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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 하늘과 땅 사이, 많은 사람이 우글거리고 있다. 모두가 내 눈엔 존재라는 이름으로 비추는 부러운 대상들이다.

불의의 사고로 움직임을 멈추면서 나는 존재라는 계열에서 물러났다. “노래를 잃어버린 카나리아는 뒷산에다 내다 버릴까요.” “아니 아니 그건 아니 됩니다.” 라는 가요가 떠오른다. 노래를 하지 않는 앵무새는 더 이상 새가 아니란다. 그래도 내다 버릴 순 없지 않겠는가… 글을 쓰지 못하는 나에게 그 노래가 다가온 건 억지가 아니다.

 

찰나의 실수로 인생 밖으로 내던져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뒷산에 버려지지는 않았지만 붙박이처럼 앉아서 살아간다. 새삼 방안을 휘둘러본다. 벽마다 그림들이 걸려 있다. 저마다의 의미와 표정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만큼은 나의 정서를 닮아온 이 집의 소속들이다. 그런데 오늘은 진열품 같은 개개의 민낯으로 이 집의 임자인 나를 모른다는 내색이다.

익숙한 것들에게서 받는 이질감이 내 집 벽의 그림에서 오는 것 만은 아니지만 뒷방으로 밀려났다는 나의 현실은 부정할 수 없는 더 큰 이질감을 준다. 십여 년 넘게 용케도 견뎌온 나홀로의 생활도 잘 살아온 만큼의 허무를 안겨준 꼴이 되었다.

 

우연히 빠져든 감상인데 그림이 그림을 불러들인 듯 오래 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둑어둑 해가 저물어가는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 화가들이 모여들어 초상화를 그려주는 언덕 거리이다. 거리 한편으로 늘어선 카페들 앞에는 자그마한 둥근 탁자가 놓여 있었고 탁자에 부착된 오렌지빛 등불들은 은근히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하고 있었다. 나도 등불 하나를 차지했다. 예술의 향기에 젖어 드는 양 분에 넘치는 커피와 다과를 즐기고 있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한 중년 화가가 다가왔다. “초상화를 그려줄까요” 그가 물었다. “아니요” 나는 지체없이 거절했다. 당치도 않는 일이라고. 초상화는 귀인이나 미인들의 관심사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믿어 온 나였다. 그러나 그 주변의 분위기는 분명 세상과는 다른 낭만적 향기와 매력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상반신을 의자의 등에 기댄 채 꿈꾸듯 허공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도 그녀는 초상화가 완성된 후에 보게 될 또 하나의 자신을 상상하면서 어떤 도취경에 빠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인을 관찰하는 화가의 눈빛은 직선이었다. 여인의 느긋함이 자아내는 원의 부드러움과 화가의 눈이 발사하는 직선의 날카로움이 세속을 일탈하는 하나가 되어 승화의 세계로 날고 있을 것이었다. 예술과 인간의 본능이 교차하면서 새로이 재생되어 가는 분위기를 나도 덩달아 따라가던 한때의 그 정서가 한 폭의 그림으로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던 것 같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다시 본다. 그 중 한 폭의 한국화에 눈이 멎었다. 내가 그린 한 마리 작은 새다. 새의 깃털이 선명하다. 그 새의 목에 달린 몇 가닥 깃털을 그릴 때 붓을 잡은 내 손과 가슴은 얼마나 떨렸던가. 새가 숨을 쉬고 있다는 실태를 가냘픈 깃털의 떨림으로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세한 털 한 가닥 한 가닥에 숨어있는 숨의 신비를 잡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외형만으로 그려진 깃털은 이미 생명체 없는 허수아비로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을 때 나는 이 지상 가장 낮은 곳, 어둡고 질퍽한 검은 땅 위에 누워있는 하나의 물체로 있었다. 신분도 혈연도 돈도 심지어 내가 어제까지 살아온 집도 생각이 나지 않는 딴 세계의 광경이었다. 다만,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원시 차원 물체의 하나로 황야에 누워있는 그 무엇일 뿐이었다.

고귀하지도 미인도 아닌데, 하는 일상적 개념으로, 그러면서도 다분히 자만적인 태도로 화가를 거부했을 나였다. 교양이니 예의니 하며 사회적 명분을 앞세워 일 차선 위만 달리던 내가 병원 한구석에 누웠다. 그로부터 나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 속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맥박과 호흡을 재고 씻어주고 눕혀주었다. 아무 조건 없이.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생명체라는 사실로 그들의 최상 목적이 되었던 것이다.

 

병원을 거쳐 재활원에서 60일을 머물다가 돌아간 내 집안의 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불편한 몸에 맞춰서 구비된 낯선 기구와 물건들이 마치 객을 맞는 양 주인인 나를 맞았다. 세상은 다시 나에게서 멀어졌고 그렇게 지내온 두 해 동안 나는 이 집의 비품으로 전락되었다

육체가 회복세를 보이는 한편으로 나의 마음은 시들고 비틀어졌다. 내 등뼈를 바로 세워준 사람들이 보여 주었던 생명의 존엄성과 그들의 노고에 감격했던 벅찬 마음씨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상처를 입은 등뼈의 후유증만이 현실이 되어 어두움을 키워갔다. 당당하게 화가를 거부했던 그때의 치졸한 용기가 차라리 그리웠다. 싸우고 다투어 볼 대상도 없는 내 삶은 백지장처럼 무의미했다.

오랜 번민 끝에 다가온 초상화의 기억이 나를 거울 앞에 앉혔다. 세상을 멀리 한 고독의 끝에 다가온 내 얼굴, 백 개 천 개의 얼굴로 인생을 살아왔을 내가 아니던가. 주름살 한 줄 한 줄에 새겨진 흔적이 깊다. “그 흔적 누구의 것이냐? 아흔의 고개를 두 해 넘어온 흔적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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