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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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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songdamkim3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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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4941
9218
2019-08-08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7)

 

(지난 호에 이어)
부분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루게 되는 유기체 모델에 있어서는 전체와 부분 그리고 부분과 부분들의 관계는 일즉다, 다즉일의 관계로 거기에는 자타라든가, 내외라든가, 선악이라든가, 귀천이라는 관념이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거룩한 신으로 섬기게 했던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함으로써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하셨다. 


즉 하나님이 사람 안에 계시고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겨 온 방식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예수님을 결국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지 못하고 목자와 양 떼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을 자기 밖에 존재하는 두려운 존재로 자신의 운명을 그의 손 안에 쥐어진 절대적 통제자로만 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온갖 기적과 포도원의 비유나 사람의 몸이 곧 성정이라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신 것처럼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 안에 사람이 거한다고 보면 하나님은 단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뜻이 자신의 법과 뜻이 되도록 자신을 비워야 하는 과제가 성도들에게 주어지게 된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게 된다. 


성도가 속한 교회나 개인이 속한 사회나 인류가 속한 우주자연을 유기체로 보게 되면 거기에는 자타라는 관념도 없고, 선악이나 귀천으로 분리될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관념도 없고, 로마인이나 희랍인이라는 관념도 없고, 흑인과 백인이라는 관념도 없고, 종교와 종교라는 관념도 없어져 어떤 이웃이든 자기 몸에 붙은 지체로 사랑하게 된다. 


무조건 사랑과 용서라는 성경의 대의가 여기서 나타난다. 기독교인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하거나 기독교인이 이웃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거부한다면 그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그들이 유대인임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흔한 돌로도 유대인을 만들 수 있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오만을 책망하신 것과 같이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 임을 스스로 부인한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셨다. 비록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도 정죄하시지 않으셨다. 오른손이 왼손을 정죄하지 않는다. 머리가 발을 귀천으로 나누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 사회라는 그리스도의 몸, 우주라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모든 것과 한 몸이 된다.


필자가 이 글에서 선(禪)을 기독교 성경과 결부시킨 것은 기독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유기체로 보는 것처럼 불교 역시 천지만물을 하나의 거대한 망과 같은 상호의존적 유기체로 보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란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은 모두 무념행을 시사한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무념행을 위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하거나 불교에서 천지만물을 일즉다, 다즉일이라는 총체적 관계에서 보거나 자연과학에서 사람 안에 우주가 있고, 우주 안에 사람이 있다고 하는 연합설에서 보면 사람의 본질은 무아이며 공이다.


거기에는 어떤 경계나 분별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보면, 비록 문화나 종교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본질은 누구나 동일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님의 교회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대답 위에 세워졌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베드로의 그 대답은 베드로 사신의 대답이 아니라 베드로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독교는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반석으로 건설되었다. 베드로는 그 말을 한 이후에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로 자신의 말이 될 때 구원이 있다. 


자신이 양 떼 중의 하나로 목자의 뒤를 무조건 따라가는 것을 기독교 신앙이라는 단계를 넘어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로 성도가 된다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을 자신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 본심으로 찾는 것이 중요하다.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과 안으로 성품을 보아 동요하지 않게 한다”는 좌선이 기독교인들에게도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어 성령이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간교한 생각으로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지금 처한 현주소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사람이 임의로 지어 붙인 명칭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거기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따로 없는 것과 같이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인간이 만든 경계도 있을 수 없다. 


아담과 이브가 지은 죄는 단순히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은 불복종 때문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에 있다. 지금도 그렇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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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4824
9218
2019-08-02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6)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의 몸이 서로 다른 지체들이 서로 다른 책임과 기능을 발휘함으로 온전하게 되는 것과 같이 우주도 해와 달이 있고, 밤과 낮이 있고, 바다와 육지가 있고, 산과 골짜기가 있고, 물과 불이 있고, 음과 양이 있어서 사람의 몸과 같은 조화로운 세계를 이룬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가 되고 또한 동일한 성령으로 숨을 쉰다. 사람의 구원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형상,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이(理)와 일치되어 사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랑 안에 있으면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다. 사람의 몸이 성전으로 그 안은 성령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령으로 채워져 있어야 할 사람의 몸이 탐욕과 분노와 무지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는 성전이 될 수 없다. 아담과 예수님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은 곧 사랑으로, 거기에는 자기라는 관념이 없다. 


