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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go
삶의 끝 언저리에서/허정희(문협회원)
gigo

 

종이에 적힌 주소대로 차를 몰고 갔다. 행여 잘못 찾아왔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종이의 번호와 건물의 번호가 똑같았다. 도착한 곳에는 구급차가 와 있었고, 구급차 위에서 소리를 내며 쉼 없이 돌아가는 빨간 불빛이 길가에 흩어져있던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불러 모았고, 다급한 소리에 놀란 발걸음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천장이 낮은 건물은 우리를 답답하게 맞이했고, 주변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서둘러 입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건물에서는 휠체어를 탄 여인이 힘없이 구급차에 실려 갔다.

몰려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맥없이 흔들렸고, 불안한 마음에 나도 실려갈 것 같아 문 뒤로 몸을 숨기고 구급차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삶의 끝 언저리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입구의 반대쪽에 안내실이 있었고, 벽면을 따라 늘어선 흰색벽을 지나자, 안내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40대쯤 보이는 안경 쓴 여자는 눈을 마주치기 싫은 듯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았다. 그녀의 컴퓨터 화면이 나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었고, 낯선 공기와 함께 한참 동안 거기에 서 있었다. 눈을 힐끔거리며 안경 위로 치켜뜬 여자의 눈동자가 나를 훑어 내리다가 다시 컴퓨터로 돌아가 버렸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서 있던 나는 어색함을 감당할 수 없어 책상만 빤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녀의 안경 뒤로 숨어있던 눈이 나와 마주쳤고, 나는 그녀의 눈길이 사라지기 전 재빨리 입꼬리를 올려 머쓱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코끝으로 내려온 안경을 위로 올리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안내실 앞에서 기다리던 내가 양로원 방문이 처음이며, 시아버님 친구 소개로 왔으며, 이곳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책상 밑의 스위치로 누군가를 불러냈다. 그녀는 인내심 있게 나에게 집중했고, 내 다리에 매달린 그녀의 시선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입구만 바라보았다. 매니저라는 여자가 미소를 띤 얼굴로 친절한 인사를 건네자, 안내실의 안경 쓴 여자가 재빠르게 발길을 옮기며 요양원 소개에 열을 올렸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신 시아버지가 흥분된 눈으로 큰 소리로 말한다. 한인이 운영하는 양로원이 있으며, 그곳에 가면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어 외롭지 않고, 한식을 먹을 수 있고, 한국말로 소통할 수 있다고 당장 그곳에 가고 싶다고 한다. 나도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한식을 매끼 해드리고,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믿었는데 섭섭함이 밀려온다.

채울 수 없는 거리감이 시아버지와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다. 하는 수 없이 남편과 나는 친구 말에 흥분된 시아버님을 모시고 요양원을 방문하기로 한다.

복도를 따라 양 옆으로 줄지어 들어선 작은방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방은 침대 하나와 TV 그리고 옷 서너 벌 넣을 옷장이 들어갈 정도의 넓이와 작은 욕실이 있었다. 규정상 방만 빌려주고, 가구는 각자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방들이 작았고, 샤워실이 없는 곳도 있어 공동샤워실이 층마다 하나씩 있었다. 좁은 방에 비해 복도가 넓게 느껴졌고, 벽에 달린 창문은 바깥세상을 볼 수 있는 은밀한 장소였다. 창문에 비친 요양원은 지루했고, 하루를 견뎌내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바닥을 기어 다녔다.

 

저녁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복도에 몰려있었다. 그들은 한국말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고, 상대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처럼 복도를 떠돌아다녔다. 시아버님은 사람들에게 악수하며 인사를 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친절한 얼굴로 눈을 마주쳤다. 악수한 사람이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사탕을 꺼내 시아버님에게 나누어 주고, 나에게도 주었다. 복도에 깔려 있던 외로움이 사탕 한 알에 싸여 전해왔다. 사탕을 입에 넣고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는 사탕 껍질 소리도 사람들의 대화도 들리지 않았고,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내 입 안에 누워 있던 사탕을 일으켜 삼켜버렸다. 사탕이 내 심장에 박혔고, 터져버린 외로움이 온몸에 퍼졌다. 힘없는 서러움이 몰려왔고 복도를 향해 서 있던 흰 벽이 허무하게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식당으로 가기 위해 흰 벽을 지나갔고, 벽은 무심하게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경 쓴 여자가 내 옆에 바짝 다가서서 말했다. 방이 다 차서 하나밖에 남지 않아 오늘 계약하지 않으면 금방 없어질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방이 빨리 채워져 우리에게 영원히 차례가 오지 않았으면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끝내 하지 못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차 밖의 거리보다 더 복잡하다. 남편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고, 애써 눈물을 감추려 말없이 운전대만 쳐다본다. 도로 위의 방지턱에 차가 흔들거리며 속도를 늦춘다.

느린 차의 움직임이 습관처럼 지나온 거리를 소중하게 지나간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함께 있을 수 있는 순간들이 간절하게 사라져간다. 돌이킬 수 없는 삶의 끝 언저리에서 맞닥뜨린 무기력과 허무가 평범하게 지나간 날들을 그리워한다. 그의 기울어진 어깨가 보이고, 그 어깨 위로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 기대어 있다. 모두가 가야 하는 길 위로 흐린 구름이 내리고,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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