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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shon
멀리 떠나고 싶은 사람
jsshon

 

 온갖 시샘을 다 떨던 겨울이 마침내 두 손 들고 물러간 파란 하늘에 축제의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온 천지는 촉촉한 아지랑이로 덧칠된 듯 제자리에 들어앉은 색채라곤 하나도 없이 시야는 온통 아른거리기만 하였다. 실눈이 움돋은 가지마다 손짓을 해대고 들숨으로 들락거리는 산들바람에 온 몸이 움찔거려서 한시도 선 자리에 가만히 버텨볼 재간이 없었다.

삼 층짜리 하얀 벽돌건물조차 봄바람에 들썩이는데 허구한 날 병상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하는 정집사야 오죽하랴. 여행을 간다더니 하루도 못 있고 돌아온 그를 떠올리려니 병상에 있는 환자가 더 크게 겹쳐왔다.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존재가치를 먼저 빼앗긴 사람이었다. 휠체어에 들어 올려준 그대로 기울어진 자세를 가누지 못하고 의자에 벨트로 묶인 채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영상물과 마주 앉아 있었다. 눈은 주로 감고 있고 소리는 들리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입은 먹지도 못하고 말도 소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기분전환을 위해서라는데 감상하는지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어느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휴식을 취하라며 다시 침대에 눕혔다. 휴식을 취하라니……. 거의 종일 눈을 감고 조용하게 누워서 부려놓은 곡식자루마냥 움직이지 못하는 삶에도 다른 쉼이 있을 수 있을까.

그에게 휴식이라는 말의 뜻은 어떤 것일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가끔 문병을 가면 정 집사는 병상 머리맡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 페이퍼타월을 펴놓고 매직 마커로 사군자를 치고 있었다. 환자의 수발을 들면서 틈틈이 그린 그림에는 어김없이 빨간 색으로 하트모양을 그리고 성경 구절이 적혀있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항상 기뻐하라’ 글씨를 곁들인 그림들은 싸 두었다가 문병객들에게 하나씩 주었다.

울퉁불퉁한 종이타월에 그린 사군자는 꼿꼿한 지조와 지순한 아름다움이 넘쳐흘러 받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해 주었다. 정 집사는 30세에 23세이던 부인과 결혼하여 48년간 평범하지만 화락한 삶을 살아왔다. 엑스레이 기사에서 은퇴한 후 교회의 웹 사진사로 봉사하고 노인대학이나 여러 단체에서 사군자를 가르치며 조용한 노년생활을 하고 있었다.

권사로 교회 살림 구석구석을 보살피던 부인과 둘이 믿음의 본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평화롭게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스트로크로 쓰러지면서 삶의 리듬이 무자비하게 망가져 버렸다. 뇌의 삼분의 이(2/3)가 파괴되어 나머지 삼분의 일(1/3)로 숨 쉬고 심장박동을 유지하는 식물인간이 된 것이다.

스스로 삼키지도 못해 대여섯 개의 링거호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정 집사는 아침 일찍 와서 종일 부인 곁에 있다가 취침시간이 되면 돌아가곤 했는데 그러기를 벌써 1년 반이나 지났다. 처음엔 기적 같은 쾌유가 일어날 것을 간구하였지만 혼수상태를 두 번이나 겪고부터는 점점 소망이 엷어지고 감도는 그림자도 짙어지고 있었다.

한 가지 크게 다행이라면 권사님 얼굴이 항상 웃음 띤 모습인 것이다. 완제된 인형처럼 붓 박힌 미소를 위로 삼아 눈감은 권사님의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주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주면서 곁을 지켰다. 어쩌다 눈을 뜨면 순간적으로 세상이 확 밝아지는 듯 새 힘이 솟다가 힘없이 스러져 버리는 신기루 같은 소망을 붙잡고 견디었다.

