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협회 / 박엘리야
대기가 무거웠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서 해가 반짝였는데 이제는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집 앞에 내놓았던 쓰레기통이 길가를 미끄러지듯 횡단했고 응급차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한낮의 소란 속에 나도 모르게 손에 쥔 강아지 목줄을 꼭 잡았다. 나무들은 정신없이 흔들렸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아스팔트 길에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날씨에 산책은 무리겠다 싶어 집으로 서둘러 돌아오니 마루에 켠 전등이 자기도 바깥 상황을 안다는 듯 깜빡거렸다. 뒷마당을 향해 난 창문이 어딘가 이상하기에 자세히 보니 배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아 아직 비바람이 치고 있는 뒷마당으로 나갔다. 테라스에는 배나무가 뿌린 가지들과 흙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테라스에 쓰러져있는 의자들을 헤치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배나무는 밑동이 뜯겨나간 채 마당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쓰러져 있었다. 나무뿌리 사이에 숨어 있던 달팽이 한 마리도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내게 묻는 것 같았다.
배나무는 내 눈앞에서 말없이 쓰러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면 살랑살랑 꽃비가 내리던 모습도, 근처 야생 동물들을 다 끌어모으던 탐스러운 배도 더 이상 볼 수 없을 테지. 배나무의 새하얀 꽃을 보는 것도 그렇게 이번 봄이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배나무는 얼마 전 꽃잎을 떨어뜨리고 한창 배를 키워낼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열매를 준비하던 배나무의 정성도 그렇게 한순간에 끝나버린 것이다. 찰나에 배나무의 운명을 바꿔버린 바람이 잔혹한 것도 같고, 지나가는 바람에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진 건 자연스러운 순리인 듯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억울한 것도 같고 당연한 것도 같아 이를 어떻게 느껴야 할지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마치 이 사건에 대해 무언가에게 책임이나 이유를 묻고 싶은데 물을 대상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가진 혼란과 의문에 대한 대답은 순리라는 침묵뿐이었다.
분명 한 생명체의 존재는 소중한 것임에도, 이렇다 할 의미도 없이 순식간에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내게는 참으로 의아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아닐 거라고, 머나먼 미래의 일일 거라고 믿었었나 보다. 배나무는 태연하게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외려 내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듯했다. 그 혼란스러운 공백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건 매번 남은 자의 몫이다. 나는 묻고 또 물을 것이다, 배나무는 왜 죽어야 했냐고. 뒷마당 한가운데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을 배나무는 그렇게 간단하게 우리 곁을 떠나 쓰러진 배나무에 이미 다 져버린 줄 알았던 늦깎이 꽃이 한 송이 남아있었다. 나무의 죽음 같은 건 알지 못한다는 듯 빗물을 머금고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청초롬한 그 꽃을 보고 있으니 배나무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식물에도 동물에게도 죽음과 삶의 경계는 때로 흐릿하게 시작한다. 그 경계에서 스스로를 정의하던 것들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살아 있는 자의 신호를 하나 둘 지워나간다. 느리게 혹은 빠르게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죽은 것과 산 것을 가르는 선은 서서히 차오른다. 배나무 위에 핀 꽃이 시들어가고 밑동에 낀 이끼가 말라가고 잎을 하나 둘 떨어뜨려 가며 죽음의 모습에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 나는 길고도 짧은 그 작별 인사를 통해 배나무의 부재를 익혀 나가야 했다.
저녁이 되자 하늘이 맑아졌다. 시들시들한 배나무 가지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익숙한 소리로 울어댔다. 자연의 순리만큼이나 잔인한 것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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