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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탈북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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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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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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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5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64.끝)

 

(지난 호에 이어)

그 해 겨울에 나는 파주에 있는 영어마을에 1달 영어마을 체험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책상에서 배우는 영어 말고 생활을 통해 배우는 영어는 쉽게 배우게 되지 않을까? 한 달간 그곳에서 먹고 자고 원어민 선생들과 합숙하면서 무조건 영어로 쓰고 살아야 한다.

등록금이 200만원이었는데 나는 여길 한번 보내면 아이가 영어에 친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큰 마음먹고 등록을 했다. 그렇게 그곳에 아들을 보냈는데 저녁마다 아들이 떠듬떠듬 한국말로 전화가 온다.

“엄마, 애들이 날 자꾸 놀려. 그리고 나랑 같이 안 놀아. 선생님하고 얘기해도 아무 소용없어.”

이미 짐작한 것이었지만 나는 너무 속상했다. 아들은 아직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 어눌하고 떠듬거리니 애들이 놀려대는 모양이었다. 그 후부터 나는 아들을 합기도 학원 외에 아무 학원에도 보내지 않았다.

아이한테 중요한 건 영어나 다른 공부보다는 우리말을 잘 배우는 것이 우선인데 나의 너무 앞선 조바심 때문에 돈만 낭비하고 아이에게 상처만 주고 힘들게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때부터 나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경쟁이 치열하고 교육 수준이 훨씬 높은 이곳에서 과연 우리가 얼마나 잘 적응을 해서 따라갈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가져온 성적증명서에는 수학, 영어가 50점 대였다. 나는 성적표를 보자마자 아들 등짝을 후려 갈겼다. 지금 그것을 너무 후회하고 있지만 말이다. 왜 이렇게 점수가 낮느냐는 나의 질문에 아들은 대답했다.

“난 수학이 재밌는데 선생님이 한국말로 설명하는 걸 못 알아 듣겠어.”

결국 언어가 문제였다. 모든 설명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수학, 영어가 50점대면 말을 다한 것 아닌가? 그리고 지금 중2에서 이 정도 점수면 고등학교는 더 따라가기 힘들 것이다. 과연 내 아들이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어떻게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런데 나에게 결정적인 결심을 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가 있었다. 나는 아들 학교에 교복 문제로 방문하게 되었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선생님들이 중국어로 서로 나누는 대화의 주인공은 뜻밖에 내 아들이 아닌가? 나는 귀를 곤두세우고 듣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내가 ㅇㅇ엄마인줄도 모르고 거리낌없이 말하고 있었다.

사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이들이 내 아들을 따돌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중국어를 다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선생들은 나중에야 내가 ㅇㅇ엄마임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큰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아이가 왕따나 당하게 하려고 남한에 온건 아닌데, 참 너무 속상했고 집에 와서 그런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는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들 성적이나 신경 쓰고 있었으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도 사실 너무도 살기 좋은 나라가 왠지 심심했고 심지어 답답함을 느꼈다. 처음 2년은 천국에 온 것 같이 좋기만 하였고 어딜 가도 경치가 좋고 탈북자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좋아서 사실은 불평을 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꿈은 중국어를 배웠으니 이제는 영어를 배워서 여행을 다니면서 영어로 마음대로 소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그런 쪽으로 도전 해볼만한 아무런 계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직업학교에서 컴퓨터 관련 교육을 마치고 서울경찰청에 중국어 통역사로 프리랜서로 일하긴 했지만 전문적인 직업은 아니어서 수입도 사실 불확실했다. 나는 1년 동안 많은 고민을 통하여 드디어 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 떠나자! 이곳에서도 우리는 어차피 이방인이다! 이방인으로 살 바엔 이민을 가자! 나는 드디어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다. 캐나다는 인구의 대부분이 전 세계 이민자들로 이루어져있어 우리가 중국에서 왔는지, 북한에서 왔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낯선 땅, 지구의 서반구 캐나다를 향해 별로 정리할 것도 없는 남한생활을 마감하고 이민의 길에 올랐다. 몇 년간의 어려움 끝에 이제는 캐나다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아들은 대학도 다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일도 하고 있다. 수학과 물리학에 재능이 많은 아들은 가끔 대학에서 친구들 튜터링도 해준다. 그리고 에너지 관련 분야의 공부를 거의 마치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 많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곧게 잘 자라준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너무 고맙다. 그리고 우리는 캐나다 생활을 너무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다. 또 이곳은 내 인생의 종착점이기도 하다. 이제 또다시 국경을 넘을 일은 없을 것이다.

태어난 고향 평양에서부터 시골 농촌과 해변 도시, 중국과 수많은 국경들을 넘고 또 넘으며 좀처럼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던 나는 드디어 이곳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려 한다.

 

 

마지막 글

 

사실 내가 나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동기는 캐나다 이민 수속을 하면서부터였다. 이민이 순조롭게 되지 않아 이리저리 꼬이게 되면서 세 번째 변호사를 고용하게 되었는데 그는 나에게 간단한 히스토리를 써오라고 했다.

