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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에는 쪽을 지은 머리에 하늘거리는 흰색 한복을 입고 한 손을 치켜든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숨을 고르는 여인이 보였다. 잠시 몰입의 시간을 갖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녀의 신(神)께 기도를 드리는 것일까. 무대에도 객석에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이 들어가며 숨을 멈추고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물결을 닮은 치마의 곡선이 가늘게 흔들렸다. 한복이 오늘처럼 아름답다고 느낀 적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심금을 훑는 듯한 가락을 따라 놀랍도록 치밀하고 섬세한 손놀림에 맞춰 수건의 흐름이 이어졌다. 한을 푸는 영혼의 울림과 몸 동작이 한데 어우러져, 그녀는 흰 수건 속으로 들어갔고 흰 수건이 그녀를 움직였다. 


 수건이 공중으로 뿌려질 때 옹이진 마음들이 함께 흩어지고, 걷어내는 동작을 따라 허공에 떠돌던 혼백이 평안을 찾는 듯했다. 한복의 어깨선이 미끄러져 내려오다 멈춘 곳, 그 끝자락에 감추어진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이 무대 아래까지 전해왔다.


영과 육의 맺힘과 꼬임을 풀어내는 처절한 혼의 소리요 자아를 초월한 몸의 떨림이 살풀이 춤이다. 이는 아마 슬픔의 몸부림을 춤으로 승화시키려는 삶의 의지를 표출한 예술일 것이다.


 구성진 가락에 맞춰 때로는 가뿐하게 때로는 끈적거리는 동작으로, 보는 이의 가슴에 파고든다. 사소한 몸짓에도 관객들의 호흡이 잠시 멎으며 숙연해진다. 누구의 삶 속에도 들어있을 법한 옹이들을 꺼내어 어루만져 달래는 자리이기 때문이리라. 


흔히 굿을 통해 만나게 되는 살풀이 춤은 신명과 한을 동시에 품는다. 한 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벌인 굿판에서 즉흥적으로 무당이 춤을 추기도 한다. 지전풀이라 하여 종이 돈을 흔들어 죽은 사람의 혼을 달래거나, 매듭이 진 긴 천을 기둥에 매어 하나씩 풀어가며 죽은 원혼의 길닦음을 하기도 하고, 부채와 방울을 흔들며 넋을 달래는 등 우리 민족은 다양한 방법으로 맺힌 살을 풀며 살아온 것 같다.


‘풀이’라는 단어에는 맺힌 것을 손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잘라내지 않고 하나씩 더디게 흩어놓음으로써 스스로 화(禍)를 달래는 시간을 갖고 인과를 풀어간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가슴에 한을 묻고 사는 일이 누군들 쉬우랴마는, 시간을 들인 견딤과 기다림의 문화답게 ‘풀이’를 통해 승화시키는 방법을 우리 선조들은 알고 있었다. 


 실타래가 하나로 엉켜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떠올린다. 시간이 곧 돈이고 모든 일을 빨리 처리해야 인정받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버리고 새 것을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버리는 행위가 죄악과 동일시 되던 시대를 살던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버리기는커녕 잘라내는 일도 두려워 풀어내는 방법을 택했는지 모른다. 


 한 올 한 올 풀어가는 과정에서 인내를 배우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법까지 자연스럽게 터득했으리라. 매듭풀기에서처럼, 어려서는 이해하기 어렵던 일들도 삶의 기복을 넘고 성숙해가면서 우리는 그 안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차츰 깨닫게 된다.


 맺힘과 풀이가 손끝에 달린 수건의 곡선을 따라 흔들리다 화해하는 과정이 진지하다 못해 서럽다. 손을 꼭 쥐고 긴장할 만큼 불을 뿜는 열정을 토해내다가도 때로는 부드러움으로 달래주고 때로는 애처로움으로 눈가가 젖게 만드는 예술이다. 


 찌를 듯한 곡조에 황홀경으로 내몰려 살풀이가 절정을 이룰 때쯤, 손놀림을 따라 가쁘게 내쉬던 숨결이 잦아들며 비로소 그녀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뜬다. 접신(接神)이 끝났음일까? 육신의 불덩이를 다 소진시켜 하얀 재만 남은 듯 해쓱한 표정이 되어, 그녀는 자신을 불태우던 열정의 무대를 미련 없이 떠난다. 


 긴 시간 동안 섬세한 손놀림이 내 안에 맺혔던 매듭들도 한 가닥씩 풀어내주었는지, 공연이 끝나자 조금 후련하기도 했고 또 조금은 허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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