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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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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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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9
'말레나' (Malena) (중)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X)


눈빛과 몸짓만으로 숨막히는 관능미를 뿜어내는 모니카 벨루치 주연
 

   

 


(지난 호에 이어)
그러던 중 말레나는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탄에 빠진다. 마을사람들은 위로는커녕 여자들은 계속 험담만 하고, 남자들의 그녀에 대한 음흉한 망상은 더욱 짙어지고, 이로 인해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는다. 말레나는 스스로를 변호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그냥 혼자인 채로 참고 당할 수밖에.
   이윽고 마을의 치과의사와 불륜관계이며 젊은 장교와도 내연의 관계란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돌자 견디지 못한 그녀가 자신을 변화하기 위해 재판을 의뢰한다. 치과의사와는 한번 인사 했을 뿐인데 치과의사 스스로가 소문을 냈음을, 젊은 장교와는 좋은 감정으로 두 번 만났을 뿐임을 사람들 앞에 증명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녀의 결백은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고, 이 마을에서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심사가 뒤틀린 주장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변호사비를 대신해 몸을 요구하는 변호사 첸토르비(길베르토 이도네아)에게 겁탈을 당한다. 이때 레나토가 말레나 집 창문을 통해 이 광경을 훔쳐보다 충격으로 나무에서 떨어져 깁스를 하게 된다. 
   이미 관계를 맺게 된 현실을 받아들여 그와 결혼하고자 하나 마을에서 이미 창녀처럼 취급되는 그녀였기에 이 역시 마마보이 변호사의 모친으로부터 단박에 거절된다.
   레나토는 점점 스스로 말레나의 보호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이 마을사람들의 행동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점을 깨닫지는 못한다. 말레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복수할 말이나 행동도 못하면서 그저 하느님께 보호해 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인격체가 아닌 '화제로서 존재'하는 그녀이기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말레나의 현실적 고통에 대해서는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년과 관객은 안타깝게 느끼는 것이다.
   얼마 후 전쟁의 여파가 시칠리아 섬에도 밀어닥쳐 마을이 폭격을 맞는다. 이로 인해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마저 잃고 그녀는 완전히 홀로 남게 된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녀에 대한 모욕과 망상은 멈추지 않는 현실. 그녀는 빵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긴 검은 머리를 자르고 짙은 화장을 하고 관능적인 옷을 입고서 그녀는 아름다움을 판다. 이때 말레나가 마을 광장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욕정에 사로잡힌 남정네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 라이터, 성냥불을 들이미는 장면이 유명하다. 이탈리아에서는 매춘부가 담뱃불을 받아 피우는 것은 남자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여긴다고 한다. 담배를 피우는 말레나의 표정이 착잡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미 자신을 지탱해 오던 자존심을 버린 그녀이기에 오로지 돈을 보고 움직이는 그녀는 나치도 마다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처절함을 알아줄 리 없는 주민들은 이제 정숙한 젊은 아내였을 때보다 만족하는 모습들이었지만 아예 노골적으로 그녀를 창녀라 비난한다. 
   그 와중에 나치 장교를 맞아들이는 말레나를 훔쳐 본 소년 레나토는 충격을 받고 시름시름 앓게 된다. 이에 무지한 그의 모친은 무당을 불러 주술로 치료하려 한다. 그때까지 꼴통자식을 매일 몰아붙이던 그의 부친은 동네 쪽팔린다며 매우 난색을 표하지만 아들의 마음의 병을 알아차리고 파격적인 방법으로 레나토를 치료하는데… 글쎄 자식을 사창가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註: 이는 로마 시대부터 내려온 시칠리아의 전통이라고 한다.] 
   한 여자를 선택해야 된다는 말에 가장 말레나를 닮은 여성을 고른 레나토는, 상상 속에서 그녀와 정사를 벌이고 나서야 거짓말같이 낫는다. 아버지의 판단이 옳았다!
   드디어 독일이 패망하여 전쟁이 끝나고 미군 병사들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환호하기 위해 광장에 모여든 마을 여자들은 애국심(?)을 내세운 배타적 집단주의의 광기에 의해 말레나를 끌어내 공개적으로 구타하고 강제적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을 찢어버리는 등 잔혹한 폭행을 가한다. [註: 영화 도입부에서 아이들이 볼록렌즈로 '아무 죄도 없는' 개미 한 마리를 태워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 뒷장면에 대한 은유였지 싶다. 또 이 장면은 데이비드 린 감독의 '라이언의 딸(1970)'에서 린치를 당하는 로지(새라 마일즈)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말레나는 아무에게도 동정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의 여인처럼 처절한 분노와 공포 속에 무언의 비명을 지르지만, 남자들은 처참하게 얻어맞고 피흘리는 말레나를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만 볼 뿐이다. 어린 레나토도 마찬가지다. 
   말레나는 자신에게 상처와 치욕만을 안겨준 팔레르모를 몰래 도망쳐 메시나로 떠난다. 기차역에서 이를 지켜보는 레나토! 그리고 해변가 절벽 위에서 애지중지하던 레코드판을 바다로 날려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전사했다던 말레나의 남편 니노 스코르디아(가에타노 아로니카)가 한쪽 팔을 잃은 채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다. 
   집으로 갔으나 주인 없는 집은 피난민 수용소로 변해버렸고, 그녀를 찾기 위해 수소문했으나 아무도 그의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 마을사람들. 그러다 그의 아내가 창녀라는 말을 내뱉는 공산당원에게 "당신 같은 사람들을 위해 싸운 내가 한심하다!"며 대들자 오히려 걷어차이는 니노….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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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3
'말레나' (Malena) (상)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X)


눈빛과 몸짓만으로 숨막히는 관능미를 뿜어내는 모니카 벨루치 주연
 

 

   2015년 11월6일 개봉했던 007시리즈 24탄 '스펙터(Spectre)'는 역대 본드 걸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당시 50세의 이탈리아 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에 대적하는 루치아 샤라 역으로 출연해 화제가 되었다. [註: 그 전까지 데보라 커(Deborah Kerr, 1921~2007)가 47세 때 '카지노 로열'에서 본드걸로 출연한 기록을 깨뜨렸다.] 
   그녀가 15년 전에 주연했던 '말레나(2000)'라는 작품을 한 번 보면 그게 가능한 얘기인지 가늠이 될 것 같다. 
   13살 때부터 패션 모델을 시작하여 유럽 패션 중심지인 밀라노에서 활동하다 파리로 건너가 1996년 '라빠르망(L'Appartement)'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4년 후 이탈리아 영화계로 돌아와 찍은 작품이 '말레나'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관능의 화신'으로 극찬을 받는 이탈리아 배우로 등극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1992)'에서 단역이었지만 드라큘라 백작의 세 신부 중 하나로 나와 속이 비치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풍만한 가슴과 뇌쇄적인 눈빛으로 공포스런 성적 팬터지를 보여줬던 모니카 벨루치는,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역으로도 우리와 안면을 튼 배우이다.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2000년 미라맥스사 배급.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 출연 모니카 벨루치, 쥬세페 술파로. 음악감독 엔니오 모리코네. 러닝타임 109분(미국은 커트된 92분).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1988)'에서 순진무구한 소년의 맑은 눈으로 상처 입은 이탈리아 현대사를 바라봤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다시 햇빛 찬란한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로 돌아와 역시 13세 소년의 추억 어린 시선을 통해 전쟁과 파시즘의 폭력을 반추하며,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가슴 시린 노스탤지어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아름다운 영상에 담은 영화 '말레나'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작품성보다도 모니카 벨루치의 전라(全裸) 노출장면이 많아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17분이나 커트된 것도 사춘기 소년의 상상 속에서 모니카 벨루치가 대부분 전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야하다는 느낌에 앞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음악과 따뜻한 영상, '시네마 천국'에서 느꼈던 사춘기 소년의 풋풋한 감정과 애교(?) 등이 있기 때문이리라.

