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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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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욕 거주,본보 주최 제1회 정원&텃밭 컨테스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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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rokim
김영노
58089
10293
2015-02-27
나의 6.25 회상(11.끝)

 

(지난 호에 이어)
 대전에 와 여인숙 방에 들어가니 피난민 15명이 자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끼어 새우잠을 달게 자고 일어났더니 1951년 1월 1일.


 그로부터 3일 후인 1월 4일에 서울은 다시 인민군 치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번 후퇴를 1.4 후퇴라 불렀다.

 

 1950년 10월 말경 함경북도 북단을 제외한 북한 대부분을 유엔군이 장악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12월 6일엔 인민군에 의해 평양이 함락되고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서울까지 함락되면서 공산 북한의 학정에 시달리던 북한 국민들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대규모로 월남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군 수송선으로 피난하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을 이루었던 흥남부두는 서로 먼저 타려는 사람들의 아우성 터로 변해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이산가족이 되었다고 했다.


 총 1천만의 북한 국민들이 이산가족이 되었다는 통계도 있다. 반세기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산가족의 상봉문제는 풀리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유행가가 있다.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가 그것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메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옥천과 추풍령을 넘어 차를 점검하고 점심도 먹고 가자고 했다. 우울한 겨울 낮, 역의 현판을 보니 직지사 역이란다. 추측건대 직지사가 가까우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소백산 허리로는 추풍령, 조금 남쪽으로 보이는 황학산 그리고 연이어 있는 높은 산들.. 이곳은 사방이 소나무 숲으로 뒤덮인 깊은 산중이었다. 지난여름 피난길에 지나갔던 장성의 강재를 넘기 전의 신흥마을 같았다. 

 

 직지사!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선생이 소백산맥 기슭에 있는– 면이 고향인데 여기는 금강 상류에 해당한다고 했다. 자기 고향이 직지사에서 가까워 종종 소풍을 갔고 또 스님들한테서 들었다는 고사를 이야기하고는 했었다.


 신라 눌지왕(418년) 때 아도화상이 황학산 기슭을 손가락(指)으로 가리키며 ‘저기에 큰절이 들어설 만하다고 한 후 절을 창건하고(直指寺)라 했다는 것이다. 또 조선시대 사명대사가 이 절에 입산 출가하여 승려가 됐고 젊은 나이에 주지 스님이 되었으며 왜란 때 유명한 승장으로 커다란 공을 세워 이 절 사명각엔 대사의 진영이 안치되어 있다고도 들었다.

 

 김천, 대구, 경산을 지나 밀양에 도착하자 잘 가라며 눈시울을 붉힌다. 자기들은 새로운 집결지로 간다며 우리를 걱정했다. 언뜻 보면 우리 형제가 목자를 잃은 어린 양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난여름의 혹독했던 피난의 경험과 고물여객선, 기차 지붕 위에서 목숨을 건 상경들의 어려운 일들과 이번 1.4 후퇴의 피난을 겪으면서 값진 경험과 함께 두둑한 담력과 배짱이 생겼고 나이도 한 살을 더 먹어 할 수 있다는 오기와 자신감이 생겨났다.

 

 기차로 삼랑진을 지나 부산, 제2 부두로 왔다. 선창가 식당 겸 공동 합숙소에 들어와 여수로 가는 정기여객선이 이틀 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부두 주변을 배회하며 단팥죽도 사먹고 큰 배가 지날 때면 영도다리 한쪽이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을 신기해하며 구경하기도 했다. 여객선을 2달 전의 코스를 그대로 거쳐 여수에서 손님들을  내려놓았다. 그 후 기차로 벌교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이로써 지난해 8월에 시작되어 장장 6개월에 걸친 피난, 피난, 피난의 대장정을 마쳤다.

 

 남하하는 피난 행렬로 떨어지는 미군 폭격기의 수 많은 무차별 폭격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피난민들이 희생되었지만 우리는 용케 피할 수 있었다. 인민군과 지방 빨치산들의 보복적 학살도 직접 보았다. 강제 동원이나 그럴 듯한 속임수로 북으로 끌려갈 뻔했던 것은 몇 번이었던가…

 

 연속되는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우리 3형제가 멀쩡하게 고향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간절한 기도의 힘이 아니었는가 생각했다.(끝)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oungrokim
김영노
58088
10293
2015-02-19
나의 6.25 회상(10)

 

 

 

 대부분  집들이 그러하듯 구식한옥으로 전쟁 전에 걸었던 극동 다이어 공업사라는 간판이 아직도 그대로 붙어있었다. 염전을 찾아다니며 소금과 물건을 교환했던 일,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던 피난길, 잠시나마 낙오되어 있었던 고향에서의 생활, 고물 배와 기차 지붕에 올라 돌아온 서울.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도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과 모험을 하면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달성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사회에 대한 저항력과 담력이 갖추어졌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도 자신감을 뒷받침해주었다.

 

 공장(사실은 수리소)문을 열었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겠는가? 사업성은? 운영기금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타이어에 바람을 넣는 콤프레셔, 헌다이어 몇 개 그리고 수리공구들을 공장 앞에 널어두고 장사하는 것같이 해두었다. 낮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가 어두워져 문을 닫으려 할 때 미군 GMC, 바퀴가 열 개가 달린 대형트럭이 가게 앞에 서며 한국 헌병이 내린다. 당시 성행하던 군수품 부정거래를 단속하러 나왔나 싶었는데 오히려 휘발유 한 초롱(2갤론)에 얼마 줄래?라고 묻는 것이었다. 휘발유뿐만이 아니라 모든 물건과 서비스에 대한 거래가를 전연 모르는 우리로서는 얼마면 되겠습니까?라고 거래가를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


 000환 주라. 그때 우리가 가진 돈에 맞추어 세 초롱을 사겠다고 했더니 다섯 초롱 빼하며 자신이 몰고 온 트럭을 가리킨다. 고무호스를 탱크에 넣어 입으로 뺐다. 세 초롱 병으로 미군 부대에 파견되어 서울 경기지구를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어 비교적 휘발유를 많이 쓰는 편이었다.

 

 이 차가 떠나자마자 일본 차(이쓰스?)가 서더니 휘발유가 있느냐고 묻는다. 있다고 하자 10초롱을 팔란다. 금방 다섯 초롱을 산값에 50%를 붙여 팔았다. 이 차는 정부 조달청 차였다.


무엇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고 임기응변과 변칙적인 부정거래가 활개를 쳤다. 미국으로부터 받는 소량의 휘발유 원조 외에는 휘발유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든 관계로 부르는 것이 값이고 바가지를 쓰는 사람이 바보인 시기였다.


 이렇게 시작되어 미군 부대 근무하는 운전자들, 시청, 영단(?), 취재기자, 조달청 운전자 등 변칙 거래처가 생겨났다. 또 6.25전에 브로커로 일했던 김칠성, 김홍석 씨 등과 형수님을 중신했던 최흥겸씨등이 직접 찾아와 격려를 해주었다. 이래저래 12월 정도에는 고객이 늘며 생활도 해결할 수가 있었다. 


 특히 첫 손님이었던 미군 부대 한국 헌병은 자주 들러주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친숙해진 후, 그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자기만 쳐다보고 있어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우리의 사정을 알고는 자기 동생들과 같은 나이인데 고생한다며 동정적이었다. 국군이 인민군과 중공군에 밀려 평양을 빼앗기고 계속 후퇴하고 있는데 이러다가 다시 한 번 서울을 뺏기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라고 한 사람도 그였다. 우리는 설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다.

 

2차 피난(1.4 후퇴)

 

 민심은 하루가 다르게 불안해지며 다시 서울이 위기라는 소문이 난무했다.
애써 불안함을 감추며 겨울방학 후엔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일하고 있던 날이었다. 예의 한국 헌병이 GMC 대형트럭을 몰고 왔다. 이런 한가한 친구들을 봤나? 하며 서울이 함락위기에 있으니 빨리 타라고 했다. 경남 밀양으로 후퇴하는 중이니 거기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이다. 운전석에는 무전병인 듯 한국군이 옛날 자석식 무전기를 등에 메고 있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있는 돈과 교과서 학생증과 교복 등을 챙겨 덮개도 없는 트럭의 뒤에 올라 또 다시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살을 에는듯한 추위를 막기 위해 최대한 몸을 말고 학생 오바를 머리까지 끌어당겨 고개를 묻은 채 앞도 보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아있어야 했다.


 당시의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도로여서 차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기 일쑤였다. 얼마를 달렸는지는 모르나 트럭이 섰다. 일어서서 앞을 보니 다리가 끊겨있고 수백 대의 차가 늘어서 있는데 뗏목 배가 한 대씩 북쪽 강가에서 남쪽 강가로 건네 주고 있었다.


 그 헌병은 상황판단을 위해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이 차는 힘이 좋으니 그대로 건넌다며 강으로 들어갔다. 강물 속에는 이미 우리와 같이 모험하다가 못 빠져나간 차들이 여기저기에서 물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여기가 바로 공주 앞 금강이었다. 강물의 흐름을 따라 아래쪽을 보니 멀지 않은 곳에 공주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가 폭격을 맞아 뼈만 앙상하게 버티고 있었다.