이사무애법계와 사사무애법계로 우주는 운행된다. 화엄사법계는 우주자연의 법이기도 하면서 인간 사회의 법이기도 하다. 사람 속에 우주가 있고, 사람이 우주 안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에서도 이사무애, 사사무애법계를 보고 사도신경에서도 본다. 하나님과 사람이 둘이 아니며, 사람과 사람이 둘이 아니다. 제법무아다. 거기에 구원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의 영은 물위를 거닐면서 혼돈 속에 있었던 우주를 말씀으로 질서를 찾게 하셨고, 또한 그 질서에 따라 그 안의 모든 것이 생명을 얻어 조화를 이루며 번성하게 하셨다. 


인간이 ‘뱀’으로부터 배운 간교한 생각만 버리면 바로 이 땅과 이 하늘이 새 땅과 새 하늘이 된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너희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 


그 경고는 사람의 간교한 지식과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된 지금 더욱 무섭게 한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상호의존의 이법을 적용하면 올바르지 않은 현상을 올바른 현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 목표는 첫째,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섬김”으로 자기의 몸이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뜻과 법이 자신의 뜻과 법이 되게 하는 것이고, 둘째,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됨으로써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각 지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이(理)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어있다. 마치 사과의 본질이 만유인력에 의하여 나무에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신다. 예수님의 세상에서 보이신 행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피하지 않은, 이사무애법계와 사사무애법계를 대표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목적은 같다. 양자 모두 인간의 간교한 생각에 의하여 방해를 받고 있는 본심을 회복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심을 불성이라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본심을 성령이라 부른다. 


불성이나 성령 모두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가졌던 본심에 해당된다. 소를 잃어버린 사람이 소를 찾아가는 여정과 탕자가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불성으로 모든 것이 한 몸이 되고 각 지체가 되는 것처럼 성령으로 모두가 한 몸이 되고 각 지체가 된다. 자비가 불교의 이(理)라면, 사랑이 기독교의 이(理)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역시 이러한 종교적 범주로부터 크게 떠나지 않는다.


글을 마치며 구약성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과 유대 백성의 관계가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목자와 양 떼로 보인다. 목자와 양 떼 간의 관계에서는 목자와 양 그리고 양과 양은 상호 분리된 형태로 양은 목자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덕이고 법이 된다. 


그러나 만약 목자가 선한 목자가 아니라면 양은 고통과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와 같은 유기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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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4737
9218
2019-07-17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5)

 

(지난 호에 이어)
기독교 신행의 목적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어 생령이 된 그 본래의 모습을 되는데 있다. 즉 인간 자신의 몸이 성전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에 있다. 


불교에서는 “연기를 본 자는 부처를 보았고, 부처를 본 자는 연기를 보았다”고 한다, 우주는 유기체다. 사람이 사는 사회도 유기체다. 성도가 속한 교회도 유기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어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각 지체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다.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곧 이사무애다. 거기에 사람의 생각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성전으로서의 사람의 몸은 성령으로만 채워져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베드로/사람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졌다. 자기라는 것을 방하(放下)하는 것, 즉 “내려놓는 것”이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다. 


예수님 역시 “너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사랑의 하나님이 이(理)요, 사랑의 예수님이 곧 길이다. 탐진치는 이(理)와 어긋나는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소다. 


계정혜는 사람을 살리는 약이다. 삼독을 삼학으로 대치하는 구체적 방법들이 불교의 수행법에 들어있다. 행입으로서의 사념처와 이입으로서의 벽관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에게도 필요한 수행법이 된다.


