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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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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Energy
정재천
108740
19671
2023-09-21
보는 것을 믿으면 보이지 않는다

 

 신앙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고 그 가치를 따라 행동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 의존하고 보이는 것을 갈망하며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앙은 낯선 도전이다. 

 

기독교 신앙은 시작부터 육안으론 볼 수 없지만 확실한 대상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믿는 것이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성경의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해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은 변질되곤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서 멀어져 다시 눈에 보이는 활동들과 성과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으로 쉽게 변질된다. 

 

특별히 자본주의 물질만능 편의주의 시대와 환경에 놓인 신앙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이러한 변질에 미혹되어 신앙이 역주행하는 현상을 낳는다. 심지어 교회가 이런 신앙을 도리어 눈감아 주고 위로하고 때로는 보호해 주는 울타리 역할을 할 때도 있다.  

 

처음 회개하고 믿음을 다짐했을 때는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주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신앙이란 것을 시작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항상 더 편하고 편리하고 더 쉽게 모든 것을 이뤄줄 것 같은 안정감을 주기 마련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불안하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처음 은사를 사모했던 마음은 물질의 축복을 더 원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교회 예배당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시간들은 편안히 집에서 유튜브를 통해 흘러나오는 찬양을 들으며 자신을 위로하는 연민의 시간으로 대체된다. 

 

자신의 영을 새롭게 일깨우는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직접 읽는 수고로움 보다는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 한 편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시간처럼 착각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살아있는 말씀 듣기를 열망하며 멀리라도 부흥회를 분주히 찾아 다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는 세상을 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기독교 방송이나 강사들의 강연을 들으며 신앙이 아닌 신념을 확고히 하는 것에 시간을 소모한다. 

심지어 이런 신앙의 역주행을 돌이키기 위해 하나님이 시련을 주신다 해도 더 이상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 눈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신앙의 눈이 이미 멀어버렸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만져보지도, 안겨 보지도 못했던 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무엇보다 실존하시는 자신의 창조주 아버지며 인생의 목적이었다. 아브라함은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신앙의 확고한 기준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가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눈에 보이는 이삭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 순간 자신과 동행하고 자신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보면 기독교 신앙은 이런 신앙이 아니면 신앙이 아니다.     

이런 신앙은 절대 단기간에 생기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는 한 결코 소유할 수 없다. 오직 매 순간 자신에게 닥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강건히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좁은 신앙의 길로 전진하는 것 외에 이런 신앙은 불가능하다. 

아브라함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을 바라보며 ‘여호와 이레”라고 고백한 것이 현실이 된 것처럼 신앙인의 믿음의 고백은 언젠가 현실이 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PastorEnergy
정재천
108571
19671
2023-09-14
믿음은 의무가 아닌 열망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이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 뿐인 사랑하는 자식을 하나님께 바쳤다. 지난 수십 년간 다양한 시련들을 겪을 만큼 겪었다. 고생도 할 만큼 하고, 인내하면서 하나님 약속만 믿고 기다린 세월만 25년이다. 아내를 잃었다가 찾기를 두 번 했으며 조카를 빼앗겼다가 전쟁을 치르고 찾아와야 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아들 이스마엘과 자신의 첩인 하갈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보내야 했다. 하나님을 믿기에 순종하며 따랐지만 시련과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을 피해갈 수는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을 따랐다. 하나님을 믿었다. 

 

급기야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에는 그 동안 그의 아내, 조카, 그리고 이스마엘을 잃으며 체험했던 고통을 다 합친 것보다 더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시련은 언제나 곧 끝날 것을 예상할 수 있는 훈련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제요, 실전이었다. 생사를 가르는 그 실전 속에서 그는 치열하게 믿음으로 싸우며 자신의 인생길을 걸었다. 그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갈등하는 마음을 키워가는 대신 신뢰와 사랑을 계속 쌓아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셔도 그는 그것을 행할 믿음을 키워가게 되었다.