 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의 모래와 물을 밀며 나가려 하지만 속력은 나지 않고 애들 걸음같이 강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다른 차와는 달리 새 차에 힘이 좋아서인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강폭의 반을 지났지만 위태롭게 가다가 멎다가를 반복하더니 결국은 서고 말았다. 얼마 후 다시 시동을 걸어보았지만 붕붕거리다가 다시 꺼져버리고 만다. 그러자 ‘너희 물에 들어가 바퀴 앞에 있는 모래 좀 치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않아도 불안에 떨며 차 뒤 짐칸에 실려 오느라 몸이 얼어있었지만, 그 상황에선 거절할 수가 없었다. 차질 않았다. 추운 것에 비하면 모래를 치우기는  쉬웠다. 그 후 다시 시도했지만 실패였다.


 결국, 무전기로 어딘가에 연락하고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미군의 레커차가 도착해 쇠 철삿줄을 풀더니 그걸 가져가 걸으라는 시늉을 한다. 이번에도 할 수 없이 내가 줄을 끌고 와 차 앞 범퍼에 걸으니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두어 시간을 기다렸다 시동을 켜니 성공이었다. 그때는 벌써 캄캄해서 밤 10시도 지났다고 기억한다. 군대 차가 무방비하게 낯선 곳에서 밤을 새는 것은 좋지 않다며 계룡산을 넘어 대전까지 가야 한단다. 


 포장도 안된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가까운 곳에 서너 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점심도 굶은 채 떠나온 탓에 배가 몹시 고팠다. 민가에 가서 먹을 것 좀 얻어오라는 임무를 갖고 그 집으로 갔다. ‘여보세요’ 하고 창호지 문밖에서 부르자 ‘누구유’ 하며 문이 열리고 허연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장죽을 물고 나를 본다. 어두운 등잔 뒤로는 자비로운 미소를 띤 돌부처가 보였다. 


 배가 고파 먹을 것 좀 얻으러 왔다고 하자 나를 자세히 보고 나서 쯧쯧하고 혀를 차며 장죽으로 놋재털이를 탕탕 소리가 나도록 친다. 잠시 후 옆방에 불이 켜지면서 중년의 남자가 찐 고구마 몇 개를 들고나오며 저녁을 다 먹고 이것밖에는 없다며 미안해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듯 했다. 일행이 셋이나 더 있다고 했더니 당장 먹을 수 있는 생고구마라며 꽤 많이 안겨주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며 방금 보았던 돌부처 생각이나 불교 신자냐고 물었다. 


 “네, 가까이 있는 갑사 절의 신도예유”


 깊은 산중의 불심에 고개가 숙어지며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스님이 우리 집 사립문 앞에 와서 적선하라며 목탁을 두드리면 ‘우리는 예수 믿어요.’라고 소리쳐 돌려보내곤 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종교 대 종교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선행을 구차하게 이유를 붙여 거절하는 것이 옹졸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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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rokim
김영노
58087
10293
2015-02-12
나의 6.25 회상(9)

 


삼랑진 역

 

 우리가 탄 칸과 바로 앞칸만 끌고 가기에 참 운이 좋다 했더니 곧바로 후퇴하며 다른 레일에 두고 기관차만 가서 나머지 짐칸들을 끌고 올라갈 기세다. 기겁하고 내려와 기관차 뒤 짐칸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나중에 듣고 보니 남기고 온 2 짐칸은 진해 해군기지로 갈 것이었다고 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이 기차는 전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매우 지지부진하였다. 


 겨우 밀양을 거쳐 경산에 오니 해가 지는데 대구역에 들어갈 여건이 안 되는 것인지 오늘 저녁은 여기서 머문다고 하면서 언제 떠날는지는 다음 지시에 따른다만 한다. 참으로 막연했다. 우리는 역을 떠날 수가 없어 밥을 사다 먹으며 기차의 동정을 살펴야 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아니었다.


 새벽 2시경 사전 통고 없이 출발한 기차를 타고 왜관, 구미를 거쳐 김천에 오니 아침 동이 트기 시작한다. 오는 중에도 대구와 김천에서 각각 몇 칸씩을 떨어트렸다. 김천과 영동 사이는 소백산맥이 북에서 남서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중간이다. 여기를 뚫고 가자니 자연 몇 개의 길고 짧은 기차 굴이 생각이 난다. 


 김천을 지나 직지사 역을 통과하면 바로 추풍령 밑 기차굴을 뚫고 가는데 굴속을 지날 때는 석탄 기관차에서 나오는 연기가 따스하고 몸을 녹일 수 있어 좋았지만, 밖으로 나와보니 눈코입 주위가 그을음으로 까맣게 변해있어 서로 보고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환갑을 바로 보는 아버님의 고생에 진실로 송구스러웠고 또한 하늘만 보고 눈시울만 적셔야 했던 자식에 대한 교육열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비가 된 나 자신을 조명해 볼 때 부끄럽다.


 계속 옥천을 거쳐 대전에 오니 우리가 타고 온 차는 더는 가지 않는단다. 그날은 대전서 자고 다음 날 천안, 수원을 경유 노량진에서 내려 한강 다리까지 왔다.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 밑에 미군들이 임시로 배들을 연결하여 만든 부교를 이용해 서울에 들어가려 헌병 앞에 섰다. 아들의 복교를 위해 서울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도민증을 보였지만 지금 서울이 혼란하고 식량도 없어 서울 시민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냉담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나 역시 학생증과 시민증을 보이며 같이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말과 함께 나는 부교 쪽으로 밀려났고 아버지께는 냉정하게 ‘지금은 전쟁 중이니 돌아가시오’라고 한다. 서울에 있던 영헌과 내가 학교 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는 손으로만 빨리 가라며 넋을 잃고 쳐다보신다. ‘아버지, 저 공부 잘 할게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돌아섰지만, 아버지 혼자 돌아가실 때 고생하실 것이 염려되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지만, 기척이 없다. 얼마 만에 영헌이가 나와 문을 여는데 잠결인지 아직도 정신이 없다. 배가 고파 우선 먹을 것을 찾았지만 별것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혼자 있으며 공산당의 노력동원, 교육동원 등을 다동 23번지를 대표하여 끌려 다녀야 했고 피난을 떠나기 전 홍제동, 수색, 삼송리 등에서 옷과 바꿔온 양식은 벌써 떨어진 듯,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파리한 몸과 지친듯한 기색이 장하고도 안타까웠다.


 11월 중순이 되자 신의주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리기 시작했다. 소문에 의하면 중공군은 밤마다 지친 육신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자극하도록 구슬프게 피리를 불어 병사들에게 전의를 상실케 하는 전법을 써서 밀린다고 했으나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서울도 국군 수중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정부관리가 임시수도인 부산에 있고 서울 시청과 경찰은 있지만, 행정과 질서를 잡을만한 여력이 없었다. 시민들은 먹을 것이 된다면 무엇이든 했다. 심지어 미군이 먹다 버린 음식을 걷어다 먹었다. 일명 꿀꿀이죽.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말이 있듯 무슨 수를 쓰든지 먹고 살아남아야 했다. 배고픔 앞에선 양심, 도덕, 정직, 자유 등은 그 가치를 잃었다. 넋 빠진 것들이고 무능한 것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선 네가 죽어줘야겠다는 식의 무질서가 현실을 지배했다. 주먹을 휘둘러 뺏고 달아나고 사기 치고 달아나고…   당한 사람은 무능하고 못난 사람이었다. 반면에 가해자는 유능하고 잘 먹고 잘산다.


 이런 식으로 끓는 가마니 속에 메뚜기 튀는 현상이 계속되다 보니 자연적으로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라는 말이 회자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과연 주먹은 사라지고 법만이 존재하는 좋은 사회인가?


 학교는 아직 잠겨있었고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시청 뒤 청계천을 복개하여 생긴 꽤 넓은 길가에 있었는데 주변으로 시청, 중앙청, 국회,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자리한 중심요지였다. 대부분의 집이 그러하듯 구식한옥으로 전쟁 전에 걸었던 ‘극동 다이어 공업사’라는 간판이 아직도 그대로 붙어있었다. 


 염전을 찾아다니며 소금과 물건을 교환했던 일,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던 피난길, 잠시나마낙오되어 있었던 고향에서의 생활, 고물 배와 기차 지붕에 올라 돌아온 서울.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도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과 모험을 하면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달성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사회에 대한 저항력과 담력이 갖추어졌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도 자신감을 뒷받침해 주었다.
 
 공장(사실은 수리소) 문을 열었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겠는가? 사업성은? 운영기금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타이어에 바람을 넣는 콤프레셔, 헌다이어 몇 개 그리고 수리공구들을 공장 앞에 널어두고 장사하는 것같이 해두었다. 낮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가 어두워져 문을 닫으려 할 때 미군 GMC, 바퀴가 열 개가 달린 대형트럭이 가게 앞에 서며 한국 헌병이 내린다. 당시 성행하던 군수품 부정거래를 단속하러 나왔나 싶었는데 오히려 ‘휘발유 한 초롱(2갤론)에 얼마 줄래?’ 라고 묻는 것이었다. 휘발유뿐만이 아니라 모든 물건과 서비스에 대한 거래가를 전혀 모르는 우리로서는 ‘얼마면 되겠습니까?’ 라고 거래가를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


 “000환 주라.’ 그때 우리가 가진 돈에 맞추어 세 초롱을 사겠다고 했더니 ‘다섯 초롱 빼’ 하며 자신이 몰고 온 트럭을 가리킨다. 고무호스를 탱크에 넣어 입으로 뺐다. 세 초롱 값을 받으며 두 초롱 값은 내일 달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한국군 헌병으로 미군 부대에 파견되어 서울 경기지구를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어 비교적 휘발유를 많이 쓰는 편이었다.

