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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go
현대인의 하루/박엘리야/문협회원
gigo

 

미지근한 바람을 느끼며 어두운 동굴 속으로 내려간다. 회색 공기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카드 기계에서 나오는 반복적인 기계음이 허공을 채운다. 삑, 한 사람의 하루가 등록되는 소리. 긴 지하 통로를 따라 크고 작은 다수의 사람이 지나간다. 지하철이 들어오는 기둥에는 자살 방지 광고 옆에 페스티벌 광고가 있고, 침대 광고 옆에 커피 광고가 있다.
광고만큼이나 다양한 바람을 가진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다.

 

지하철 문이 닫힌다. 유리창에 비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유리창 안에 있는 많은 승객을 본다. 승객들은 음악을 듣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같은 행동을 매일 반복하지만 그들은 함께이며 동시에 혼자다. 각자의 커다란 에어 버블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빠져 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세계는 홀로 완성된다. 끝에 앉은 아주머니는 노란 꽃들이 튀어나온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다. 저 끝에 앉은 사람은 다리를 꼬고 두꺼운 책을 읽고 있다. 노약자석에 앉은 학생 세 명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고 그 대각선에 앉은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울고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너무 많은 인연은 없느니만 못한 걸까. 승객들은 자신의 도착지가 되면 올라탔을 때와 같이 혼자 알아서 내린다.

 

일터를 향해 앞을 바라보며 구둣발 걸음들이 분주하다. 길가에 있는 가로수의 나무가 계절을 타는 것도, 지난주까지 코너에 앉아 있던 노숙자가 오늘은 없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한 가지 아는 것은 출근길에 가는 카페가 문을 열었고 거기서 아메리카노를 살 수 있다는 것뿐이다. 줄을 서서 이메일에 답장하며 커피를 배식 받는다. 따듯한 종이컵이 손가락에 닿자, 사람들의 얼굴에 끼어 있던 잠이 벌써 깬다. 커피를 한 손에 받아 들고 일터를 향해 마저 걷는 이들의 머릿속은 벌써 일을 시작한 듯 하다.
그리고 또 퇴근길. 아침에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간다. 따듯한 바람이 나오는 입구에 앉은 머리 긴 노숙자가 큰 목소리로 외친다. 좋은 저녁 보내세요, 여러분! 너무도 인간적인 그의 말이 물 위의 기름처럼 통로를 둥둥 떠다닌다. 마음이 동해 인파 속에서 잠시 멈춰 섰지만, 내가 가진 건 신용카드밖에 없다. 현금을 챙기는 걸 또 깜빡했다. 퇴근길 인파처럼 그들을 생각했던 마음은 매번 쉬이 쓸려가 버린다. 그를 힐끗 쳐다보고 내일만은 하겠노라 하루 더 약속을 미루며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둠 속에서 노란 불이 번쩍이더니 지하철이 요란하게 들어온다. 익숙한 먼지바람을 맞으며 하루가 또 지나갔음을 느낀다.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잠깐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리는 역 바로 전 역에서 눈을 뜬다. 먼 옛날 조상들이 쓰던 귀소본능은 아직도 유효한 걸까. 지하철을 내리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 집 문을 연다. 가족들이 밥을 먹고 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며칠 전 직장 동료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그는 가끔 지하철역 근처에서 저녁을 사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역 앞이면 곧 집에 도착할 테니 들어가서 가족과 함께 먹으면 되지 왜 혼자 먹냐고, 나는 물었다. 그는 몇 초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냥 혼자 먹고 싶을 때가 있어서” 그의 짧은 대답보다 인상적인 건 그의 얼굴에 스친 색깔이었다.

 

하루를 정리하고 침대에 눕는다. 머릿속에 아침에 스치듯이 보았던 울고 있던 여자가 문뜩 떠오른다. 소리도 없이. 그녀는 왜 울고 있었을까. 지하철 안에 있는 누구도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다들 잠시 그녀에게 시선이 멈춰있다가 못 본 척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대인의 위로법. 어쩌면 그녀는 그곳이 제일 편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가득한 출근길의 지하철에서 느끼는 고독이 그녀가 원했던 게 아닐까. 우린 어느새 따듯한 포옹보다 차가운 자유에 익숙해져 버렸다. 어깨를 빌려준다는 사람들을 다 밀쳐내고 플라스틱 광고판에 고개를 묻은 그녀처럼.
괜히 생각해서 무엇하나,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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