특히 불교 수행의 목적이 본심이 이전 행동 경험으로 엉긴 망심의 제거에 있다는 점에서 보면 기독교의 목적과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불교가 망심을 본심으로 되돌리는 방법으로 학습이론과도 일치되는 연기의 이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불교의 수행방법은 기독교의 본의와도 어긋날 것이 없고, 누구에게나 평상심을 유지하게 하는 방법으로도 그 이상 완전한 것은 없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 그 안의 장사꾼들을 쫓아내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재건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비유하셨다. 부활이란 본래 성전인 자기의 몸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자신의 간교한 마음을 몰아내고 그 안에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거하시게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성도는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고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사무애법계인 동시 사사무애법계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사람의 몸과 함께 성전을 이루었던 성령은 결코 멸하지 않는다. 촛불은 꺼지지만 촛불을 타게 했던 이(理)는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부활의 의미 역시 그렇다. 사람이 이(理)와 함께 하는 한 죽지도 않고 죽어도 산다. 하나님은 이(理)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은 바 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몸이 성전이다. 사람의 본질이 곧 이(理)며 공이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理)가 있었고, 사람이 죽은 후에도 이(理)는 결코 멸하지 않는다. 무아나 공은 하나님의 말씀, 이(理)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탐진치는 이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고, 계정혜는 이와 일치한다. 불교의 행입으로서의 사념처와 이입으로서의 벽관은 각각 인지-행동적 접근법과 행동적 접근법이라는 점에서 부적응 행동을 소거하는 심리학적 방법과도 병행하고 무조건 사랑과 무조건 용서라는 기독교의 신행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방법으로도 타당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다. 유기체 내의 법칙은 상호의존이며 사랑이다. 사람의 몸은 흙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이다. 


하나님의 이(理)는 절대적 사랑이다. 태양은 분별없이 어디나 빛을 비추어주고, 구름은 어디에나 단비를 내려준다. 하나님의 법은 결코 인색하지 않다. 우주 안의 크고 적은 모든 것은 서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유기체인 전체를 살게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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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4668
9218
2019-07-11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4)

 

(지난 호에 이어)
태초에 천지는 혼돈 속에 있었다. 이를 사법계라 한다. 하나님의 영을 물위를 운행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법계다. 하나님이 혼돈 속에 있었던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질서 있게 하시고 또한 하늘에 나는 새와 육지에 기는 짐승과 물 속에 물고기를 창조하시고 번성하게 하셨다. 이를 이사무애법계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된 그 모습대로 질서를 지키며 평화롭게 그리고 지혜롭게 살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사사무애법계라 한다. 


사람이 부모에 의하여 태어나 살게 되는 과정에도 이 네 가지 법계가 포함되어 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理)시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어 생령이 된 사람의 본질 역시 이(理)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고 사람의 몸이 곧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다. 사람의 영혼이 곧 성령이다.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하신다. 우상이란 나무나 돌이나 철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절하거나 그것을 섬기는 것만은 아니다. 사람 나름으로 생각해 내어 그것을 선이나 악이라고 믿고 따르는 것도 우상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들어 놓고 절한다. 그러나 선 수행자들은 돌부처, 나무부처, 쇠부처에 절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사람은 바위 위에 올라가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지만 그 바위를 깎아 부처로 조성해 놓으면 그 위에 앉거나 눕기는커녕 그 바위를 보고 절을 한다” 하기도 하고, 제자가 “부처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말에 스승은 “절 안에 있는 것!”이라 대답한다. 


제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이(理)를 따르게 되어 있다. 물도 이(理)에 따라 흐르고, 바람도 이(理)에 따라 불고, 나비도 이(理)에 따라 난다. 사람의 몸도 이(理)에 따라 태어나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고, 병이 들기도 하고 늙어 죽는다.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도 이(理)를 따라 선한 사람도 되고, 선하지 못한 사람도 된다. 하나님은 이(理)시다. 사람의 몸은 흙으로 된 것이지만 이(理)인 성령으로 채워져 있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며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이유는 이(理)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것이며 또한 이(理)를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자신 나름의 지식으로 살려고 한 것에 있다. 


이(理)는 관계성을 말한다. 이(理)란 사람의 몸이 상하좌우 서로 쌍, 대법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불교에서는 이(理)를 연기라 부른다. 과학에서는 상대성이라 부른다. 


학습 및 행동심리학에서는 그것을 연합이라 부른다. 이(理)를 다른 말로 하면 자비와 사랑이다. 한 몸에 속한 지체와 지체의 관계가 자비와 사랑이다. 부분은 전체와 하나를 이루고, 부분과 부분이 한 몸이 된다. 


바울 사도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지체”라 선포한다.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 간의 관계에서는 선악이나 미우나 귀천이라는 관념이 없고 또한 서로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면서도 수고하고 희생한다는 관념이 없다.