 

 이 차가 떠나자마자 일본 차(이쓰스?)가 서더니 휘발유가 있느냐고 묻는다. 있다고 하자 10초롱을 팔란다. 금방 다섯 초롱을 산값에 50%를 붙여 팔았다. 이 차는 정부 조달청 차였다. 무엇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고 임기응변과 변칙적인 부정거래가 활개를 쳤다. 미국으로부터 받는 소량의 휘발유 원조 외에는 휘발유를 구할 방법이 없었든 관계로 부르는 것이 값이고 바가지를 쓰는 사람이 바보인 시기였다.


이렇게 시작되어 미군 부대 근무하는 운전자들, 시청, 영단(?), 취재기자, 조달청 운전자 등 변칙 거래처가 생겨났다. 또 6.25전에 브로커로 일했던 김칠성, 김홍석 씨 등과 형수님을 중신했던 최흥겸씨등이 직접 찾아와 격려를 해주었다. 이래저래 12월 정도에는 고객이 늘며 생활도 해결할 수가 있었다. 특히 첫 손님이었던 미군 부대 한국 헌병은 자주 들러주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친숙해진 후, 그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자기만 쳐다보고 있어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우리의 사정을 알고는 자기 동생들과 같은 나이인데 고생한다며 동정적이었다. 국군이 인민군과 중공군에 밀려 평양을 빼앗기고 계속 후퇴하고 있는데 이러다가 다시 한 번 서울을 뺏기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라고 한 사람도 그였다. 우리는 설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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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노
58086
10293
2015-01-29
나의 6.25 회상(7)

 

 

(지난 호에 이어)

 주시기만 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만 했다. 그런 자신에게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기만 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울해진다.


 생전에 아버님은 종종 고생하고 큰 아이들이 빨리 철든다고 하셨다. 고교 후배인 박 군은 젊은 나이에 암이라는 충격적인 죽음의 선고를 받고도 용기를 내어 많은 난관을 거쳐 극복했다. 그 후에도 시간을 만들어 장애인을 위한 자원봉사를 그치지 않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들은 좋든 나쁘든 극한 상황을 거치고 나면 인생을 알고 겸손해지고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가 하는 교훈을 얻는 것 같다. 내 자신도 피난 전과 피난 후의 자신은 분명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논 일곱 마지기와 밭 천여 평 가지고는 현재의 여섯 식구가 겨우 먹고 사는 정도인데 거기에 두 장정이 더해져 8명. 누님의 치료비, 동생들 학비, 가용돈 등은 가축사육으로 겨우겨우 충당하는 형편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보충하지 않으면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서울대 사범대학 졸업반이었던 영회 형님은 임시 교사로 벌교 상업고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어 다소 숨통이 터지게 되었다. 나는 다시 시급했던 취사용 나무를 맡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아름드리 소나무로 울창해 솔방울을 가마니로 주워오던 동리 바로 뒤는 거의 황폐되어있어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서 취사용 나무를 찾아다녀야 했다. 나무가 없으면 낫으로 띄풀과 잡목을 베어 사흘 정도 말리면 불편 한대로 취사용으로 쓸만했다. 도시락을 싸서 지게를 지고 낫을 들고 산으로 가다 중학교에 가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마주칠 때도 이럴 때마다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묘한 감정에 우울해지면 삭히는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내 눈에 비친 이들은 마치 ‘켄터키 옛집’을 드나드는 순진하고 행복한 소년들처럼 보였고 시야는 무만동과 별교 정도로 한정된 것 같았다.


 ‘어려운 시절이 닥쳐온…’ 나에게는 일종의 가벼운 시련이지 좌절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숲 속의 통나무집에서 빌려 읽던 책이 빗물에 젖어 책값으로 일해준 링컨보다야 낫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 중에도 유일하게 즐거움이 있다면 소학교 때 같이 소를 먹이러 다니던 양 군, 김 군 등 목동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소학교를 졸업한 지 3년이 지났건만 그냥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소일하고 있었다. 암담한 현실이다. 


 만날 때마다 허물없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아무리 오래 놀아도 지루하지 않는 심우들이다. 마루에 걸터앉아 신라의 달밤이나 비 내리는 고모령과 같은 유행가를 부르며 떠들다가도 자정이 넘을 때까지 ‘과연 이대로 가도 좋은 것이냐?’하는 심도 있는 토론을 빈번히 하곤 했었다.

 

9.28 수복

 

 어물어물 9월도 지나 10월 초가 되었다.
 유엔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 전국에 피난 갔던 서울시민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멀쩡하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나무나 하러 다니는 자식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시고 계시던 부모님은 서울로 돌아가 복학하라고 강권하셨다.


 여비가 마련되기를 기다려 11월 초 아버님과 함께 벌교 철 다리 밑 뱃머리에서 어선을 타고 선수의 주막에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 2시에 부산 가는 여객선(소위 통통배, 1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음)을 타고 부산으로 가서 당시 군수품 수송용인 기차에 불법편승할 계획이었다. 당시 전라선과 호남선은 불통이었다. 위험하고도 불안한 상경 여로가 시작되었다.


 그 주막에는 이미 통통 연락선을 타기 위해 장사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있었다.
주막의 좁은 방에 앉아 이야기들을 하는 중에 해군모와 파카를 입고 들어선 남자가 아버님께 인사를 한다. 알고 보니 이웃 아래 장터에 사는 해군 문관이었다.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영노)를 복교시키러 간다고 하자 자신도 경기 여중을 다니다 식구들과 피난 내려온 딸을 복교시킬 수 있을까 알아보러 상경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부산에 가면 해군 함정으로 인천까지 갈 것이라며 그 군함으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놀라움과 동시에 희망이 보였다. 


 새벽 2시경 여객선을 타고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따라 남행, 의자도 없는 선실에서 한숨 자고 밖으로 나오니 고흥을 끌어안고 있는 팔영산이 늦새벽의 어둠을 배경으로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펼쳐져 있다. 여수 쪽으로 뱃머리를 돌리자 다도해라는 이름이 걸맞게 무수히 많은 섬 사이를 잘도 미끄러져 간다. 돌산 섬과 육지 사이의 좁은 수로(현 돌산 연육교)를 지나 여수항에서 나룻배로 승하선을 마치고 남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현 남해대교(당시에는 없었다.) 수로를 지나 삼천포를 들러 당시 자개장으로 유명했던 통영항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에 정박했다.


 여느 항구와 같이 부두시설이 전근대적이어서 가까이 대지를 못하는 것이다. 털 손님을 싣고 나룻배가 오기도 전에 조그마한 보트 같은 배들이 다가와 ‘깨엿 사이소, 깨엿 사이소’ 소리치며 여객선 주위를 돈다. 기차를 따라 우르르 달리면서 천안 명물 호두과자를 사라고 외쳐대던 천안역의 장수들이 연상되었다. 불편하고 지루한 여행에 지친 손님들은 당시의 유일한 기호식품이라 할 수 있는 엿을 사 먹으며 기분을 전환했다.


 그 후 계속 항해하여 거제도의 장승포항을 들러 부산으로 향했다. 여태까지 남해안을 따라 수많은 섬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고 왔다면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득한 수평선이 있을 뿐 육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해가 수평선 끝에 닿아가며 하늘과 바다가 불그스레 물들어갔다. 낙동강 물이 바다로 유입된다는 가덕도에서 대한 해협 쪽은 물결이 높고 거칠었다. 여태까지 잘 버틴 고물 선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배의 프로펠러가 지나가며 잔챙이 고기들을 솟구치게 하는지는 몰라도 수많은 갈매기떼가 까악까악 거리며 물속을 들락거렸다.


 부산에 도착한 것은 거의 밤 10시경이었다. 선창가에 즐비한 선술집 겸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같이 왔던 해군 문관은 군함 사정을 알아보러 간다며 나갔다. 군함을 타면 목포를 거쳐 인천까지 하루면 갈 수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다음 날 아침까지 나타나지를 않았다. 언제 어떻게 바뀔 줄 모르는 전시상황인 것을 감안하여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기차에 편승하기 위해 역으로 갔다.


 임시 수도인 부산은 서울의 관리, 배경이 든든한 사람, 전국의 부자와 그의 가족들이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다. 마치 콩나물 시루 속 같았다. 무질서하고 혼란하고 폭력이 난무하고 너 죽고 나 살자는 것이 현실이었다. 역은 한층 더했다. 서울로 돌아가려고 모여든 수많은 피난민이 어떤 화물칸이 갈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운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객열차라는 것이 없는 관계로 차표라는 것도 없었다. 서울로 올라가다 달리는 열차의 지붕에서 떨어져 죽든 말든 하는 것조차 나중 문제였다.


 그때의 전황을 보자면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국군이 서울부터 동해까지 중부지역을 탈환, 북진 중이었다. 남쪽에 남아있던 인민군과 지방 빨치산들은 산속으로 쫓겨 들어가 후방의 국군들이 소탕작전을 펴고 있었다. 최 전장에서는 유엔군들이 50년 10월 19일 평양을 함락하고 계속 북진 중이었지만 평양함락을 기점으로 중공군이 개입함으로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북으로 가는 군수물자가 무한정 필요한 상황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참전 16개국에서 보내온 군수물자를 부산 부두에서 싣고 전국으로 수송하는 것이다. 우리도 바로 이 기차 지붕을 타고 서울까지 가려고 온 것이다.


 군수물자를 실은 화차의 문은 꼭 잠겨있고 뒤나 옆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지붕에 반자 정도의 판자가 세줄로 붙어있어 달리는 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여기에 줄로 몸을 묶어 11월 초의 북풍을 맞받으며 올라가는 것이다. 한참을 기다리니 화물칸 20여 개를 단 기관차가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혹시 이것이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난민들이 짐을 지고 지붕으로 개미떼같이 올라가 순식간에 지붕들이 꽉 차버린다.