나는 두 장 정도의 간단한 나의 이력을 써내려 가다가 그만 글이 엄청나게 길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이참에 차라리 내가 겪어온 모든 것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기억에서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을 것 같았다. 또한 아들에게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가 엄마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묘사하며 서술하다가 그때의 감정들이 자꾸 북받쳐서 갑자기 두통이 생겨나고 사실 정신적으로 너무 견디기 어려웠다. 마음속의 고통과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가 않아 또다시 파헤쳐지는 것이 두려웠고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탈북과정을 쓰다가 그만 멈춰 버렸다.

“나는 만약 옛날로 다시 돌아가 내가 겪었던 일을 다시 겪어야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나는 항상 지인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이 말을 꼭 덧붙이곤 했다.

그때로부터 7년이 지나서 어느 정도 정착이 되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있는데 대학에 다니고 있는 아들이 요즘 들어 부쩍 엄마의 지난 시절 이야기를 자주 물어본다. 나는 아들에게 조금씩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이제는 책을 완성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나 역시 이 글을 다시 돌이켜 읽어 보면서 잊을 뻔했던 그 사연들을 되살리며 초심을 가다듬기도 한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또 가정의 행복이 그저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지, 또 내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겪으며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서야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 이 책을 보면서 돌이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죽음이 눈앞에 닥쳐오고 삶이 끝장날 것 같은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모든 고난들을 이겨내 여기까지 오게 된 나의 경험들이 현재 좌절과 절망을 느끼며 심지어 삶을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안겨주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지금 우리가 끼니를 굶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원하는 걸 아무 때나 먹고 살수 있는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 전쟁과 기아에 시달려 사람들이 죽어가고 어린이들이 미처 피어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특히 북한은 내가 탈북 전부터 시작되었던 가난과 굶주림이 25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북한 인민들이 최소한 배고픔 만이라도 느끼지 않을 만큼의 세상이 올 그날이 과연 있을까? 지금의 체제로서는 참으로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북한에 있는 나의 형제, 친척, 친구들, 인민들도 나처럼 자유와 풍요로운 삶을 맘껏 누리는 그날이 오길, 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쓰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캐나다 토론토 한인뉴스 신문사 이용우 사장님과 많은 분들께 감사 드린다.

 

저자 김민주

2021년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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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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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8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63)

 

(지난 호에 이어)

나는 구청 홈페이지에 회원가입하고 민원을 넣었다. 겨울 보일러용 기름값이 월세의 2배만큼 더 비싸고 여름 전기세가 월세보다 훨씬 비싼 이런 무허가 건물에서 빗물이 새어 들고 여름 내내 축축한 방안에서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도저히 돈이 없어 이곳에서 살 수가 없으니 정부에서 이 건물을 철거해 달라고 긴 사연을 덧붙여 적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의 마지막 세입자가 되기를,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정부에서 조치를 취해 달라고 말이다.

바로 다음날 구청직원의 전화가 왔다. 민원을 접수 받아서 조사를 해야 하니 우리 집에 찾아온다고 한다. 그렇게 이것저것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구청 직원은 불법건물이라 철거해야 하고, 주인 할머니가 벌금을 내야 하는 것도 맞지만 나는 법적인 계약을 했기 때문에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 주변에 상가만 몇 개나 가지고 있는 주인 할머니한테 2달 월세 빼고 돈 180만원이 뭐가 그리 큰돈이라고 이러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갑자기 독기가 생겼다.

“그래요? 돈을 못 돌려받아도 괜찮으니 난 이 컨테이너가 철거될 때까지 민원을 넣을 거예요.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또다시 피해를 입으면 안 되죠. 돈이 없어서 옥탑방에서 사는 건데 전기세와 보일러 사용료가 월세의 2배를 내야 한다면 과연 누가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나요?”

그로부터 며칠 후 구청직원은 또 전화를 했다. 오늘은 할머니도 구청에 와야 하고 나도 와야 한다고 한다. 서로 합의를 할 수 있는지를 일단 얘기해보고 합의가 서로 안되면 법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사실 나는 이미 이사를 한 상태였고 옥탑방은 비어 있었다. 새로 이사한 집주인 내외는 너무 좋은 어르신들이었는데 내가 보증금 200만원이 부족하다고 하니 돈 되는 대로 달라고 흔쾌히 허락했다. 정말 주인 할머니와는 많이 상반되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나는 더 이상 조급할 것 없었다.

“그냥 법대로 처리해 주세요. 저는 보증금을 이미 포기했어요. 그런 사람들은 법의 처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할머니 만나고 싶지 않아요. 전화로 수 차례 사정해보고 250만원 중에 180만원만 돌려달라고 사정해도 거절당했는데 이제 와서 합의를요?”

“두 분이 마지막으로 합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결국 나는 약속된 시간에 구청에 갔다. 주인 할머니와 딸이 먼저 와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주인 할머니가 대뜸 한다는 말이 “내 70 평생을 살면서, 수많은 세입자들을 들였지만 구청에 신고 당해서 불려오기는 처음일세”라고 하며 민원을 넣은 나를 원망하는 듯했다.

