unification of Korea means, as far as the PJCSK was concerned, not only the marginalization of the PJCSK community but also harsh punishment of the traitors by North Koreans.   The peace process and the North-South economic cooperation have resulted in the weakening of the PJCSK's political and economic position.   However, the PJCSK was not idle. It fought back. In 2008, Lee Mung-bak became president of South Korea(2008-2013). Lee was notorious for his cunning methods of killing adversaries and enriching the corruption culture community of the PJCSK.   He forced Rho Moo-hyun to kill himself through the manufactured bribe scandal of Mrs. Rho.   However, the vision and the spirit of Rho are still alive and they remain the source of the courage and the determination of LNSK to get rid of the traitors.   Lee Myung-bak would have embezzles billions of dollars through the "4-Rivers Project" and the "Natural Resources Diplomacy."   Lee was succeeded by Park Geun-hye, daughter of General Park Chung-hee (2013-2017). She was not qualified to run a government. But she was picked to enrich the PJCSK.   However, what was a historical irony was the fact that their complicity to enrich the PJCSK with stolen money has resulted in the further loss of PJCSK's legitimacy and credibility.   Thus, the force and the credibility of the PJCSK which began to fall due to the ten-year governing by the LNSK under Km Dae-jung and Rho Moo-hyun has been further damaged by the corruption and the abuse of power by Lee Mung-bak and Park Geun-hye.   Then, in 2017, Moon Jae-in came along and became president after the 8-month long Candle-Light Revolution carried out by 27,000,000 South Koreans.   Moon hit hard the PJCSK through the social and economic reforms, the promotion of PMEs along with the war against the corruption culture of the PJCSK.   I may point out here that the power of the LNSK has been attributable to a series of mass protest demonstrations leading to the ruin of PJCSK presidents and the LNSK's access to power.   The following is the list of massive protest demonstrations by the LNSK and the punishment of the six PJCSK presidents.   April 19, 1960: The Student Revolution forcing President Rhee Syngman to flee after being accused for corruption and abuse of power.   October 16 1979: the BUMA Protest leading to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 Chung-hee for corruption and abuse of power.   May 18, 1980: the Kwangju Democratic Movement leading to the imprisonment of Presidents Chun Doo-hwan and Rho Tae-woo for treason (Chun), corruption and abuse of power.   June10, 1987: the Democratic Movement leading to the amendment of the Constitution leading o the formation of civil government.   2016-2017: the Candle-light Revolution resulting in the imprisonment of Presidents Lee Myung-bak and Park Geun-hye for corruption, abuse of power and incompetence de govern (Park).   Thus, none of the six presidents of the PJCSK has ended his or her presidency in honourable way.   This shows how deeply the PJCSK has been corrupted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how hard the LNSK has fought back risking the lives of its members.   This is what has made the PJCSK panicky and made it to do everything possible to take back the power.   The PJCSK was searching for the possible presidential candidate who could restore the PJCSK's power, privileges and wealth. They picked Yoon Suk-yeol.   As I mentioned several times in my previous Global Research articles, Yoon has none of the qualities to become president.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youngho2017