 우리는 앞에서 두 번째 지붕에 올라탔는데 아버지는 솜을 두껍게 넣은 한복 상.하의를 껴입고 일제때 만든 방한모(솜을 두껍게 넣어 어깨까지 늘어트려 얼굴만 작게 드러나게 만듦. 폭탄이 터지면 파편으로부터 고막을 보호하게끔 만들어짐)을 쓰셨다. 나는 학생용 오버에 방한모를 썼다.


 이윽고 목이 메는듯한 기적 소리가 울리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옆에 탄 젊은 분은 자신은 몇 번이나 차 지붕에 오르내리다 겨우 서울 가는 것을 타게 되었는데 우리 보고는 단번에 적중시켜 탈 수 있었으니 재수가 좋다고 했다. 기차가 부산 시가지를 벗어나 줄곧 낙동강 변으로 달린다. 최남단인 데다가 막 기차에 오른 터라 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기차 지붕에서 보는 탁 트인 전망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낙동강 하류는 넓고 출렁이는 물결과 넓게 펼쳐진 을숙도 갈대밭의 물결, 떼로 몰려다니며 먹이를 찾는 물오리들, 멀리 펼쳐져 있는 김해평야 등은 불안하기만 한 상황에서도 자연의 조화를 감상하게 해주었다. 자연에 도취하여 있는데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 다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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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rokim
김영노
58085
10293
2015-01-22
나의 6.25 회상(4)

 

 

(지난 호에 이어)

 이양에 도착해 벌교 가는 지름길을 물으니 조성(새재)로 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준다. 말은 쉽게 들었지만, 물어물어 소나무와 잡목으로 뒤덮인 준험한 고개를 넘어 조성에 치맛자락에 안고 있는 광덕산이 여성적이라면 이번 고개는 거칠고 남성적이었다. 여순반란사건 때 율어가 공산 반도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어도 토벌대가 접근하기 힘들었다는 말처럼 그럴만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조성은 칠팔년전 일제 소학교 시절 호기심에 집을 떠나왔다가 차표를 사지 못해 집에까지 걸어간 경험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을 물어볼 필요도 없이 철길을 따라 걸었다.


 “무슨 담배요? 좀 팔구가오.”


 새재의 철도 굴을 지나 새끼산거리를 지나는데 우리를 담배장수로 오인하고 부른다. 해는 거의 새재에 걸쳐있었고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갈만한 간이주막이었다. 형님이 담배장사가 아니라고 밝히며 물 한 모금을 청하자 들어오란다. 40대 중반 정도의 껄렁한 놈팽이처럼 보이는 주인의 눈매가 예민하게 우리는 살피는 것이 공산당 특유의 프락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조심하자는 신호를 교환하며 들어갔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서울에서 이 아랫마을 무만동에 간다고 대답했지만, 그의 얼굴엔 ‘여수반란 때 부역했던 너희가 서울에 숨어 살다 이제 너희 세상으로 바뀌었다니까 돌아오는구나.’라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돌아가 인민위원회에서 한자리쯤 하게 되면 덕 좀 보겠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안방으로 들어가자 자신의 집에 온 귀한 손님이니 술 한 잔 하고 싶다며 당시 비밀리에 내린 꽃 소주와 피문어를 내놓는다. 피문어는 큰 문어를 눌러 고급스럽게 상품화한 것으로 주로 제사상에 오르거나 환자의 영양식으로 많이 쓰였다. 어렸을 적 외가에 식량을 얻으러 갈 때 할아버지, 할머니 잡수시라고 우리에게 들려 보낼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피곤함에 찌들고 마치 피부병마저 앓고 있는 듯이 남루해 보이는 우리에게 이런 융숭한 대접을 하는 속뜻이 짐작이 갔다.


 능주에서 벌교까지 200여 리의 길을 산길, 들길, 험한 길을 가리지 않고 질러온 덕에 100여 리로 줄일 수 있었지만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거기에 집에 가까워져 간다는 흥분과 감격 안도감 등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독한 술을 마시자 빠르게 허물어져 내린다.


 술을 마셔도 형님과 나는 반응이 틀리다. 나는 마셔도 침착하지만, 형님은 금방 흥분하여 공격적으로 변한다. 주인장은 계속 잔을 권하며 이리저리 떠보는 듯한 말을 던지면서 좋은 기회라도 건지려 들었지만 의도했던 만큼의 소득은 얻지 못했다. 


 어물 저물 밤이 깊어져 가겠다고 하니 주인장은 바로 아래 과수원에서 산 듯한 배 한 포대를 주며 가져가란다.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과 허물어지려는 몸을 추스르고 본래 가지고 있던 짐에 배 한 자루까지 얻어 어둠 속을 갈지자걸음으로 걷다가 넘어지다가 하며 동구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개가 짖고 잠이 없는 할아버지의 담뱃재를 터는 소리, 헛기침소리가 난다. 집이 가까울수록 기쁜 마음과 억울함으로 들떠 올랐다.


 마침내 대나무로 엮은 우리 집 문 앞에 다다라 ‘왔습니다.’ 라고 외쳤지만 그건 기분뿐, 실제로는 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답답해서 손으로 문을 힘차게 두드리자 놀란 개가 요란하게 짖어댔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주 기쁘거나 아주 슬프면 웃음도 울음도 안 나는 건가 계속 울먹이며 문을 두들겼다. 드디어 아버님이 방문 건너에서 ‘거 뉘기여?’하며 동정을 살피신다. 당시의 밤손님은 무엇보다 더 두려운 존재…


 대여섯 번을 뉘기여? 뉘기여? 하시다가 대답이 없자 우리 앞에까지 오셔서 누구냐고 물으신다. 그때야 겨우겨우 “영놉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문이 열리고 온 가족이 뛰어 나오며 붙잡고 한바탕 운 것을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가 쓰러져버린 우리는 뒷날 아침까지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어머님이 우리 옷을 다 벗기고 땀과 소금가루,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몸을 시원한 수건으로 다 닦아내고 삼베 등지 개와 삼베 바지로 바꿔 입히고 이놈들이 정말 내 자식들인지 우리들의 불알을 만져보고 또 만지며 한참이나 지켜보다 주무셨다고 한다.


 13일간 사선을 넘나들던 피난일정이 이렇게 끝나고 그리웠던 고향에서 부모님이 지극정성으로 챙겨주시는 영양식을 먹으며 열흘쯤 지나니 몸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활력이 되살아났다. 주시기만 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만 했다. 그런 자신에게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기만 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울해진다.


 생전에 아버님은 종종 고생하고 큰 아이들이 빨리 철든다고 하셨다. 고교 후배인 박 군은 젊은 나이에 암이라는 충격적인 죽음의 선고를 받고도 용기를 내어 많은 난관을 거쳐 극복했다. 그 후에도 시간을 만들어 장애인을 위한 자원봉사를 그치지 않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들은 좋든 나쁘든 극한 상황을 거치고 나면 인생을 알고 겸손해지고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가 하는 교훈을 얻는 것 같다. 내 자신도 피난 전과 피난 후의 자신은 분명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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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rokim
김영노
58084
10293
2015-01-15
나의 6.25회상(5)

 

(지난 호에 이어)
 
 깜짝 놀라 연유를 물어보니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이 통했던 듯 우리가 떠난 후 곧 석방되었단다. 빨리 걸으면 중간에서 만날 것이라고 했지만, 몸이 말을 안 들어 지금 왔다며 연신 정말 고맙네, 고마워라고 하신다.
 

며칠 쉬었다 가겠다는 장 씨와 헤어진 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는 무사히 벌교에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벌교는 빈번히 미군기의 폭격을 받았는데 그의 가족이 폭격 때문에  한자리에서 몰살했다는 소식을 듣곤 한동안 멍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장영자 양은 국민학교 6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었다. 졸업한 지 불과 3년 정도여서 그 여학생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라 괴로웠다.

 

 점심을 잘 먹고 확실한 증명을 하니 마음도 가볍고 기운이 났다. 국도를 따라가도 별로 장애가 없었다. 남행에 절로 속도가 붙었다. 강경을 떠나자 바로 전라도 이정표가 눈에 뜨인다. 어! 고향 친구들 그동안 고생했네. 이젠 마음을 놓고 내 품 안에 오게 하는 말도 없건만 어쩐지 마음이 흐뭇하고 안심이 되며 누가 해칠 것 같지도 않았다. 고생한 보람을 느낀 것이다. 


 함열, 간촌을 지나니 여기가 수엄니(이리, 지금의 익산)라고 한다. 어떤 촌사람은 수엄니만 알지 이리라는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이리도 지나 황산과 김제평야의 젖줄이라 할 만 경을 지나 황산벌로 들어서니 백제 의자왕 때(서기 660년)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유신 장군에 대항해 싸우자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 장군이 생각났다. 엊그제는 백제 최후의 삼천궁녀가 낙화한 백마강의 낙화암 등은 비통한 일들이다.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려 황산벌도 어슴프게하고 벼는 마치 강가의 갈대처럼 소슬바람에 잔잔한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밤이 되니 농가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잠도 잘 잤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고향으로 갔으면 하지만 마음뿐, 김제 신태인 정읍 내장산과 백양사 입구를 지나 신흥이라는 큰 마을 같은 읍의 변두리 농가에 들어갔다. 밥값만 낼 테니 하루 자고 가자고 하니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사실은 우리가 가진 옷을 돈 대신 주었다.)

