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들의 이야기’ 제 6권에 김란사 지사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구한말, 이화학당을 거쳐 미국 웨슬리언대학에서 한국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문학사를 받은 신여성으로 이화학당과 첫 번째 이화여자대학 교수로서 암울하던 조국의 교육자로, 여성계몽가로,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바친 분이다.
여러 자료를 수집하다가 그 시대에 여성이기에 당하는 큰 부조리에 당면하게 되어 깊은 상념에 들게 되었다. 김란사는 하란사란 이름으로 서훈되다가 2015년 증손자 김용택 씨의 정정 요청에 의해 오래된 사진과 기록들을 추적하여 6년 만인 지난 2021년 3월에 마침내 김란사 이름으로 기록을 정정하고 새 훈장도 재발급을 받게 되었다.
탄생 150년 만에 드디어 자기의 바른 생년월일과 이름을 찾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록상의 실책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오류라 할 수 있다. 구한말, 여자아이들에겐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김란사는 1872년 아버지 김병국 씨와 어머니 이씨(성명이 없다)의 일남 일녀 중 장녀로 평양에서 탄생하였다. 1893년에 인천항 감리사의 고위관리인 하상기와 결혼하였다.
이화학당에서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받아 한문발음과 비슷한 란사(蘭史)로 개명하였다. 1897년 남편과 함께 미국유학을 갔을 때 출입국 관리소에서 남편의 성씨를 따라 ‘하’씨로 등록하여 ‘하란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름은 한 존재의 전부를 나타낸다. 이름을 부르기 전에 꽃은 꽃이 아니듯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나는 내가 아니다. 이름은 남이 나를 구별하는 수단이고 나를 표면화시킬 수 있는 도구라 생각한다. 또한 이름은 가문의 위상을 나타내는 표상이며 선대와 후대를 이어주는 가계의 혈연고리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지 인류문화의 흐름에서 묵계적인 한 유형이 생성되었다.
여자의 이름은 부모 밑에서 자랄 때는 부모의 성씨를 지니다가 혼인하면 남편의 성씨로 바뀐다. 사회적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자의 이름은 문패에서, 전화번호부에서 사라진다. 여자 친구의 행방을 찾기는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기만큼 힘들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남편과 아들을 위해 일생을 바침)이 있는가 하면 조선시대에는 ‘삼종지도’(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늙어서는 아들을 따름.)가 있어 동서양 어느 곳이나 세계는 남성위주의 독선무대 같다.
처음 캐나다에 왔을 때 나의 이름은 ‘미시스 송’, 혹은 ‘수지 송’이었다. 그나마도 별로 불러주는 이 없고 들을 필요성도 없었다. 어느날 아이들과 한창 바쁠 때 전화가 왔다. 혹시 00대학 ‘손’ 선생님 계시냐고 찾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그런 사람 없는데요.’ 하였다.
대뜸 저쪽에서 ‘선생님 저 김00에요’ 하였다. 또 한번은 미국 LA에 사는 남편의 친구가 나이아가라 여행 중에 방문하였다. ‘어서 오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데 ‘얘. 나야 나.’ 그의 부인이 어깨를 쳤다. 고등학교 친구였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폭소가 터진다.
여자가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선교사들의 영향이 많았던 듯하다. 천주교, 기독교, 성공회 등 1883년 개항을 전후해 들어온 서양종교는 여성들에게 전 근대적 차별과 핍박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다. 선교사들은 교리전파와 함께 신식교육을 병행하였는데 ‘룰 루 프라이’ 이화학당장 같이 신식 교육기관의 책임자는 대부분이 선교사였다.
가부장적 남편과 시집살이 속에서 사랑과 평등을 전하는 서양종교에 여성들은 개화되었다. 세상의 기본질서로 굳게 서있던 남자와 여자 사이의 높고 두터운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조의 관계를 통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가며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관리하는 권리와 의무를 시행하는 것이라 각성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거의 전 세계는 여자의 노출을 억제하고 있는 듯하다. 가장 뛰어난 문화민족이라는 북미에서조차 내 건강보험증, 운전면허증, 심지어 여권에서 성(姓) 손(孫)씨는 찾을 수 없다. 어디 가서 나를 찾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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