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 시간은 족히 지난 듯하다. 방문한 목적은 제쳐두고 자기의 넋두리를 풀어놓고 있는 그를 그저 멍히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눈에 다 보이도록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끌어 오르는 울화로 얼굴은 붉어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열중하여 침이 튈 지경이었다.
원하는 대학교육을 순조롭게 마친 충실한 남매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건실한 남편, 아름다운 부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남들이 바라는 행복한 가정의 조건은 거의 다 갖춘 듯 보이는 부부인데 다투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말을 자르듯 결론을 물었다. “헤어지자고 했더니 금방 조용해졌어요.”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하였다.
쓰레기 거두는 날, 이웃에서 오래된 가죽소파를 내놓았다고 한다. 알뜰한 부인은
그 무거운 소파를 낑낑거리며 가져왔다. 부유한 동네이고 보니 새것으로 바꾸면서 옛 것을 내놓고,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애썼다고 다독이기는커녕 ‘그런 건 왜 들여와.’ 퉁명을 부렸다는 것이다.
펄 펄 뛰며 언성을 높이는 남편의 분노는 자존심 상했다는 것 외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볼멘소리로 시작된 다툼은 그렇게 시작되다 보니 점점 가속도가 붙어서 언덕 위에서 굴러 내리는 빈 마차 꼴이 되어 털그럭 거린 모양이었다.
어느 기관에서 부부 싸움의 요인을 조사했다고 한다. 수치는 정확히 기억에 없으나 가장 큰 원인은 ‘자존심’이었다고 한다. 남녀에 있어 자존심 구기는 조건들을 조사해 보니 ‘못났다’가 최고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에게 있어 ‘못났다’는 말은 “외모가 아름답지 못하다”의 한 가지 뜻이나 남자에게는 “외모가 흉하다”는 것 외에 “성격이 고약하다”, “똑똑치 못하다”, 그리고 “능력이 없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능력이 없다는 말은 또 여러 가지 예민한 항목들을 담고 있어서 자존심을 건드린다는 것은 때로 억제된 불만의 화약고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자존심은 가히 남자의 존재가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민자의 가정에 부부싸움이 많은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도 많은 이민 직장인들은 서투른 영어를 말하면서 전혀 다른 문화와 생활습관에 얽혀 비비며 살고 있다. 직장에서의 지위가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정신적 심적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는 통계는 이제 상식화된 이야기이다. 존경을 받아보지 못한다는 이유도 민족적 스트레스 요인에 크게 작용할 것이다.
아버지 날. 어버이 날. 그 어떤 날에도 사랑과 아울러 아빠가 엄마를, 엄마가 아빠를 존경해야 한다는 마음자세를 가다듬어야 될 것이다. 아무리 못나고 고약한 성격이라도 ‘죽음’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넉넉히 감내할 수 있는 조건들임을 말하고 싶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여자는 돕는 배필로 지어진 존재이다.
돕는다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다.
세상 모든 아버지께 “부족한 그 모든 것, 그런대로 다 사랑한다.”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큰 웃음으로 어깨를 활짝 펼 것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아버지 되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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