2024-05-09
'무방비 도시 (Rome, Open City)' (5·끝)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V)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물이 되는 여인들.   네오리얼리즘 3부작 중 첫 번째로 현실감을 살린 수작     2. 제2부 (계속)    하르트만 대위는 "나는 이를 잊기 위해 매일 밤 술을 마시죠.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또렷하게 생각이 나요. 우리 모두는 정말 살인하는 것밖에 몰라요. 우리는 전 유럽에 시체를 널부러 놓았지요.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억제할 수 없는 증오가 솟구치고 있으며 그 증오가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며 희망이 없어요. 최소한의 희망도 없이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오"라고 자책감을 털어놓는다.    소령이 화를 내며 "닥쳐라! 넌 독일 장교임을 잊고 있다!"고 말하는데 부하가 찾아와서 고문실로 간다. 만프레디가 말을 하지 않을 뿐더러 실토시키는 게 불가능해 보인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피투성이가 돼 실신한 만프레디에게 주사를 놓아 정신이 들게 한 뒤 소령은 갑자기 유연한 목소리로 "페라리스 씨, 내가 아까 말한 것처럼 난 당신을 대단히 존경하오. 또한 당신의 용기와 희생정신에 감탄하오. 그러나 이 점을 이해해야 하오. 당신은 공산주의자이고 더 이상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것을. 당신의 당은 반동적인 당이오. 당신들 모두 우리에게 대항하고 있소. 하지만 내일이면 로마는 점령되거나 당신 말대로 '자유화' 될 것이오. 이 군주주의자들이 아직도 당신의 동맹자라고 생각하오? 난 당신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 하오."라며 만프레디를 회유하지만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 만프레디!        소령은 채찍으로 그를 사정없이 때리며 "보도글리오 장군의 사람들 이름을 대라!"고 고함을 지른다. 처음부터 이를 지켜보는 신부. 이제 불로 지지고, 손톱을 뽑는다. 고문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잉그리드가 고문실이 보이는 신부의 방으로 들어온다. "잘 돼 가나요? 내가 쉽지 않을 거라고 말했잖아요?"라며 담배를 피는 잉그리드. 소령은 갑자기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신부를 고문실로 데려간다. "신부 이제 만족하는가? 이게 크리스천의 자비인가? 그리스도의 형제에 대한 당신의 사랑인가? 말하는 것보다 이 같은 꼴을 보는 걸 더 좋아하지? 당신 스스로 구원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나? 이 위선자야!"    끝끝내 침묵을 지킨 만프레디는 죽임을 당한다. 신부가 성호를 긋고 독일군들에게 말한다. "이제 끝났다…. 당신들은 그의 영혼을 파괴하려고 했지만 그의 육체만 죽였을 뿐이오. 당신들 모두에게 저주를! 당신들은 벌레처럼 먼지 속에 짓밟힐 것이오. 주여 용서하소서!"    이때 하르트만 대위와 함께 고문실로 건너온 마리나가 죽은 애인 만프레디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다 쇼크사한다. 곁에서 지켜보던 잉그리드가 선물로 줬던 코트를 얼른 걷어가 버린다.      소령은 신부를 데리고 가라며 모두 나가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잉그리드에게 "빌어먹을 이탈리아놈들! 우리가 졌다"며 "저 신부가 날 당혹스럽게 했다"고 말한다.    잉그리드가 말한다. "또 다른 순교자가 생겼네요. 이미 너무 많긴 하지만…" 이를 듣고 있던 하르트만 대위가 "잠깐만. 다음 번에는 우리가 우수 종족이 될 걸세!"하고 시니컬하게 말한다.        장면은 바뀌어 어느 공터. 독일병들이 사형집행 준비를 하고 있고 돈 피에트로 신부가 끌려나온다. 신부는 엄숙하게 말한다. “죽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오. 바르게 산다는 일이 어려운 것이오.” 그리고 하느님께 이들 사형집행자들을 용서해 줄 것을 간구한다. [註: 이 장면은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나오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군인들은 신부를 의자에 묶는다. 독일병 사수들의 표정이 어둡다. 철조망 바깥에는 마르첼로와 로몰레토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레지스탕스의 노래인 '모닝 인 플로렌스'를 휘파람으로 불고 있다.    드디어 총살형이 집행된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은 그에게 독일군 장교가 다가와 권총으로 머리에 한 방을 쏜다.    가슴에 저항심을 품고 있는 아이들은 죽어가는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절규한다. 그들은 도시를 향해 걸어간다. 영화는 첫 타이틀 장면에서 성베드로 대성당의 돔에서 패닝하면서 도시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다시 성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배경으로 아이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로마, 무방비 도시'이다.     3. 맺는 글     이 작품은 로셀리니 감독의 네오리얼리즘 3부작 중 첫 번째로 그 다음은 '전화의 저편(Paisan, 1946)'과 '독일 0년(Germany, Year Zero, 1948)'이다. 