 

만약 하나님이 실제로 이삭의 피를 흘려 번제로 그를 받으셨다면 분명 아브라함은 그 자리에서 자신도 타고 있는 장작더미에 몸을 던져 하나님께 드렸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행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의무감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은 의무감이 아닌 열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믿음을 지키는 신앙은 책임감에서 행하는 의무감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쁨이 되기 위한 간절한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가지고만 있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성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믿음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대적인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강한 믿음은 하나님을 인지하는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만 성장한다. 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야만 믿음도 성장할 수 있다.

믿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부담으로 다가오는 의무적인 신앙의 부속물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알면 알수록 깊이 사랑하고 존중하고 더 신뢰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세월 속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닮아갔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었으며. 그의 열망이 커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커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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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Energy
정재천
108410
19671
2023-09-07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다

 

 믿음을 지켜 신앙을 성장시키는 책임은 처음 회개한 날부터 주님의 심판대에 설 때까지 온전히 자기자신에게 있다. 다양한 이유와 근거들을 나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국 믿음과 관련한 최종 선택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대신 져 줄 수 없다.

“성공의 가장 좋은 스승은 실패다.” 심지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만 신앙에 관해서 이들은 좋은 격언이 되지 못 한다. 왜냐 하면 믿음에는 연습도, 훈련도 없으며 오직 무엇이든 그대로 심고 뿌린 대로 반드시 거두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에는 결코 요행이 없으며 오직 믿음의 결단과 결과 만이 책임으로 남는다. 이토록 막중한 신앙을 위한 순간의 선택들을 실패하지 않도록 성도들은 신중하고 지혜로운 결단을 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현대 교회와 신앙인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가 아니다. 신앙의 성장은 매일 현실 속에서 성경적인 믿음을 실천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될 수 없다.

마치 기독교가 비현실적이고 무능력한 것처럼 조롱 당하는 세상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성장하는 길은 그 비난과 조롱을 이길 수 있게 해주는 신앙교육이나 훈련 혹은 성장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런 핍박과 조롱이 존재하지 않는 온실 같은 교회 안에서 특정 기간 훈련을 받고 학습하여 수료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기반으로 믿음으로 살기 위해 매 순간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실전 만이 신앙을 지키고 능력 있는 믿음을 더욱 더 소유할 수 있게 하는 비결이다.

 

교회에서는 신실하고 전도 프로그램에 앞장서며, 섬김 활동에도 헌신적인 성도들 대부분이 자신의 가정과 직장, 사회 친분 관계 속에서는 영적인 열매나 전도의 결실을 맺지 못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령의 인도하심 대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제자들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행한 것처럼 성령을 의지하여 말씀대로 믿음이 삶을 개척하고 정복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현실 속에서 격리하지 않으셨다. 기도하는 시간을 제외한 주님의 유일한 제자양육은 현실 속 실전뿐이었다. 신앙이 마치 실생활을 떠나 실제와 다른 곳에서 연습과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갖가지 거짓말에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각종 프로그램, 코스, 훈련, 모임, 교육 등에 자족하면서도 놀라운 신앙 성장의 직접적인 현장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결국 주님을 향한 신앙은 오직 주님이 보내신 이 세상 매 순간의 선교현장 속에서만 성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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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천
108230
19671
2023-08-31
이민사회 차별에서 구별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바로를 위해 모든 것을 지혜롭게 행한 요셉. 그는 7년간 이어진 기근에 오히려 애굽을 세상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한때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그의 형들과 자신이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 야곱은 당대 최강국 애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처음 이민을 갈 때는 총리의 가족 자격으로 초청이민을 받은 것이니, 왕을 만나는 특전부터 살 수 있는 영토를 무상으로 받는 것까지 특별한 환영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가 죽고 요셉도 죽고,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통치자 바로와 함께 권력의 자리에 앉은 애굽인들은 더 이상 요셉을 알지 못했다.

 

처음에 칠십 명으로 들어온 야곱의 히브리 이민자들이 이미 애굽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크게 성장했으니 새로운 바로에게 그들은 더 이상 환영 받는 존재가 아닌 위협적인 존재로 보인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바로는 이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점점 핍박하며 노예로 삼는다.

요셉을 통해 지금의 강대국 애굽이 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합리한 처우가 아닐 수 없다. 겉으로 보면 히브리인들은 요셉으로 인해 모든 특혜를 받고, 대접을 받던 구별된 존재에서 이제는 요셉이 없으니 핍박과 차별을 받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데 정말 그들을 구별된 존재에서 차별 받는 존재로 추락시킨 것이 요셉과 그의 공헌이 잊혀졌기 때문일까?

