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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rosa
얼음 밭에서 보낸 반 나절
Hwangrosa

다락방에서 내려다 보이는 지붕에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길 건너 공원에는 산책 나온 개 발자국들이 무늬처럼 찍혀있고, 넓게 펼쳐있는 얼음 밭에는 강태공들이 겨울 낚시 하는 오두막들이 즐비하다. 저 멀리 호수 끝자락, 수평선 위에 길게 그어진 한 줄기 뭍이 보인다. 이니스필(Innisfil)이다.  여기서 운전해서 가려면 구불구불한 국도를 타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내가 사는 케스윅(Keswick)과 이니스필은 심코 호수를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를 직선으로 걸어서 가면 얼마나 걸릴까. 물끄러미 하얀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공연히 호기심이 올라온다. 

눈이 쌓인 얼음 위를 걷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깊이 쌓인 곳에서는 발자국을 쿡쿡 찍으며 가다가, 얇게 덮인 데에서는 운동화로 눈을 밀어내며 걷는다.  얼음이 녹아 물에 빠지는 건 아닐까. 가끔 발로 얼음을 두드려 본다. 여자 하나쯤은 든든하게 받쳐줄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두꺼운 공명이 응답처럼 되돌아온다. 

반쯤 왔으려나,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뒤돌아보니 우리 동네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렇게 먼 줄 알았으면 아이젠이라도 부착하고 올걸. 후회해도 돌아갔다가 다시 오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이왕 나선 길, 멀리 바라만 보았던 땅을 터치하고 오기로 마음먹고 계속 걷기로 한다. 저 앞에서 스노우 모빌 두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경쟁하듯 질주한다. 얼음이 단단하게 얼었다는 두 번째 신호로 받아들인다.

광활한 얼음 밭을 혼자 하염없이 걷노라니, 생각이 친구가 된다. 누군가 물었었다.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냐고. 가족인 듯 아끼며 같이 살고 있는 하얀 말티즈 강아지가 아니라, '새'라고 덥석 말하는 나 자신을 보고 스스로 놀랐다. 두 발 달린 동물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닭도, 새도, 병아리조차도 만지려면 징그럽고, 발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나는 왜 '새'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을까. 단 한가지 이유다. 날 수 있다는 것. 나이 들어가면서 나는 자유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속한 단체나 관계에서 나를 묶으려 하면 슬며시 빠져 나오는 바람에 미움을 사기도 했다. 베스트 프렌드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지키고 싶은 거리가 무너지고 묶이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이파리 사이에 몸을 숨겼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묶여있는 우리'보다 외롭더라도 '자유로운 혼자'가 더 좋았다. 외로움을 티백처럼 우려내니 맛은 씁쓸한데, 한 켠에는 속을 환하게 해주는 박하맛이 났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를 자주 돌이켜 생각한다. 마음을 지배하는 평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원하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만 느끼는 팍스(Pax)이고, 다른 하나는 상황에 상관없이 내면에 깊이 흐르는 샬롬(Shalom) 이다. 그가 생전에 바랐던 것도 결국 자아의 경계를 넘어선 내면의 자유, 샬롬의 경지가 아니었을까.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연한 미소를 짓게 하는 파스텔톤 추억만 있으면 좋으련만. 부정적인 경험 속에서도 때로는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웃을 수 있는 기억이 남기도 한다. 그러나 해야만 했던 말을 할 기회를 놓치거나, 다른 이유로 매듭짓지 못하고 내면에 가라앉은 것은, 가끔 수면 위에 삐죽이 튀어올라 조용했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때마다 마무리 짓고 살면 좋겠지만, 세상 일이 어디 호락호락하게만 흘러가던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신본주의로 산다면 그런 것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겠지만, 인본주의 성향이 짙은 나로서는 백일몽이다. 

똑바로 온 줄 알았는데 뒤돌아보니 걸어온 길이 술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시간 조각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실한 열매 하나 없이 '할머니'라는 물컹한 명찰만 오롯이 남았을 때, 삶은 너무 열심히도, 곧게도 살 필요없이 느슨하게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흔들거리는 발자국을 보니 괜히 흐뭇해서 웃음이 나온다.

어느덧 이니스필 호숫가 울창한 수초 숲이 내 앞에 있다. '아. 너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 반가워 손을 내민다. 수초들은 바짝 마르고 얼은 채로 함박눈꽃을 소담스레 피우고 있다. 이제 곧 봄바람이 불면 너희들도 찰랑 거리는 물 속에서 춤을 추며 마른 줄기 사이에서 새 순을 올리겠지.

어둡기 전에 집에 도착하려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내가 왔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면 되겠구나, 했는데 딴 생각하는 사이에 어디에 있는지 찾지를 못하겠다. 나는 다시 흔들거리는 선을 남기며 걷기 시작한다. 집을 떠날 때 중천에 있던 해가 기울어 이니스필 서녘 하늘을 노을 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한참을 오다 보니 케스윜 동쪽 하늘에서는 검은 세상을 밝혀줄 달이 서서히 금빛으로 달궈지고 있다.

집에 오자마자 얼음 위에서 균형 잡느라 애썼던 몸을 눕힌다. 나를 품어주는 이불 속이 유난히 따듯하다. 노곤함이 온기에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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