지체와 지체 간의 관계가 곧 무조건 사랑과 무조건 용서다. 깨달음이란 자신이 이(理)의 세계에 들어가 이(理)와 하나가 됨을 뜻한다. 사람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다. 불성이 곧 이(理)에 일치하는 자비심이다. 


기독교 역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니라”는 말씀을 믿는다. 사랑이 곧 이(理)가 되는 것은 천지만물이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지체들처럼 우주라는 천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부분마다 모양이 다르고 기능도 다르다. 그러나 부분들은 전체로 한 몸을 이룬다. 한 몸을 이루고 각각의 지체들의 본질이 사랑이 아니라면 전체란 있을 수 없다. 


아담의 후예인 사람들은 아담처럼 지금도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나 귀천이라는 관념으로 전체로부터 자신이 분리된 것과 같은 망상에 빠져있다. 이러한 망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참 구원이란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새끼줄을 보면서도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지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이전 행동 경험의 결과로 본심이 무엇에 엉긴 탓이란 것을 알아차리고, 본래 이웃과 하나가 되고 우주와 하나가 되게 되어 있는 본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는 본심이 무엇에 엉기어 망심이 된 것을 어떻게 하면 망심을 다시 본심으로 회복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 수행법을 제공한다. 그것이 도에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으로, 행입과 이입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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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4567
9218
2019-07-09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3)

  

(지난 호에 이어)
바울 사도가 지적하신 것처럼 모두가 눈이어서도 안 되고, 모두가 귀이어서도 안 되고, 모두가 손이어서도 안 된다.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지체들은 서로 다르고,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온전한 전체를 이룬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 역시 그렇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나 미추나 귀천이라는 관념을 가진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은혜로 사람마다 각각 다른 재능과 역할을 맡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유기체로 비유되는 인간 사회이고 우주자연의 모습이기도 하다. 


모두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고 동일한 성령으로 숨 쉰다. 성도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천지만물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고 동일한 성령으로 숨을 쉰다. 어리석은 중생은 그것을 모르고 있지만 성도는 그것을 안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란 이사무애법계에 들어간 사람이고 사사무애법계에 들어 간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사람이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다. 


그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으로 생리를 얻어 생령이 된 그 때 그대로의 모습을 되찾게 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되찾게 되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 온 탕자처럼 이제 안심이다. 그는 옛 일을 잊게 되고, 자신 마저 잊는다. 화엄사법계가 기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실로 크다. 사법계와 이법계는 각각 인간 나름으로 만들어 낸 가상적 세계와 실제로서의 하나님의 세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사무애법계는 사람의 몸이 곧 성전으로 하나님이 사람 안에 거하시고,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사람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됨을 뜻하고, 사사무애법계는 하나님이 사랑인 것처럼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음을 뜻한다.

 

화엄사법계에서 우린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화엄사법계는 우주를 꽃과 같은 유기체로 보게 될 때 나타나는 진리다. 사(事) 이면에는 반드시 이(理)가 있다. 사에 있어서 이는 사양의 여지가 없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이 그런 것이고, 십계명이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다. 화엄사법계는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이 연기 사상은 연합설이란 측면에서 자연과학과도 일치하고,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형성되는지를 설명하는 학습이론과도 일치한다. 화엄사법계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인간이 현실적으로 당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공식이 된다. 


어떤 현상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이 일어날만한 조건과 상황 아래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하게 하는 화엄사법계나 연기법은 인간을 무력감에서 구하는 구체적 전략을 제공한다. 


불교가 기독교와 다른 것은, 불교는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는 것과 같은, 형이상학적 신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과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가, 등 사람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있게 하시고 천지만물을 관리하는 법과 이로 보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신이나 우상이 될 수 없다.

이(理)가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이(理)가 되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행적이 바로 사람이 따라야 할 길이다. 