 

세계가 지구촌으로 불릴 만큼 가까워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라마다 곳곳에서 이민자들은 차별을 받고 심지어 그들의 처지와 환경에 따라 멸시와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이들이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단지 인종이 다르고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핍박을 받고는 한다.

이제 와서 이민 1세대 자신의 부모가 그 나라의 발전을 위해 과거 얼마나 헌신하며 공헌했는지 이야기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미 나라는 성장해 있고 1세대들은 오래 전에 잊혀졌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요셉을 통해서 가족이 이민을 올 수 있었고 환경이 더 좋은, 살 만한 선진국 애굽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그 나라의 총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를 총리로 만들어 준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을 주셨기 때문이며 또한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즉, 알지 못하고 바랄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은 요셉에게 원하고 바랄 수 있는 희망을 처음부터 주셨고 요셉은 그것을 신뢰했기에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애굽으로 이주해 온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과거 “꿈꾸는 자”(창세기 37:19)라고 조롱했던 것을 회개하고 이제 자신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꿀 수 있기를 소망했다면 어떠했을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을 만나게 된다면 당장은 억울한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안타까운 사건들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요셉이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노예로 팔리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을 기억하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 옥에 갇히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꿈을 신뢰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면 결국 그들이 어디에 있으나 그들을 돌보시고 부흥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은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지금 이민사회에서 구별된 존재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으며 간구했던 것처럼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누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곳의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한다면 차별을 받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설령 주류사회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세대가 지나고 나면 자식들은 또 다시 새로운 핍박과 차별 속에 놓일 수 있다.

하지만 요셉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꿈을 이뤄 자신을 높여 주시기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처럼 인내해야 한다. 스스로 노력해서 높아진 자리에서는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지만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자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 이유가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암기하기 쉬운 신명기 7장7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하나님의 구별된 사랑이 우리와 어디서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지금 우리가 세계 곳곳 처소에서 겪게 되는 “차별”은 우리를 다시 한번 “구별”된 삶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오늘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 살다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을 반드시 만나는 때가 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신뢰할 수 있다면 그 삶과 후대의 삶은 더 이상 요셉이 필요로 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요셉이 될 수 있는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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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Energy
정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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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6
신앙독립만세

큰 딸이 혼자 책을 읽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 “아빠, 그런데 왜 김구 선생님은 김구라고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백범이라고 불러요?”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그런데 순간 오늘 오전에 묵상했던 사도행전 4장이 떠올랐다. 백범(白凡)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당시 독립운동의 중요성과 함께 설명해줄 수 있었다.

김구 선생님의 독립운동 이야기처럼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사는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긴박감 넘치는 역사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이제 막 유대교 밖으로 독립을 시작하려고 하는 초대교회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도리어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이방인 지도자인 빌라도의 손에 넘겨주어 죽게 한 것 같이 종교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분명 주님의 공생애 동안 삶의 본보기와 죽음과 부활을 통한 복음의 선포는 율법에 얽매여 있던 하나님의 백성을 자유롭게 해준 신앙독립의 탄탄한 기틀을 제공했다. 이제 그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만 하면 되는데 그 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사도행전 3장에서 시작되는 이러한 신앙독립 투쟁의 역사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성전 미문 앞,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본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완전히 기적적인 치유를 일으키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적의 결과를 목격했으며 그 기적에 이어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 주님을 영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빌라도에게 주님을 넘겨주는데 공조했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에게 그 사실은 달갑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주님이 부활하신 무덤을 지키던 보초들을 매수해서 주님이 부활한 사실을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간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미문 앞에서 이뤄진 기적적인 광경은 목격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예루살렘 모든 사람의 눈과 귀를 막고 그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들은 모여서 회의를 하고는 4장 18절에 베드로를 향해 다음과 같이 심판을 선고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믿는 대로라면 이미 죽은 예수인데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심판은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말라고 하거나 아픈 병자를 성전 앞에서 치유하지 말라고 금하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이들이 사도들에게 요구한 것은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더 이상 설교를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두려워할만한 건 제자들의 설교와 전도였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금지한 단 한 가지는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들 종교지도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다름아닌 “예수”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름만은 도무지 사용하지 말라고 심판을 내린 것이다.

