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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을 준비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그릇 세일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했다. 그릇은 많은데 더 사서 뭘 하나 싶으면서도 마음이 흔들렸다. 잠시 망설이다가 기분전환도 할 겸 나가보려고 약속을 잡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요즈음은 아들이 학교에서 점심 저녁을 다 먹고 늦게야 돌아오기 때문에 식사를 보통 우리 부부만 하게 되어 단어 그대로 ‘소박한 밥상’을 차리게 된다. 나이 들어가면서부터는 집에서 접대하는 손님도 거의 없다 보니 아마 앞으로도 그릇이 많이 필요한 기회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나는 그릇에 대한 욕심을 좀체 접지 못한다. 


 전화를 받고 오니 물이 벌써 끓고 있다.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국물을 내고 버섯과 양파, 그리고 호박을 숭숭 썰어 넣었다. 오늘 저녁은 된장우동이다. 구수한 국물이 먹고 싶을 때 간장 대신 된장으로 간을 해서 붙은 이름이다. 국수를 좋아하다 보니 고명이나 양념만 달라져도 별난 국수나 되는 것처럼 새로운 이름을 붙여가며 먹는 것일 뿐, 보통 우동과 다를 것도 없다. 


 찬장에서 우동 그릇을 꺼냈다. 도톰하고 하얀 바탕에 자잘한 꽃무늬가 산뜻하다. 한국에 살 때 막내 동생이 백화점에서 사은품으로 받아 내게 준 그릇인데 이민 오면서 이곳까지 함께 흘러온 것이다. 냄새에 기억이 불려나오 듯 그릇에 묻어온 동생 생각에 마음이 후드득, 흔들린다. 


 나는 아직도 예쁜 그릇을 보면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지루하도록 단조롭고 평범한 일상에 뭔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어서일까. 남편은 그릇 나들이로 가슴 설레는 나에게 지금 나이가 몇인데, 하다가 말끝을 흐린다. 나이가 그릇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만한 일에도 아직 가슴이 설렌다는 것은 감수성이 마르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안도하다가 불현듯 ‘어떤 낯섦’을 내 안에서 발견하고 만다.  


 딸들을 다 출가시키고 다섯 손주의 할머니가 된 후에도 엄마는 예쁜 브로치나 목걸이를 보면 갖고 싶어하셨다. 나는 엄마도 여자라는 사실은 잊어버린 채, 대체 몇 살까지 여성스러움이 남아있는 것일까 하며 의아해하고 낯설어 했다. 그런데 그때의 낯섦이 오늘 내 안에서 만져진 것이다. 엄마의 가슴설렘은 ‘남세스러운 낯섦’으로 치부해버리던 내가, 나의 가슴설렘은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있는 감수성’이라며 좋아하다니. 


 나이 오십이면 서리가 내리는 계절, 인생의 가을로 들어선 시점일 것이다. 생의 어느 구비에선들 아프고 힘든 굴곡이 없겠는가 마는 육신과 정신이 한꺼번에 몸살을 앓게 되는 시기는 늙음의 문턱에서가 아닌가 싶다. 가족에 대한 의무와 사회의 관심에서 한 발짝 물러선 홀가분함과 허전함이 혼재하는 시기, 여유로운 만큼 고독과 외로움이 달려드는 때이기도 하다.


 생각난 김에 그릇을 정리했다. 많기도 하다. 추억과 사연을 담은 것들로부터 누군가의 체온이 실려온 것들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런데 묘한 것은 거의 삼십 년 전에 신혼살림용으로 구비한 접시들이 아직까지도 가장 자주 식탁에 오르내린다는 점이다. 함께 늙어가는 접시에 대한 애틋한 마음 때문인지 홀대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같잖은 의리 때문인지, 한시도 구석에 놓여본 적 없이 늘 당당하게 중앙을 차지한다. 


 부엌뿐 아니라 내 마음에도 세월만큼이나 많은 크고 작은 그릇들을 들여놓으며 산 것 같다. 잘 빚은 그릇은 그릇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고 울림도 크다. 그러나 대부분은 무엇인가를 담고 있고 앞으로도 무엇인가로 채워질 그릇들이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온갖 감정들이 다 들락거린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웃음을 담은 달콤한 그릇과 상처로 얼룩진 그릇, 내 가슴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후회막급인 불편한 그릇에서부터 볼수록 대견스럽고 뿌듯한 그릇, 아직도 델 듯이 뜨거운 것, 소름 돋을 만큼 냉기서린 것까지.


 하찮은 국수도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내용물뿐 아니라 식탁까지도 빛낼 수 있듯 내 마음의 그릇을 거쳐간 생각이나 감정들도 그렇게 빛날 수 있을까. 어쩌면 내일 그릇을 사는 순간, 부엌에 차고 넘치는 그릇들을 떠올리며 금세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몇 개 사 들고 좋아라 하며 돌아올 것이다. 마음이 행복하면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도 정겹고 따습게 느껴진다. 그런 마음이라면 부엌의 그릇으로는 육신에 공양(供養)을 할 것이고, 마음의 그릇으로는 정신과 영혼에 공양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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