 

 

   영화의 배경은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이탈리아 파시즘이 지배하고 있는 지중해의 작은 섬 시칠리아. 거기서 13살짜리 소년 레나토(쥬세페 술파로)는 어느 날, 하루에 세 가지의 주요 사건을 경험한다. 첫째는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가한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중고품이지만 자기 자전거를 장만했고, 세 번째는 난생 처음으로 범접할 수 없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 말레나(모니카 벨루치)를 보고 짧은 바지 속이 들썩거렸다는 것이다. 
   영화는 첫눈에 그녀를 흠모하게 된 소년 레나토의 끊임없는 그녀를 향한 눈길을 통해 1인칭 내러티브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말레나는 남편 니노 스코르디아를 아프리카 전장에 보내고 홀로 남아 늙은 선생이며 귀까지 먹은 아버지(피에트로 노타리안니)를 모시고 산다. 
   여성, 그것도 아름다운 여성이 혼자 살면 필연적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마련이다. 말레나는 시칠리아 최고의 얼짱에 몸짱이었던 까닭에 그 '존재'만으로 소년 레나토를 포함하여 나이를 초월한 모든 마을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과 질시를 한 몸에 받는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말레나가 거리를 거닐 때마다 모든 동작을 멈춘 채 그녀만 바라보는 사람들.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남자들은 돌아서서는 그녀를 희롱하는 언사를 늘어놓기 바쁘고, 여자들은 남자들을 빼앗긴 데 대한 질투와 분노로 그녀를 험담하고 모욕한다. 
   이렇게 말레나에 의해 지배된 주민들은 그녀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과 망상으로써 말레나의 인생을 유린하고 억압한다.
   그러나 그런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레나는 밤마다 남편만을 그리워한다. 레나토는 여느 날처럼 밤중에 나무 위로 올라가 창을 통해 말레나를 엿보던 중, 그녀가 전쟁에 참가 중인 남편 사진 액자를 끌어안고 음악에 맞춰 혼자서 춤추는 광경을 목격한다. 

 

 

   소년은 그때 들었던 음악이 맘에 들었는지, 다음날 레코드 가게에 가서 힘들게 음반을 구입하여 밤엔 그 음악을 들으며 마스터베이션을 즐긴다. 어쩌면 남성들만의 보편적인 심리 내지 정서일지 모르지만 영화의 본질이 '훔쳐보기(peeping)' 내지 '관음(voyeur)'이 아니겠는가….
   그러다 어느 날, 레나토는 빨래터에서 훔친 말레나의 속곳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레코드판을 틀어놓고 춘화(春畵)를 보며 그 만의 팬터지 세계로 빠져들어 늦잠을 자다가 아버지(루치아노 페데리코)와 어머니(마틸데 피아나)에게 들켜 흠씬 두들겨 맞고 혼쭐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나토는 사춘기의 여느 소년과 마찬가지로 끓어오르는 음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애교짓을 일삼는데, 부모는 그의 행위를 막을 모든 수단을 동원하지만 헛수고다. 그러나 레나토는 열심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건강한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데….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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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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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5
'베를린의 여인 (A Woman in Berlin)' (5, 끝)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X)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
 

 

(지난 호에 이어)

   자전거로 집으로 돌아온 여인. 안드레이를 부르며 들어오지만 대신 기다리고 있던 안드로포프가 '그는 전근됐다'는 말을 전하고 떠난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약혼자 게르트가 돌아왔다. 초라하고 꾀죄죄한 모습이다.
   "새들은 침묵하고 종들은 고요하다. 어떻게 된 거야?"라며 "작업실은 없앴어?"라고 말을 끄집어내는 게르트. "혼자 살 수 없었어." "알아. 우크라이나인 같으니…" 
   감자볶음 요리를 하던 여인이 잠깐 손을 놓고 버리려던 일기장을 게르트에게 건넨다. 이를 읽던 약혼자 게르트는 "수치심도 없어? 그걸 몰라? 당신 보니 역겨워!"하고 역정을 낸다. 
   여인은 자전거를 타고 안드레이를 찾아 길거리로 나선다. 마침 병사들이 집결한 곳에 다다른 여인. 그의 전근식이 거행되고 있다.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건물을 나서는 안드레이와 마주치는 여인. 이 모습을 그의 충직한 몽골병이 조심스럽게 지켜본다. 
   여인이 고맙다고 말하자 "뭐가?"라고 되묻는 안드레이. "당신을 알게 된 거요. 잘 지내세요." 그러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몸으로 가려 그의 손을 꼭 잡는 여인. "우리 어떻게 살죠?" 이때 안드로포프의 미안한 듯한 모습과 몽골병의 슬픈 표정이 교차된다.

 

 

   드디어 지프차를 타고 떠나는 안드레이. 일제히 경례를 한다. 모두들 애틋한 표정이다. 마샤의 안타까운 표정이 잡힌다. 안드레이 소령은 한 여인의 보호막이 되어 잘못을 무리하게 덮어주려다 안드로포프의 상부 보고로 시베리아로 '전근'을 하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게르트가 모든 가구를 닥치는대로 박살내고 있다. 
   내레이션: 게르트, 내 사랑 게르트. 우리 이제 어떡하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당신이 내게 처음 말한 때로 돌아가자. 당신은 말했다. '30분만 줘. 절대 날 떠나지마!'
   제 풀에 지쳐 약혼녀를 빤히 쳐다보는 게르트에게 "그래서 뭐?"라고 두 번이나 묻지만 대답이 없다.
   A의 마지막 내레이션: 이틀 후 그는 사라졌다. 돌아올 지는 모르겠다. 더 이상 상심하지 않는 자신이 놀라웠다. 할 일이 많다. 부싯돌을 찾아야 한다. 작업실의 구덩이를 청소해야 한다. 어제는 라일락을 발견했다. 게르트는 날 생각할까? 누가 알겠어? 그의 마음이 움직이면 다시 볼 수 있겠지. 언젠가는….

 

 

 서두에서 이미 얘기한대로 엔딩 크레디트에 수기집 '익명: 베를린의 몰락'과 작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지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마르타 힐러스의 수기집은 1945년 4월 20일부터 6월 22일까지 소련군이 진주한 동베를린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겪은 독일인들, 특히 독일 여성들의 아픔과 고통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일기는 4월 20일부터 4월 26일까지는 베를린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방공호 피신생활의 배고픔과 힘겨움을 기록했고, 4월 27일부터 5월 9일까지는 동베를린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독일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주로 이 기간을 다루고 있다.

   5월 10일부터 6월 22일까지는 복구를 위한 노역에 동원되어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는 패전국 국민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으며, 6월 22일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약혼자 게르트가 돌아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소비에트 군인이 베를린을 점령한 4개월 동안 강간 당한 여성은 9만5천~13만 명으로 추산한다. 소비에트 종군기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8세에서 80세의 독일 여성들을 닥치는대로 강간했다고 한다. 
   전쟁에 있어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수치스러운 성적 유린은 상대편 남자들에게조차 큰 굴욕감과 좌절감을 주기 위한 조치이다. 또한 인종적 혼혈을 유도하여 상대 인종을 말살하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수기집의 작가 마르타 힐러스는 당시 34살인 인텔리 여성이었으나, 패전에는 신분 고하가 없다. 패전국에는 더 이상 존귀한 귀부인은 없으며 더 이상 품위 있는 신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을 통해 모두는 만신창이의 오물덩어리가 된다. 따라서 전쟁은 반드시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덕은 '도덕적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패전은 한 나라의 모든 보수적 가치를 박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악으로만 그려질 수 있는 소련군에 대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부여하기도 하고, 소련군 장교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컨대 A가 "소령은 날 강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뜻으로 그에게 맡기고 그의 처분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과 "러시아인은 독일인과는 달리 배운 여자를 알아줬다"는 표현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안드레이 소령이 A에게 "포옹하고 싶소. 남은 여생을 위해!"라는 말과, 나아가 A의 안드레이에 대한 솔직한 묘사인 "빌어먹을 러시안 이상주의자!… 하지만 그가 좋다. 그보다 많이 그가 좋다. 아주 많이" 등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벌이고 전쟁 피해를 당하는 모두는 '인간'이다. 전쟁은 인간과 세계를 바꾸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수기집이 출간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작가는 자기 연민은 결여돼 있고. 건조하고 간결한 어조로 너무 성찰적이고 솔직하며 세속적"이라고 평했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그녀는 관계를 통해 (음식물, 안전보호 등) 이득을 보았다. 또 소령도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환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익명의) 여자와 남자(안드레이)가 직면한 현실에 적응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평했다.
   이 영화는 독일과 폴란드에서 촬영됐다. 특히 주인공 '익명의 여인' 역의 니나 호스(Nina Hoss•49)는 솔직히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理智的)인 모습으로, 지옥같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복잡하게 변화하는 환경이지만 마음은 친밀하면서도 허리부분의 아픔과 슬픔을 삼키는 역을 훌륭하게 소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일 출신의 막스 페르베르뵈크(Max Faerberboeck•74) 감독은 1999년 첫 장편영화 '아이메와 야구아(Aimee & Jaguar)'로 두 주연 여배우 율리아네 쾰러와 마리아 슈라더에게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안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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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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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1
'베를린의 여인 (A Woman in Berlin)' (4)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X)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