 

깊은 산중이어서인지 그렇게 덥지 않아 마당 평상에 앉아 주인과 잡담을 했다. 둘러보니 이곳에 철도가 없었다면 인적이 드문 깊은 산중으로 옛날 화적떼의 소굴이나 될 법한 곳이라고 생각됐다. 그러나 주인장은 장성갈재가 험하고 높아 창공을 나는 기러기도 쉬어간다고 하며 경상도에 문경새재가 있다면 전라도에는 장성갈재가 있다고 자랑을 한다. 


 장성갈재를 걸어 넘는 것은 산짐승이나 못된 산적이 있어 위험하니 기차 굴을 걸어가라 했다. 기차가 불규칙하게 탄약과 인력을 수송하니 걸어가는 도중에 기차 소리가 들리면 굴 벽 밑 물 흐르는 고랑에 엎드리면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우리는 피난 후 매일매일 몇 가지 필수사항을 점검해왔다. 최우선이 발바닥 점검과 양말에 비누칠을 하는 것이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없나, 붉게 부어오른 데는 없나, 비누칠을 해댄 양말은 마치 부드러운 가죽같이 변했다. 다음은 몸통인데 열흘 동안 모기, 빈대, 벼룩, 진드기 등에 물려 피부 전체가 옴이 오른듯했다. 그중에도 덧난 곳을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날 아침도 점검을 끝내고 어두운 새벽에 출발하여 철도를 따라 걸어서 굴입구에 다다르니 동녘이 붉어져 있었다. 거침없이 철도 굴로 들어서 넘어지고 수없이 돌멩이도 차면서 거의 뛰다시피 전진했다. 혹시라도 불시에 기차가 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긴박감에 정신없이 한참을 뛰자 앞이 훤하여 나가보니 해는 벌써 중천에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사히 통과하게 하여 주신 것 감사합니다.

 

 대치, 비아를 지나 광주에 사시는 목포 이모 집에 왔다. 


 “워마, 이 새끼들아! 내 새끼들아! 느그덜이 살아 있었구나. 느그 엄니는 매일 거지가 지나가도 혹시 느그덜이 아닌가? 유심히 본단다.” “워머- 이놈들아” 하시며 우리를 잡고 우신다.


유난히도 잔정이 많은 이모님을 대하니 우리도 감격해서 눈물이 나고 비슷하게 닮은 어머님 모습이 더욱더 그리웠다.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밥 덩어리 몇 개를 가지고 지체하지 않고 가겠다고 나서니 “응, 그래 가야제. 몸은 성하냐?”고 물으신다. 사실 그간 먹는 것도 부실하기는 했지만 땀을 하도 많이 흘려 몸이 가뿐해진 듯했다. 걷는 것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었고 집이 가까워 올수록 마음이 조급했다. 다정한 이모님을 마치 귀찮은 사람 털어버리듯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지가 지나가도 느그덜인가 확인했다니 피가 거꾸로 도는 듯했다. 


가자, 빨리 가자.


 화순을 지나 능주 앞다리를 건너게 됐다. 물가에 앉아 능주 읍을 보고 혹시 어머니가 어릴 때 살았던 고향이 아닌가 생각했다. 물가에 앉아 능주 읍을 보고 혹시 어머니가 어릴 때 살았던 고향이 아닌가 생각했다. 어머님의 택호가 능주 댁이고 또 능주 구 씨였기 때문이다. 능주가 어머님의 고향일거라고 생각하니 별 볼 일 없는 그저 산골 소읍이 다정하고 친밀감이 들었다. 능주가 잘 보이는 어느 주막에서 잤다. 짐을 풀고 내일은 지쳐서 죽더라도 고향에 가자고 다짐을 했다. 험한 것 상관없이 지름길이라면 질러 가리라고 마음을 먹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늘 하던 대로 여행점검을 마치고 마당에 나오니 어젯밤에 같은 주막에서 잔 듯한 사람들이 세수하면서 능주 장이 어떻고 화순 장이 어떻고 하는 것이 보부상들인듯했다. 주인이 나서서 이분들 가는 길이 지름길이라고 따라가라 권해주었다. 그분들을 따라 산길로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우리 고향 벌교로 피난 가는 중이라고 대답을 하자 피난이란 말이 생소한 듯 자기들끼리 여순반란 사건 때 부역했던 사람들이 서울로 몸을 피했다가 제 세상을 만나 돌아오나 보라고 멋대로 추측을 한다. 사실 그동안 그런 종류의 의심을 받아왔기 때문에 별로 유의치 않았다. 


 이양에 도착해 벌교 가는 지름길을 물으니 조성(새재)로 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준다. 말은 쉽게 들었지만, 물어물어 소나무와 잡목으로 뒤덮인 준험한 고개를 넘어 조성에 치맛자락에 안고 있는 광덕산이 여성적이라면 이번 고개는 거칠고 남성적이었다. 여순반란사건 때 율어가 공산 반도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어도 토벌대가 접근하기 힘들었다는 말처럼 그럴만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조성은 칠팔년전 일제 소학교 시절 호기심에 집을 떠나왔다가 차표를 사지 못해 집에까지 걸어간 경험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을 물어볼 필요도 없이 철길을 따라 걸었다.

“무슨 담배요? 좀 팔구가오.”

새재의 철도 굴을 지나 새끼산거리를 지나는데 우리를 담배장수로 오인하고 부른다. 해는 거의 새재에 걸쳐있었고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갈만한 간이주막이었다. 형님이 담배장사가 아니라고 밝히며 물 한 모금을 청하자 들어오란다. 40대 중반 정도의 껄렁한 놈팽이처럼 보이는 주인의 눈매가 예민하게 우리는 살피는 것이 공산당 특유의 프락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조심하자는 신호를 교환하며 들어갔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서울에서 이 아랫마을 무만동에 간다고 대답했지만, 그의 얼굴엔 ‘여수반란 때 부역했던 너희가 서울에 숨어 살다 이제 너희 세상으로 바뀌었다니까 돌아오는구나.’라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돌아가 인민위원회에서 한자리쯤 하게 되면 덕 좀 보겠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안방으로 들어가자 자신의 집에 온 귀한 손님이니 술 한 잔 하고 싶다며 당시 비밀리에 내린 꽃 소주와 피문어를 내놓는다. 피문어는 큰 문어를 눌러 고급스럽게 상품화한 것으로 주로 제사상에 오르거나 환자의 영양식으로 많이 쓰였다. 어렸을 적 외가에 식량을 얻으러 갈 때 할아버지, 할머니 잡수시라고 우리에게 들려 보낼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피곤함에 찌들고 마치 피부병마저 앓고 있는 듯이 남루해 보이는 우리에게 이런 융숭한 대접을 하는 속뜻이 짐작이 갔다.

 

능주에서 벌교까지 200여 리의 길을 산길, 들길, 험한 길을 가리지 않고 질러온 덕에 100여 리로 줄일 수 있었지만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거기에 집에 가까워져 간다는 흥분과 감격 안도감 등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독한 술을 마시자 빠르게 허물어져 내린다.


술을 마셔도 형님과 나는 반응이 틀리다. 나는 마셔도 침착하지만, 형님은 금방 흥분하여 공격적으로 변한다. 주인장은 계속 잔을 권하며 이리저리 떠보는 듯한 말을 던지면서 좋은 기회라도 건지려 들었지만 의도했던 만큼의 소득은 얻지 못했다. 


어물 저물 밤이 깊어져 가겠다고 하니 주인장은 바로 아래 과수원에서 산 듯한 배 한 포대를 주며 가져가란다.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과 허물어지려는 몸을 추스르고 본래 가지고 있던 짐에 배 한 자루까지 얻어 어둠 속을 갈지자걸음으로 걷다가 넘어지다가 하며 동구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개가 짖고 잠이 없는 할아버지의 담뱃재를 터는 소리, 헛기침소리가 난다. 집이 가까울수록 기쁜 마음과 억울함으로 들떠 올랐다.

 

마침내 대나무로 엮은 우리 집 문 앞에 다다라 ‘왔습니다.’ 라고 외쳤지만 그건 기분뿐, 실제로는 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답답해서 손으로 문을 힘차게 두드리자 놀란 개가 요란하게 짖어댔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주 기쁘거나 아주 슬프면 웃음도 울음도 안 나는 건가 계속 울먹이며 문을 두들겼다. 드디어 아버님이 방문 건너에서 ‘거 뉘기여?’하며 동정을 살피신다. 당시의 밤손님은 무엇보다 더 두려운 존재…


대 여섯 번을 뉘기여? 뉘기여? 하시다가 대답이 없자 우리 앞에까지 오셔서 누구냐고 물으신다.


그때야 겨우겨우 “영놉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문이 열리고 온 가족이 뛰어 나오며 붙잡고 한바탕 운 것을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가 쓰러져버린 우리는 뒷날 아침까지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어머님이 우리 옷을 다 벗기고 땀과 소금가루,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몸을 시원한 수건으로 다 닦아내고 삼베 등지 개와 삼베 바지로 바꿔 입히고 이놈들이 정말 내 자식들인지 우리들의 불알을 만져보고 또 만지며 한참이나 지켜보다 주무셨다고 한다.

 

13일간 사선을 넘나들던 피난일정이 이렇게 끝나고 그리웠던 고향에서 부모님이 지극정성으로 챙겨주시는 영양식을 먹으며 열흘쯤 지나니 몸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활력이 되살아났다. 주시기만 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만 했다. 그런 자신에게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기만 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울해진다.


