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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철 
(전 문협회장)

 

일찍 찾아오는 어둠이 자주 다니는 길도 낯설게 한다. 젖은 솜뭉치처럼 엉켜서 하늘을 가득 채우던 구름이 결국 진눈깨비를 뿌렸다. 차선마저 흐려지기에 운전대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서둘러 해가 지니, 땅거미가 더 어둡게 느껴진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긴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처진 어깨에 이른 저녁이 더해져 귀갓길이 스산하기만 했다. 추위보다 더 마음을 위축시키는 것은 구름 낀 하늘과 일찍 찾아오는 어둠인 것 같다.

 

잔뜩 움츠린 채 동네로 접어들 때 어귀에서 알록달록한 장식을 보았다. 짧아지는 해를 인식하며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다 느끼던 차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조명들이 포근해 보였다. 주눅 든 어깨가 살짝 펴졌다. 동화책 그림에 나올 듯한 오색등이 추위와 어둠에 지친 길손을 위로하는 듯했다. 겨울이 밀려오는 길목에 누군가 켜놓은 불빛이 고마웠다.
몇 해 전 어느 날 을씨년스러운 거리에서 예쁜 불빛의 따뜻한 위로를 받은 후로, 나도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기 시작했다. 12월이 오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만 걸던 전등을 다시 꺼내 창가에 걸었다. 작은 전구가 연이어 달린 전선의 스위치를 켜고 어두운 거리를 향해 빛을 밝힌다. 전등에 불을 켜니 눈 내린 지붕의 처마와 창가에서 고운 빛이 영롱하다.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인데, 예수의 생일은 12월 25일이 아닐 거라는 설도 있다. 서기 연도도 예수 탄생과 수년 차이가 난다고 한다. 예수를 구세주로 모시더라도 종단에 따라 다른 날을 성탄일로 삼기도 한다. 그런데 왜 오래 전에 사람들은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정했을까? 혼자 생각하다가 동지(冬至)를 떠올렸다. 밤이 제일 긴 날을 지나고 다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즈음을 희망의 날로 삼았을 거로 추정한다. 밤새워 새벽을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춥고 어둡고 힘들다는 것을. 어둠에 지친 사람은 빛을 바랄 것이고 절망에 지친 사람은 간절하게 구원의 메시아, 구세주를 기다릴 것이다.

 

빛을 가져준다는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적절한 구원의 상징이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서구 중세 시대의 예술은 빛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교회 장식의 절정은 스테인드글라스라는 해설도 있다. 크리스트교뿐 아니라 그 보다 훨씬 전에도 태양을 숭배하던 신앙이 여럿 있었다. 신앙이 아니더라도 자연의 거의 모든 아름다움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농사를 지으면 하늘에 뜬 태양의 심기를 살피고, 도시에 사는 나도 화창한 날에 마음이 더 가볍다. 생명의 기원이고 살아있는 모든 만물의 활동을 지배하는 태양이지만 겨울이 되면 떠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 그러니 긴 겨울 밤에 작은 빛이라도 걸어 희망의 불씨를 이어가는 것 아닐까? 그것이 크리스마스 장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도 희망을 잇고, 이웃에게 위로를 전하는 마음으로 빛을 걸어 본다.

 

연중 어둠이 가장 짙은 기간을 통과하는 크리스마스 시기에 자연스레 메시아와 희망을 떠올린다. 어둡고 춥지만 이제 막 동이 트는 새벽처럼, 동지를 지나고 힘든 시간을 헤쳐 나오는 기쁜 날이다. 어둠의 나락에서 바닥을 딛고 돌아서서, 차츰 해가 길어지는 날을 맞이한다는 사실은 추운 바람과 많은 눈을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준다. 깊은 어둠을 이겨 나온 비장함이 고통과 슬픔조차 담대하게 대할 수 있도록 할 것 같다.

 

생각을 이어가니, 부활절의 절기도 춘분 다음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기가 부활절인 것도 참으로 적절하다. 춘분이 되면 얼음이 풀리고 새싹이 움튼다. 쟁기질을 시작으로 경작에 들어간다. 여린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흙 속에서 힘겹게 몸부림치는 것이 안타까워 시인 엘리엇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말했지만, 분명한 것은 만물이 소생하는 때인 것이다. 바로 부활의 시간이다. 크리스마스만큼이나 탁월한 절기의 선택이다.

 

크리스마스는 빛의 상징이고, 춘분을 지나며 맞이하는 부활절은 생명의 상징으로 보인다. 모든 상징이 그렇듯이,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절기에도 깊은 은유가 담겨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할 방법은 비유와 은유를 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귀가 있는 자는 듣고, 눈이 있는 자는 보라”는 말이 나왔나 보다. 
크리스마스 휴일 끝자락에 한 해의 변화와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해의 길이와 사계절의 변화가 끊이지 않고 연주되는 하나의 선율처럼 느껴진다. 교향곡의 4악장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연주되고 다시 봄이 이어지는 조화로움을 느끼니, 무언가가 마음에 가득 차오른다.

* 동지: 12월 22일~23일
** 춘분: 3월 20일~21일
*** 부활절: 춘분 다음 보름 이후 첫째 주일 (양력과 음력이 모두 적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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