강력한 무기를 앞세운 일제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의 아무런 힘도 없는 한 사람인 백범 선생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그 이유는 총과 칼로도 잠재울 수 없는 “독립”이라는 삶의 목표가 백범에게 확고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겪고 있는 수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무엇으로 이길 수 있을까? 오직 능력있는 예수님의 이름 만이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의 능력이 자신의 삶에 나타나려면 반드시 마음 속에 어떠한 세상의 미혹도 멀리하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겠다는 신앙의 독립을 이뤄야 한다.

한 나라의 독립이 만세를 이룬 것처럼 세상 권세에 무릎을 꿇지 않는 신앙의 독립은 아멘으로 모두에게 화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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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천
105775
19671
2023-05-25
현실을 지배하는 4차원 영적 세계

 

 2천년 전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거룩하고 찬란한 영광의 주님. 이 시대, 이 땅에서 수많은 유혹과 죄악 앞에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그 주님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온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임재를 소망하면 주님은 성령님으로 우리를 만나 주신다.

그분의 임재하심은 형언하기 어렵지만 가슴으로 뜨겁게 간증되고, 성경으로 확신 있게 증거되는 현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이러한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려면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갈망하는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가르친다. 다른 말로 하면, 구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으며, 찾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으며, 두드리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가끔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주어진 성령님과 동행하는 위대한 삶이 마치 별다른 노력 없이 교회만 다니면 이뤄지는 일로 착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따르는 그리스도의 길은 그런 수동적인 종교의 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기독교는 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변화시켜 천국을 이뤄가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삶의 목적이다.

이처럼 주님의 임재와 성령의 동행하심을 현실 삶에서 영위하려면 세 가지 노력을 의지적으로 기울여야 한다.

첫째,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영적 존재의 권위를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먼저 반응하도록 부지 중에 훈련되어 있다. 즉,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몸이 움직이고 반응하는 것이 모두에게 가장 익숙한 행동 패턴이다.

하지만 영적인 세계의 권위는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을 통제하고 좌우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능력을 사용하려면 가장 먼저 그 세계를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는 성령께 그 세계의 안내자 역할을 맡아달라고 기도로 매 순간 간청해야 한다.

 

둘째, 세상의 것이 영적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 이뤄진 질서가 세상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영적 세계의 일을 영적 전쟁이라 부르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물론 모든 세상의 전쟁을 마귀와 악한 영과 싸우는 것으로만 섣불리 해석하는 경향도 경계해야 하지만 때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아픔과 어려움, 다툼 뒤에 영혼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영적인 전쟁이 있을 수 있다. 성도가 주님을 외면하고 멀리하려 할 때 주님은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 우리를 영적 세계로 초대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셋째, 세상에서도 무엇인가를 이루고 성취하려면 노력과 열정, 그리고 끈기 있는 목표의식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수영, 피아노, 어떤 학업 목표나 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인내로 노력하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나아간다.

영적 세상도 이와 동일하다. 영적인 성장과 성취도 인내와 노력에 의해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영적 세계에서 이뤄지는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성도는 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얻으며 그곳에서 이뤄지는 악한 세력을 대항한 승리를 통해 이 세상의 아픔과 미혹에 대처할 수 있다.

이 모든 놀라운 것이 우리 육신의 눈이 아닌 믿음의 영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4차원의 영적인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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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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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
2023-04-20
포스트 팬데믹 하나님의 생각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다. 이 기간 대부분 사람들은 한편으론 모두의 생명을 위협한 바이러스를 두려워했고, 또 한편에선 고조되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제 오랜 칩거생활을 청산하고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 팬데믹은 지났어도 여전히 암담한 현실은 한숨을 내쉬게 한다.

이러한 낙심되는 현실은 신앙을 가진 성도라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위로가 되는 것은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별히 예레미야 29장 11절은 선포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려는 것이니라.”