예상한대로 구청 직원은 민원을 일단 받았으니 주인 할머니는 700만원 정도의 벌금을 내야 하며 무허가 건물에 대해서는 서울시에 보고하고 결정이 내려오면 그대로 처리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계약금 문제는 오직 할머니와 나와의 문제이므로 자기들은 개입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만약 민원을 취소하면 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주인할머니가 180만원을 안 주려고 하다가 이제 와서 700만원 벌금을 물게 생긴 것이다.

나는 냉담하게 얘기했다.

“잘됐네요. 전 어떻게 서울시에서 저런 무허가 건물을 버젓이 세를 내주고 수익을 받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안 그러면 제가 그런 불법 건물에 계약을 할 일은 없었을 텐데요. 부동산업자 역시 그곳이 얼마나 살기가 불편한지, 불법 건물인지 알면서도 알려주지도 않고 중개비만 챙기고 나 몰라라 하고요. 200만원 계약금은 원래 나한테 없었던 걸로 생각할 겁니다. 구청에서 건물 철거가 안 된다면 전 서울시청에 민원을 넣어서 끝까지 갈 겁니다.”

사실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아 할 말을 얼른 끝내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과 5분도 안 되어 내가 먼저 나가버리자 주인 할머니와 딸이 급히 따라 나오더니 내 팔을 잡았다. “아기엄마. 저기 커피숍에 가서 얘기 좀 나눠요.”

“전 커피 안 마셔요. 그리고 얘기는 아까 끝났는데요.”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나에게는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가 역겨웠다. 딸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내 앞을 가로막으며 간청했다.

“저 커피를 안 마신다니, 그럼 옥탑방에 가서 얘기 할까요? 아기 엄마 조건을 들어줄게요.”

“이제 와서 들어준다고요? 처음에 얼마나 사정했는데요? 옥탑방에서 산다고 사람을 너무 무시하네요.”

그리고 나는 걸음을 빨리 걸었다. 주인할머니와 딸도 얼른 내 뒤를 쫓아왔다. 열 걸음 정도 걸으면서 나는 구청 직원이 한 말을 떠올렸다.

“서울시청에 신고해도 철거가 이뤄지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몰라요. 또 철거가 안 될 수도 있고요, 웬만하게 합의를 해서 보증금이라도 챙기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나는 생각을 곱씹으며 에잇! 그냥 실속이라도 챙길까? 하는 흔들리는 마음을 안고 있었는데 주인 딸이 다시 한 번 날 멈췄다.

“아기엄마.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저희 엄마가 연세가 있으셔서 고집불통이라 좀 과하신 것 같은데 제가 그 대신 사과 드릴게요.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옥탑방으로 가시죠?”

나에게 180만원은 정말 큰돈이라 나도 고집을 내려놓고 그만 못 이기는 척하고 그들과 함께 옥탑방에 갔다. 나는 텅 비어 있는 옥탑방 차가운 방바닥에 앉았다. 전기사용료를 빼고 나머지 보증금을 다 돌려준다고 한다.

전기사용료만 28만 원이 넘었다. 내가 그 집에서 아직도 살았으면 전기세와 보일러 기름값에 돈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남한에 막 첫발을 디딘 나에게 딱히 수입도 없고 일자리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돈을 돌려받고 나서 나는 씁쓸한 마음을 안고 나와 버렸다.

나중에 한번 그곳을 지나가면서 들려보니 창문과 출입문을 모두 새로 갈고 물이 새지 않게 수리를 해놓은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또 와서 살고 있었다.

 

5. 드디어 뿌리를 내리다.

 

남한에는 국제학교들도 있었고 화교학교들도 있었다. 남한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일단 국제학교에 찾아갔다. 외국에서 3년을 살거나 부모 중 한 명이 외국인이거나 외국에서 태어났거나 하면 국제학교 입학 조건이 충분하다.

욕심은 굴뚝같지만 등록금이 내 수준에는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다. 사립학교라 입학금이 들지만 화교학교는 큰 부담이 되지 않아 그 학교 근처에 집을 잡아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를 주저 없이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떠날 결심을 하는데 큰 요인이었다. 그래서 나오자마자 화교 초등학교에 아들을 입학시켰고 아들은 처음부터 또래 애들과 이질감 없이 잘 어울려 놀았다.

일반 초등학교에 보냈더라면 왕따를 당해서 애가 얼마나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야 할지 상상만 해도 속상했는데 내가 결정을 잘한 것 같다. 많은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낳은 자녀들을 데리고 남한에 왔는데 7살~12살 사이의 애들의 경우 시간이 갈수록 이미 알고 있는 중국어를 다 잊어버린다.

아들은 남한을 너무 좋아했다. 중국에서 맛볼 수 없었던 치킨과 피자, 자장면, 짬뽕도 아무 때나 배달시켜서 먹을 수 있었다. 아들은 특히 회를 너무 좋아했고 사우나도 좋아했다. 그리고 남한 말도 금방 배워서 애니메이션 영화도 즐겨봤다. 정말 이곳은 천국이었다.

 놀러 갈 데가 많고 차가 없어도 교통수단이 잘 되어 있었으며 음식문화는 세계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들이 영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남한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데 아들은 처음 배우는 영어가 너무 생소하고 영어 선생의 한국어 설명이 다 이해가 되지 않아 영어를 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영어 학원에 보냈는데 한 달도 안 되어서 학원 선생님의 전화가 왔다.