 

 

   어두운 밤 창밖 거리에는 스탈린의 초상화가 내걸린다. 안드레이가 "들어봐요. 그들은 남자처럼 피우고 마시죠. 러시아 군대엔 백만 여군이 있소. 사방에서 모였지. 우리는 군복도 없고 군화는 너무 크고 셔츠와 재킷도… 재난이었지. '루바'란 소녀가 내게 왔소. 그녀가 말했소. '소령님, 전 오늘 죽을거라 믿어요. 새옷을 원해요.' …그래서 말했지. '그래! 새 옷을 갖게 됐소. 여기 눈처럼 하얀 리본과 함께 말이요. 피로 가득 뒤덮였소.' 모든 여군들은 두려워하오. 죽을 때 추해 보이는 것을."
   그러면서 안드레이가 A에게 묻는다. "당신 파시스트요?" 허나 대답이 없는 여인.

 

 

   장면이 바뀐다. 페트카(알렉산드르 사모이렌코)가 대대장과 여인이 있는 방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몽골병에게 또 찾아온다. "1,678일(4년6개월)을 전쟁터에 있었다"며 문쪽을 바라보며 "그녀는 창녀야 그렇잖아? 전부 다 사창가야!"라며 못 참겠다는 듯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잠자고 있는 독일패잔병의 애인인 피난민 여자를 덮치는 페트카. 
   비명소리에 놀라 숨어있던 독일패잔병이 권총을 쏘지만 헛탕이라 둘 사이에 격투가 벌어지고 이윽고 패잔병은 층계 난간으로 떨어져 죽는다. 
   총소리에 모두 일어나고 안드레이 소령이 취조를 한다. 누구의 집이었냐고 묻자 A가 "자기집"이라고 대답한다. 다락방에서 총과 수류탄이 발견된다. 이는 붉은 군대의 군법 위반이라고 말하자 죽은 패잔병의 애인이 "총통 만세! 모두 죽어!"라고 외치면서 끌려나간다.

 

 

   안드레이가 여자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자 안드로포프(사무엘 무지키안)가 그에게 "그 여자는 나치입니다. 먼저 조사를 해야 합니다. 무장병사를 숨겼으므로 처형시킬 이유입니다"라고 말한다. 다시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자 안드로포프는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말한다.
   프리드리히 호흐가 방으로 들어오는 A를 "그런 위험한 짓을 해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질책한다. 모두 위선자들이다.
   한편 러시아군은 "나치 괴물을 그의 동굴에서 잡았다. 독일 수도의 수비대는 항복했다!"고 외치며 안드레이 소령을 일제히 비난한다.
   한편 아나톨이 A의 집으로 찾아온다. 자기는 카이저담(황제거리) 등을 거치며 사방이 붉은 깃발임을 확인했다며 그동안 받았던 편지들을 여인 앞에 쏟아놓으며 모든 여자들이 자기를 사랑했다고 횡설수설한다. 이때 안드레이가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방으로 들어와 아나톨과 그녀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 자전거? 그 놈의 거시기? 어느 게 더 좋아?"라며 "불알 날리기 전에 썩 꺼지라"고 명령하고는 축하연이 열리니 모두 나오라고 명령하는 안드레이.

 

 

   겁에 질린 여자들. 안드레이는 A에게 말한다. "러시아인들, 짐승들! 아니면 동물들! 당신 말처럼. 우리 중 누구라도 잠시도 주저않고 독일인을 쏠 수 있소. 당신들 피가 우리 군복에 묻는 게 좋소. 그들 중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소. 대부분은 독일을 알지도 못했었소"라며 밖으로 나가자고 말하는 안드레이.
   노소를 불문하고 여자들과 어울려 강제로 술을 먹이고 춤을 추는 러시아군인들. 아나톨이 베르벨 말트하우스(외르디스 트리에벨)에게 딴지를 건다. 한편 아래층에서 뜨게질을 하고 있는 부인 일제에게 프리드리히는 위층에 가서 같이 놀아라고 말한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합류하는데….
 

 

 한편 안드레이는 A에게 "포옹하고 싶소. 남은 여생을 위해!"라고 말한다. "전 여기, 당신은 모스크바! 누구도 그런 긴 팔은 없어요."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에게 "해보겠소."라고 화답하는 안드레이.
   내레이션: 소령은 안드레이로 불러달라고 했다. 난 말했다. '전쟁은 끝났어요.' 오랫동안 그는 나를 응시하다 말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전쟁을 위해 울어대요.' 아무것도 없다고, 개인이든 국가든 순환을 멈출 수 없다고, 죽음 외에는!
   모두들 오랜만에 춤을 추면서 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한 병사가 음악을 바꾼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난 너와 사랑에 빠졌어"라는 곡에 맞춰 안드레이는 여인과 같이 춤을 춘다. 
   프리드리히가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이라는 책을 얼른 난롯불 속에 집어 던진다. 
   "소련 연방은 개발을 시작했소. 미래가 말해 줄 거요." 안드레이가 말한다. "조국을 사랑하시는군요. 꼭 자신을 사랑하듯. 어머니가 한번은 말했죠. 내가 피아노 치는 남자와 결혼했으면 하고요." "오늘이 어땠을까 모두 궁금해 했소. 난 아니오. 결코. 이런 경험을 원치 않았소." "왜죠?…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제가 말씀드리죠, 안드레이." 

 

 

   "전쟁은 단어를 변화시키죠. 사랑 본래의 의미는 더이상 없어요. 그리고 아직도 제가 원하는 건 남편이 남기고 떠난 여자를 찾아주는 거예요." 갑자기 자리를 뜨는 안드레이를 포옹하고 뜨거운 키쓰를 하는 여인!
   내레이션: 우리 여자들은 성공해야 했다. 하지만 당분간이다. 지금 잠시만 괜찮을 뿐이다.
   침대에 누워있는 안드레이에게 차를 끓여주기 위해 일제의 방으로 온 여인. 일제 호흐의 딸 렌첸(스텔라 쿤카트)만 퍼즐게임을 하고 있다. 반야는 일하러 가고 없다는데 일제는 음독자살한 남편 프리드리히를 부둥켜 안고 통곡하고 있지 않은가. 
   내레이션: 게르트, 기억 나? 화요일이었다. 우린 송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비는 구름처럼 에워쌌고 당신은 각각의 이름을 알았다. 푸른부전나비, 멧노랑나비, 불새나비, 호랑나비 그리고 훨씬 더 많이. 하나는 길에서 빛났다. 노랑 파랑으로 장식했지. 당신은 '신부나비'라 했다.
   이때 장면은 여인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계속되는 내레이션: 난 너무 많은 걸 겪었다. 지나칠 정도로, 소령은 모든 걸 잃었다. 빌어먹을 러시안 이상주의자!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보고싶겠지. 소련 신봉자! 하지만 그가 좋다. 그보다 많이 그가 좋다. 아주 많이."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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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121156
9208
2024-11-14
'베를린의 여인 (A Woman in Berlin)' (3)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X)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

 

 

 

(지난 호에 이어)

   미망인이 이 집이 마치 들락날락 하는 기차역 같다고 투덜거린다. 이때 무솔리니가 교수형을 당한 소식이 들린다. [註: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는 1945년 4월 28일 게릴라에게 사로잡혀 다른 측근들 그리고 그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총살당해 죽었다.]