그런데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계획일까? 어떻게 이런 아픔을 평안으로 여길 수 있을까?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도 지구 곳곳에 재앙과 재난이 끊이지 않는데 어떻게 평안과 희망을 바라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로 이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미래에 대한 암울한 생각을 피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이 위로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행복”이 아닌 “평안”이다. 코로나 대유행이 지난 시점에 대부분 성도들이 바라는 것은 다시 이전의 행복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시고 전 인류 미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창조주는 그분의 약속을 어기거나 바꾸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약속은 팬데믹과 같이 온 인류가 두려워하는 상황에서도 구원받는 성도에게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주시려는 계획이다. 현재의 행복은 인간의 미래를 보장하거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주지 않는다. 순간적이고 감정적인 행복과 달리 평안은 상황과 무관하게 주 안에서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비록 감정적으로 혹은 인지적으로 현실의 암담함을 평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도 관계 없다. 성경에 기록된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팬데믹의 상처와 포스트 팬데믹의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도와의 교제다. 그분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인간과 대화하기를 바라신다.

코로나19를 비롯해 온갖 풍랑 속에서도 성도들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상처와 시련을 넉넉히 이기도록 돕는 능력이 있는 분이다.

로마서 8장29절은 약속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지금 심한 풍랑과 같은 두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온 과거의 간증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도는 그 어떤 어려운 일도 이겨내고 여기까지 온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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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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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0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을 넘어뜨린 편안함

 

다윗은 평범한 목동에서 용맹한 장수로 그리고 위대한 왕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그가 겪은 일화 중에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이 골리앗과의 싸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그가 아직 전쟁터의 장수도 아니고 왕이 되지도 않은 목동 시절의 사건이다.

하루는 다윗이 전쟁터에 있는 자신의 형들에게 급히 도시락을 가져다 주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기위해 양들을 초원에 두고 전투를 위해 블레셋과 대치 중인 전쟁터로 향한다. 그런데 거기서 골리앗이라는 블레셋 진영의 엄청난 체구의 장수가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된다.

그 비난의 음성을 들은 다윗이 그를 두고 말한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그리고는 물맷돌 다섯 개를 집어 들고는 골리앗과 일대일로 전투장에서 마주하게 된다.

골리앗을 향해 무장적 달려가며 그는 외친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나아가노라.” 그렇게 물맷돌을 날린 다윗은 일순간에 골리앗을 제압하고 무찌른다.

그런데 이런 다윗이 훗날 위대한 군대 장관이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는 도리어 불륜을 저지르고 그것도 부족해서 자신의 충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더 큰 죄악까지 저지르게 된다. 무명하던 시절의 정의롭던 다윗은 어디로 가고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른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것은 전쟁이 한창인 때에, 자신의 장수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그때에, 그가 전쟁터를 뒤로하고 자신의 궁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백성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그 때에 더욱 긴장하고, 기도하며, 주님께 매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윗은 한가하게 옥상을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용맹한 장수답게 위대한 왕답게 전쟁터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었더라면 보지 않았을 광경을 그 옥상에서 보게 되었고 그는 죄악에 빠지게 된다.

장수는 전쟁에 나가서 싸워야만 장수다.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만 그리스도인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믿음대로 행할 용기가 있어야 진정한 성도다. 주님과 동행하는 능력있는 삶을 살려면 내 멋대로 정한 길을 걸어가지 않고 매 순간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다윗의 실패를 통해 배운 것처럼 편안함에는 대적하여 승리할 장수가 없다. 무시무시한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이지만 정작 한 순간 누린 한가한 편안함 앞에서는 처절하게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장수는 전쟁터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싸워야만 장수다. 장수에게는 전쟁터의 시간이 가장 명예롭고 가치있는 시간이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합니다”라는 디모데후서 2장4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장수다운 삶을 용기있게 살아가기 위한 결단이 매일 다윗에게 필요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를 순종의 마음이 매순간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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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6
갚을 수 없는 것과 갚을 필요가 없는 것의 차이

 

흔히 “갚을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한다. 사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감히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어 그 광대함을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감사하다는 의미다.

