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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전 시골에서 우체부가 편지를 전해주던 모습   

 

Editor’s Note

-아련한 옛 추억의 그림자  

 

-사라져가는 정취들 아쉬워  

 

 

 “막내야 보아라. 겨울날씨가 추워지는데 그 섬은 어떠냐? 대청도란 섬이 어디 있는지 이 에미는 그저 꿈속에서만 겨우 짐작해보곤 한다… 아무튼 언제나 건강에 조심하고 먹을 것 꼭 챙겨먹어라. 나는 한시도 걱정이 놓이질 않는구나…” 
 내가 전방 섬(대청도)에 첫 소대장으로 부임하고 난 며칠 후, 전령이 전해준 손편지 겉봉투엔 어머니의 눈에 익은 꼬부랑 글씨가 적혀 있었다. 예전의 어머니는 ‘아래 아’ 글씨를 쓰셨으며 글씨체만 보아도 대번에 어머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군에서 처음으로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드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못난 막내를 군에 보내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실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졌다. 

 

0…이런 사연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군에 가서 부모님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들고 눈물 한번 안흘린 한국남자가 있을까. 
 지금은 좀처럼 보기도 쓰기도 어려운 손편지. 그에 대한 추억도 참 많다. 사춘기 시절, 가슴 두근거리며 써내려가던 풋사랑 연애편지는 지금 생각해도 마냥 청초하고 살폿하기만 하다.   
 우체부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가셔서 받았던 군에 간 우리형님의 편지. 그후엔 내가 전방에서 받아보는 어머니의 가슴 절절한 자식사랑 편지.  

 

0…“그리운 00씨”로 시작되는 연인에게서 날아온 사랑편지는 힘들고 고독한 군생활을 견디게 하는 최대의 무기였다. 
 유명인사들의 편지에 얽힌 사연도 많다.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감옥에 갇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주고받은 옥중서신들을 모은 ‘마지막 편지’라는 책이 만들어져 세인의 심금을 울렸다.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생활을 한 신영복 교수의 옥중서신이 모아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지식인 사회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1997년에 제작된 최진실.박신양 주연의 ‘편지’란 멜로영화는 보는 이들의 눈물샘을 흠뻑 적시기도 했다. 

 

0…손편지 하면 떠오르는 영화같은 스토리가 바로 유치환.이영도 시인의 플라토닉 사랑 이야기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유치환 ‘행복’ 중)
 애당초 청마(靑馬) 유치환과 정운(丁芸) 이영도 시인의 사랑은 요즘 말로 하면 외도(外道)요 불륜이었다. 

 

0…경북 청도 출생의 이영도 시인은 재색(才色)을 갖춘 규수로 21세에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남편이 폐결핵으로 죽는 바람에 스물 아홉에 청상과부가 되어 홀로 살다 해방되던 해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다. 
 그런데 일본 유학 후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같은 학교의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열렬한 사랑의 화신으로 다가왔다. 일제치하의 방황에서 지쳐 돌아온 서른 여덟 살의 청마는 스물 아홉살의 청상(靑孀)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유교적 가풍과 전통적 규범을 깰 수 없는 정운이었기에 좀처럼 마음의 빗장을 열 수 없었다. 

 

0…청마는 이때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정운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통영 우체국에 나가 편지를 부치는 일이 일상사가 됐다. 
 그러기를 3년.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애절한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정운의 마음도 녹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플라토닉 사랑은  시작됐다. 
 하지만 이미 둘 다 기혼(旣婚)인데다 자식까지 있는 이들의 사랑은 애당초 이루어질 수 없었고 그러기에 더욱 안타깝고 애틋했다. 

 

0…끝이 보이지 않던 청마의 사랑편지는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청마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영영 붓을 놓게 된 것이다.
 청마는 타계할 때까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편지를 써보냈고 정운은 그 편지들을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6•25 이전 것은 전화(戰禍)에 불타 버리고 청마가 죽었을 때 남은 편지는 5천여 통. 이 편지들이 모여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책이 엮어져 나왔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한폭의 빛바랜 앨범 같은 아름다운 문학작품이 잉태된 배경엔 이처럼 애틋한 사랑의 손편지가 있었다. 

 

0…손편지는 인간적 체온과 진솔함이 담긴 사랑의 매개체이다. 특히 외국에 살면서부터 고국에서 날아온 편지는 더욱 더 반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요즘엔 그런 낭만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편함엔 대부분 공과금 고지서나 광고 전단지만  쌓여 있을 뿐 그리운 사람의 손편지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요즘 세상에 육필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메일로 혹은 그마저 귀찮으면 셀폰 메신저로 소식을 주고 받는다. 

 

0…문명의 이기(利器) 덕분에 모든게 편리해지긴 했으나 그리운 이의 체취가 담긴 손편지를 받아보는 반가움과 기쁨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연말이 되니 이곳저곳에서 스마트폰으로 안부를 전해오고 있다. 아예 없는 것보다야 반갑긴 하지만 갈수록 인간의 정이 메말라 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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