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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수록 신문 펼치기가 겁이 난다. 산불에 지진, 홍수와 폭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느 구석에선가는 크고 작은 재해가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침수된 주택가 광경을 담은 커다란 사진 옆에 유럽 어느 나라에서 물난리가 났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자주 접하는 소식이다 보니 감각도 둔해진 듯 건성으로 굵은 활자만 훑으며 지나칠 때였다. 무엇인가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당기는 게 있었다. 

 


사진 속의 작은 머그잔, 놀랍게도 그들은 차가 담긴 하얀 머그잔을 하나씩 들고 허리까지 차오른 흙탕물 속에 서있었다. 침수된 마을의 주민들이 현관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장면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사진 밑에 들어 있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혼란이 잠시 일이었다. 아무리 차를 즐기는 민족이라 해도 마을이 통째로 잠긴 상황에서 침수된 자기 집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그들의 여유는 대체 어떤 것일까. 


 목이 바작바작 타들어가도 차는커녕 마른 침만 삼키며 넋 놓고 초점 잃은 시선으로 주저앉아 있는 편이 오히려 우리 정서에는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금세라도 무너질 듯한 모습 대신에 벽에 기대어 선 채 차를 마시는 그들. 우리에게 차 한잔의 의미가 심적 여유가 있을 때 마시는 것이라면 그들에게는 급박한 상황에서 여유를 찾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나 보았다. 


  서양영화에서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긴박한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제 할일 다하는 느긋한 모습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그건 각본이 있는 허구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여기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문화적 거리감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영화가 아닌 실생활에서 그런 점을 발견하면 더 당혹스러웠다.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서도 그 정도의 민족성이나 문화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들의 사고 깊숙이 배어있는 여유로움은 내게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숨이 차게 뛰며 악착을 떨어야 사는 줄 알고 경쟁심으로 쫓기듯 허둥거리던 우리에 비해, 우리보다 덜 갖고 덜 누리는 계층에서도 천천히 걸으며 삶을 즐기는 여유를 발견하고 놀라던 기억. 그건 어쩌면 광활한 대지를 물려받아 천혜를 누리는 이들과 좁은 땅덩이에 살면서도 외세 앞에 늘 불안하여 마음 졸이며 대비해야 했던 민족성, 그 차이 때문인 지도 모를 일이었다. 


 표정 관리 측면에서도 이들은 절제와 여유를 부릴 줄 아는 것 같아 보였다. 아무리 슬퍼도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소리 없이 구르는 눈물, 그건 우리네가 대성 통곡을 해야 속이 풀리는 것과 많은 대조를 보였다. 화가 날 때도 이들은 여간해서는 표정에 감정을 포개지 않았다. 감정이 앞서 언성을 높이고 얼굴색이 울그락 푸르락 하면서도 인정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우리에 비해 이들의 웃는 얼굴 이면에는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차갑게 날 세운 이성을 숨긴 야멸참이 있었다. 그런 견지에서라면 그 엄청난 재해 앞에서 차를 마시는 여유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인간의 내면에는 타인의 고통이나 불행에 익숙해지는 것보다 이질감을 더 못 견뎌 하는 성향이 있는지 모른다. 그 ‘같지 않음’을 바로 알고 인정하면 문화적 거리감도 조금 수월하게 좁힐 수 있지 않을까. 
 이 땅에 뿌리 내리면서 언어만큼이나 넘어서기 어려운 문화의 벽을 종종 실감한다. 저절로 해결 될 일은 아니겠지만 언어도 문화도 두드려 여는 만큼은 저 안의 세계를 허락할 것이다. 앞을 막아 선 문이 아무리 높고 육중하다 해도 발 하나 들여놓을 정도만 밀어낸다면, 꿈꾸던 것이 한꺼번에 열리는 벅찬 희열을 느끼리라 기대한다. 마치 어린아이의 말문이 긴긴 동안의 침묵을 깨고 신기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트이듯이 말이다. 


 힘이 들어도 살아내기로 작정을 한 이상, 꾸준히 두드리다 보면 그 단단해 보이던 벽이 툭, 하고 열릴지 모른다는 희망. ‘희망의 끄나풀만 놓지 않는다면’ 을 주문처럼 외며 그 작은 허세로도 마음이 느긋해오는 느낌이다. 


 저만치 밀어놓았던 찻잔에 차를 따르는 손길이 비로소 평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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