“00이가 집중을 전혀 안 해요. 설명을 하면 딴짓을 하고 있고 수업에 관심을 두지 않아요.”

학원에 보낸 지 2달 만에 시험지를 가지고 왔는데 점수가 36점이었다.

“왜 점수가 50점도 안 되니? 그렇게 영어 공부가 싫어? 그럼 영어학원에는 왜 가는 거야?”

“싫은데 엄마가 가라고 해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엄마가 가라고 했으니 일단 가지만 배우기는 싫다는 거다. 나는 당장 영어학원을 그만두게 했다. 없는 돈을 써가며 배우기 싫은 영어학원에 보낼 필요가 있는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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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1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62)

 

(지난 호에 이어)

드디어 오매불망하던 그날이 왔다. 내가 살던 곳에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그곳을 국경을 몇 개나 넘고 돌고 돌아가게 된 것이다. 비행기 출발을 앞둔 며칠 전부터 들뜬 마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기쁨에 넘쳐 있었다.

드디어 2008년 봄,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우리는 7시간 후에 화려한 불빛들과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때는 거의 새벽이었다.

 

4. 서울의 옥탑방

 

중국에서 살 때 남한은 꿈의 나라였다. TV를 통해 본 남한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의 하나로 꼽혔으며 아시안들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나라였다.

산 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 땅에서 무시와 멸시, 조롱과 천대 속에 움츠리고 잡혀갈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그 시간들은 다 옛말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나는 내 나라 내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남한에 들어와서 우리는 정부 탈북자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3달 동안 훈련을 받는다. 그곳에서는 교통과 노동법에 대한 상식, 직업훈련과 기타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컴퓨터 기초교육 등등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훈련을 해준다. 내가 그곳에서 한 것들 중에 가장 잘한 일은 영어 수업을 빠짐없이 참가해 영어를 배운 것이었다.

영어는 필수가 아니고 본인 선택이었는데 매일 아침 8시~9시 사이에 진행하는 영어 수업을 절대 빠지지 않고 들었다. 발음이나 문법이 북한에서 배운 것과 많이 달랐다. 모두 20대 학생들이 대학진학을 위해 수업을 들었는데 그 속에 아이 달린 아줌마는 나 혼자 뿐이었다.

아들은 언어 때문에 담당 선생님과 거의 일대일 교육을 받아야 했다. 3개월 정도 교육을 받고 나니 그 애도 금방 적응을 하게 되었다. 하나원을 수료하면서 나는 최우수 성적을 받았다.

 하나원에서 나오자마자 첫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던 정말 가슴벅찬 그 날의 감동은 잊을 수 없다. 드디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나는 속으로 그 많은 수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끝내 오고야 만 내 자신에게 감사하고 우리 모자를 품어준 남한 정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정부의 노력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정책은 정말 과분했고, 내가 이런 혜택을 받아도 되는 건지 송구스럽기만 하였다. 정부에서 임대아파트를 받게 되는데 나는 운이 나쁘게 서울, 인천 지역에 당첨되지 못했다. 경북 경산으로 가게 되어 나는 임대아파트를 포기했다.

임대아파트를 포기하는 건 사실 나에게 큰 모험이었다. 포기하는 순간부터 나는 월세건 전세건 내가 알아서 살 곳을 찾아야 하고 300만원이라는 정착금을 받는 돈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 서울에 가서 살아야 했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떠나올 때 미리 검색해둔 서울의 중국어학교에 아이를 보낼 계획을 세우고 왔기 때문이다. 나는 과감히 아파트를 포기하고 아들과 함께 서울에 살고 있는 지인의 집에 임시로 한 달 정도 살았다.

나는 300만원으로 아들과 살 수 있는 월셋집을 찾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 금액으로 찾을 수 있는 월세가 서울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찾은 부동산 광고에 눈이 번쩍 띄었다. 보증금 250만, 월세 25만, 서울 ㅇㅇ중심에 있는 옥탑방, 이건 완전 대박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부동산중개소에 한달음에 달려갔고 난생처음 해보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나는 더 묻고 따질 것도 없었다. 아들 학교와 걸어서 20분 거리도 안 되는 가장 적합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덜컥 계약하고 1주일 후에 이사를 한 우리는 그날부터 옥탑방에서 살게 되었는데 살면 살수록 불편함이 여기저기 드러나기 시작했다.

옥탑방은 컨테이너를 개조하여 만들었고 사실 구청의 허가도 받지 않은 불법건물이었다. 8개월에 걸치는 난민수용소, 국정원, 하나원을 거친 오랫동안 갇혀살다가 드디어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된 기쁨도 잠시였고 덜컥 사인부터 해놓고 여길 이사 온 것부터 막심한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는 여름에는 너무 뜨거워 도저히 에어컨을 잠시도 끌 수 없어 전기세만 한 달에 30만원 정도 나왔다. 겨울에는 기름보일러가 돌아가는데 기름 먹는 하마처럼 한 달 50만원의 기름으로도 부족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통에 담아서 낑낑거리며 집에까지 들고 와서 옥탑방까지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며 보일러 기름구멍에 쏟아 넣는 것은 나에게 정말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잘못하면 기름이 밖으로 새어나가 냄새가 진동하고 또 화재의 위험도 있기 때문에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겨울엔 거의 보일러를 16도 정도로 돌리고 겨울 재킷과 두터운 옷들을 입고 살아야 했으며, 샤워는 너무 추워서 매일 할 수가 없어 1주일에 두세 번만 했다.