나치가 1944년 6월 로마에서 철수하고 두 달 뒤에 촬영을 시작한 로셀리니 감독은 당시에 활약하던 레지스탕스의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화면에는 날카로운 현실감과 박력이 넘쳐나, 네오 리얼리즘의 제1작품으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현실도피적 환상을 부추겨온 전쟁 전 부르주아적 연출을 벗어나, 로케이션 촬영이 돋보이는 액추얼리티를 보여주는 영화가 곧 그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적 감각으로 보면 거의 80년 전의 영화라 아무래도 썩 어필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 '무방비 도시'는 두 여배우의 희비극이 깃들어 있다. 이 작품을 보고 반한 유부녀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1982)이 헐리우드를 탈출하여 이탈리아로 날아와 유부남인 로셀리니 감독과 결혼하여 쌍둥이 자매를 낳아 세기의 가십이 되었다.    그런 반면 이 작품을 위해 로셀리니 감독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가장 이상형으로 사랑했던 안나 마냐니(Anna Magnani, 1908~1973)는 그가 갑자기 잉그리드 버그만과 결혼해 버리자 정신적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실연에 의한 불면증, 거식증 등으로 시달리다 65세에 췌장암으로 사망한 비운의 여인이다. (끝)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JOHNCHO
2024-05-09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62)

JC칼럼- 191   (지난 호에 이어) 벌써 개나리도 목련도 다시 한번 내년을 약속하면서 아주 잠깐 얼굴을 내밀며 피고 또 지었다. 이제 몇 남지 않은 우리 한인동포 1세의 노인 분들은 아직도 이곳 저곳에서 산마늘, 고사리, 취나물을 따다가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 모습에 마음이 짠하다. 이제 그것도 우리 2세, 3세들에겐 잊혀진 조상들의 역사로 남을 것이고 우리는 너도 나도 먼 길을 떠난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한 일생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한편의 영화를 찍고 그것을 되돌아 보면서 지독한 그리움에 따라오는 고독 그리고 후회를 가슴에 품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또 잊혀진다. 죽음 후엔 또 어떤 세상이 우리를 기다릴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사라져 간다. 하나의 그리움, 후회, 슬픔, 고통, 고뇌가 함께 하는 삶이 없는 그저 아무 기억도 없는 존재치 않는 무(無)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희망을 바라며 50보, 100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 모두는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며칠 전엔 오랜만에 50년 전 이민을 함께 왔던 친구들을 만났다. 모두 나이가 70대 중반을 넘어선 옛말로 표현한다면 고령의 노인들이다. 다행히 아직 상처를 한 친구는 없었는데, 한 친구의 아내가 오랫동안 치매를 앓고 있어 참여를 못했다. 모두가 수십 년 이민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또 정직하게 살아온 오랜 친구들이다. 자주는 아니고 그저 1년에 한 번씩 모이는 친구들의 대화가 이제 모두 과거의 이야기들일뿐 현재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은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서 너도 나도 이제 모두가 포기 그리고 순간순간 이별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니 갑자기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모두가 저마다 큰소리를 치고 미래의 설계를 하면서 밤을 새우던 그 시절이 마치 엊그제였는데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프 비거리가 얼마고, 자식이 어느 대학을 가고 손자손녀가 무슨 상을 타고 등등 말들도 많았지만 이제 우리 모두는 자기자신에게 또 자식들에게 또 지나온 삶에 실망을 하면서 조용히 다가오는 운명에 순종하는 모습들이다. 얼굴마다 굵게 또는 얇게 패인 주름 속에서 씁쓸한 웃음들과 함께 여기 저기 숭숭 빠져버린 앞니들 사이로 찐한 외로움들이 흘러내린다.  어찌 보면 짓궂기도 하신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역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세상,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를 우리는 이미 조상들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실감을 하는 어리석기만 했던 우리들은 모임은 그저 초라하기만 했다. 워낙 추운 이곳 캐나다는 벌써 5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씩 쌀쌀하고 또 비도 자주 내린다. 어찌 보면 그나마 유일한 우리 한인동포들의 즐거움은 오늘도 이곳 저곳의 골프장을 누비며 마치 갈 곳과 갈 길을 헤매며 뭔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처럼 별 이유도 없이 멍하게 살아가고 있다. 긴 겨울잠에서 덜 깨어난 사람들처럼 말이다.   지독히도 가난하게 살았던 50-60년 전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이제는 선진국 그리고 잘 사는 나라로 바뀌면서 한국을 떠나 이민을 오던 시대는 이미 옛말이 되었고, 이젠 오히려 거꾸로 복수국적이다, 귀화다 하면서 한국으로 역이민을 하는 동포들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캐나다에 사는 동포 수는 점점 줄어들고 또 유학생까지 줄게 되니 한국인을 상대해서 먹고 사는 영세업자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다. 물론 한국에도 남북간의 문제와 아직도 후진국 수준인 정치문제가 있긴 하지만 세상에 물도 좋고 정자도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필자는 모국 방문할 때마다 종종 느끼는 일이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 수준을 넘어서 이미 방종(self-indulgence)의 단계에 온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allellu
