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아직도....
벌써 3월이면 봄인가?
뒷 마당 장독대에 수북이 쌓인 눈이 채 녹기도 전인데 하늘은 잔뜩 찌푸린 상태로 심통을 부리더니 결국 부슬부슬 눈송이를 내리어 농장을 다시 흰 눈으로 덮어 버린다.
토론토의 기온보다 약 3도 가량이 낮은 이곳 농장은 절기 중 우수가 지나 북풍이 동풍으로 바뀌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경칩이 되었는데도 밭이고 장독대고 잔뜩 쌓여있는 눈을 보고 금년 농사를 시작하려는 새내기 농부는 한숨만 쉬고 있다.
매년 이맘때면 농장에서는 장 담그기를 시작으로 서서히 바빠지게 된다. 지난 가을 낙엽 떨어질 쯤에, 정성들여 삶고 두드려 메주를 만들었다. 그것을 상온에 잘 띄우고 말려서 보관해 놓은 메주로 된장을 만들고 간장을 달이게 된다.
해를 거르지 않고 꾸준히 해야 하는 일이라 지난 가을에도 예년과 다름없이 메주를 만들었고 평소보다 부지런을 떨며 욕심을 내서 많은 양의 메주를 만들어 놓고는 한껏 뿌듯해 했다.
가끔 메주 창고를 들여다 보며 문제가 없기를 바라며 잘 뜨고있는 메주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애써서 띄워놓은 메주 창고에 동물이 들어와 만들어 놓은 메주를 몽땅 망가뜨린 것이다. 너구리일 것 같은 몇 놈이 메주 창고로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괘씸한 놈들이 망가뜨린 메주는 결국 닭 모이로 주었고 일년 장 농사가 잘못되어 끓어 오르는 속을 달래기에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했다.
" 몹쓸 놈들! " " 괘씸한 놈들! " " 잡히기만 해봐라! ".....
전문적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그해에 무엇을 심을 지를 결정하면 다른사람에게 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 농사꾼이라 할 수 없는 우리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무엇을 심을까? "를 고민하고 있다.
예전에 미리 심어 놓아 잘 자라고 있는 다년생 작물 몇 가지만을 생각해도 새내기 농부인 우리 가슴을 뿌듯하게 만든다.
일년에 수차례를 자르면 또 자라고 키우기 쉬운 부추, 해마다 씨가 떨어져 조금씩 늘어가는 황기밭, 지난 봄에 귀하게 구한 종자로 잘 키워 보겠다고 정성들여 심어놓은 쪽파, 몇해 전 아버지께서 심어놓으신 도라지....
뒷산에는 눈 녹으며 머리를 내미는 코호시(Cohosh), 그 뒤를 따라 산마늘, 취나물, 참나물, 고비 등등 자연이 주신 선물들도 그득하다. 모두들 춥고 긴 겨울이 끝나서 자기를 뽐낼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작년에 받아놓은 씨앗 상자를 열어 보았다. 들깨, 옥수수, 검은콩, 황기, 단호박, 고추, 오이, 여주, 무, 배추, 부추.... 많다!
이것들 중에 모종을 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어야 한다. 모종을 해야 하는 것은 모종판을 선정해서....
갑자기 내 머리속이 복잡해 지기 시작한다.
" 왜 이놈들은 해마다 다시 심어야 하는 건가? 아까 그놈들처럼 한번 심어놓으면 계속 자라지 않는거야? "
무식(?)한 새내기 농부의 머리속은 별별 말 같지 않은 생각으로 가득 차 점점 더 복잡해지고 꺼내놓은 씨앗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게으름을 떤다.
거의 비슷하게 게으른 농부의 다른 한쪽 머리 속에는 냉장고에 마시다 남은 막걸리와 순대 한점, 그리고 춥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한 따뜻한 이불 속을 떠올린다.
이내 게으른 농부는 막걸리 한사발을 그득히 따라 단숨에 들이키고 밖을 보니 처마 끝에 커다란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 아직도 겨울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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