삼분의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뇌가 점점 기력을 잃어가는 저 마음속에는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을까. 네 딸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이제 모두 결혼하여 여덟 명이나 되는 손주들의 뒤치다꺼리까지 하느라 평생 어디 한 곳에 조용히 앉아보지 못하고 치마폭에 바람이 휙휙 거릴 지경이던 아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소에 그리도 사려가 깊은 아내였으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분명 주위에서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느낄 것이라 믿어졌다. 그는 한입으로 두말을 하는 인형연극사처럼 함께 성경을 읽고 손잡고 기도하고 음을 맞추어 가며 찬송가를 불렀다.

‘여보 오늘은 찬송가 460장이야.’ ‘지금까지 지내온 것 모두 주의 은혜라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자신에게도 활력주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자기의 얼굴에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어디든 먼데로 떠나고 싶다고 하였다.

권사님이 세 번째 스트로크로 응급사태를 겪고 난 후 의료진이 링거호스를 제거하자는 언질을 심각하게 비쳐왔기 때문이었다. 수천 달러의 치료가 전혀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머지않아 결혼 50주년이 다가오는데 몸과 마음이 동시에 기진하여 쓰러질 직전까지 도달한 듯하였다. 고통 없이 편안하게 품위 있게 생을 마치게 한다는 선한 동기의 실행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그를 많이 괴롭혀 왔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며칠간 여행하고 오겠다던 그가 왜 벌써 돌아왔는지 그 자초지종이 무척 궁금하였다. 우리가 들어서자 만면에 웃음을 띤 정집사가 두 팔을 벌리며 반기었다. 병실 안은 무어라 이름 할 수 없는 화사한 공기가 자작하게 괴어 있어 상쾌하기까지 하였다. 창틀에 놓인 작은 트랜지스터에서 찬송가가 나지막하니 흘러나오고 있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길이 함께 하소서.

너무 힘이 들어 멀리 떠나고 싶었다고 한다. 간호사에게 사흘만 달라고 부탁해 허락을 받고 무조건 차를 타고 달렸다. 그런데 갈 곳이 딱히 없었다. 아내가 눈으로 자기를 찾을 것만 같고 눈물에 찻길이 가려져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침대맡에 앉아서 자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일모래가 금혼식인데 저 지경이 되어가지고 금혼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뜨거운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렀다. 자기도 모르게 엎드려 한숨의 기도를 쏟아내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니라. 영감이 퍼뜩 왔다 ‘당신 살아있어?’ 그런데 바로 그때 ‘응’하는 대답이 돌아오더라는 것이다. 식물인간, 뇌사자라는 병의 속성을 상식과 다른 각도에서 관찰하게 하는 큰 사건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주로 정신적, 감성적, 육신적인 능력의 조화를 의미한다. 근래에 와서 인간이 품위를 가지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존엄사의 권리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1994년 미국 오리건(Oregon)에서 처음으로 법적 인준을 하였고 2013년 캐나다 밴쿠버에서는 ‘루게릭’ 환자에 대한 존엄사 권리인정을 처음으로 하였다.

앞으로도 계속 찬반양론을 거듭하겠지만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을 돕는 존엄사보다는 안락사에 대한 논쟁이 더 뜨거울 듯하다. 뇌사나 식물인간 같은 회복 불가능한 병에 대해 자연적인 죽음을 맞기 전에 인위적으로 죽게 하는 안락사는 편안한 죽음 내지 행복한 죽음을 뜻하는 의학적 행위로 간주되지만 오늘 날엔 다분히 의도적인 죽음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정집사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라일락 꽃에 코를 대고 있는 권사님. 꽃 향기를 맡고 있는 것일까 오늘따라 신부의 미소가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몸이 아플 때나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영원히 변치 않을 황금의 미소였다. 뇌가 단지 삼분의 일이나 그보다 더 적게 살아있더라도 사랑을 할 수 있는데 품위 있게 생명줄을 제거할 수 있을까.

오늘 80세 시니어 운전면허 재시험에 패스한 정집사가 기쁨에 들뜬 환성을 발했다.

‘이제 집사람은 안락한 곳에 있으니 안심하고 어디든 가도 되지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면 오래 참아준걸 칭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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