2024-05-09
웃음과 죽음

  “맛없는 빵에서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듯이, 멋이 없는 인생에서는 사는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다.” “사람은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열 가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죽어야 할 이유를 따져 봐야 한다. 그리고 나서 죽어야 할 이유가 없으면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삶에서 곱씹어 볼 만한 주옥 같은 이야기를 했던 주인공은 지리산 청학동 훈장 이정석 씨다. 한학을 깊이 공부했던 이 씨는 1995년말 펴낸 에세이집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 사람을 보고 웃는다’에서 세상을 향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오래 전 어느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 시선을 끄는 제목의 하얀 표지를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서당 훈장의 글은 어딘가 신선하고 끌리는 맛이 있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리산 청학동은 하얀 한복에 댕기머리를 땋은 아이들이 뛰어 노는 곳으로 인식됐다. 현대 문명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란 선입견이었다.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멸시를 보내고, 넘치는 사람에게는 아첨을 하고, 힘없는 이들을 짓밟으면서 힘 센 이들에게는 추파를 던지는 세태가 아닌가.” 그럼에도 바깥 세상을 향한 저자의 지적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책에서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1990년대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즈음의 한국사회는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자신감에다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뤘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사회의 위기라는 인식이 적지 않게 퍼졌다. 억눌렸던 시민들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사회적 혼란도 찾아왔고, 경제적으로는 IMF 사태의 전운이 짙게 드리웠던 시기다. 어쩌면 다소 어수선한 한국의 상황을, 어쩌면 한발 물러서서 바라본 청학동 훈장의 메시지가 그래서 독자의 시선을 붙잡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책 서문에서 “세상에는 사람들이 참 많다. 청학동의 안개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그들을 보고 웃었다. 세월은 절로 흘렀고 우리의 그 웃음도 흘렀다”고 적었다. 세상 사람들이 지리산 청학동 훈장을 보며 웃었던 ‘웃음’과 청학동 훈장이 세상 사람들을 보고 웃었던 ‘웃음’의 의미는 결코 같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문명세계와 청학동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개역개정)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표준새번역)   사도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 6장14절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세상이 분리돼 있음을 고백한다. 기준점은 십자가다. 정확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표준새번역이 쉽게 설명했듯 십자가는 죽음이며, 심판이다. 십자가라는 망원경을 통해서 서로를 바라보면 바울도 죽었고, 세상도 죽었다. 바울은 십자가 때문에 세상이 이미 심판을 당해 죽었다고 선언하고, 세상은 십자가 너머의 바울을 가치 없고, 죽은 존재로 취급한다. 바울이 이런 극단적인 고백을 하게 된 것은 갈라디아의 교회에 복음의 메시지를 주기 원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1장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통탄한 뒤 3장에서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면서 탄식한다. 갈라디아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을 들은 뒤에도 여전히 할례와 율법에 방점을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은혜의 복음도 중요하지만 할례를 받고, 율법도 행해야 온전한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었다. 바울은 6장 12~13절에서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지적했다.   바울은 여기서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자들과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을 구별한다. 바울 자신은 단호하게 십자가만 자랑하겠노라고 말한다. 심지어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 쪽에서 보면 율법을 통해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죽었고, 반대로 할례와 율법을 지킴으로 자랑을 삼으려는 사람들 쪽에서 보면 바울 자신이 죽은 존재로 보일 것이라고 진술한다. 율법과 할례라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자랑거리를 만들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초대교회 갈라디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득실득실하다. 