   A 내레이션: 안드레이 소령은 기뻐서 떠났고 그때 아나톨 대위가 나타났다. 우두머리 수컷 둘을 중간에서 만날 때는 죽을 것같이 두려웠다. 소령은 날 강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뜻으로 그에게 맡기고 그의 처분을 따랐을 뿐… 창녀? 아마도 인생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이다. 사람들은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무슨 의미냐구? 나쁘다는 뜻이다." [註: 아마도 매춘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대가 없지만 평화로운 상황에서는 절대 이런 상황에 있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고, 합의된 성 관계는 매춘과 비슷하지만, 전쟁 상황에서는 도덕적으로 용인된다는 그런 뜻이 아닐까…]

   어느 날 물을 길러 길거리를 걸어가는 A를 부르는 여인이 있다. 바로 친구 엘케(율리아네 쾰러)다. A 내레이션: 엘케의 방문으로 우리는 환호했다. 소령의 당번병이 보초를 서는 동안 평화롭게 그의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좋은 세계다. 여자들이 오랜만에 남편 얘기, 매독에 대한 얘기, 그리고 성생활에 대한 얘기 등을 나누며 가장 중요한 것이 뱃속이라며 파안대소를 하고 떠든다.

   장면은 안드레이 소령이 새 임무에 관한 서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A가 어디로 갈 거냐며 계속 보호해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어디든 나를 필요로 한다고 대답하는 안드레이.

 

 

   내레이션: 특별한 저녁을 같이 보냈다. 즐거운 대화… 그는 감탄했다고 했다. 다른 아무것도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독일인과는 달리 러시아인은 배운 여자를 알아줬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미망인이 A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찾아온다. 러시아군이 통역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내 마을에서 독일군이 모든 아이를 죽였다. 간단히 칼로 찔렀다. 아이 다리를 잡고 벽에 던져서 머리를 박살냈다." 여인이 묻는다. "들었나요? 아니면 봤나요?" 직접 봤다고 말하는 병사. 그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있어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이에 서둘러 도망치는 여인. 뒤에 대고 '속옷을 벗어놓고 왔냐?'며 희롱하는 러시아군.

   거리로 뛰쳐나온 A는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광경을 목격한다. 노파가 굶주림에 허덕이며 음식 쓰레기통을 뒤지고, 또 한 여자는 러시아군에게 끌려가면서 가족이 있다고 말해달라고 애걸하고…

   가다가 안드레이를 만나지만 부하가 부르는 바람에 "구 독일은 끝났다"는 말을 남기고 가자, 홀로 남은 A에게 옆에 있던 마샤가 "그에게 손 벌리지마!"라고 말한다. A는 "그가 내게 왔지, 내가 가지 않았어"라고 말하자 꺼지라고 욕을 하는 마샤. "왜?"라고 묻자 "아내 자격이 안 돼."라고 대꾸하는 마샤. 질투심에 가득 차 금방 죽일 듯한 태도다.

 

 

   이때 방송이 나온다. "베를린 시민 여러분. 1945년 4월 30일 총통(아돌프 히틀러)이 자살했습니다. 그에게 맹세한 여러분의 충성심은 버림받았습니다. 여러분! 총통의 마지막 명령은 베를린 방어이지만 전체 상황이 무기와 탄약의 부족으로 더 이상의 싸움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합니다. 싸우는 매 시간마다 베를린 시민과 부상자의 고통이 연장될 뿐입니다. 이제부터 '베를린 전투'로 인한 죽음이나 희생은 없습니다. 소련군대의 최고 명령에 합의하여 모든 전투 작전을 즉각 중단합니다. 저는 '헬무트 바이틀링' 포병장군이며 베를린 방어사령관입니다."

   [: 베를린 방어사령관 헬무트 바이틀링(Helmuth Weidling, 1891~1955) 장군은 430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51 요제프 괴벨스의 자살 사실을 52 소련군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Vasily Ivanovich Chuikov, 1900~1982) 중장에게 알리고 협상을 했다. 추이코프 장군은 '무조건 항복' 문서로 작성하게 했으며 내용이 당일 아침에 그대로 발표되었다.

   바이틀링 장군은 소비에트 연방 대법원의 군법 판결에 의해 25 형을 선고 받고 블라디미르 KGB감옥에서 복역 1955 1117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한편 추이코프 장군은 1940 12월에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1887~1975) 국민당 총수의 항일전쟁을 돕기 위한 군사자문으로 파견되었던 인물이다. 추이코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등에서 대승을 거두어 1944, 1945 번에 걸쳐 소련 최고의 영웅 타이틀을 수상하였으며, 1955 소련군 원수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영화가 올리버 히르슈비겔 감독의 '다운폴(Downfall, 2004)'이다. 영화에 율리아네 쾰러(Juliane Kohler·59) 히틀러의 정부인 에바 브라운 역으로 출연했다.]

 

 

   이때 장면은 여인들의 절망에 가득 찬 모습을 천천히 살피고 지나간다. 반대로 "8군단 붉은 군대 병사 장교 동지들! 오늘 아침 베를린 수비대가 항복했소. 베를린은 패했소." 이에 거리는 온통 승리를 축하하는 환호 속에 러시아 국가를 부르며 춤추는 러시아군 일색이다. 안드레이, 몽골병, 마샤 등도 마찬가지다. 마샤는 승리를 축하하는 거리에서 냅다 안드레이에게 달려가 진한 키스를 퍼붓는다.

   장면은 생선 넙치 두 마리를 갖고 여자들 아파트로 간 러시아병들이 "한 마리는 히틀러, 다른 한 마리는 괴벨스"라고 말한다. 이 파티 자리에서 안드레이가 피아노를 연주한다.

   내레이션: 항복이다. 오랜 시간 끝에 전쟁은 끝났다. 우리 여자들이 얼마나 기다렸나… 하지만 지금 아주 쓰라린 패배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처참함을 얘기했다. 어떤 섬뜩하고 사악하고 위협적인 기운이 감도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기 싫다.

   안드레이가 일기를 쓰고 있는 A에게 와서 다 끝났냐고 묻는다. 여인은 "불행이 키운 상상력이 두렵다"고 대답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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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120973
9208
2024-11-07
'베를린의 여인 (A Woman in Berlin)' (2)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X)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

 

 

   (지난 호에 이어)

드디어 지휘관인 안드레이 리브킨 소령(유제니 시디킨)을 찾아간 A는 "어제 당신 군인들이 아파트를 급습해 강간을 당했다"고 하자 "들은 바 없다"고 말하는 안드레이. "도우는 게 당신의 의무"라고 말하는 여인. "누구를 도우는 거냐?"고 묻는 소령에게 "그 여인은 바로 자기!"라고 말하는 A.[註: 치오치아라의 '마로크키나테(Marocchinate)' 사건과 같이 지휘관으로서 성폭력을 묵인했지 싶다. 여인은 더 이상의 강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방패막이가 되어 줄 것을 제안한 것이다.]

   어느 날 아나톨 대위(로만 그리브코프)에게 아파트 난간에 있는 폭발물을 치워줄 수 있느냐고 묻는 여인. 그는 독일어로 "당신과 나, 오늘 밤!"이라고 말하자 이에 응하는 여인 ― "당신과 나. 그것 간단하지. 그 순간 맹세했다. 그들 외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뭐든 상관없다."