불교나 기독교는 동일하게 사람이 살 길을 자비라 하고 사랑이라 한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사랑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랑 안에 거하면 그것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하나님도 사람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서의 하나님은 사람 밖에 별개로 존재하는 신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신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태어나게 하고, 숨 쉬게 하고, 걷고 뛰게 하는 인간의 본질로서의 이(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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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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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3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2)

 

(지난 호에 이어)


제 5 장 : 결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현대과학의 공통점은 그 모두가,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연합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일즉다, 다즉일이라는 우주와의 총체적 관계에서 정의하고, 기독교 역시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하나님은 농부”라는 총체성에 기초하고, 과학에서도 사람 안에 우주가 있고, 우주 안에 사람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에서 발견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은 인간의 지각과 판단이 우주와 공유하게 되어 있는 인간의 본심 또는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를 사(事)법계, 이(理)법계, 이사(理事)무애법계, 사사(事事)무애법계로 나누어 ; 사(事)와 이(理)가 서로 어떻게 서로 의존하여 아름다운 세계를 이루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불교의 화엄사법계는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과학 간에 발견되는 사람과 우주, 사람과 창조주 하나님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事)법계란 사람의 몸과 감각기관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또한 반응할 수 있는 현상계다. 사람은 보통 사법계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법계에서 경험되고, 느껴지고, 생각되는 대로 살아간다. 


이(理)법계는 비록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떤 작은 현상이라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이 일어날만한 어떤 조건과 법칙, 즉 이(理) 안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물리적 화학적 현상 이면에서 작용하는 원리를 찾아내려는 것도 이것이고, 심리학자들이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변화 이면 작용하는 법칙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하는 것도 이 이(理)다.


이(理)는 인간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우주자연의 법칙이다. 불교에서는 이 법칙을 연기의 이법이라 부르고, 과학에서는 연합이라 부른다. 이사무애법계는 이와 사가 서로 분리된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어떤 장애도 없이 서로 소통함으로써 어떤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창조되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고 또한 멸하기도 하는 진실한 모습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설한다. 


예를 들어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현상 이면에는 만유인력이라는 이(理)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줌과 같다. 이사무애법계가 사(事)의 본질이 곧 이(理)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면, 사사무애법계는 이사무애법계의 다른 측면으로서 사(事)와 사(事)가 서로 인과관계에 있게 됨을 말한다. 바람이 일어나면 구름이 밀려가게 되는 것과 같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나비효과” 역시 사사무애법계를 말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지 않고 지은 바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엄사법계에 의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곧 이(理)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이(理)에 따라 살게 되어있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란 말씀 역시 사람의 본질이 하나님의 뜻과 법에 일치하여 살게 되어있음을 지적한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우린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모든 행적의 이면에서 화엄사법계를 본다. 이(理)와 사(事)의 관계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숨으로 숨을 쉰다. 


하나님이 사람 안에 거하시고,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한다.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까지도 우주자연의 법칙에 의하여 통제되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이(理)로서의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라고 하시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사람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다. 포도나무 가지가 봄에 푸른 잎을 내고 여름 동안 번성하여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 동치에 붙어 있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여야 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포도나무 둥치는 본체로서의 이(理)고 포도나무 가지는 지체로서의 사(事)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다.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은 각각 머리나 몸통이나 손이나 발이나 눈이나 코로 서로 다른 모양과 책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한 차이를 선악이나 미추나 귀천으로 나눌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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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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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5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1)

 

(지난 호에 이어)


30. 견성, 본심의 회복


달마 대사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 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대관절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아 견성하고 부처가 된다고 하는 말이다. 마음이란 학습된 것으로, 밖으로부터 침입한 도적과 같다. 


마음이란 새끼줄을 보고도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게 만드는 것이고, 간밤에 달게 마셨던 물도 아침에는 구역질 나게 하는 물로 둔갑시킨다. 지금 자기가 본심으로 믿고 있는 마음이 실은 이전 행동 경험의 쌓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수행자는 이제 “새끼줄은 새끼줄로, 뱀은 뱀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본심을 찾아 나선다. 


이 여정이 소를 잃어버린 사람이 소를 찾아 먹이고 길들인 후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심우도에 묘사되어 있다. 견성성불이란 이렇게 이전 경험으로 학습된 마음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본심을 거울이나 허공으로 비유한다. 거울의 특성은 이전 행동 경험의 흔적이 남지 않음으로 매양 되풀이 되는 것도 매양 새로운 것으로 볼 수 있게 됨을 뜻하는 것이고, 허공 역시 빛이 오면 빛으로 하나가 되고, 어둠이 오면 어둠과 하나가 된다는 절대적 수용성을 말한다. 