생전에 아버님은 종종 고생하고 큰 아이들이 빨리 철든다고 하셨다. 고교 후배인 박 군은 젊은 나이에 암이라는 충격적인 죽음의 선고를 받고도 용기를 내어 많은 난관을 거쳐 극복했다. 그 후에도 시간을 만들어 장애인을 위한 자원봉사를 그치지 않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들은 좋든 나쁘든 극한 상황을 거치고 나면 인생을 알고 겸손해지고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가 하는 교훈을 얻는 것 같다. 내 자신도 피난 전과 피난 후의 자신은 분명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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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rokim
김영노
58083
10293
2014-12-22
나의 6.25 회상(3)

 

 

 

 

(지난 호에 이어)

 남루한 옷차림에 피로한 몰골로 헐떡이는 우리에게 무뚝뚝하게 목이나 축이라며 참외를 하나씩 내민다.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를 연상시키는 이 거한은 키가 거의 6척은 되는 듯 컸고 얼굴도 우악스러워 보였다. 


 우리가 목이 말라 정신없이 먹고 있으니 말없이 우리의 기색을 살피던 산사나이가 “가유, 우리 집에 가서 저녁이나 나누어 먹어유” 한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아- 우리가 충청도에 들어섰구나’ 하고 위치를 알게 되었다. 


 수원에서는 집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밀어냈는데 여기서는 밖의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인적이 드물어 그런지 인심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산기슭 외딴집에서 보리밥에 된장찌개를 먹이고는 빨리 가라는 것이다. 벌써 밤중인데 우리는 서울 학생이고 먹을 것이 없어 고향에 간다며 염려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얼마쯤 지나자 부락자위대가 대창을 가지고 순찰을 왔다가 우리 일행을 보고 깜짝 놀란다. 먼저 증명을 보고 짐을 뒤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짐이래야 그전 수십 번과 같이 별문제가 없었다.


 매번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제시대 만주에서 헌병으로 근무했던 장 씨의 완벽한 헌병 복장의 사진과 그때 썼다는 단도였다. 이것들이 또 문제가 되었지만 장 씨는 자신이 공산당원으로 서울에서 보성 득량발전소 소장으로 발령받아 내려간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은 의심하면서도 뒤탈이 있을까 싶어서인지 그정도로 물러났다. 그들이 간 다음에도 장 씨는 아내가 벌교에서 인민 여성동맹위원장이라며 호언장담했다.


 이 집 주인인 산사나이, 장비는 안도의 숨을 쉬며 다행이라고 부처님께 빌었다고 한다. 그는 재 넘어 가까운 곳에 있는 마곡사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불공을 드린다고 했다. 우리가 묵게 될 건넛방은 죽석이 깔렸었는데 저녁 내내 모기, 빈대, 벼룩에 시달려 잔 듯 만 듯하고 다시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이 산길을 따라 걷고 있으려니 온갖 새가 지저귀며 간혹 산토끼나 꿩이 놀라서 달아나는 것이 보인다. 


 얼마쯤 가니 앞이 트이고 작은 평야가 나오며 농로, 수로 등을 따라 강경 쪽으로 걷다 백마강(금강)이라는 곳을 건너게 되었다. 그즈음은 가물고 산에 나무가 적어서인지 강인데도 비교적 수월하게 건너 남행은 계속되었다. 


 30~40리를 더 걸어 야산에 다다라 살펴보니 떡 벌어진 묘비 뒤에 수십 년 묵은 노송이 짙은 그늘을 내리고 서 있었다. 그 아래서 한여름 오후 꽃 더위를 피해 쉬며 밑을 내려다보니 조그마한 남향판 부락이 보인다. 부락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당시 우리가 강경을 거쳐 가려고 했던 것은 이리, 장성, 광주 선상에 있었고 타이어 공장의 고객이었던 강씨가 우리보다 먼저 떠나면서 피난 가는 길에 들러 쉬어가라고 권해주었던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꽃 더위가 지나고 우리는 다시 행장을 짊어지고 동네 뒤 대밭 쪽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 대창을 든 자위대가 나타나 우리를 부락으로 연행해갔다. 다시 증명검사를 당하고 짐이 뒤져졌다. 문제가 되었던 장씨의 사진과 칼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패잔병이고 장씨는 거물 첩자라며 분출소(파출소)로 끌고 가 인계해 버렸다. 그곳이 바로 초촌면 분출소 였다. 지금은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린 두 고인과 함께 잊고 싶은 고장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치안상황이란 전시의 혼란과 다를 바 없었다. 이승만 정부 법은 무효이고 그렇다고 공산 정부 법이 공정하게 적용되지도 않았다. 통신망도 전부 망가지고 도로의 요소요소도 끊겨버렸다. 그야말로 정당한 법은 없고 공산당의 말과 개인의 감정이 법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형을 집행하는 절차조차 없었다.


 그들의 감정과 순간의 기분에 의해 사람의 생사가 좌지우지되던 실정이었다. 우리는 학생증을 제시했는데도 패잔병으로 간주하였고 장씨는 거물급 간첩으로 간주하여 특수 죄수수용소라 불리는 동굴에 수감되었다. 그날 하루는 수용소에서 자고 다음날 부여 내무서(경찰서)로 소환한단다. 처음 수용소라는 말을 들었을 땐 우산각이나 강당 같은 좋은 곳으로 착각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감옥이었다. 소가 끄는 달구지에 손이 묶인 채 나와 밀고죄로 체포된 구장, 형님과 공주경찰서 감찰과장을 둘씩 연결해 묶어 두었다.


 더운 여름 비포장도로를 달구지에 실려 한참을 가는데 나와 같이 묶인 밀고자(민주진영)가 소변 좀 보고가자 해 달구지에서 내려 논두렁에서 일을 보았다. 일을 보면서 밀고자는 옆에 호송하는 젊은이에게 반말로 유언 같은 부탁을 한다. “자네, 같은 동네 사람 아닌가. 자네가 공산주의자로 산에서 내려온 것을 내 직무상 보고했는데 나는 살기를 포기했네만 가서 내 자식들에게 어떤 형태든 밀고는 말라고 좀 전해주게.”


 이 분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을 뿐인데 중죄인이라니 세상이 바뀌며 같이 바뀐 운명이랄까 참으로 착잡한 심정이었다. 우리 죄수 일행은 부여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정자나무 아래서 쉬게 되었다.


 때마침 참외장수가 바지게를 내려놓고 참외를 판다. 우리는 비상금으로 참외를 사서 거기 쉬고 있는 어르신들과 우리 일행들에게 주었다. 특히 어르신들은 고향에 계신 부모에게 마지막으로 대신 드린다는 생각이었는데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부모님께 죄송했다.


 거기 어르신들 중 입담 좋은 듯한 노인이 ‘젊은이들은 어찌 이렇게 묶여가유’ 하신다. ‘서울서 학교에 다니다 배가 고파 고향에 가는 길에 이렇게 됐습니다.’ 딴 데서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쯧쯧쯧, 시국탓이유. 시국탓’ 하며 안타까워하면서 말을 이으신다. ‘그럼 여기는 잘 모르겠지만...’하며 그 고장 이야기를 하신다. ‘저기 흘러가는 강이 백마강이고 저 바위산은 낙화암이여.’


 백제 멸망의 한이 되어 백마강에 몸을 던진 3천 궁녀의 고사가 전해온다. 자랑스러운 그 지조에 백제의 넋이 서려있는 듯했다. 


 형님은 어차피 죽을 것 내무 서에서 아무리 맞아도 끝까지 학생이라고 하자, 만약 딴말하면 엉뚱한 죄명으로 죽는다고 했다.


 드디어 부여 내무서 정문. 인민군 보초가 어깨에 따발총을 메고 한 손에는 대검을 들고 우리에게 차례차례 묻는다.


 “동무 어찌 왔어?” 공주경찰서 감찰과장이었다고 하자 대검으로 묶은 끈을 끊어버리며 “저쪽으로”


 “동무는?” “나는 학생인데 의심합니다.” “들어가.”


 “동무는?” “나는 밀고했다.” “저쪽으로”


 “동무는?” “학생입니다.” “들어가”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는 감찰과 앞에서 신고요령을 연습하고 있는데 내무서 밖에서 총성이 들린다. 내다보니 같이 잡혀 온 그들이었다. 벌써 밭 언덕에서 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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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rokim
김영노
58082
10293
2014-12-16
나의 6.25 회상(2)

 

 

 

(지난 호에 이어)

 

1차 피난(1)


 우리는 더 이상은 여기에 머물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영헌이는 아직 어려서 노약자, 소년 등을 동원하는 노력동원에는 나가지만 징집연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에 남기로 하고 형님과 나는 자정만 지나면 고향 무만동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혼자 남을 영헌이가 안타까웠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현실은 어쩔 수가 없었고 지금도 미안한 마음 뿐이다. 학생증, 성적표, 최근 사진과 영어사전, 간단한 옷가지를 챙겨 감시가 뜸한 틈을 노려 뒷길만을 골라 마포나루에 다다랐다.

 

 조심히 다가가 살펴보자 새우젖 배 몇 척이 보였지만 이를 인민군이 지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루를 포기하고 바로 위쪽에 있는 당인리 화력발전소 쪽으로 올라가 수면 폭이 좁은 곳을 택해 한 손으론 짐이 젖지 않도록 들고 한 손으로만 수영하여 무사히 건너편 모래밭에 닿을 수 있었다. 당시 이 섬 일대에는 땅콩을 재배하고 있었고 후에 미군 경비행장(K-16)으로 쓰이다 비행장이 성남으로 이동하고 오늘날의 여의도로 변하였다. 


