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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다. 또 내린다.

커다란 광주리로 털어 붓듯 쏟아진 폭설이 두 자 길이나 쌓여 현관문을 열 수 없다. 학교가 개학을 연기하고, 관공서가 문을 닫고, 밴쿠버 어디에서는 돌풍을 몰고 온 눈사태에 나무가 뿌리 채 뽑히고 집이 무너지고 동네가 온통 눈에 범벅이 된 난장판이 되었다 한다.

부르릉 ~ 옆집 앞집 착한 이웃들이 길을 터주고 제설차가 덜컹거리며 찻길을 열어준 것이, 코로나로 억제 당했던 일상이 눈 때문에 완전히 감금 상태가 되었다가 겨우 빠져 나왔는데 눈이 온다. “또”라는 단어엔 이런 모든 불평과 짜증이 전부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데크에 나가 손바닥을 펴고 눈을 받는다. 차가움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보드라운 눈이 금세 사르르 녹아버린다. 흰 눈에 덮인 뒤뜰을 바라보니 폭설의 참상이 겹쳐 떠올라 어두운 상념에 젖게 한다. 문득 머리를 세차게 젓는다. 네 탓이 아니야. 이처럼 하얗고 솜털보다 더 가벼운 네가. 절대로 너는 아니라고 머리를 흔든다.

 눈은 기상학적으로 구름 속의 수증기가 얼어서 고체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다. 눈의 모양은 생성과정에 따라 함박눈(굵고 탐스럽게 내리는 눈), 진눈깨비(눈과 비가 섞여서 오는 눈), 가루눈(분설. 뭉쳐지지 않고 가루 모양의 눈), 싸락눈(빗방울이 내리다 갑자기 얼어서 내리는 눈) 등이 있고 내리는 현상에 따라 소나기눈(폭설. 갑자기 많이 내리는 눈), 눈발(발처럼 줄을 이어 죽죽 내리는 눈), 눈보라(바람에 날려 세차게 몰아치는 눈), 눈갈기(쌓인 눈이 말의 갈기처럼 흩날리는 눈보라), 눈안개(눈발이 자욱하여 사방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희부옇게 보이는 눈발), 외에 마른 눈(비가 섞이지 않은 눈), 젖은 눈, 굳은 눈이 있고, 자국눈(겨우 발자국이 날 정도로 적게 내린 눈), 살눈(살짝 얇게 내린 눈), 잣눈(한자 정도 쌓인 눈), 길눈(한길 사람의 키 정도 높이 내린 눈), 날린 눈(지표면에 쌓인 눈이 날려 올라가 쌓인 눈) 등이 있다.

숫눈(눈이 와서 쌓인 채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 밤눈(도둑눈. 밤에 내린 눈), 꽃눈(나뭇가지에 내려 앉아 꽃이 핀 것처럼 보이는 눈) 등도 있다. 하지만 마음의 상태에 따라 붙여진 이름은 없을까.

수억 개의 눈 입자는 모두가 제각기 다른 육각형 모양이다. 그렇다고 둘 이상이 작당하여 못된 힘을 과시하는 속물이 아니다. 따뜻한 느낌과 사고의 상호 교류가 전류처럼 흐르리라.

첫 눈이 내리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무작정 눈길을 걷던 옛 시절이 있었다. 대학 캠퍼스가 있는 용두동에서 동대문 종로 서대문을 지나 아현동까지 눈을 맞으며 걷노라면 눈은 젊음의 낭만이고 깊은 내면과 대화하는 사색의 샘터였다.

미국 버펄로에서 맞은 첫 겨울의 눈을 잊을 수가 없다. 무릎까지 쌓이는 눈은 새벽마다 나가서 삽으로 치워야 하는 불편한 존재였다. 더 이상 머리에 어깨에 맞으며 고개 숙이고 자신을 돌아보던 낭만의 눈이 아니었다. 얼음길 운전을 염려하여 안절부절못하던 매일이었다. 한 달이나 지나 전해진 어머님의 부음을 듣고 마음속 고통을 푹푹 찍어대던 하얀 발자국은 진눈깨비의 얼음판이었다.

3년 후에 캐나다 런던으로 오게 되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였지만 눈과 더불어 겨울이 오고 눈과 함께 겨울이 떠나는 듯하였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기록적인 눈사태라는 밤눈이 내렸다. 이층 침실에서 일어나니 밝은 아침햇살이 창문으로 흘러 들어왔다. 아, 오랜만에 참 맑은 날씨네. 콧노래를 부르며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왔다. 그런데 아래층은 깜깜하였다. 전등을 켜니 들어왔다. 전기고장은 아닌데 왜 이렇게 깜깜할까 커튼을 젖히다 깜짝 놀랐다.

눈이 창문 높이만큼 쌓여서 사방이 깜깜한 것이었다. 문을 안에서 열 수도 없어 완전히 집안에 갇혀버렸다. 티브이와 전화에서는 집안에 혹시 어린아이와 노인이 있는지 문의하는 전화가 계속 잇달았다. 소방대원들이 제설차를 움직여 어린아이들의 우유와 비상약과 식품을 배달해 주었다.

일주일 후 차를 움직이려고 시동을 거니 끄떡도 하지 않았다. 차 앞 후드를 열고 들여다보니 눈이 빈틈없이 꽉 차 있어 차를 움직이기까지는 또 며칠간의 기다림이 있어야 했다.

뿌리 내리기에 지쳐 돌풍에 돛이 부러진 돛배처럼 표류하던 시기. 그날도 눈이 내렸다.

밤눈 함박눈이 한자는 되게 내린 위로 아침 햇살이 퍼지고 있었다. 파란 하늘, 하얀 눈, 찬란하게 빛나는 햇살이 비참한 낙오자의 우울감에서 허우적거리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리트머스시험지를 휘젓듯 새빨간 불씨 하나를 찾아 주었다.

수정처럼 맑은 하얀 눈 입자가 프리즘이 되어 희망과 이상, 사랑의 칠보 색 무지개로 빛을 발했다. 위로와 격려의 무지개였다.

한숨이 수증기로, 눈물어린 빗방울로 쏟아지다 얼어 하얗게 표백된 눈송이가 귓가를 스친다. 내가 다 아노라고, 결코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수억 약속의 무지개가 소복소복 내리고 있다. **

 

 * 리트머스 시험지: 로버트 보일(1627-1691)이 제작. 리트머스이끼에서 추출한 용액에 종이를 담갔다가 꺼내서 말린 것. 산과 염기를 구별하는데 사용함. 산성용액에서는 빨강색, 알카리성 용액에서는 파랑색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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