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ipline is the Soul of an Army. (George Washington)
총 200회 이상 미 독립전쟁 전투 중 1775년 4월 19일부터 1781년 9월 8일까지 특기할만한 26번의 전투에서 워싱턴의 미연합군은 12번의 승리기록을 세웠다. 유럽최고의 영국 정예군은 전투에서 후퇴를 하는 워싱턴 민병을 궤멸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워싱턴 군대는 계속 위기에서 빠져 나왔다.
클린턴 하우이 버고인 콘월리스 등 영국 명장들이 후퇴하는 워싱턴을 추격하지 못한 것은 워싱턴의 허허실실 전략과 때에 따라서는 짙은 안개 및 지리를 이용한 탈출작전 등으로 볼 수 있다.
6년간의 장기전 중 워싱턴을 힘들게 한 것은 미 상원의 자금난에 의한 양식부족으로 사냥 초근목피는 물론 허기진 일부 장병들은 가죽 군화까지 물에 불려 먹어야 했다.
겨울에는 옷이 없어 떨고, 여름철에는 장질부사 천연두 등으로 사망하는 병사들의 참상이었다. 게다가 돈이 없어 병사 월급이 끊어지고 화폐가치가 떨어져 고향에 가족들을 두고 온 병사들의 탈영이 늘고, 소수 반란까지 일으킨 전우들을 보이지 않는 눈물과 엄격한 군법으로 처형해야 했다.
다행히 프랭클린의 설득력 있는 외교술과 라파옛의 도움으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군사 및 재정 원조를 받아 워싱턴은 연명할 수 있었다.
1780년
1778년 3월 17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루이 16세는 로참보 장군과 5천5백명의 프랑스 정기군을 미 독립전쟁에 참전하게 하였다. 1780년 7월에 로드아일런드 뉴포트에 상륙한 로참보는 7척의 군함과 군을 재정비하며 9월 뉴욕주에 있는 워싱턴과 중간지점인 컨넥티커트 하트포드에서 만나 군사작전을 세웠다.
1781년
5월8일 컨넥티커트 웨더필드에서 워싱턴과 로참보는 제2의 군사작전을 세웠다. 로참보는 드그라쓰 프랑스제독이 프랑스 함대를 지휘하여 요크타운으로 향한다고 전했다.
워싱턴은 뉴욕을, 로참보는 요크타운을 공격하자고 의견을 달리했지만 22일 두 장군은 뉴욕에 접근하여 마지막 결정을 하자고 동의했다. 결국 뉴욕보다 요크타운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워싱턴은 뉴저지에 프랑스 빵 공장을 건축하여 클린턴이 뉴욕수비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
8월을 맞으면서 콘월리스가 요크타운에 교두보를 세울 때 라파엣은 멜번언덕을 중심으로 요크타운을 둘러싸고 대포를 겨냥하였다. 때를 같이 해서 드그라쓰가 이끄는 29척의 프랑스 함대가 버지니아 케이프스 해전에서 영국해군을 거의 섬멸하여 코널리스군은 영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완전히 포위 되었다.
또한 드그라쓰는 요크타운에 선착하여 프랑스 증원군과 50만 쿠바 페소 은화를 연합군에 지원하였다.
9월 28일 워싱턴 미군과 로참보 장군의 프랑스군은 워싱턴의 전략대로 라파옛 군이 만든 포위망에 가담했다. 워싱턴은 프랑스군 7천8백, 의용군 3천1백, 미연합군 8천여 명의 미불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콘월리스 영국군 8천9백 명과 전투를 시작했다.
10월 14일 워싱턴 자신이 첫 번째로 점화한 연합군의 포격이 시작되면서 포위선을 좁혀갔다. 해밀턴이 이끄는 미 연합군이9번 교두보를, 라파옛이 이끄는 400명의 군대가 오른쪽 10번 교두보룰 육박전으로 점령하였다
10월 19일 뉴욕 클린턴의 지원이 불가능하자 콘월리스와 8천명 영국군은 워싱턴이 이끄는 미불 연합군에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지만 미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만심으로 콘월리스는 투항 선언식에 병을 핑계로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 워싱턴은 부관을 시켜 투항서에 서명하게 하였다. 영국 부관은 워싱턴을 영국대령으로 부르고 그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항복선언서에 이어 영국군은 소지무기를 땅에 내려놓기 위하여 미불 군대열병 사이를 지나가면서 프랑스군에만 고개를 돌리고 미군을 무시하였다. 이를 감지한 라파옛은 미군과 함께 양키두들 노래를 합창하여 영국군에 치욕을 더 안겨 주었다.
후에 콘월리스는 워싱턴을 개인적으로 초청하여 워싱턴의 위대함을 인정하였다. 워싱턴은 왕당파 민병을 용서해 달라는 콘월리스의 의견을 들어 주지 않았다. 대부분 그들은 영국으로 역이민 가야 했다. 요크타운 전투에 패한 영국은 영국국회 반전파에 투표 승부에 의해 평화 협상을 위한 휴전에 들어가야 했다.
워싱턴으로부터 승전소식을 받은 미 상원은 7일간 애국개척민들과 함께 기쁨과 눈물의 경축행사를 가졌다. 워싱턴은 6년 만에 요크타운 전투장에 가까운 고향을 방문하여 아들 존을 군대에 입영시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승리한 워싱턴은 유일한 의붓아들이 군영에 도는 장질부사에 사망하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요크타운 전투역사는 미국의 어린이들에게 투철한 애국심으로 세계를 이끌어 가는 미국민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필수과목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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