 거기에다 바퀴벌레들이 사방에 기어 다니고 나는 그것이 바퀴벌레인지도 몰랐는데 얼마나 살찌고 큰지 징그러워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다가 여름에 비가 오면 창문 틈으로 빗물이 철철 새어 들어 밤새 이불이 젖어버렸고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창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올 정도로 허술하기 그지없고 일단은 겨울 난방용 기름값과 여름 에어컨용 전기세가 한 달 50만원을 웃돌고 있으니 도저히 여기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계약서라는 개념을 사실 몰랐던 나는 난생처음으로 문서에 사인을 해놓고도 내용도 읽어보지 않았고 내가 2년 계약을 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주인 할머니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이런 불편을 얘기하면 내가 계약을 했기 때문에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만 했다.

나는 그렇게 1년 넘게 살다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당장 이사가야 한다는 마음에 좀 괜찮은 집을 찾고 또 덜컥 사인하고 말았다. 거기에다 보증금까지 내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주인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기서 너무 춥고 더워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이사 갈 거예요. 2달 후에 이사 나가니 보증금 돌려주실 거죠?”

“아니, 무슨 보증금? 2년 계약했으니 끝날 때까지 돌려줄 수 없어. 새 계약을 했든지 이사 나가든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야.”

나는 사실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주인할머니가 어쩌면 이렇게 냉정할 수 있을까 하는 원망이 생겼다. 내가 계약을 했던 부동산에 찾아가 다른 세입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보러 왔다 갔지만 아무도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2달이 지나도 다음 세입자를 구할 수가 없었고 나는 당장 이사갈 날짜가 다가왔다. 그런데다가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다음 집에 보증금을 맞춰서 낼 수 있다.

나는 다시 할머니에게 사정을 해보려고 전화를 걸었다.

“여기 법을 잘 모르고 덥석 계약부터 한 내가 잘못이지만 이 건물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도저히 못되니 더 이상 여기서 살 수 없어요. 제가 이렇게 부탁 드릴게요. 2달치 월세를 빼고 나머지만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전 1주일 후에 이사를 가야 해요. 그 2달 동안이면 다른 세입자를 찾게 되겠죠.”

“아니, 이봐 아기 엄마! 자꾸 떼를 쓰는데 이건 떼를 쓴다고 되는 게 아니야. 2년 계약기간은 본인 책임이야.”

“물론 저도 제 불찰인 걸 잘 알아요. 여긴 처음이라 너무 몰라서 그랬어요. 그저 저를 한번 도와주는 셈치고 180만원만 돌려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나 지금 너무 바쁘니까 이젠 그만해요. 계약을 해놓고 떼를 쓰면 안 되지 참나.”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냥 일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정말 너무 하시네요. 자꾸 계약서 얘기를 하시는데 무허가 건물을 가지고 법을 말씀하시니 앞뒤가 안 맞네요. 이 건물 불법으로 개조해서 월세 놓으시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계약서도 무효가 아닌가요?”

갑자기 주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가시가 돋쳤다. “아니, 이런 북한 새아기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계약은 법적인 책임이 따르는 거라고, 불법건물 얘기는 또 어디서 듣고 와서 이젠 별 걸로 다 협박하네?”

사실 행복하기만 하고 감사하기만 하던 남한 사회의 첫 현실이라는 장벽에 부딪치게 되니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차갑고 쌀쌀한 주인 할머니도 원망스러웠고, 무허가 건물을 알면서도 나에게 계약서를 내민 부동산업자도 원망스러웠고, 이런 불법 건물이 버젓이 세를 주고 또 사람이 살고 있는 것도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코 만만치 않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새삼 느꼈다. 다른 탈북자 가족들은 정부 임대아파트에서 불편함이 없이 살고 있는데 나는 이게 무슨 고생인가? 하지만 이제 와서 이렇게 남을 원망만 할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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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98559
19195
2022-08-25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61)

 

 (지난 호에 이어)

 “아니 넌 어디서 어떻게 왔니? 누가 데려다 줬니?” 아이를 데려온 경찰은 옆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나 잘했지? 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며 아들을 꼭 품에 안았다. 우리 이젠 갈라지지 말자!

아무도 아들을 데려다 준다고 말하지 않아서 사실 나는 정말 놀랐다. 내가 자살소동을 벌리자 경찰서에서 청소년 감호소에 가서 아들을 데려오도록 조치를 취했고 이삼일 후에 진짜로 아들이 내 품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가 떨어져 있는지 1주일 동안의 얘기를 들어보니 꽤 괜찮게 지내긴 한 것 같았지만 매일 엄마가 보고 싶고 혼자 무섭고 두려워서 울고 지냈다고 했다. 그곳에서 태국어도 가르치고 운동도 하고 음식도 괜찮았지만 갑자기 엄마와 떨어지고 낯선 곳에 끌려가게 되니 너무 불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불상도 있었는데 아들은 불상 앞에서 두 손을 모아 빌었다고 한다. “빨리 엄마를 만나게 해주세요! 엄마와 내가 한국까지 무사히 가게 해주세요!”