 간밤의 긴장으로 피곤하고 졸린 우리는 동이 트기 시작하는 땅콩밭 두덕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일단 단속이 심한 서울을 벗어나 영등포 쪽 국도를 택해 걷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여드는 엄청난 수의 피난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추측건대 서울에서 버티다 먹을 것은 없고 동원과 징집이 심해져 가자 우리처럼 피난을 가는 것이리라. 이 피난 대열에 합류하여 시흥에 와서 아는 사람 집에 들러 점심을 얻어먹었다.


 수차례 비행기 폭격과 기총소사를 받으며 안양, 군포를 지나 부곡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간다. 무리해서 더 걸어 밤이 이슥해질 때쯤에 서야 수원에 도착했다.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에 잘 곳을 찾아 농가로 보이는 집에 들어가 마당에서 자게 해달라자 피난민이 많아서 안 된다고 거절을 했다. 하는 수없이 밖에 나와 아무 담벼락 밑에서 자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것은 농가의 변소였다. 두 사람 다 양말을 신기 전 발바닥에 비누칠을 칠하고 다시 출발, 국도에 들어서는 순간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아는 사람과 만났다. 6.25전 우리 집에 종종 들렀던 벌교 시내의 장재동 씨였다.


 그의 발은 벌써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터져 뻘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간의 행적을 몰랐지만, 그는 전남 보성 득량 발전소의 소장 발령 증을 갖고 내려가니 학생증밖에 지닌 것이 없는 우리들의 증명문제가 해결될 거라며 짐을 한데 모아 리어카에 싣고 자신은 그냥 걷고 우리는 앞뒤에서 리어카를 끌고 가자고 제안했다.
 사실 전시인 그때의 상황으로 신분증명은 안전하게 집에까지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의 제의네 솔깃한 우리는 그와 함께 밀고 당기며 하행을 계속했다. 가는 도중에도 몇 번씩이나 비행기를 피해 숲 속에 숨어들었다 조용해지면 다시 길을 가는 고된 여정이 이어지며 태안을 지나 오산까지 오는데 꼬박 하루를 소비했다.


 
 둘째 날은 여의도에서 수원까지 근 90리 길을 걸었는데 셋째 날을 50리도 채 걷지를 못했으면서도 고되기는 배나 되어 허탈했다. 그날은 계곡에서 자고 다음날 우리가 따로 가겠다고 말하자 자신도 할 수 없다며 세 사람이 각각 자기 짐을 지고 걷기 시작했는데 발바닥이 부어터진 그로 인해 여전히 더딘 여정이 되었다. 송탄을 지나 평택에 들어서니 국도는 비행기 폭격이 잦고 인민군의 증명검사가 심해 지방도로를 따라 걷다가 둔포의 어느 실개천 언덕에서 네 번째 저녁을 맞이했다. 고단한 와중에 보았던  그날의 석양은 전혀 아름답지 않고 그저 칙칙하고 덥게만 느껴졌다.


 피곤하고 배가 고파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씻지를 못해 자잘한 소금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개천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니 밥 생각이 간절해지는데 멀리에 농가가 보였다. 몇 집을 돌며 구걸을 해봤지만 이미 끼니때는 지나갔고 하루에도 몇 사람씩이나 찾아드니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할 수 없이 그냥 자고 내일 아침이나 얻어먹자고 체념하고 자려고 했지만 세 사람 다 너무 배가 고차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해 내가 농가 처마 밑에 걸린 삶은 보리를 바구니에 훔쳐와 먹고 남은 것은 수건에 싸서 새벽 일찍이 그곳을 떠났다.


 변함없이 인민군은 국도를 점령하고 있었고 지방도로는 부락단위로 자위대가 대창을 꼬나 들고 지나는 사람들의 증명조사를 한다며 시시콜콜하게 따지는 게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인민군보다 더 심했다. 피난길을 떠난 이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긴장의 연속이었던 우리 일행들의 몸에는 전신으로 마치 두드러기라도 난 것같이 오돌톨하게 부어올라 걷는 내내 끊임없이 긁어야 할 정도로 가려웠다. 계속되는 야숙으로 모기, 진드기, 개미 등 기타 곤충들에게도 물어뜯긴 탓이었다.


 그때까지도 지방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어떻게 하면 고생을 덜 하고 하루라도 빨리 집에까지 가느냐’ 하는 것을 의논했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은 역시 지방도로 쪽이었다. 국도는 일직선으로 뻗어있어 걷기도 편하고 빠르지만 잦은 검색으로 인한 징집의 위험과 빈번한 미국의 폭격으로 생명의 위협이 컸기에 포기해야 했다. 당시의 지방도로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은 개념이 아니고 취락이나 마을들, 소읍, 면 등을 연결하는 생활도로였다. 도로 자체도 구불구불하게 사람들이 사는 곳을 따라 나 있었다.


 그래서 지방도로도 포기하고 질러갈 수만 있다면 재를 넘고 냇물도 건너고 농로, 오솔길, 솔밭길, 고갯길, 시냇물을 따라난 비탈길 등 필요에 따라선 수풀을 헤치고라도 무조건 빨리 갈 수만 있는 길을 택했는데 그럴 때에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확인하는 것이 필수였다. 잘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지나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부여, 강경으로 가는 지름길만을 묻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수양버들이 몇 그루 있는 언덕인 천안 삼거리를 지났다. 온양과 현충사, 도고를 지나 산중으로 들어섰다. 한참 솔밭길을 걸어가는데 어느덧 소나무 그림자가 길쭉길쭉 늘어지고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해지며 해가 지려 한다. 빨리 민가를 찾아 밥을 얻어먹고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비탈진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얼마쯤 내려가니 앞이 트이면서 밭이 보였다. 조금 더 내려가니 한 농부가 참외를 바지게에 채우고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워 다가가니 그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 여차하면 덤벼들 태세였다. 알고 보니 우리를 이승만의 패잔병이나 스파이로 오인한 것이다. 남루한 옷차림에 피로한 몰골로 헐떡이는 우리에게 무뚝뚝하게 목이나 축이라며 참외를 하나씩 내민다.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를 연상시키는 이 거한은 키가 거의 6척은 되는 듯 컸고 얼굴도 우악스러워 보였다. 


 우리가 목이 말라 정신없이 먹고 있으니 말없이 우리의 기색을 살피던 산사나이가 “가유, 우리 집에 가서 저녁이나 나누어 먹어유” 한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아- 우리가 충청도에 들어섰구나’ 하고 위치를 알게 되었다. 


 수원에서는 집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밀어냈는데 여기서는 밖의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인적이 드물어 그런지 인심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산기슭 외딴집에서 보리밥에 된장찌개를 먹이고는 빨리 가라는 것이다. 벌써 밤중인데 우리는 서울 학생이고 먹을 것이 없어 고향에 간다며 염려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얼마쯤 지나자 부락자위대가 대창을 가지고 순찰을 왔다가 우리 일행을 보고 깜짝 놀란다. 먼저 증명을 보고 짐을 뒤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짐이래야 그전 수십 번과 같이 별문제가 없었다.


 매번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제시대 만주에서 헌병으로 근무했던 장 씨의 완벽한 헌병 복장의 사진과 그때 썼다는 단도였다. 이것들이 또 문제가 되었지만 장 씨는 자신이 공산당원으로 서울에서 보성 득량발전소 소장으로 발령받아 내려간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은 의심하면서도 뒤탈이 있을까 싶어서인지 그정도로 물러났다. 그들이 간 다음에도 장 씨는 아내가 벌교에서 인민 여성동맹위원장이라며 호언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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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노
58081
10293
2014-12-11
나의 6.25 회상(1)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종종 되살아나서 회상해본다. 6.25 전쟁에 대해서. 지금 70세 이하는 정사(正史)의 몇 장을 읽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당시 기억력이 왕성한 17세 중학(6년제)생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참담한 경험을 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미군 개입에 이어 중공군 개입까지 6개월간 실제 경험자로서 사실(史實)을 사심 없이 기록함으로써 당시 실상의 일면을 알리고 싶다.

 

1.전쟁 발발


 3학년이 되고 학급이 새롭게 편성되고 반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긴급 뉴스라며 ‘북한 공산괴뢰군이 새벽에 38선을 넘어 쳐내려 오고 있다.’ 고 HLKA 서울 중앙 라디오 방송이 시시각각으로 반복해서 긴장한 목소리로 보도했다. 하지만 ‘안심하라.’ 곧 반격해서 격퇴하겠다는 정부의 호언에 안심하고 등교를 했는데 2교시가 끝나니 담임선생님께서 오늘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학교에서 통지할 때까지 기다리라며 수업을 중단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은 행복했던 내 중학 시절을 앗아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서울사대에 다니던 형님과 중학교 2학년생인 동생 영헌이도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학교가 중단되고 큰형님 공장도 혼란 속에 근무자들을 일찍 보내고 문을 걸었다. 