   어느 날 안드레이 소령이 A가 머물고 있는 일제 호흐(울리케 크룸비겔), 프리드리히 호흐(롤프 카니에스) 부부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한다. 수소문해서 찾았단다. 사령관은 없고 안드레이 소령이 대대장을 맡고 있단다.

   대대장의 당번병으로 몽골인이라고 조롱받는 병사(빅토르 잘사노프, 부랴티아 Buryatia 공화국 출신 배우. 부랴티아는 남쪽으로 몽골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 동쪽에 위치한 러시아 연방국)는 여군인 마샤(알렉산드라 쿠릴코바)까지 업수이 여긴다. 마샤는 안드레이 소령을 자기가 책임진다고 말한다. 아마 짝사랑을 하는 모양이다.

   느닷없이 아파트에 있는 안드레이를 찾아온 마샤는 A를 보고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질투심이 났는지 그에게 주려고 갖고 온 비누를 목욕탕에 냅다 내던지고 "베를린은 우리 꺼야!"라고 내뱉곤 뛰쳐 나간다.

   욕실을 나온 A가 침대에 가서 옷을 벗지만 안드레이는 그냥 밖으로 나간다.

 

 

내레이션: "강간은 계속됐다. 그들은 모든 곳 모든 집에 있었다. 우리는 러시아다. 그들에게 봉사하는… 그리고 여성들은 침묵해야 한다. 아니면 우리를 원하는 남자는 다신 없을 것이다. 불쌍한 독일…"

   러시아군이 고함을 지른다. "베를린은 거대한 창녀촌이야! 이것 봐! 전부 갖고 있어! 보석, 돈, 집! 그런데 전쟁을 일으켜? 나쁜놈들!" [註: 여기서 '창녀촌'이라는 말 속에는 '전리품'으로서 '강간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창녀를 강간하면 무죄'라는 남성우월적 의식이 깔려있다.]

   내레이션: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가끔 무엇이든 버텨야 했다. 몸은 굴복하지만 마음은 굴복하지 않는다. 난 잘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러시안은 좋아지고 있다.

   밤에 아나톨이 아파트로 찾아온다. 아나톨은 집시출신이다. 자기 좋을 대로 왔다가 가버린다. 분명 보호자는 아니다. 잘못된 선택이지만 그를 웃음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A.

   한편 다락방에 숨어있는 독일패잔병(제바스티안 우르젠도브스키)이 묻는다. "총통이 우리를 포기했다고 생각해?" 피난민 애인(안네 카니스)이 "아니 절대로!"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독일병은 권총을 차고 음식을 구해오겠다며 어디론가 나서는데….

 

 

   이즈음 한 미망인(아이알엠 헤르만)이 강간 당한 얘기를 한다. 우크라이나 여자 것은 이만큼 큰데 내 것은 쬐끄만 하다고 칭찬했다고 말해 일행이 박장대소를 한다. 하지만 입냄새가 나더라고 말하는데 문노크 소리가 들린다. 안드레이 소령이 찾아온 것이다. 몽골인이 베이컨, 소시지, 설탕 등 음식물을 잔뜩 갖고 왔다.

   내레이션: 다음날 아침, 근처의 전투는 격렬했고 소령은 부하들과 함께 왔다. 미망인은 고기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꿀벌처럼 활기찼다. 우리의 국민돌격대는 투항 준비를 했다. 정말 기쁘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다.

   호흐 부부집에서 안드레이를 비롯한 러시아군들이 전투에서 독일군을 무찌른 이야기를 하며 병사, 장교 모두들 겁먹고 도망쳤다고 하자 그 중 한 젊은 장교가 이건 주인에게 모욕을 주는 무례한 언사라고 나무란다.

   다른 한 명이 코카서스 산맥에 대해 얘기하며 "태양, 산, 푸른 하늘, 아름다운 춤과 여성! 포도같이 달콤하죠!"라고 자랑하자 A는 "푸쉬킨이 그곳으로 망명했죠."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 러시아군은 푸쉬킨 스타일이라며 노래를 부르고 자기는 아내와 아이들을 원한단다.

 

 

   안드레이가 여인에게 파시즘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파쇼에서 유래, 고대 로마의 막대기 묶음 결속을 뜻한다"고 대답하자 "우리 안주인은 현명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군인들. 미망인이 독일인과 러시아인의 우정을 위해 잔을 들고 건배를 제의하는데….

   이때 바깥에서 무장한 독일군이 음식물을 훔쳐갔다며 무고한 시민을 폭행하는 부하를 안드레이가 흠씬 두들겨팬다. 몽골인 당번병이 달려가 상관을 말리지만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A가 일행에게 살짝 말한다. 저들이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그때 안드레이가 갑자기 여인에게 키스를 하며 으스러지게 포옹하는데…

   A가 독일패잔병이 숨어있는 다락에 올라가 얼른 자리를 피하라고 말하자 독일패잔병은 시베리아로 가긴 싫다고 말하는데…. 안드레이 소령이 누구든 숨겨준 자는 총살형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몽골병이 몽골 특유의 창법으로 노래한다. [註: '흐미 또는 회메이(Khoomei)', 일명 '쓰로트 싱잉(throat-singing)'이라는 창법이다. 숨을 길게 내쉬면서 성대를 울려 입술 모양을 통해 멜로디를 만들어 내는 몽골인의 독특한 기교의 전통 창법으로 마치 'Jew's Harp' 연주처럼 들린다.]

   내레이션: 며칠 동안 소령이 왔다 갔다. 모두의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다. 양초, 담배 그리고 많은 선물을 주었다. 어떤 미망인은 얼른 찬장에 숨겨두었다.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많은 러시아 남자들은 산타 클로스를 좋아한다. 왜 우리 여자들은 막을까? 소령은 유창하게 러시아어로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보다 많이 말해주었다. 그의 은행 계좌, 부모, 형제의 이름도. 전쟁은 격렬했다. 우리 남자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되는 동안에도 많은 여성들은 보호자를 찾았으나 남겨진 여인들을 위해 침묵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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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120649
9208
2024-10-25
‘베를린의 여인 (A Woman in Berlin)’ (1)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X)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

 



   ‘베를린의 여인(A Woman in Berlin)’은 2003년에 독일에서 익명으로 출간된 수기집을 바탕으로 2008년 독일의 막스 페르베르뵈크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원제는 “익명: 베를린의 한 여인(Anonyma - Eine Frau in Berlin)”인데, 영국에서는 “익명: 베를린의 함락(The Downfall of Berlin - Anonyma)”으로 소개되었고 2009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첫 상영되었다. 
   콘스탄틴 영화사 배급. 출연 니나 호스, 유제니 시디킨. 율리아네 쾰러. 음악감독은 폴란드 출신 쯔비크녜프 프라이스네르(Zbigniew Preisner•69). 러닝타임 126분.
   얘기 시작 전에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도 간략히 나오지만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 앞에서 설명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영화를 안 보신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양해를 바란다. 
   독일의 저널리스트였던 익명의 주인공은 ‘베를린 전투(The Battle of Berlin)’ 중간부터 연합군이 승리할 때까지인 1945년 4월 20일 ~ 6월 22일까지 2개월여 동안 노트에 쓴 일기를 바탕으로 1954년에 미국에서 영어로 첫 출간을 하고 5년 후인 1959년에 독일에서도 출간했다. 