이런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성도의 심령에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 라는 찬양이 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감사와 간증에도 불구하고 갚을 수 없을 정도로 한계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이렇게 깊고 높고 광대한 하나님의 은혜인데 “갚을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마치 하나의 관용구처럼 사용되면서 그 본래의 뜻에 반하는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이 “갚을 수 없는 은혜”가 이제는 어차피 노력해도 갚지 못할 은혜이니 “갚을 필요가 없는 은혜”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표현한 것은 갚기 위한 어떤 노력도 소용없다는 말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적인 해석은 모든 성도가 이런 은혜에 대해 빚진 자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데 초점이 있다.

문제는 이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인간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말 그대로 ‘하.나.님.’이 대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같이 갚을 것이 없는 대상을 향해 진 은혜의 빚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에 어떻게 갚아야 할까? 하나님께 빚진 자의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성경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대상에게 갚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로마의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두 번씩이나 성도들에게 자신이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받은 적이 없고 빚을 진 것도 없는 로마교인들에게 바울이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이지만 그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눈에 보이는 이웃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베푸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그들에게 사랑으로 열심히 갚아나간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을 새롭게 발견한 성도의 삶은 힘있는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성도에게는 이 세상이 아무리 자신과 무관하고 무정해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사랑으로 갚아야 할 선교지로 보일 것이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만 허우적대며 오직 하나님께 위로만을 간구한다면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갚을 필요가 없는 가치로 인식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쩌면 그 괴로운 현실에서 미로와 같이 계속 헤매며 살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으로 남의 아픔과 고통을 먼저 돌아보고 헌신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아픔은 또 누군가가 돌아봐 주고 주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치유해 주시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이다. 이제 그런 간증을 만들어 가는 힘있는 성도의 삶 개척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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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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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2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

 

요즘 청년들은 꿈에 관한 대화에 상당한 부담을 느낀다. 그래도 목사로서 청년들과 마주 앉았을 때 가장 중요하게 던져야 할 질문은 그들의 꿈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너의 꿈이 뭐니?”

수 많은 청년들과 이런 꿈에 관한 대화를 하다 보면 통계적으로 얻어지는 대답이 있다. 대부분 천편일률적으로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혹은 유명한 사람 중에 누구와 같이 되고 싶은지를 이야기 한다. 이런 대답은 짓궂게 반문을 하게 한다: “아니, 그런 시시한 것들 말고. 진짜 네 평생, 인생의 꿈이 뭐냐고?” 그러면 대체로 아무런 말을 잇지 못한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한참 패기와 꿈으로 넘쳐야 할 청년들에게 꿈이 없다는 것은 앞으로 드리워질 암울하고 참담한 현실을 예견한다. 여기서 꿈이라는 것은 직업도, 진로도, 누군가를 닮아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꿈이란,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을 삶의 가장 확고한 목적이며 하나님이 이 땅에 각각의 사람들을 보내신 원대한 비전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어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에서 성취하기 위해 달려가야 할 삶의 목적이자 생명의 원동력이다. 동시에 이 “목적”을 “목표”와 혼용해서는 안 된다. 성도에게 목표란 온전한 목적을 깨달았을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거룩한 인생의 타깃이기 때문이다.

청년 다니엘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하지만 그는 마음에 한 가지 뜻을 정하여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을 이방 세계의 영향력으로부터 지켜내고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을 지키겠노라는 꿈을 품었다. 그의 이러한 꿈(삶의 목적)은 훗날 그로 하여금 바벨론 제2의 권력자가 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벨론의 왕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삶의 목표를 성취하는 과업을 이루게 된다.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을 접한 다리오 왕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다니엘 7장26-27절).

한 리서치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현존하는 직업 중 30%가량인 7만5천 개가 10년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전망이라고 한다(2022년 기준). 만약 직업을 꿈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다면 그들이 그 꿈에 다가서려 할 때쯤에는 그것들의 다수가 사라지고 없어졌을 수도 있다.

청년들은 지금의 현실만 바라보며 세상이 세운 성공이라는 잣대를 향해 나아갈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꿈을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경쟁을 통해 남을 짓밟고 얻어야 하는 세상의 성공은 하나님이 그리시는 청년들의 꿈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실 꿈은 영혼을 살리는 꿈이며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목표를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청년은 “당신의 꿈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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