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벽두, 수필가 여동원 선생이 87세를 일기(一期)로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비보에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분의 중후한 성품과 격조 높은 글을 더 이상 접할 수 없게 된 후학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행운유수같이 살다 가신 선배님의 마지막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선생은 1937년생이라 저보다는 11년 앞서시고, 작품 활동의 연조로 보자면 30년쯤 선배가 되는 분입니다. 제가 이민살이를 시작한 그때 벌써 선배님은 수필 문을 발표하고 계셨지요. 실례의 말씀이오나 문학에 문외한이던 저는 “영어, 불어로 생활하는 캐나다에 모국어로 문학 활동을 하는 분들이 꽤 있구나. 고국을 잊지 못하는 마음에서인가, 아니면 의리 때문인가?”라는 생각에 문인들의 수필 문을 읽으면서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곤 했었지요.
“선한 마음, 착한 행동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더라”는 뻔한 이치를 되씹으며, 마음고생이 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민 초기에 서쪽 2백 킬로미터의 L 시에서 가게를 할 때 사악한 건물주를 만나 경제적 봉변을 당한 데다, 토론토로 돌아와서는 겨우 60을 지나면서 수술로 인해 경제 활동조차 멈출 수밖에 없었지요. ‘인생, 그거 별것이 아니구나. 캐나다에선 건전한 상식도, 동포의 의리도, 종교의 가르침도, 법률가의 보호마저 기댈 게 못 되는구나. 인생의 의미 실현도 못 한 채 이대로 저물고 마는가?’라는 자괴감에 빠져 허탈했습니다.
그래도 ‘내 인생의 빈터는 꽃밭으로 가꾸어야 한다’란 식자로서의 의무감이 가슴에 남았던지, 저는 다시 ESL School에 등록하여 한동안 영어 공부에 힘썼습니다. 2014년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문예 교실’에 나아가, 생애에 처음으로 ‘문예 창작’을 수련했습니다. 그래서 2015년 초 문인협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계간수필>의 초회 추천, 그다음 해엔 완료 추천을 받아 한국 문단에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저는 이런 진척이 신문이나 문예지에 간간이 글 한 편씩 실을 승낙서를 받은 셈이라 여기며, 그동안 저를 이끌어준 글동무들과 보조를 맞추는 마음으로 몇 해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성품만큼이나 담담한 필치로 엮으신 선생의 수필 문은, 산 계곡을 굽이치며 재잘대는 개울물 소리 같은 맛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문화 현상에 즐겨 천착하셨는데, 특히 이민자가 잊고 지내는, 옛 풍습이나 한국 문화의 편린을 수필 문에 담아 소개하는 열정이 남다른 분이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선생의 글에선 도포 자락 날리며 휘적휘적 걸어가는 옛 선비를 떠올릴, 운치와 품격이 배어났었지요. 각박한 이민살이 중에도 선생의 글을 만나면 마음이 느긋해지던 기억이 나지만, 이 게으른 독자는 제대로 된 감사의 인사조차 못한 채 선생과 영별하게 되었으니, 오호통재! 슬프고도 죄송할 뿐입니다.
2016년 7월의 어느 날 선배님은 수필 반이 20여 년 이어오던 합평 교실을 찾으셨지요. “나도 힘을 내어 수필 모임에 나와야지”라시며, 당신의 마지막 저술이 된 <밖에서 모국 보기 50년>을 나눠주고 격려하시던 모습도 바로 어제 일 같습니다. “위장 절제 수술을 세 번이나 받는 바람에 내 위장이 다 사라졌다”고 하시며 저간의 투병 담도 들려주셨지요. 미욱한 저는 그때야, ‘아하! 선배님 특유의 부드럽고 담담한 수필 문은 육체적 고초를 삭히며 피워올린 고운 꽃송이구나’ 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답니다.
그해 9월의 심코(Simco) 호숫가. ‘호반 문학제’가 열린 달 밝은 밤에 선생은 한복 두루마기, 통영갓에다 쥘부채를 펼치시며 <사철가> 시조창唱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호강시켜 주셨지요. 저는 세수 80의 선배님이 긴 시조를 온전히 들려주려고 얼마나 연습하셨을까 싶어 짠했습니다. 암송 중 멈칫하던 때면 이내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와 달아나던 선생의 총기聰氣를 붙들어주었던지, 결국 완창을 하셨지요. ‘문예의 정신’을 후학에 일깨워 주신 장면이요, 그것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던 순간이었습니다.
2018년 1월 27일 신춘 문예 시상식장에서 저를 보신 선배님이, “지난 연말에 상을 하나 받았던데? 축하해요! 좋은 글 많이 쓰세요”라고 격려하셨지요. 협회에 회원이 많으나 따뜻한 ‘축하의 인사’를 건넨 분은 수필 반의 두세 분 선배 외에, L 교수, 여동원 선생뿐이었습니다. ‘그런 냉랭한 마음은 어디에 연유할까?’란 의문이 일었지만, 아둔한 머리로써는 헤아리기 어렵군요. 축하하는 데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나 봅니다. 수필은 ‘가슴으로 쓰는 정情의 문학’이라 했습니다. 자칫 인간성이 메마르기 쉬운 디지털 사회에서, 수필이 바로 그런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닐까요. 여동원 선배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씨가, 그리워지는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입니다
2024년 12월 초, 후학 윤종호는 영전에 머리 숙여 절하며 선생과 함께했던 추억을 되살린 몇 자 글로써 뒤늦은 영결을 고하려 합니다. 인간적인 멋을 맘껏 보여주신 여동원 선생의 영혼이시여! 먼 길 평안히 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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