불교는 일체유심조라는 깨달음에 바탕을 둔다.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사물의 실체와는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흑’이나 ‘백’으로 지각하고 판단한다. 그것이 불교가 지적하는 무지며 무명이다. 


이러한 무지는 불교라는 종교적 수행의 목적일 뿐 아니라, 사람이 일상적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조건이다. 깨달음이란 조건화 또는 학습된 행동의 소거를 뜻한다. 


이는 마치 개에 대한 공포증으로 개를 보기만 해도 불안하여 꼼짝하지 못했던 사람이 그러한 공포증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을 때 자유로움과 같다. 깨달음이란 탐진치로 조건화되었던 마음과 행동으로부터 벗어나게 됨을 뜻한다. 


그는 이제 탐진치 대신, 계정혜로 거듭나게 된다. 탐진치가 실은 자신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면서도 그것을 부인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본심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계정혜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붙은 그대로 우주자연의 질서에 따라 자신을 성장하게 하며, 모든 것과 평화를 유지하며, 그 안에서 슬기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달마의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선 수행의 목적일 뿐만 아니라.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보게 될 때 성도가 따라야 할 신행이 되기도 하고, 인간을 우주에 속한 부분으로 보는 과학자들의 인간관 역시 그것에 일치한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마음이 어디에 걸림도 없다는 심리치료의 최종적 목표도 된다. 무아란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와 지체 간의 본질이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며 연결되어 있다. 이를 절대적 진리로 보게 되면 인간의 본질 역시 공이 아닐 수 없다. 


공은 소통이며 공감이다. 공은 자비와 사랑이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지만 깨달았다는 관념이 없고, 보살은 이웃을 위하여 보시하면서도 보시한다는 관념이 없다. 


보살이란 오른손이 왼손을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면서도 수고하고 희생한다는 관념도 없는, 이웃을 위하여 공무아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보살행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성도를 본다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경의 본의가 무념행에 있다. 성경에서는 자기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성도란 성령으로 한 몸이 되고, 동일한 성령으로 숨을 쉰다. 성령과 사랑은 동의어다. 


성령이 나타난 곳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고, 사랑이 나타나는 곳에는 언제나 성령이 있다. 사랑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것은 세상 어디서 보나 보편타당한 진리다. 
사랑이 병을 고치고, 사랑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고, 사랑이 영생하게 한다. 자비와 사랑은 억지로 애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럽히지 않음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어 생령이 되었다. 


흙으로 된 사람의 몸은 흩어지지만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으며, 생령으로 살아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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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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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6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30)

 

(지난 호에 이어)
목이 마르면 차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여 잠이 오면 자는 것“이 곧 도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평상심은 아담과 이브가 초심으로 살고 있었을 때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낙원에 있었을 때의 마음이란 억지로 애쓸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도록 미리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사람이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거나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면 지금의 이 땅과 이 하늘이 바로 낙원이 된다고 하는 것과도 같다. 사람은 시장해도 먹지 못한다. 번뇌망상 때문이다. 사람은 피곤해도 자지 못한다. 역시 번뇌망상 때문이다.


불교의 목적은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가를 걱정함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서 안심하고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데 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인 모든 행적 역시 평상심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혼인 잔치에 온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고, 떡 두 덩이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배고픈 군중을 배불리 먹고도 남게 했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다시 살게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일상적 삶에 관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거룩한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보다 더 귀한 것이 아닌가! 라는 말씀으로 십계명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선 수행의 목적이 “거룩한” 그 무엇을 깨닫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이, 기독교의 목적도 이웃 사랑에 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둘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온 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셨다. 


성경의 대의가 곧 평상심에 있다. 자신이 배가 고프면 먹는 것과 같이 이웃이 배가 고파하면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이며, 자기가 병들면 자기를 치유하는 것과 같이 아웃이 병들면 치유해 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사랑이 제일이다. 사랑이 곧 하나님이며, 사랑이 곧 자신의 본질이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다. 