그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찡해져 코끝이 시려왔다. 그렇게 나는 타국의 법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아들과 함께 남은 40일을 지낼 수가 있었다. 경찰서 사람들은 모두 나를 위해 기뻐해주었고 그때부터 그들은 나를 친구처럼 편하게 대했으며 또 구내식당에도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또 나를 불러 쇼핑하고 싶으면 갔다 오라고 경찰 한 명을 붙여주었다. 같이 있던 5명 중에 나 혼자만 나갈 수 있었는데 아마 그들이 영어가 안 돼서 그런지 그들은 못나가게 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사주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파는 쌀국수도 사먹고 밖의 시원한 공기도 마음껏 마시며 45일이 지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그때 나는 태국인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이 너무도 부러웠다. 나도 그들처럼 정말 영어를 잘하고 싶었고 외국인들과 마음껏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사실 태국은 그저 못사는 나라로만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친절했고 태국어는 기본이고 영어, 중국어가 만연하여 대부분의 태국인들은 영어를 잘했고 모두가 2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대단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탈북자 행렬 10여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방콕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다가 여권검색에 걸려서 잡혀 들어왔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합류하게 된 우리는 언제 방콕으로 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매일 같이 경찰들에 게 물어봐야 했다.

사실 우리가 그곳에 그토록 오래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내 아들이 청소년감호소에서 45일을 있어야 방콕으로 갈 수 있는 태국 법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간다! 드디어 그곳을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3. 방콕 이민국 수용소에서

 

드디어 방콕의 난민수용소에 이송된 우리는 탈북자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들은 남자들 방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또다시 그와 갈라져야 있어야 한다니. 여자방과 남자방은 서로 마주 보는 건물에 갈라져 있었는데 서로 왕래는 절대 금지이며 오직 음식만 전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중국에서 먼저 떠난 친한 언니네 가족과 재회하였다. 우리 모두 정말 친형제를 만난 듯이 기뻐하였다. 그곳은 여러 나라에서 들어온 불법체류자들과 난민들이 너무 많았고 국적별로 칸이 다 달랐다.

매일 1시부터 2시 사이에는 운동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방에서 나갈 수 있고 간이매점에서 간단한 것을 살 수도 있었다. 매일 운동시간이 되면 밖에 나가면서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한 번 만이라도 꼭 보고 싶었던 나는 어떻게 하면 아들을 만날 수가 있을까, 혼자 조용히 궁리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함께 온 여인들은 남편, 아들들과 서로 갈라져 있어야 했으며 그곳에 있는 동안은 서로가 절대 만날 수는 없었다. 법이나 규정이 그렇지만 나는 일단 부딪쳐보기로 했다.

나는 경호원에게 10살 된 아들이 아빠 없이 혼자 남자수용소에 있는데 내 아들을 데려다 줄 수 있겠느냐. 여기서 한 시간 만이라도 함께 있고 싶다고 말이다. 당연히 그는 안 된다고 머리를 저었다. 나는 다른 경찰에게 또 부탁을 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이번에는 중년의 경찰에게 부탁했다. 그는 자기는 권한이 없다며 나를 사무실에 있는 제일 높은 사람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가 여기 제일 높은 빅보스라고 하는데 덩치가 커서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꼈다.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10살 된 아들이 어른의 보호 없이 혼자 남자 수용소에 있어요. 그는 조선말도 잘 모르고 중국어만 할 줄 아는데 그곳 사람들은 중국어를 모르니 의사소통도 안 되고 돌봐 줄 사람도 없어요. 나는 정말 걱정이 되어 그러니 제발 한번 만나게 해주세요. 어떻게 지내는지 꼭 보고 싶어요.”

내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그런지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않은 영어 단어가 막 슬슬 튀어나왔다. 영어가 엉망이지만 떠듬떠듬 단어만 갖다 붙여 설명을 하니 그래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떡이더니 아들한테 데려다 주라고 지시했다. 정말이요? 이건 진짜 대단한 기적이다!

사실 나는 보스가 허락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규정이 있기 때문에 나를 허락해주면 다른 사람들이 무질서 하게 서로 가게 해달라고 할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도전을 해 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내 한마디에 쉽게 승낙을 하다니 나는 아무도 해내지 못한 기적을 이루어낸 나 자신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한 나의 정신력에 스스로 감탄했다. 규정이 있고 법이 있어 그냥 수긍하고 속상해하기만 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경찰을 따라가 보니 세상에 무슨 정치범 수용소도 아니고 감옥보다 더 감옥 같은 곳에 남자들이 꽉 차 있었다.

