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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아침이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다. 
어제 낮에 분홍빛 가을꽃 무더미 사이사이로 날아다니던 그 호랑나비가 안개 속에 날으는 듯하다. 
어제의 기억이 오늘에 살며 날으는 것이다. 

 

내일 모레면 추석이다. 
추석이면 아직도 내 몸 속에서 서늘하게 실려오는 나도 모르는 그리움이 맴돈다. 
그리고 눈감으면 고향의 누우런 황금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들판,  
이런 아침이면 누런 벼이삭 위에 내린 아침 이슬이 더 무겁게 보이고 그 위에 기운 없이 붙어 있는 메뚜기가 이제 가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추석이면 선산에 성묘를 갔었다.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5-6 학년 때일 것이다. 거의 반 세기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말목장터에서 남쪽으로 한 2km쯤 떨어진 화랑골에서 아버지와 형 그리고 나, 오정리 당숙님과 아제들이 독대동에서 만나, 버스를 두 번 타고 정읍쪽에서 내장사 들어가기 전 내장저수지 한참 아래서 내린다. 풍경이 우리 들판 동네와는 완전히 다르다. 산중(?)에서 누렇게 고개 숙인 벼들이 한자락 강하게 부는 바람에 황금 물결을 이루고, 그 끝에서 솟아오르는 산들이 앞으로 뒤로 있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작은 강둑 위를 걸어서, 밭둑길을 걸어서 간다. 

 

지금 같은 시절에는 차로 선산 아래까지 바로 가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지 못했다. 형과 아재들이 목기와 음식과 술을 나누어 들고 강둑과 밭길을 갔었다. 나도 뭔가 하나 들고 갔을 것이다. 

 

아버지와 당숙이 걸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간다. 이제 조금은 경사가 진 고구마 밭, 콩밭길을 걸으면 거기에서 밭 가운데 서 있는 한 열녀비(列女碑)를 맞는다. 처음 보던 그 해에 그 비는 참 인상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지나온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 비는 밭 가운데 잔디가 좀 있는 곳에 서있다. “남양홍씨 열녀비”를 그 비문(碑文) 속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몇 년 전에 선산에 성묘를 가면서 그 비를 눈으로도 찾아보고 내 동생에게 물어봐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그곳에 가지 못한 오랜기간 동안에 길은 좀 달라졌어도 그 비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는 선산에 오른다. 한참 올라가서 고조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 제단에 짊어지고 온 목기를 내려놓고 가져온 음식과 실과를 그 위에 놓고 목기 술잔에 술을 따른다. 절을 두 번씩 하고 술을 묘지 위에 아버지가 붙는다. 아버지와 당숙께서 음복으로 술을 조금 마시고, 우리는 음복을 한다. 음복은 밤, 대추, 곶감, 그 중에 하나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아래 증조부모 묘소 제단에 이와 같이 차려놓고 절하고 음복을 한다. 지금은 다 선산 한 곳에 모셨지만,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 동네 근처에 묻혀 계시기에 우리는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성묘를 하고 온 것이다. 

 

성묘는 고조부모 까지만 하고, 그 윗대 어른들은 문중제사로 한다. 어쩌면 내가 9-10살 쯤이었을까,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문중제사에 한번 따라 간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만들어낸 기억(?)으로 그런 이미지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날 상당히 높은 산 중턱의 조금은 넓직한 곳에서 수많은 하얀 두루마기 자락을 한 어른들, 허연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들이 화강암 제단 위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하고 묘지 위에 술을 붙고 그 묘지 앞에서 축문을 읽는 장면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어른거리겠는가. 유세차(維歲次)로 시작되는 축문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어떤 기억은 자신의 삶을 의미롭게 치장하기 위하여 크든 작든 간에 어떤 이미지를 생성하기도 할 것 같다. 

 

아, 그 시절에 성묘는 남자들만 갔었다. 

 

이제 안개가 걷히고 있다. 
안개 속에 묻힌 것 같은 아득한 옛날이 아렴풋이 떠오르다 사라져 간다. 
멀리 가는 기차소리가 들려오고 내 귀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다. 
내 앞에 있는 분홍빛 가을꽃 무더기 사이로 벌들이 날으고 있다. 
어제 날으던 호랑나비가 오늘도 찾아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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