기독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사랑에 대한 깨달음에 있다. 사랑처럼 무아와 공을 요구하는 것은 없다. 탐진치가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계정혜는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사랑에는 분별심이 없다. 사랑에는 선악이라는 관념도 없고, 귀천이라는 관념도 없다. 사랑과 자비가 사람을 구하는 길이요 진리가 아니라면 깨달은 사람이 속세로 다시 들어가는 이유도 없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도 그것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고 그 사랑을 예수님은 전파하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사랑이란 무아가 되는데 있다. 


사랑이란 자기라는 것을 버리는데 있다.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 한다. 전신질환의 기준이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닌가에 있다. 


경전의 대의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 사람에게 “차 한 잔 들게!”라고 한 조주 선사의 응답에서 사람의 말과 문자로 기록된 경전이 따로 전하는 소식이 무엇인지를 머리로서가 아닌, 직접적 체험을 통하여 되어야 한다. 


성경의 본의 역시 나팔소리가 단지 나팔소리가 아닌, 그 소리가 전하는 본 뜻을 몸으로 알아차리고 행동해야 한다. 사신경도 화두이고 주기도문도 화두다. 성경전체가 화두이며 공안(公案)이다. 


화두나 공안은 행동변화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배운 그대로의 탐심을 가지고 천국을 기대한다. 예수님은 천국에서의 삶이란 천사의 삶과 같음을 지적한다. 


천국이란 사람의 생각으로 상상하거나 기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뜻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은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법이 자신 또는 사람으로 생각으로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 책임은 사람 자신에게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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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김보경
74243
9218
2019-06-11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9)

 

(지난 호에 이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선 수행을 통하여 습 또는 조건화된 감정이나 행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조사들의 언행은, 이전 행동 경험으로 학습 또는 오염된 사람의 언행과는 다르다. 


조사들이 보이는 언행의 특징은 그의 생각이나 행동이 지금-여기에 머문다. 즉 그들은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고, 미래에 대한 보상이나 기대도 없다. 그들은 시장하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그들에게는 이전 경험의 흔적으로 생기게 되는 자타나 성법이나 귀천이나 미추라는 분별이나 경계가 없다. 그들은 사람의 본심으로 주어진 자연지, 근본지로 산다. 


그들 안에 본심으로 주어져 있는 우주의 지혜를 가지고 우주와 소통하며 산다. 그들은 여기서 신통기적을 나타낸다. 그 기적이란 본심이 망심에 의하여 방해를 받지 않게 될 때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신통기적이다. 


실은 지금의 과학기술이 모두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주자연의 법칙에서 빌려 온 것을 알게 될 때 무아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사람이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담의 초심, 즉 자기의 몸이 성전으로 비워져 오직 그 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만이 머물게 될 때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 역시 상상하기 쉽지 않다. 


지기의 몸이 성전으로 기능하게 될 때 사람은 고통에 빠지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의 몸이 오로지 창조주의 뜻 또는 우주자연의 법에 일치하여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창조주의 숨으로 살게 되어 있는 사람의 본질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어떤 갈등이나 괴리가 있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자기라는 것이 따로 없는, 자신이 이(理)에 들어가 살기 때문에 이(理)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 생로병사라는 현상으로부터도 자신이 벗어나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생로병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촛불이 타다가 꺼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촛불이 꺼졌다고 해서 촛불이라는 현상 이면에 있는 이(理)가 변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하는 것은 사람의 몸이 비록 흙으로 흩어진다고 해도 그 안에 거하시는 참 자기로서의 하나님의 영은 없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한 사도들은 모두 자신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산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아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며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 주었다. 기독교인들에게 무아와 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무아와 공은 사람의 몸이 성전으로 하나님의 뜻과 법이 자신의 뜻과 법이 되게 할 때 요구되는 조건이며,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기능하게 될 요구된 절대 조건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선행 조건이다. 그리고 무아는 우주에 속한 인간이 우주의 법에 따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있어서도 요구되는 필수적 조건이다.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은 바 된 것은 모두가 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게 하는 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 생명수로 산다. 


부활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진리란 자기라는 것을 버림에 있다. 자기란 관념은 사막에서 갈증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신기루와 같다. 사람의 마음이란 학습된 것이다. 학습된 마음이 인간의 본심이 될 수는 없다. 