 긴장과 혼란 중에도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은 다음 계속 진격하여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하고 호언장담을 했다는데 막상 분위기는 살벌하고 전황은 정반대로 전개되고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당시 우리 군은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변변한 저항도 받지 않고 파죽지세로 동두천과 의정부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했다는 전황을 듣게 되었다. 설마 서울까지야 하며 여유를 가지고 있던 서울 시민들은 우왕좌왕 두려움을 자제하지 못하고 극심한 혼란 중에 각자 살길을  찾았지만 갑작스러운 사태에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큰형님을 비롯해 만삭인 형수 님, 이웃 주민들과 함께 동아일보사 옆을 흐르는 청계천의 복개된 맨홀을 열고 깜깜한 바닥으로 내려가 쪼그리고 앉아 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중앙청 쪽에서 인민군 선발대의 탱크 구르는 소리를 시작으로 광화문을 지나 시청 쪽으로 수십 대가 따발총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때가 1950년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은 계속 입성하여 서울을 함락했다. 얼마 후 따발총 소리가 멈추고 인민군 행정요원들이 마이크로 ‘다 나와서 정상생활을 해라.’고 낯선 이북 말투로 외쳐댄다. 밖으로 나오자 자유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공산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어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개입하기 전의 한국군은 연일 쫓기다 후퇴할 힘이 없을 정도로 약한 군대였다고 했다. 인민공화국 하에서 날마다 세뇌교육과 노력 동원 등으로 끌려가 시달리던 중 큰형님은 만삭의 형수 님을 자전거 뒤에 싣고 청주 처가로 내려가시고 며칠이 지나자 우리 셋은 배가 고파 이젠 사상이고 학습이고 다 싫었다. 종이봉투로 사다 먹던 쌀이 떨어졌으나 양곡 가게는 간판까지 떼어버렸다. 양곡 반입까지 끊겼으니 이제는 모든 시민이 굶주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서울에서 하숙하며 공부하던 지방의 유지 갑부들의 자식들은 전부 하숙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었다. 호화롭게 자라 아무런 사회 저항력이 없는 이들이 우선은 배가 고프니까 공산당 측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작은 형님의 친구로 광주에서 잘 나가는 집안의 맏아들이라는 이가 찾아왔다. 김씨 성을 가진 이였는데 며칠이나 굶었는지 눈이 쑥 들어가고 허리가 휘어져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형님에게 밥 좀 달란다. 우리 역시 굶고 있는 처지에 밥이 있을 리가 없고 쌀도 없으니 딱했다. 결국, 기운이 파하여 우리 방에 누워버리고 만다.


 보다못해 내가 보관하고 있던 학급 교과서 대금이 있으니 그것의 일부라도 주자고 형님에게 제의하자 어느새 그 말을 들은 것인지 그것 다 빌려주면 곧 집에서 가져다 갚겠단다. 실제론 전시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형님의 동의하에 다 주었다. 그러나 그 후 2주가 되어도 갚기는커녕 소식도 없다가 얼마후에 벽초 홍명의의 임꺽정 전 6권을 주며 일어보라기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후 그는 인민군으로 전투 중 전사했거나 이북으로 끌려갔는지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배를 곯는 중에도 세뇌교육과 노력동원은 계속되었다. 굶다 굶다 못해 형님과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산 생활필수품과 우리들의 옷가지를 들고 당시 국내 최대의 염전인 인천 주안에 가서 소금과 바꾸어 짊어지고 부천 소사 시흥동 농가를 들며 곡식과 바꾸어 왔다. 어떤 때는 소금이 너무 무거워 생활필수품만 가지고 서대문에서 영천고개를 넘어 홍재동 화장터를 지나 녹번동, 불광동, 모래내, 수색 등을 돌며 곡식과 교환해 근근이 연명했다. 어떤 노부부는 우리의 행색을 얼른 알아차리고 시국을 잘못 만나 고생한다며 덤으로 몇 되씩 더 주곤 했는데 이럴 때면 고향의 부모님 생각이 나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혼란상태는 7월 중순에 이르러 한층 더 악화하였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점차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나마 점령 초기의 선심 정치는 사라지고 강압 정치로 돌아서며 시민들을 괴롭혔다. 주위의 고향 사람들은 더는 버틸 수 없으니 앉아 죽으나 가다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고향으로 피난을 가겠다며 하나하나 사라졌다. 이 와중에 우리에게도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서울시내 중학, 대학 전부 학교별로 궐기대회가 있으니 모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별 의심 없이 학교로 갔다. 교문을 들어서자 궐기대회고 뭐고 없이 무조건 의용군 지원서를 쓰라는 것이다. 나는 나이도 어리고 해서 못 쓰겠다고 하니 ‘이렇게 큰 키에 건강한데 무슨 아이 탓을 해!’ 하며 강요해도 거절하고 화학실로 집어넣어 버린다. 그 속에는 200여 명 정도가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나는 바로 입구에 서   있었는데 평소 잘 알고 있는 6학년 야구선수가 완장을 차고 들어선다. 나는 바로 입구에 서있었는데 평소 잘 알고 있는 6학년 야구선수가 완장을 차고 들어선다. 반가워서 얼른 다가가 “김 선배님, 나 좀 빼주시오.” 하니 “나도 먹고 살기 어려워 완장을 차게 되었는데 무슨 힘이 있겠냐”며 기다려 보라는 말만 하고 나갔다. 


 그 뒤로 두어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20~30명이 더 들어왔고 모두 극한상황에 겁이 질려있었다. 누군가가 말하는 대로 ‘화학실 문을 잠그고 독가스를 넣어 몰살시킬 지도 모른다.’며 초조해 하고 있는데 김 선배가 돌아왔다. 12시부터 시가행진이 있는데 ‘네가 키가 크고 건장하니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 맨 앞에 서면 의용군 자원서를 면제하겠다’고 하니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란 작대기 맨 위에 별로 크지 않은 스탈린의 초상화를 붙들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모르토프(당시 소련 외상)과 비신 스키(내상), 베리아(KGB 수장), 김일성의 순으로 초상화가 따르고 그 뒤로 학생들이 따랐다.


 학교에서 출발한 시가행진은 대법원 덕수궁 돌담길 대한문에서 남대문을 거쳐 을지로, 서울운동장을 지나 동대문에서 돌아 종로 화신, 광화문에서 다시 돌아 유서 깊은 수송국민학교(현 종로구청)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여기저기에서 동원된 수천의 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공산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 날뛰고 있었다. 


 더욱이 더 무서웠던 것은 이곳에서는 지원서도 뭐도 필요없이 차례로 강당으로 들어가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게 했다. 신체검사에 합격을 하게 되면 인민군복을 입고 대기 중인 트럭에 실려 당시의 최전선이었던 대전 남쪽 추풍령 근처로 간다고 했다. 나 역시 신체검사를 위해 강당에 들어가 팬티 바람으로 줄에 앉아있는데 들어갔던 사람이 다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왜 그냥 나오느냐’고 묻자 ‘폐병이 있어 불합격’이란다.


 그래서 검사장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밖으로 나오니 인민군 경비병이 왜 나오느냐고 묻는다. 폐병이 있다고 대답해주자 가라고 해서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비슷한 과정을 거쳐 도망 나오신 작은 형님이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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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rokim
김영노
58080
10293
2014-11-20
정원 텃밭 일기(6)

 

 

 
 

 어렴풋이 한달 가량의 단풍 계절도 자연의 질서에 따라 정리되는 것 같다. 주목과 편백 등 상록수만 변함 없이 푸르고 단풍나무들은 그 종류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의 떨어지고 있다. 
 우리 부부는 내년 채소 벌이를 위해 떨어진 가랑잎을 긁어 모아 부엽토(腐葉土) 탱크에 쓸어 넣느라 바쁘다.
 
 초 봄부터 늦가을까지 붉은색만 띄는 붉은 단풍(Nursery-Japanese Maple)과, 여름은 서슬이 푸르게 무성하던 녹색이 가을이면 갈색 가랑잎으로 떨어지는 단풍 등으로, 그  잎색으로 양분할 수 있다.

 우리 정원의 붉은 단풍은 초록색 정원수들 사이사이에 박혀 색의 조화를 이룬다. 어린 붉은 단풍이 묘목 가게에서 나를 따라와 아침마다 안부인사를 주고 받은지 20여년. 나는 아침에 딱 보면 저들의 안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되었다. 
 어느 가지가 힘없이 늘어지면 당장 나무 밑을 파서 썩기 시작하는 뿌리를 잘라내고 Manure(살균된 소, 양의 똥거름) 한 포대를 주위에 뿌려주곤 하여 치료 겸 영양식을 주어 왔다.
 이제는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내려 대지의 정기를 빨아 들여 자급자족하고 있다. 
 똑같은 붉은 단풍이지만 햇빛, 위치, 주위환경 등에 따라 그 잎 색과 크기가 눈에 띄게 다르다.

 붉은 단풍 나무들 중에 중간치의 높이는 2층 지붕을 넘어섰고, 옆 폭은 직경 6m 정도로 붉은 단풍치고는 거목으로 자랐다. 실로 우람하고 의젓하며 어쩌면 신령스러운 감이 든다. 
 나는 고작해야 연약하나마  문리적인 힘만 썼을 뿐 막상 저들에게 혼을 불어 넣고 에너지를 마련해준 것은 자연의 섭리(攝理)일 것이다.

 때로는 늦가을 보름달이 올라 오면 우리 부부는 이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무심히 스쳐가는 바람결에 가지 사이로 둥근달이 걸리면 낭만적인 풍류와 은근한 운치를 즐긴다. 주위의 잔디밭과 꽃밭에서는 풀벌레들이 어쩌자고 저리도 울어대는지, 한 철의 수명이 다해가니 넋이 나가는 모양이다.

 주위의 친구들은 거의 가고, 아무리 노력해도 추(醜)해지기 쉬운 나이. 스스로 격리해 주어야지 싶어 마치 이방인처럼 나는 내 식대로 저 나무들과 같이 없는 듯이 살아갈 뿐이다. 
 저마다 다른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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