 

 

   그러나 익명의 수기집은 독일 여성들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출판 금지 당하여 익명의 저자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발간하지 말도록 조치했다. 여성이기 때문에 수치심을 자극하는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녀가 2001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90세로 사망한 후 2003년에 독일에서, 2005년에 미국에서 또 익명으로 새로이 출판되었는데, 세상이 달라져서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7개 국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기자들의 끈질기고 집요한 추적 끝에 저자는 나치시대에 독일 신문, 잡지 기자였던 마르타 힐러스(Marta Hillers, 1911~2001)로 밝혀졌다.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주인공인 ‘익명의 여성’이 일기를 읽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1945년 4월 26일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는 베를린을 포위했고 독일 의회당까지 거리 곳곳에 있었다. 구름에 가린 태양을 당신이 봤을 그 날, 버려진 정원에서는 라일락 꽃향기가 퍼졌으리라. 어디부터 시작할까? 적절한 단어는 뭘까? 난 기자이고 12개국을 여행했다. 모스크바, 파리와 런던에서 살았었고, 파리와 런던이 즐거웠다. 그러나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곳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註: 그녀는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수학했다.]

 


   폐허가 된 거리를 보여주던 화면이 타이프라이터를 치고있는 주인공으로 디졸브된다. 그리고 ‘익명의 여인’의 내레이션이 계속된다.
   “내 이름은 중요치 않다. 난 조국의 운명을 믿었던 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 의심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의 약혼자인 게르트(아우구스트 딜)가 말한다. “바르샤바, 브뤼셀, 파리… 끝없는 승리야. 러시아는 지도력이 없어. 재정비될 때까지 모스크바에 있을 거야. 전쟁이잖아.… 방해해서 미안해.”
   내레이션은 계속된다. “게르트는 떠났고 구두소리는 집안을 울렸다. 옳다는 걸 확신했고 모두 같은 공기를 숨쉬며 우리는 취해갔다.”
   장면은 파티장. 독일 기자인 ‘익명의 여인’(니나 호스)이 모두에게 묵념을 제안한다. [註: 이후 편의상 A라고 칭하기로 한다.]

 


   그리고 장면은 퇴각하는 독일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포격 속에 도망치는 사람들이 무수히 죽는다. 그 현장을 지켜보던 A가 다른 사람들을 선도하여 지하대피소로 피신한다. 약사, 음악가 등 중산층의 애달픈 삶을 모두 기록하여 약혼자 게르트에게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는 A!
   폐허가 된 거리에 러시아 홍색군의 탱크가 진입한다. 확성기로 모든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방송하는 러시아군. 지하에 숨어있는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이 소리를 다 듣고 있다. 이윽고 독일군과 러시아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마지막 저항을 하는 독일군을 무찌르고 드디어 해방군으로 도시를 장악하는 러시아군.
   지하대피소로 들어온 러시아군이 민간인들을 일일이 조사하면서 여자들에게 “전쟁 끝! 여자!”라고 독일어로 몇 단어를 말하며 나이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강간을 하자, A가 러시아어로 “뭘 원하느냐? 당신들은 왜 원하지 않는 여자들을 데려가느냐?”고 묻는다. 

 


   배고픔에 지친 여자들이 여기 지하에 묻히기 싫다며 밖으로 나간다. 손수레에 감자가 수북히 쌓여있는 것을 보고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여인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주인공은 어린 여자를 겁탈하려는 러시아군을 유인하여 다른 곳으로 데려가 그를 철창에 가두고 밖으로 나와 상급지휘관을 찾는데, A도 결국 두 명으로부터 윤간 당한다. 


   A의 내레이션: 어느 미망인이 머물 곳을 제공했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놀랍게도 멀쩡했다. 난 받아들였다. 몇 발자국이면 작업실이고 옷, 책, 노트 등을 얻었다. … 좀 더 주변을 살펴야 했었다. 그러나 결코 모든 걸 볼 순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흘러간다. [註: 모든 걸 볼 수 없었다는 말은 사실 그 집의 다락방에 독일패잔병이 숨어 있었고, 이로 인해 나중에 파국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군인들은 점령자로서 승리를 만끽하고 밤낮으로 아파트를 뒤지는데, 베를린 시민들은 특히 여자들은 목매 자살하거나 총으로 살해되는 등 누구도 모면하지 못했다. 이제 모든 감정이 죽었다. 
   내레이션: 그들은 어디에 있지? 우리의 구세주? 최고의 군대? 전쟁과 죽음은 남자들의 일이었다. 그 시절은 끝났다. 젠장할 러시아인! 장교, 장군, 사령관 등 상위로 가야 한다. 그리고 나를 선택할 사람을 정해야 한다. [註: 전장에 나가는 남성은 차라리 죽임을 당할지언정, 강간처럼 정신을 말살하는 류(類)의 범죄를 당하진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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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120474
9208
2024-10-17
'두 여인(Two Women)' (4, 끝)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I)
두 모녀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양면성 묘사, 연기자 소피아 로렌의 진면목 보여준 작품
 


(지난 호에 이어)
   이에 "아무 일 없었다고 말했잖아요"라고 대답하며 "로마까지 태워줄 수 있느냐?"고 묻는 체시라. 그는 로마는 너무 위험하다며 미군이 들어간 후에 가라고 충고하고, 자기 어머니가 잠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친절을 베푼다.
   플로린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 모녀. 그러나 밤 사이 악몽에서 깨어난 체시라가 딸을 찾으나 사라지고 없다. 그녀는 미켈레를 찾으러 폰디로 갔거니 생각하고 마을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한 촌로로부터 뜻밖에 미켈레의 시체가 포르첼로(Porcello)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독일군에게 총살 당하는 것을 누가 봤다는 것이었다. 
   연인이었던 미켈레의 사망 소식에 울음을 터뜨리는 체시라에게 플로린도의 모친이 "부인, 당신 딸은 제 아들과 같이 춤추러 갔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아까 차에서 말한 승전 기념 파티에 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어린애를 데려가다니 당신 아들 죽여버릴 거야!" "당신 딸도 좋으니까 따라간 거지! 강제로 데려갔겠어?" 
   실랑이를 하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체시라.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거죠? 제게 무슨 죄가 있길래…" 전쟁 때문에 행복하고 단란한 한 가정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네오 리얼리즘 장면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모의 자식 걱정과 사랑은 하등의 차이가 없다!
   밤을 하얗게 샌 엄마 앞에 플로린도와 춤추고 몸 팔아 받은 실크 스타킹을 들고 나타나는 딸. 체시라는 격분하여 철없는 딸을 때린다. 그러나 로세타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울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가 "미켈레의 말이 맞았어. '아무리 도망쳐도 자기 자신은 피할 수 없어.'… 미켈레 소식도 묻지 않는구나…" 하며 큰소리로 미켈레의 죽음을 알리자 그제서야 로세타는 통곡하기 시작한다. 마치 폭행 당하기 전의 순수한 소녀로 돌아간 듯…. 
   어머니도 같이 울며 모정으로 "엄마를 용서해. 그만 울거라. 내 딸 로세타, 금쪽같은 내 딸! 이제 자!"하며 딸을 부둥켜 안고 위로하는 장면을 줌 아웃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작품으로 외국영화로는 처음으로 1961년 아카데미 및 칸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22개의 국제영화상들을 휩쓸면서 소피아 로렌(Sophia Loren•90)은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배우가 되었다. 
   그런데 아카데미상 시상식 때 소피아 로렌은 무대 공포증 때문에 직접 수상하지 못하고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1942)'의 주연배우로 유명한 그리어 가슨(Greer Garson, 1904~1996)이 대리 수상하면서 "(소피아 로렌을) 이 야성미 넘치고 재능 있는 여자(This wildly beautiful and talented girl)!"라고 외쳤다고 한다. 
   당시 아카데미상 후보로 올라온 여배우들은 '초원의 빛'의 나탈리 우드,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의 오드리 헵번 등 쟁쟁한 배우들이었는데, 이례적으로 '외국인'인 소피아 로렌이 수상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26세밖에 안 되었던 로렌이 '두 여인'에서 미녀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30대의 어머니로 분장하여 투박하고 강인하며 억척스러운 여성상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딸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을 깊은 모정을 온몸으로 연기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피아 로렌의 진정한 연기자로서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여준 영화가 '두 여인'이었지 싶다. 
   한편 미켈레 역을 연기한 장 폴 벨몬도(Jean-Paul Belmondo, 1933~2021)는 상대적으로 유약한 진보주의자 청년으로 비치는데, 이탈리아 영화에 프랑스 배우가 출연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제작자 카를로 폰티가 자금 조달을 위해 프랑스 회사와 합작했을 때 당시 프랑스 법규정에 의해 프랑스 배우를 반드시 기용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때 장 폴 벨몬도의 목소리는 이탈리아어로 더빙을 한 반면 로렌은 직접 영어로 더빙했기 때문에 영예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1~1974)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 체사레 자바티니(Cesare Zavattini, 1902~1989)를 만난 것은 축복이었다. 로마 가톨릭 신자인 감독과 공산주의 작가의 만남에 의해 '구두닦이(1946)' '자전거 도둑(1948)' '밀라노의 기적(1951)' '움베르토 D(1952)' 등 주옥같은 네오 리얼리즘의 걸작들을 공동 창출했기 때문이다. 
   데 시카 감독은 감독보다 배우로서 더 많이 활약했다. 예컨대 헤밍웨이 원작으로 록 허드슨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했던 찰스 비더(Charles Vidor, 1900~1959) 감독의 '무기여 잘 있거라(1957)'에서 알레산드로 리날디 소령 역으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첫 번째 부인 쥬디타 리쏘네(Giuditta Rissone, 1895~1977) 사이에 딸 에미를 낳은 후 1954년 이혼하고 1959년 스페인 배우 마리아 메르카데르(Maria Mercader, 1918~2011)와 재혼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법으로는 이 결혼이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에 1968년 프랑스 시민권을 받자 파리에서 결혼했다. 
   그런데 리쏘네와 이혼하기 전에 마리아 사이에서 벌써 아들 둘을 두었다. 1949년생인 마뉘엘은 음악가로, 1951년생인 크리스티앙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 배우와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참고로 마리아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마르크시즘 이론가로 유명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를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했던 라몬 메르카데르(Ramon Mercader, 1913~1978)의 여동생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데 시카는 비록 이혼은 했지만 전처딸 에미가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해마다 성탄절과 새해에는 시계를 두 시간 거꾸로 돌려놓고서는 두 가족 모두 파리에 있는 메르카데르 집에 모여 자정에 축배를 들곤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73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두 여인'은 지금도 오페라 등으로 제작되어 공연되고 있는 걸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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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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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두 여인(Two Women)' (3)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I)


