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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가장 긴 동지를 지나면 조금씩 해가 길어진다. 내가 사는 토론토는 해 지는 시간이 연중 가장 짧을 때와 가장 길 때 세 시간 차이가 난다. 일광절약 시간제를 적용하느라 시간 계산이 혼동되기도 하지만, 연중 일몰 편차는 세 시간이다. 세 시간은 180분이니, 6개월 동안 180일에 걸쳐 매일 1분씩 늦게 해가 진다. 아침에도 1분씩 더 일찍 해가 뜨니, 낮의 길이가 매일 2분씩 시나브로 늘어난다. 위도에 따라 다르지만, 내가 사는 위치에서는 6 개월에 걸쳐 매일 2분씩 낮이 길어지다가, 하지(6월 21일~22일)를 지나면서 다시 6개월 동안 2분씩 짧아진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일어나는 해 길이의 변화가 한 주기를 마치면 그것이 1년이다. 지축의 기울기,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이에 따른 계절의 변화가 펼쳐지는 모습을 우리는 자연의 순리라고 한다.

 

두어 달 전 개기일식 때,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식 현상이 경이로웠다. 그런데 일식이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도 무척 신기했다. 인류 수백 수천 년 전부터 일식 날짜를 계산했다고는 하는데, 오늘날에는 정교한 과학지식이 이전과 달리 좁은 전문 영역 안에 머무르지 않고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신의 자리를 과학기술이 차지했다고 하는 유발 하라리(역사학자/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의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천체를 관측하고 정교한 달력을 만들기에 공들였던 로마제국에서 원을 360도로 정의했다. 1년, 365일에 걸쳐 규칙적으로 전개되는 태양 각도의 변화를 측정한 결과다. 로마 숫자의 60진법이라는 독특하고 비효율적인 셈법도 로마의 그런 천문학과 기하학적 탐구의 결과였을 것이다. 로마제국은 문명을 성큼 발전시킨 징검다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멸망에 이르기까지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오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2024년의 하지가 며칠 전에 지났다. 그러고 보니 연도표기도 로마시절에 만들어진 것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이제 태양은 일 년 중 가장 높은 산마루를 넘었고, 12월 동지까지 6개월 동안은 낮의 길이가 매일 2분씩 짧아질 것이다. 텃밭을 일구는 사람에게는 밭에 남은 감자를 마저 캐야 할 시기다. 3월에 파종한 감자는 매일 햇볕을 한 숟가락(2분)씩 더 먹고 자라다가 하지가 되면 자라기를 다 한다. 해바라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해를 바라보는데, 감자는 춘분부터 하지까지 긴 호흡으로 태양이 길어지는 길을 뚜벅뚜벅 따라간다. 그러다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면 그 걸음이 멈추기에 걷어 들여야 할 때다. 한반도 농사 환경에서는 그렇게 해야 맛있는 감자를 맛볼 수 있다. 이름 하여 '하지감자'라 하지 않던가. 감자를 캐낸 자리에는 8월에 배추를 파종하든가, 아니면 흙이 힘을 기르도록 쉬게 했다가 가을에 마늘을 심어 이듬해 봄에 수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는 태양의 길이가 변하고, 밭에서는 작물이 바뀌어 가면서 1년이 또 한 바퀴 돌아간다.

 

하지가 지나면 한반도는 으레 장마 시기에 접어든다. 뜨겁게 달궈진 대지에 굵은 비가 내리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강수량이 장마철에 집중된 한국에서는 물난리가 나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6·25 전쟁이 일어난 새벽에도 장대비가 내렸다고 하던데, 아마 그것도 장마전선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작년에는 약간 늦은 장마가 광폭하게 몰아쳐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 신(神)이 있는 곳 저편에 악마가 있는 것처럼, 자연은 아름답고 자비롭지만, 동시에 거칠고 무서울 때도 잦다. 문명의 발전이 자연을 정복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자연재해는 여전히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

 

작년 물난리 때 수해복구를 위해 출동한 해병대원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주역이 될 늠름한 청년이 자연재해 때문이 아닌, 준비되지 않은 임무수행으로 참변을 당했다. 세월호가 기울어질 때 그저 선실에 남아있으라고 했던 지시만큼이나 어이없는 수색명령이었다. 명령에 따라 아무 장비 없이 강물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는, 몸 가누지 못할 물살에 휘말려 그만 황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에는 감자를 캐야 하듯. 무고한 병사의 죽음은 책임을 밝혀야 한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는 그것이 도리다. 그런데 아직도 이를 막아서는 사람들이 있다. 진상을 규명하려는 이를 오히려 보직에서 해임하고 고발하는 그들의 시도는 오늘날의 세상을 60진법으로 재단하려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엄숙한 표정으로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진지한 억지다. 지난날의 백성이 이제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시민이 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큰 시대착오다. 그들에게 하지가 한참 지난 감자를 먹이고 싶다. 싹이 움트는 묵은 감자, 푸짐하게 먹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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