매 주일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라는 이름의 메시지가 인간의 행함과 삶에 대한 것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것인지 차분히 따져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청학동 훈장 이정석 씨는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 사람을 보고 웃는다’는 책에서 “인생은 그저 산다는 데는 별 의미가 없고 뭔가 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인생은 자기 가치를 찾으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나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신의 유일한 존재이유라고 믿는다”고 적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신과 종교를 수단으로 삼으라”고 가르친다. 몇몇 문장들은 청학동 훈장의 에세이가 아니라 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라고 해도 깜빡 속을 정도다.   바울은 이런 가르침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에서 이 ‘결코’라는 단어 때문에 바울은 세상으로부터 죽은 존재로 취급을 당했다. 그럴수록 바울은 십자가에 더욱 매달렸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결심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처럼 바울을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의 은혜와 죽음이 바울을 삼켜버린 것이다. 바울은 세상에 대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일 듯 달려드는 세상을 향해 그처럼 담대하게 “오직 십자가”만 외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1장15절)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회개는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행위의 잘잘못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는 현실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 대신 죽으러 왔으니,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라는 외침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kwangchul
2024-05-09
56년 후, 그들이 돌아왔다

  56년 전 1968년 4월30일, 미국 뉴욕시의 콜롬비아 대학생들은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위해 대학내의 해밀톤 홀(Hamilton Hall)을 점거했다. 경찰은 강경 진압을 통해 시위 인원 700명을 체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학생은 물론 경찰까지 포함해 총 100명 이상이 다쳤다. 미국 대학생들의 위와 같은 월남전에 반전 시위는 그후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일반 시민들 사이에도 비판의식이 번지게 된다. 이에 당시 미군 파병을 결정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고 반면, 월남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운 공화당 후보 닉슨이 대통령에 선출됐다. 1968년 사회운동은 그 당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사회분쟁으로 권위주의적 정권에 맞서 일어났다. 이 운동은 인종주의를 비롯한 여러 차별들에 대한 반대 뿐만 아니라 핵이나 환경 오염, 월남 전쟁과 같은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반대도 포함하고 있다. 이를 통칭해서 68혁명이라 불렀는데 미국에서는 콜롬비아대학 사태가 이 운동을 크게 확산시켰다.   최근 미국 대학가에서 확산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는, 1968년 베트남전 반전 시위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서 대선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요소가 되고 있다.(흡사 1968년의 유령이 되살아 온 것처럼 56년 전의 풍경과 너무 닮은 꼴이라 할 수 있다.) 미국 언론에 의하면 30일 밤 뉴욕경찰이 콜롬비아대 해밀톤 홀에 진입해 바리케이트를 치고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을 체포했다고 보도하였다. 앞서 대학당국은 전날 오후 2시까지 천막 농성장을 떠나라고 통첩을 보냈지만 학생들은 투표를 통해 거부를 결의하게 된다. 이어 이튿날 새벽 일부 학생들이 해밀톤 홀에 들어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가자 학교 당국은 점거 학생들을 퇴학시키겠다고 위협하며 경찰에 진압 요청을 하게 된다.     해밀톤홀을 점거한 학생들은 그들이 점거한 이 건물을 ‘힌드의 홀’이라 명칭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는데 학생들이 내건 대자보 사연은 이러하다. ‘힌드 라잡’은 팔레스타인 소녀로, 이 세상에서 보낸 햇수는 고작 6년 이었다. 지난 1월29일 힌드는 삼촌가족과 차를 타고 가자시티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 소녀는 이스라엘군의 총탄이 무서워 도망치려 하였으나, 그 총탄 때문에 영영 도망칠 수 없게 된다. 삼촌과 숙모가 먼저 죽임을 당했고 사촌언니도 죽었다. 이 몰살당한 차량에서 아직 죽지 않은 15살 라얀이 외국에 있는 친척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전화를 하였다. “엄마 아빠는 벌써 죽었어요. 언니도 죽었고요. 저랑 힌드만 살아 있어요.”  “걱정 하지마, 무서워 하지마, 바로 앰뷸런스를 보내줄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친척은 바로 이슬람권 적십자사에 구조를 요청했다. 라얀의 전화번호를 주고 연락하면 라얀이 받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라얀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있는 사이에 이스라엘군의 탱크는 총격을 가했다. 