커다란 자물쇠를 철컥 열더니 들어가보라고 한다. 나는 들어가면서 아들 이름부터 불렀다. 난데없이 갑자기 웬 여자가 들어오게 되자 맥없이 누워있던 남자들이 모두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외계인을 보듯이 나를 희한한 눈길로 쳐다보며 어떻게 여길 다 왔냐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ㅇㅇ이 데려가서 같이 1시간만 있으려고 왔어요.” “야!! ㅇㅇ엄마 대단한 여자네. 여기를 이렇게 막 들어오다니” “아니, ㅇㅇ엄마는 이렇게 들어오는데 왜 우리 마누라는 못 오는 거야? 여기 남편하고 아들 둘씩이나 있는데 말야.”

갑자기 그들의 부러움이 아내들에 대한 원망으로 번져갔다. 나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속에서 아들을 찾아 데리고 밖에 나왔다.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불편한 건 없는 지 물어보며 아이스크림이나 다른 먹을 것도 사주었다.

나를 안내해주던 경찰은 아직 여기 수용소가 생긴 이래 한번도 남자수용소에 여자가 찾아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보스가 왜 나를 허락해주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내가 남자수용소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여자들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다른 여자들이 저들도 함께 따라간다고 할까 봐 나 혼자 몰래 경찰들에게 물어보았고 또 영어로 대화를 나누니 그들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전화기가 불이 날 지경이었다. 전화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는데 외부에서 몰래 들여온 전화기 2대를 방장이 가지고 있었으며 경찰이 밖에서 보이지 않게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등 뒤에 가려서 통화를 해야 했다.

남편들이 아내들한테 전화를 하느라 전화가 수없이 걸려 왔는데 대뜸 한다는 말들이 “ㅇㅇ엄마는 아들 보러 왔다 가는데 너는 여기 남편도 있고 아들도 둘씩이나 있는데 뭐하냐.”

여자들은 남편들이 거짓말한다고 믿지를 않았다. “거기 아무도 못 가는데 무슨 소릴? 거짓말 마오.”

답답한 방에 갇혀서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으니 내가 다녀간 뒤로는 사람들이 화젯거리가 생겼다. 그렇게 되자 나는 그곳에서 갑자기 인기가 많아졌다. 중국어도 잘하네, 영어도 잘하네, 그리고 용감하고 결단성이 있네 등등 칭찬이 줄줄이 따라왔다. 나는 그들의 칭찬에 피식 웃기만 했다. 진짜 영어를 잘해 보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그 후에는 빅 보스한테 직접 찾아가지 않고 날 데려다 준 경찰한테 부탁했더니 나를 두 번 더 데려다 주었다. 다른 여자들도 서로 경찰들 붙잡고 가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랐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너도나도 다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질서가 무너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곳에서 2달을 지내면서 대사관에서 나온 직원들로부터 조사를 받으며 남한으로 가는 날을 기다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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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98298
19195
2022-08-18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60)

 

(지난 호에 이어)

 

2. 내 아들을 돌려주세요!

우리가 도착한 곳은 태국 치앙라이라는 국경 도시였는데 나는 학교 때 배웠던 영어를 기억하며 태국인들에게 길을 물었다. 우리 일행 중에 나 혼자 유일하게 영어를 더듬거리며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처음으로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해 본다.

여기 도시 이름은 뭐냐, 치앙마이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버스터미널은 어디에 있나, 택시는 있는가 등등 말이다. 치앙마이는 태국의 방콕 다음으로 큰 광역도시이고 해외 관광객들이 넘쳐났는데, 태국어를 몰라도 의사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태국인들 대부분이 영어나 중국어 둘 중의 하나는 잘 할 수 있었으며, 식당에 가면 대부분이 중국인들이라 그곳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쫓기거나 숨지 않아도 되어 점심을 푸짐하게 먹은 우리는 그날 작은 여관에 들어가 하룻밤을 잤다.

시골 여관은 안전시설이 안 되어 밤에 강도나 경찰이 들이닥칠 때도 있다고 한다. 침대 2개밖에 없는 여관방에서 나는 아들과 한 침대를 쓰고 다른 일행은 여자 형제 2명과 딸과 함께 한 침대에서 좁은 대로 자야 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우리는 일단 간단한 쇼핑을 했다. 여름옷들과 샌들을 사들고 버스터미널로 갔다. 치앙마이 버스터미널은 너무 크고 넓어 자칫 길을 잃을 것 같았다. 해외 여행객들이 많아 그들은 대부분 치앙마이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다행히도 티켓을 끊고 제대로 버스에 탈 수 있었다.

우리는 치앙마이에 도착하면 다시 버스를 타고 방콕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은 나중에 다 틀어졌다. 버스를 타고 몇 시간 달려 치앙마이에 도착한 우리는 일단 길옆에서 팔고 있는 쌀국수부터 사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쌀국수였는데 정말 맛있었다. 이건 매일 먹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서 시장을 여기저기 구경하고 방콕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경찰서에 바로 갈 것이냐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방콕으로 바로 가면 1인당 버스비용이 600 밧트가 들었고, 경찰서로 찾아가 난민신청을 바로 하고 방콕에 이송되면 난민수용소에 바로 갈 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비용을 쓰지 않고도 갈 수 있는 길을 택했다.

