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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go
어디로 가야 할까 /허정희/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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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back where you come from‘.

그 사람이 나에게 고함을 질렀다. 얼굴에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내려앉은 주름 사이로 묵은 때가 끼어 있었다. 엉클어진 머리카락은 갈 길을 잃은 듯 뒤섞여 있었고, 누런 흙탕물에 빠진 것 같은 그의 눈빛은 희미해서 초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계절 지난 허름한 외투는 그의 큰 키를 땅바닥에 내려놓았고, 바닥에 덮인 외투만큼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엉성한 이빨 사이로 튀어나온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그 사람이 뱉어낸 한마디가 나의 지난 시간을 되감아 놓았다. 나는 되감긴 시간으로 들어가 보았다.

 

37년 전 남편이 사는 캐나다로 이민 왔다. 살면서 낯섦을 지우려 외로움도 견디며 자신 있게 살았다. 자신감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고국에서의 나를 지우려는 허탈한 노력이 나를 단단하게 세웠고, 뒤따라오는 시간이 나를 앞세워 지금으로 데려왔다. 이곳에서 지낸 세월이 한국에서 살았던 것 보다 더 길어질 즈음 어느 곳을 가든 익숙해질 수 있었고, 낯섦에도 견딜 수 있게 강해져 있었다.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다가도 눌러놓은 향수가 한 번씩 건드려지면 어느새 발길은 고국을 향해 있었다.

 

본향을 향한 나의 그리움은 온종일 골목에서 놀다, 어둠이 내리면 집으로 가고픈 어린 시절처럼 찾아왔다. 어둑한 골목길에서 집으로 향하던 길에는 밥 짓는 냄새와 하나 둘씩 켜지는 전등 빛 풍경과 바빠지는 나의 발걸음 소리가 있었다. 진해지는 어둠 속에서도 돌아가 쉴 수 있고, 언제든 기다려 주는 부모님이 있었다. 설레던 나의 고국 방문은 밤하늘로 옮겨가신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없음에 텅 빈 마음으로 돌아왔고, 고국에 남아있는 기억들과 헤어지는 서글픔이 그림자처럼 따라와 내 옆에서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고국으로 떠나려 챙기던 트렁크는 무게 초과로 세관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밤새도록 무게를 재고 또 재었다. 트렁크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 가보고 싶은 곳으로 가득 채워졌고, 가눌 수 없는 흥분이 트렁크에서 넘쳐흘러 무릎으로 꾹꾹 누르고, 올라앉아 내 흥분보다 더 벌어진 지퍼의 입을 닫아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반기는 고국의 그리운 냄새와 소리, 그리고 골목마다 새겨놓은 추억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그립던 고향과 살던 동네가 나를 반겼다. 내가 떠나있던 시간만큼 도시는 변해있고, 어린 시절의 고향 집과 동네는 작아진 기억만 하게 서 있었다. 그것은 내가 멀어진 시간이 가져온 풍경이었다. 그냥 그대로 이길 바랐고, 나처럼 멈춰진 시간에 머물러있기를 바랐는데. 가는 곳, 만난 사람들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고, 그들도 나를 먼 곳에서 온 사람으로 대했다. 고국에 있으면서도 고국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얼까.

 

추억 속의 장소가 변해서 느끼는 내 속 좁은 서운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은 사라지고 변해버린 낯섦이 나를 그곳으로부터 뒷걸음질 치게 했다. 그 변화가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는 현존의 결과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소멸해 가는 것들에 새겨진 한 조각 햇살 같은 한때의 젊음을 만나고 싶어, 나는 고향의 골목길에서 1980년대 말 나의 과거를,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내가 그곳에 있지 않다면 난 어디로 가야 할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 헤매는 그곳이 진정 내가 원하는 곳일까? 아니면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얼마나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살면서 무던히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스쳐 지난다.

 

가던 길을 다시 돌아 나에게 고함치던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의 자리를 찾은 걸까? 아니면 자기도 헝클어진 머리칼처럼 길을 잃어 내게 소리친 것일까. 땅바닥에 앉아 구걸하며 내민 그 사람의 검은색 손톱이 도드라져 보였다. 손톱에 낀 때 보다 작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소리친 그 한마디. 그는 손톱 밑의 먼지만큼을 지키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만큼도 내어줄 수 없다는 인색한 오만이었을까.

나는 주머니 속에서 귀찮게 뒹굴던 동전을 꺼내 때 묻은 그의 손에 던져주었다. 신용카드에 익숙해진 세상에서 갈 길을 잃은 동전이 소리 내 울어대다 사라지니, 내 주머니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동전은 그에게로 가 흩어진 동전 옆에서 말없이 누워있었다. 손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힐끗 쳐다보던 그의 눈빛은 못 본 척 외면하는 도시를 닮아 있었다. 그의 엉성한 이빨 사이로 관심 없이 흘러나온 “Thank you, God bless you”가 소리 없는 소리로 흩어져, 허공 속에 사라졌다. 손에 쥔 차가운 동전이 그의 마음을 녹이고 변하게 했는지. 아니면 관심을 끌기 위한 그의 공허한 외침이었는지. 어쩌면 그가 하루를 견뎌내는 일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그런 말을 하게 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주인 없는 거리에 그 사람이 내려놓은 손바닥 위로 희뿌연 먼지가 떠돌고 있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시간이 먼지가 되어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어디에서 왔든, 어디에 있든, 내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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