둔탁한 총격소리와 라얀의 비명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2주 뒤 차 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되며 구조대원 2명도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다.) 전쟁에 반대하고 이스라엘의 군산 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에 대한 투자 철회를 요구하는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진압은 56년 전 1968년 콜롬비아대 상황과 여러모로 동일하다. 당시 해밀톤 홀을 점거하고 월남전 징집 반대와 이 대학의 군산 복합체(軍産複合體)와의 관계 단절을 주장하던 학생 700여 명을 경찰 1천여 명을 투입해 진압한 날도 또한 4월30일이었다. 시위 학생들이 이날 새벽 해밀톤홀을 점거한 의도의 배경도 4월30일이라는 날짜에 상징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날 밤 몇 명의 시위대가 홀에 들어간 뒤 이날 새벽에 문을 열어 많은 학생들이 대거 진입할 수 있게 하였다. NBC 방송은, 1968년 당시 같은 장소에서 데모에 참여했던 마크 나이손 역사학과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56년 전 당시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고 전하였다.   지난해 10월7일 하마스의 테러 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은 캐나다와 미국으로 대학생들이 참여하면서 반유대주의(Anti-semitic)와 반 팔레스타인에 대한 어느 한 쪽의 지지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발생한 집단 살해의 윤리적인 차원에 입각한 인권(Human Right)문제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만여 명의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3만5천여 명의 시민이 이미 죽었고, 지금 이 시각에도 가자지역에 남아 있는 생존자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기아 선상에서 고난을 받고 있다. 한편, 몇몇 유대인 학생들은 캠퍼스 분위기가 반 유대주의적인 정치적 동기를 포함하고 있어 신변의 안전 우려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시위대는 이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부풀려 있다고 지적하며 유대인 학생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가하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그들 학생들의 주장은 이스라엘이 가자지역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집단 학살을 중단하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전쟁을 지원하는 무기 제조산업 및 관련 기업들로부터 대규모 기부금 투자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캐나다나 미국의 학생들의 반전시위와 그때마다 요구하는 사항들은, 1960년대에도 70년, 80년대 그리고 현재, 2024년에도 옳았다. 지금은 학생들을 처벌하기 보다는 그들의 의견을 경청 할 때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daekim
2024-05-09
다윗의 생애(2)

-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이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그의 칼을 그 칼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삼상 17: 45-51)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었지만 다윗은 일개 목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목동 다윗에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우뚝 서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엘라 골짜기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가 그 때였다. 그때 이새의 장자 엘리압과 차남 아비나답과 세째 아들 삼마가 그 전투에 참전하고 있었는데, 이새가 다윗에게 볶은 곡식, 떡, 치즈를 싸주며 형들과 그들의 상관에게 가져다 주라고 심부름을 보낸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 진영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스라엘과 마주하고 있었던 블레셋의 대장은 골리앗이란 장수였는데, 그는 천하무적의 용장이었다. 그는 키가 거의 3미터나 되는 거인으로서 기네스북에 인류 역사상 가장 키가 큰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괴물 같은 체구의 소유자 골리앗은 머리에 놋 투구를 쓰고, 무게가 57킬로나 되는 놋 갑옷을 입었으며,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찼고, 놋 창을 들고 있었다. 그의 창 자루는 베틀 채 만큼 두꺼웠고, 창날의 무게만도 7킬로나 되었다. 그런 무장을 한 골리앗의 모습은 “인간 탱크”였다.   ‘인간 탱크’ 골리앗이 이스라엘 진영을 향해 외쳤다. ‘너희 중 제일 용감한 장수를 뽑아 나와 승부를 가리자. 그가 나를 이기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되겠고, 내가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 종이 되는 거다.’ 