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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엘리야. 문협회원 

 

토요일 오후, 홀로 주방에 서서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오갔다. 수납함 문을 열고 감자와 양파를 꺼냈다. 이번에 슈퍼에서 너무 큰 봉지들을 샀는지 절반쯤 먹어갈 때가 되니 다들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겉껍질이 물컹해져 가는 몇몇 양파들 사이로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양파를 하나 꺼냈다. 주홍빛을 띠는 얇은 껍질에 묻은 흙을 물에 씻어냈다. 껍질을 벗기고 양파를 반으로 잘랐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던 양파의 내부가 갈색으로 변해있다. 겉이 아니라 속이 상해버린 모양이었다. 제일 여린 층을 품고 있는 속내부터 한층 한층 상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양파의 무른 부위를 들어내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하지만 요리하는 내내 마음속으로는 쓰레기통 안에 있는 버려진 양파 속으로 시선이 갔다.

겉은 남보다 멀쩡했지만 제일 깊은 곳에서부터 상처가 점점 차오르던 그 양파. 왜 다른 양파들처럼 겉에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아픔을 제 안에 가두어 두었을까.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많이 상했다는 걸 알고는 있었을까. 언제쯤 자신의 속마음을 밖으로 드러내려 했던 걸까. 양파의 속내를 남몰래 들어버린 것 같아서 괜스레 마음이 쓰인다. 양파의 여린 마음이 끝내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그 양파의 속마음에는 겉으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양파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을 것만 같다. 자기 자신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 이제 더는 누구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양파의 이야기가 내 귀에 들릴 것만 같다. 양파의 여린 속을 끝내 문드러지게 했을 차마 말로 표현되지 못한 이야기가.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그랬냐고, 어째서 내내 홀로 아픔을 삭였느냐고, 나는 양파에 묻는다. 양파에서 그날 밤 엄마의 씁쓸한 웃음을 떠올린다. 너무 오래된 과거가 되어, 안다는 사실이 더 이상 아무 소용도 없을 때 스쳐 가듯이 말해 주던 날. 왜 이제야 얘기 해주냐고 묻자 엄마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답답함에 침묵했다. 양파 속을 꺼내어 들여다보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겉에서부터 상해가는 양파는 주변에 있는 양파를 상하게 만들지만, 안쪽에서부터 상하는 양파는 주변에 있는 양파를 온전히 살게 한다. 양파의 깊은 속도 모르고 나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보채기만 했었나 보다. 감당하지도 못할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 보고 싶어서. 결국 나는 긴긴 세월 동안 그런 양파의 마음을 몰랐을 수가 있냐며 스스로 보채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 나도 이미 양파 속을 냉큼 쓰레기통에 버렸고 멀쩡한 부분만 골라 먹어 버린 지 오래였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지나가 버린 뒤였다.

사람들은 흔히 갈등은 대화로 풀어내라고들 말한다. 그렇지만 대화로 풀릴 수가 없는 갈등도 있다. 나눌수록 커져만 가는 갈등도 있다. 그런 갈등은 각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틀어박혀 침묵을 먹고 자라난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할 그 마음은 시간과 함께 겹을 더해간다. 제일 중요한 것들은 되려 말이 되지 못한 채 저만 아는 곳에서 자라난다. 각자의 가슴 위에 새겨진 주홍 글자는, 오롯이 홀로 짊어져야 할 몫이 된다.

양파의 깊은 마음을 내가 끝끝내 헤아릴 수 있을까. 나도 누군가를 위해 그러한 깊이를 품을 수 있을까. 내 속은 꽉 차 있어도 갈색으로 물러버린 양파의 속보다 가벼웠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사실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덤덤히 홀로 견뎌낸 양파의 세월 앞에서 나는 무력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고, 양파에 말했다. 이제는 나에게 조금은 기대도 된다고. 그렇게 혼자서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양파가 살며시 내 어깨에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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