 29. 깨달음의 결과, 평상심 중국의 조주 선사는 “달마 대사가 동쪽으로부터 오신 연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수행자에게 “차 한 잔 들게!” 라 말하고, “경전의 대의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은 사람에게도 “차 한 잔 들게!”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끽다거(喫茶去)!”하는 유명한 화두(話頭)다. 참선(參禪), 즉 화두를 들게 하는 선 수행의 목적은 평상심이 곧 도라는 것을 깨닫게 함에 있다. 목이 마르면 차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여 잠이 오면 자는 것“이 곧 도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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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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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8
2019-05-29
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8)

 

(지난 호에 이어)
사념처를 학습 및 행동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행과 마찬가지로 인지-행동적 접근법에 속한다. 사념처에는 심신의 이완, 심상, 생각, 행동이 결합된 총체적 자기 통제법이다. 사념처의 적용은 탐진치를 계정혜로 대치하는 심리치료법이 된다. 


예를 들어 사념처는 탐(貪)을 계(戒)로, 진(嗔)을 정(定)으로, 그리고 치(痴)를 혜(慧)로 전환하게 하는 방법으로 유기체로 비유되는 사회 그리고 우주의 일부인 자신을 전체라는 법에 일치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본심으로 가진 사랑과 평화 그리고 지혜를 실현할 수 있게 한다. 


그 이상의 사회적 윤리나 도덕도 없고 병든 몸과 마음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사념처는 결국 “어스름한 밤에 길 앞에 가로놓인 새끼줄을 보고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그러한 무지에서 벗어나 “뱀은 뱀으로, 새끼줄은 새끼줄”로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또한 사념처는 거기서 한 층 더 나아가 새끼줄도 수 많은 짚들이 모인 것이고, 뱀이라고 할지라도 지수화풍, 사대가 모인 결과에 지나지 않은 것이므로 뱀이나 새끼줄이라 할지라도 미리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 모든 것의 본질 역시 공으로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면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린 십계명 역시 탐지치를 계정혜로 바꾸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사념처에 제시된 내용이나 기법들은 십계명을 지키는 자기 통제법으로 역시 적용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억지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본래의 그 모습대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28. 벽관/좌선


달마 대사의 사행이나 사념처를 “생각으로 생각을 다스리게 하는” 인지적 방법이라 한다면 달마의 벽관이나 좌선 수행은 생각 자체를 끊게 하는 방법으로 공인 인간의 본심에 바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다스리게 하는 사행이나 사념처가 착한 생각으로 악한 생각을 다스리게 하는 좋은 방법이 되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자기 나름으로 생각, 인간 나름으로의 생각이라는 우주의 법, 자연의 법에 일치하지 않는 망상이 포함되어 있다. 


달마의 벽관이나 좌선은 그러한 위험성까지도 제거하는 방법이다. 혜능 선사는 좌선을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을 좌(坐), ‘앉음’이라 하고,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음을 선(禪)이라 한다”고 정의하셨다(육조단경, 2003). 


본심이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지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가 가졌던 초심이다. 아담의 초심이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직접 아담의 코 안에 숨을 불어 넣어 생기를 얻고 생령이 되게 한 바로 그 몸이고 그 마음이다. 


아담의 초심은 “너희 몸이 곧 성전!”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나타낸다. 아담의 몸은 흙과 벽돌 그리고 나무로 성전의 기둥과 벽과 지붕이 되고, 하나님의 숨결과 지혜가 성전의 주인이 된다. 


하나님의 뜻과 법이 아담의 뜻과 법이 된다. 그러나 아담의 초심은 그가 선악과를 먹는 순간 지금까지 하나님과 자신이 둘이 아니었던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자타가 되었고, 내외가 되었고, 주종이 되었고, 선악이 되었고, 귀천이 되었다. 


그것이 지금 사람들이 가진 마음이다. 벽관이나 좌선을 불교에서 보면 그것은 자가가 가진 지금의 마음이란 이전 행동 경험이 쌓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이 자신이 통제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본래 자기란 비어있게 되어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본심을 회복하기 위한 불교의 벽관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아담이 잃어버린 초심을 찾는 방법에 해당된다. 또한 벽관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심신의 깊은 이완으로, 이완을 방해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불필요한 긴장이나 두려움이나 분노와 부적응 행동을 소거하는 방법이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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