이 같은 골리앗의 도전 앞에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모두들 무서워 벌벌 떨며 숨을 곳을 찾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이러기를 40일을 계속하자 이스라엘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사울 왕의 영도력도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면회하러 온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 진영 안으로 들어섰을 때도 골리앗은 자기와 싸울 자가 있으면 나오라고 외쳐대고 있었고, 이스라엘 측에서는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의아해 하는 다윗에게 누군가가 상황을 설명해주며 사울 왕이 누구든지 골리앗을 죽이면 큰 상금을 주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며, 세금도 면제시켜 준다고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들은 소년 다윗은 격분하여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며(삼상 17:26) 자기가 골리앗과 대결하겠노라 나선다. 그 말을 들은 그의 맏형 엘리압은 건방지게 굴지 말라며 다윗을 꾸짖는다.   하지만 다윗의 말을 전해들은 사울 왕은 그를 불렀다. 사울 왕 앞에 선 다윗은 그가 목동 일을 하면서 그의 양들을 해치려는 사자나 곰 같은 맹수들을 죽인 것처럼 골리앗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한다.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별다른 방도도 없었던 사울 왕은 다윗에게 출전을 허락하며 그가 착용하고 있던 갑옷과 놋 투구를 벗어주었다. 다윗은 그의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그의 칼까지 찬 다음 몇 걸음 걸어보다 그것들을 다 벗어버린다. 그리고는 시냇가에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주머니에 넣고 양을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와 물매만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걸어갔다.   골리앗은 그에게 다가오는 소년 목동 다윗을 기가 막힌 듯이 쳐다보며 그의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에게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다윗은 태연하게 “너는 창과 칼을 가지고 나왔지만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왔노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의 시체를 새들과 들짐승들의 밥이 되게 할 것이다.”(삼상 17:45-47)라 소리치고는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며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꺼내 물매로 그에게 던졌다. 그러자 그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박혔다. 다윗은 달려가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어 높이 들었다. 이로서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사들을 40일을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엘라 골짜기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났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많은 교훈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무리 능력 있고 용감하더라도 하나님을 경멸하고 그 분을 대적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 귀한 진리와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천하의 명장 골리앗을 죽임으로 무명의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왕좌를 향한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벤 후 이스라엘 군사령관 아브넬의 인도로 왕 앞에 섰을 때 사울은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고 묻는다. 사울과 다윗이 처음으로 만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사울 왕은 심한 정신적인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그러자 그의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소년을 불러들여 악령으로 고통 당하는 왕을 위로하도록 했는데, 그 소년이 바로 다윗이었다. 사울 왕은 다윗이 연주하는 수금 소리를 들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기에 다윗을 사랑하며 그의 곁에 있도록 했다.(삼상 16:14-23)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한 다윗에게 수금 타는 재능을 주셔서 그가 사울 왕 곁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제거하고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어 사울 왕과 대면했을 때 그의 진정한 인생의 길벗으로 또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곧 사울 왕의 맏아들 요나단이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자였다.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신 것을 깨달았기에 그에게 왕위 계승권을 양보했을 뿐 아니라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의리와 정의의 사나이였다.   권력을 위해서는 의리와 신의 같은 것은 헌신짝 같이 버리며, 친구와 친척은 물론 부모 형제까지 주저하지 않고 배신하는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정한 용기의 소유자가 요나단이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을 향한 사랑을 예표한다고까지  말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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