두 모녀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양면성 묘사,

연기자 소피아 로렌의 진면목 보여준 작품



(지난 호에 이어)   
그 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미켈레가 어느 날 나타나 체시라의 뒤를 밟는다. 별 대화 없이 나란히 걷던 둘은 독일군을 피해 마을 부호집으로 찾아가는데 거기서 예기치 않은 독일군 중위와 맞닥뜨린다. 뭐 하느냐고 묻는 중위의 물음에 막 대학을 졸업했다고 대답하는 미켈레. 전공은? 문학이라고 답하자 중위는 로마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 말한다. 
   이에 비위를 맞추려고 부호영감이 "그러면 이탈리아인들이 철학을 싫어하는 이유도 당연히 아시겠군요?"라고 거든다. 중위는 엉뚱하게도 "당신 같은 계층은 진수성찬이지만 농부들은 먹을 것도 없다"며 따지자 "보통은 이렇게 안 먹어요. 이건 중위님을 위한 특별한 점심이지요"라며 쩔쩔매는 부호영감님이 "그들이 그렇게 사는 건 그들의 선택이에요"라고 강변하자 "이탈리아의 지도계층인 당신들의 잘못"이라며 "점심 한끼 먹이고 내 입을 다물게 하려는 거요? 난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소"라며 격앙되어 소리치는 독일군 중위.

 

 

   이때 부엌에서 부호마님과 함께 있던 체시라가 이 고함소리를 듣고 뜨끔해 하는데 부호마님이 말한다. "저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야 해. 토요일마다 식사하러 오거든" "저라면 수프에 독약을 넣겠어요"라고 말하는 체시라. 
   딸에게 줄 음식을 싸가도 괜찮다는 호의에 체시라는 설탕, 밀가루 등 닥치는 대로 바구니에 싸 담는데. 이때 칸초네 노랫소리가 들린다. 중위가 부호영감에게 노래를 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마님 할머니.
   이때 부호마님이 깜빡했다며 커피를 갈아달라고 부탁하자 커피를 갈며 노랫소리가 들리는 거실로 가보는 체시라. 담배 연기가 자욱한 거실에서 영감이 노래를 하고 있는 가운데 중위와 미켈레의 대화가 이어진다.    
   중위: 당신들은 선천적으로 전쟁을 좋아하지. 전쟁은 남자의 필수경험이죠. 전쟁 없이는 남자도 없어요.
   미켈레: 차라리 거세를 하겠어요.  
   중위: 역시 이탈리아인답게 감상적이군요. 오늘도 독일의 소중한 병사들은 당신들 대신 피를 흘리고 있어요.
   미켈레: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당신들은 출발부터 잘못됐어요.
   중위: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보시오. 냉철한 머리로! 당신과 이탈리아 사람들은 패배를 해야 정신을 차릴 거요. 당신들 자식들도 피눈물로 그 대가를 치를 거요!

 

 

   독일군 중위가 점점 핏대를 올리자 이를 엿듣던 체시라가 불쑥 나타나 "애들이 무슨 상관이에요? 어서 말해봐요!"라며 "여기 오다가 당신들 때문에 미친 여자를 봤어요. 어디 나한테도 한번 해봐요"라고 삿대질을 하며 대들자 부호영감이 "여자 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말리는데 그때 공습사이렌이 울려 모두들 방공호로 대피한다. 
   체시라가 두고 온 바구니를 챙기러 부엌으로 갔다 오니 무시무시한 공습이 이어지고, 경황(驚惶) 중에 안경도 쓰지 못해 앞이 보이지 않는 미켈레를 이끌고 나오다 둘은 풀밭에 쓰러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풀잎에 예쁜 무당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다. 체시라의 몸을 안고 쓰러진 미켈레는 은연중에 그녀를 더듬고 키스를 한다. 경보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방공호에서 나오던 부호 부부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 그때서야 안경을 찾아 쓰는 미켈레. 쏟아진 밀가루를 말없이 주워담는 두 사람.
   그러나 이만한 평화마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독일군 패잔병 6명이 마을에 들어와 총으로 위협하며 물과 먹을 것을 요구하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길잡이를 요청한다. 마을사람들이 이를 구경하기 위해 다 모였는데 결국 가장 젊은 미켈레가 험악한 산악지대의 길잡이로 잡혀가게 된다.

 

 

  •한편 연합군의 진격이 시작되고 무솔리니와 독일군의 패망이 가까워지면서 식료품 부족과 더 잦은 폭격 등으로 이 시골이 도시보다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옛 거처로 복귀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미켈레의 부모도 여기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들과 합류한다.
   가는 길에서 미군 탱크부대를 만난 사람들은 군인들이 던져주는 껌과 초콜릿 등을 챙기기에 바쁘다. 마치 우리 6•25전쟁 때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탱크 위에 있던 사진사가 체시라를 보고 "다리를 보여주면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하자 "네 누이 다리나 찍어라!"며 야유하는 사이에 독일 전투기 한 대가 아군들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바로 코앞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독일 전투기가 사라지고 평온을 되찾자 사람들은 폰디로 가는 것도 위험하다며 미군이 더 진군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의견과 미켈레 부모는 아들을 찾으러 그래도 폰디로 가겠다고 하고, 체시라는 미켈레를 보러 폰디로 가려고 하는 딸 로세타를 끌다시피 하여 모녀는 로마로 향하는데….

