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X)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
(지난 호에 이어)
자전거로 집으로 돌아온 여인. 안드레이를 부르며 들어오지만 대신 기다리고 있던 안드로포프가 '그는 전근됐다'는 말을 전하고 떠난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약혼자 게르트가 돌아왔다. 초라하고 꾀죄죄한 모습이다.
"새들은 침묵하고 종들은 고요하다. 어떻게 된 거야?"라며 "작업실은 없앴어?"라고 말을 끄집어내는 게르트. "혼자 살 수 없었어." "알아. 우크라이나인 같으니…"
감자볶음 요리를 하던 여인이 잠깐 손을 놓고 버리려던 일기장을 게르트에게 건넨다. 이를 읽던 약혼자 게르트는 "수치심도 없어? 그걸 몰라? 당신 보니 역겨워!"하고 역정을 낸다.
여인은 자전거를 타고 안드레이를 찾아 길거리로 나선다. 마침 병사들이 집결한 곳에 다다른 여인. 그의 전근식이 거행되고 있다.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건물을 나서는 안드레이와 마주치는 여인. 이 모습을 그의 충직한 몽골병이 조심스럽게 지켜본다.
여인이 고맙다고 말하자 "뭐가?"라고 되묻는 안드레이. "당신을 알게 된 거요. 잘 지내세요." 그러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몸으로 가려 그의 손을 꼭 잡는 여인. "우리 어떻게 살죠?" 이때 안드로포프의 미안한 듯한 모습과 몽골병의 슬픈 표정이 교차된다.
드디어 지프차를 타고 떠나는 안드레이. 일제히 경례를 한다. 모두들 애틋한 표정이다. 마샤의 안타까운 표정이 잡힌다. 안드레이 소령은 한 여인의 보호막이 되어 잘못을 무리하게 덮어주려다 안드로포프의 상부 보고로 시베리아로 '전근'을 하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게르트가 모든 가구를 닥치는대로 박살내고 있다.
내레이션: 게르트, 내 사랑 게르트. 우리 이제 어떡하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당신이 내게 처음 말한 때로 돌아가자. 당신은 말했다. '30분만 줘. 절대 날 떠나지마!'
제 풀에 지쳐 약혼녀를 빤히 쳐다보는 게르트에게 "그래서 뭐?"라고 두 번이나 묻지만 대답이 없다.
A의 마지막 내레이션: 이틀 후 그는 사라졌다. 돌아올 지는 모르겠다. 더 이상 상심하지 않는 자신이 놀라웠다. 할 일이 많다. 부싯돌을 찾아야 한다. 작업실의 구덩이를 청소해야 한다. 어제는 라일락을 발견했다. 게르트는 날 생각할까? 누가 알겠어? 그의 마음이 움직이면 다시 볼 수 있겠지. 언젠가는….
서두에서 이미 얘기한대로 엔딩 크레디트에 수기집 '익명: 베를린의 몰락'과 작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지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마르타 힐러스의 수기집은 1945년 4월 20일부터 6월 22일까지 소련군이 진주한 동베를린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겪은 독일인들, 특히 독일 여성들의 아픔과 고통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일기는 4월 20일부터 4월 26일까지는 베를린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방공호 피신생활의 배고픔과 힘겨움을 기록했고, 4월 27일부터 5월 9일까지는 동베를린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독일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주로 이 기간을 다루고 있다.
5월 10일부터 6월 22일까지는 복구를 위한 노역에 동원되어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는 패전국 국민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으며, 6월 22일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약혼자 게르트가 돌아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소비에트 군인이 베를린을 점령한 4개월 동안 강간 당한 여성은 9만5천~13만 명으로 추산한다. 소비에트 종군기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8세에서 80세의 독일 여성들을 닥치는대로 강간했다고 한다.
전쟁에 있어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수치스러운 성적 유린은 상대편 남자들에게조차 큰 굴욕감과 좌절감을 주기 위한 조치이다. 또한 인종적 혼혈을 유도하여 상대 인종을 말살하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수기집의 작가 마르타 힐러스는 당시 34살인 인텔리 여성이었으나, 패전에는 신분 고하가 없다. 패전국에는 더 이상 존귀한 귀부인은 없으며 더 이상 품위 있는 신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을 통해 모두는 만신창이의 오물덩어리가 된다. 따라서 전쟁은 반드시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덕은 '도덕적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패전은 한 나라의 모든 보수적 가치를 박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악으로만 그려질 수 있는 소련군에 대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부여하기도 하고, 소련군 장교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컨대 A가 "소령은 날 강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뜻으로 그에게 맡기고 그의 처분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과 "러시아인은 독일인과는 달리 배운 여자를 알아줬다"는 표현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안드레이 소령이 A에게 "포옹하고 싶소. 남은 여생을 위해!"라는 말과, 나아가 A의 안드레이에 대한 솔직한 묘사인 "빌어먹을 러시안 이상주의자!… 하지만 그가 좋다. 그보다 많이 그가 좋다. 아주 많이" 등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벌이고 전쟁 피해를 당하는 모두는 '인간'이다. 전쟁은 인간과 세계를 바꾸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수기집이 출간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작가는 자기 연민은 결여돼 있고. 건조하고 간결한 어조로 너무 성찰적이고 솔직하며 세속적"이라고 평했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그녀는 관계를 통해 (음식물, 안전보호 등) 이득을 보았다. 또 소령도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환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익명의) 여자와 남자(안드레이)가 직면한 현실에 적응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평했다.
이 영화는 독일과 폴란드에서 촬영됐다. 특히 주인공 '익명의 여인' 역의 니나 호스(Nina Hoss•49)는 솔직히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理智的)인 모습으로, 지옥같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복잡하게 변화하는 환경이지만 마음은 친밀하면서도 허리부분의 아픔과 슬픔을 삼키는 역을 훌륭하게 소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일 출신의 막스 페르베르뵈크(Max Faerberboeck•74) 감독은 1999년 첫 장편영화 '아이메와 야구아(Aimee & Jaguar)'로 두 주연 여배우 율리아네 쾰러와 마리아 슈라더에게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안겼다.
(끝)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