 

 

   뙤약볕 길가에서 모녀가 잠깐 쉬며 싸온 빵을 먹고 있는데 머리에 터번을 두른 무장군인들이 탄 트럭행렬이 지나간다. 그냥 지나간 것으로 보아 연합군인 것 같은데… 암튼 모녀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성당에 들어가 벤치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쉰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갑자기 들이닥친 프랑스 식민지 군대인 모로코 군인들에 의해 집단 강간을 당할 줄이야! 엄마는 금쪽같은 딸의 이름을 부르짖지만… 이때 신성함과 숭고함의 상징인 교회의 성모상 앞에서 윤간 당하는 로세타의 얼굴을 클로스업된 정지화면으로 보여줌으로써 강렬한 충격을 준다.[註: 그런데 정작 이 장면은 당시 '성적 노출 금지' 규정에 대한 무언(無言)의 항변으로 일부러 정지화면으로 처리했다는 후문인데 아무튼 데 시카 감독은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신을 차린 엄마가 딸에게 다가가 부둥켜 안고 눈물로 머리를 빗겨주고 입가에 흘린 피를 닦아준다. 그러나 로세타는 이 처참한 충격으로 더 이상 순진하고 사랑스런 '소녀'가 아닌 '여자'로 바뀌었고, 어머니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간다. 
   모녀가 다행히(?) 친절한 젊은 트럭운전사 플로린도(레나토 살바토리)를 만나 차로 이동하게 된다. 플로린도는 "정말 모로코 놈들과 아무 일 없었냐?"고 물으며 "오늘 아침 근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놨어요. 내 동생을 건드렸으면 다 죽여버렸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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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3
'두 여인(Two Women)' (2)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I)
 

두 모녀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양면성 묘사,

연기자 소피아 로렌의 진면목 보여준 작품
 

 

 

(지난 호에 이어)
다음날 새벽 일찍, 잠에 취한 딸을 깨워 다시 여정에 오르는 모녀. 시골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촌로(村老)를 만나 (걷기 힘들어 하는 딸을 태우고 갈) 당나귀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묻는데, 그때 로마를 공습하려는 연합군의 전투기 편대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들을 기총소사(機銃掃射)하여 그만 노인이 즉사한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인 산골마을 치오치아라에 도착하는 모녀. 마침 야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던 마을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모녀를 친척처럼 따뜻하게 맞이한다. 아코디언 연주를 하는 아킬레에게 누군가 '파체타 네라'라는 곡을 요청하자 체시라는 '비베레'라는 곡을 신청한다. [註: '파체타 네라(Faccetta Nera)'는 '어여쁜 검은 얼굴(의 여인)'이란 뜻으로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비공식 국가였던 인기 행진곡이다. '비베레(Vivere)!'는 '살아라(Live)!'란 뜻으로 체사레 빅시오(1896~1978)가 작곡한 1937년 동명의 이탈리아 영화의 주제곡으로, 이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1930~1940년대를 풍미하던 유명 테너 가수 티토 스키파(Tito Schipa, 1888~1965)가 불러 크게 히트한 낭만적인 곡이다.]

 

 

순박한 마을사람들이 영국이든 독일이든 누가 이기든 상관없고 전쟁이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거기에 참석한 젊고 지적인 엘리트 청년 미켈레(장 폴 벨몬도)는 "만일 독일이 이기면 자살하겠다"며 "파시스트 배지를 달고 있는 여러분들이 원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남들은 죽든 말든 여기서 제 배만 불리면 된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모두 돼지들입니다"라고 일갈(一喝) 한다. 
이때 누군가 미켈레는 이상주의자라며 정치 얘기로 분위기 깨지 말고 노래나 듣자고 제안하는데….
며칠 후 미켈레는 모녀와 함께 등산을 하면서 체시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짜 무지한 사람들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며 "순수한 농부들은 전쟁 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덧붙여 "지금까지 도시인들이 농부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어요. 그러나 농부들은 절대 안 변해요"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체시라는 "나는 농부들과 다르게 산 덕분에 조금이라도 돈을 모았다"며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대꾸한다. [註: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업화에 따른 rural exodus, urban exodus 문제는 정치•경제•사회 및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끝없는 논쟁거리이다.]
이때 두 명의 파시스트가 나타난다. 그 중 한 명은 어제 마을에서 본 얼굴이다. 그들은 "무솔리니를 도둑처럼 감옥에 가뒀다"며 "20년 동안 건설했던 제국이 하루 만에 무너졌다"고 분개하다가 "너희 같은 반역자들은 진작에 제거했어야 했었는데"라며 총을 빼드는 게 아닌가. 
미켈레가 나서서 "그게 사실이라면 난 웃으며 죽을 수 있다"며 "어서 쏴라!"고 말하는데, 다른 한 명이 "우리 손으로 죽이기보다는 독일군에게 맡기는 게 낫다"며 말리자 둘은 황급히 도망친다.

 

 

마을에서 나물을 다듬던 여자들 중 한 명이 "무솔리니를 남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화두를 끄집어낸다. 누군가가 "난 무서워서 사랑도 못 할 것 같다"고 하자 체시라가 "불을 끄면 되지" 하고 말해 모두 박장대소를 하는데….
이때 미켈레가 영국군 두 명을 데리고 들어온다. 그들은 작전을 위해 잠수함으로 상륙했다가 패잔병이 되었다고 한다. 만일 독일군에게 발각되면 모두 총살감이라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질 못하는데 체시라와 로세타 모녀가 그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대접한다.
그들을 배웅한 뒤 미켈레는 와인에 좀 취한 체시라에게 아까 포도주를 마실 때 '조반니를 위해!'라며 건배했는데 그가 누구이며 혹시 사랑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사실 그 포도주는 조반니가 선물로 준 비싼 와인이었다. 
대답을 회피하고 "싫은 남자와 평생을, 그것도 매일 밤 함께 자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라고 말하는 체시라.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제라도 새로운 사랑을 갈구하는 듯한 애매한 대답이다. 로세타가 오자 딸을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체시라.

 

 

마을사람들을 거처에 모아놓고 미켈레가 성경을 읽어주는데 들락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말이 자꾸 끊긴다. 또 아킬레가 편지를 전해주자 조반니에게서 온 편지를 읽어본 체시라가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조반니가 붙잡았다"며 소리를 지르며 편지에 키스를 하는 등 도무지 책을 읽어줄 분위기가 아니다. 
이에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간 미켈레를 체시라가 뒤쫓아간다. 그는 대뜸 그녀에게 정직하지 못했다며 그 이유는 "사랑한다"는 말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이때 비가 쏟아져 혼자 뛰쳐가는 체시라. 
잠자리에서 딸 로세타가 "미켈레는 엄마를 사랑해요. 엄마는 너무 예쁘잖아요"라고 말하자 "그는 25살이야. 여자는 연하의 남자와는 안 사귀는 거야"라고 에둘러 대답하는 체시라. "하지만 미켈레는 여기서 제일 착해요" "요즈음은 착한 게 별로 도움이 안돼… 그는 너무 반체제적이야. 착하기는 하지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지. 남편감으로는 괜찮아. 나쁜 습관도 없고… 네가 좀 더 나이가 들면 너와 약혼시키고 싶어!"
죽은 아버지를 닮은 미켈레를 잘 따르며 사춘기적 사랑을 느끼던 로세타는 "무슨 그런 말씀을…"하고 수줍어 하는데 "언젠가는 생각해야 할 일이지." 이에 한바탕 웃는 모녀의 사랑과 행복은 밤처럼 깊어만 간다. 
이튿날 온 마을 사람들이 들과 산을 헤매며 먹을 것들을 찾는다. 우리의 보릿고개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이때 미켈레가 아버지 몰래 집에서 갖고 온 커다란 빵조각을 얼른 로세타에게 건넨다. 그러나 이를 목격한 남자애가 빵을 달라며 보채자 로세타는 그를 업고 언덕 위로 올라가 나눠 먹는다.
한편 체시라는 양치기인 농부를 찾아가 거의 집 한 채 값을 주고 치즈를 사는데, 착실한 기독교도인 척하며 실속은 다 차리는 노인의 행태가 역겨울 정도로 얄밉다. 하지만 전시 체제에서 살기 위한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어찌 탓할 수가 있겠는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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