대부분 탈북자들은 버스에서 경찰에게 여권검색에 걸려들어 수용소에 이송된다 고 하는데 우리는 검색도 당하지 않아 스스로 경찰서에 찾아가는 어리석은 짓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잘못된 판단과 정보 부족으로 우리는 이곳에서 예상보다 더 오래 발이 묶이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일단 치앙마이시 경찰서를 찾아갔다. 나는 이때 학교 때 배웠던 온갖 영어 단어들을 떠올리며 소통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다른 2명은 러시아어를 배워 영어는 하나도 몰랐고 그 지역에는 중국어보다 영어를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나 아니면 소통을 할 수가 없어 갑자기 5명의 운명이 내 어깨에 달려있는 듯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경찰서 앞에 짐을 내려놓고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지만 그들은 우리를 기다리라고만 해놓고 저녁 해질녘까지 들여놓지 않았다.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음식들과 과일을 사고 주변을 구경했는데 횡단보도를 찾지 못해 하마터면 차에 부딪칠 뻔하였다.

태국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그래서 길을 건너다가 갑자기 경적도 없이 차 한 대가 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 기절할뻔했다. 그 후부터 무서워 길을 건너지는 못하고 한 쪽만 계속 뱅뱅 맴돌면서 경찰서의 수속을 기다렸다.

밤이 되어오자 당직 경찰은 종이로 등불을 만들어 하늘에 날려보내는 걸 보여줬는데 소원을 빌어서 하늘로 올려 보내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아들과 나는 등불을 만들어 하늘에 띄우며 무사히 남한에 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다음날 수속을 하게 된 우리는 경찰서 측에서 불러준 남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통역뿐 아니라 성경책과 한식들을 많이 가져다 주셨다. 특히 불고기, 김치, 김, 밥 등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다. 여러모로 그 목사님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어렵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변수가 생겼다. 우리는 불법체류자이므로 법적으로 재판을 받고 나서 우리가 원하는 나라에 갈 수 있는 난민수용소에 보내지는데 7살~18살의 청소년들은 45일 동안 따 로 청소년 감호소에 보내진다고 한다. 하지만 목사님도 우리에게 설명을 제대로 해주시지 않아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 45일 동안에 아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며 우리는 경찰서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법을 우리가 알았더라면 바로 방콕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우리는 그곳 경찰서에서 45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렇게 경찰서에 다시 돌아오게 된 나와 아들은 갑자기 갈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아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뭐가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 먼 땅에 와서 아들이 어디로 간 건지, 어떻게 사는지, 언제 나한테 다시 돌아오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무척 화가 났고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정말 매일 아침 경찰들에게 물었다.

“아들이 언제 오나요? 제발 아들을 데려다 주세요. 제발, 제발.”

“45일 지나야 온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그들은 분명히 영어로 45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 45일이라는 날짜를 알아들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4박 5일도 아니고 45일을 어떻게 갈라져 산단 말인가?

중국말만 하던 아들이 갑자기 학교도 못 가고 이상한 감호소에 가서 외국 애들이랑 지내야 한다니. 애는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고 또 낯선 환경이 무서웠을까? 울고 있을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이 현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는 절대로 아들과 45일 동안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마치 아들을 영영 못 만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너무 두려웠다. 내가 고향의 부모, 형제들과 그렇게 헤어져 다시는 영영 못 만나게 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아이와 갈라져 지낸 지 1주일째 되는 날 큰 계획을 세웠다. 나는 떠날 때 접이식 칼을 준비해 왔는데 혹시라도 산이나 수림 속에서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침 식사를 배달하러 당직 경찰 한 명이 구류소 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구류소 안에 있는 복도에 있었고 다른 죄인들은 감방처럼 생긴 방에 분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할 수는 있었는데 당직 경찰이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가 나가는 순간에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을 데려다 주세요. 제발 데려다 주세요.”

사실 경찰들은 내가 매일같이 애원하는데 익숙해져 그냥 나를 무시하곤 했다.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나를 매정하게 밀쳐버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의 다리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갑자기 다리를 나한테 잡히게 된 그는 걸을 수가 없게 되자 다시 들어왔다. 나는 그의 앞에서 준비했던 작은 손 칼을 꺼내 내 배에 갖다 댔다.

“아들을 지금 당장 안 데려오면 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다. 아들을 지금 당장 데려다 달라.”

그리고 칼을 내 배에 깊이 눌렀다. 갑자기 당황해진 당직경찰은 비상벨을 눌렀고 순식간에 10여 명의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대여섯 명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킴. 그 칼 내려놔. 안 돼 그러지 말고 잠깐 얘기해!”

나는 사실 자살소동을 벌여 그들에게 겁을 주어 아들을 데려오게 함이었는데 칼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진짜로 옷을 찢을 뻔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연기를 하며 진짜로 울부짖었다.

“내 아들을 데려다 주세요! 아들을 돌려주세요. 제발 아들을 데려다 주세요!”

내가 할 줄 아는 영어는 고작 몇 문장밖에 없어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사방에 둘러싸인 경찰에 결국 잡히게 되었고 칼을 뺏겼다. 그들은 나를 독방에 처넣고 문을 잠가버렸다. 나는 혼자 하루 종일 독방에서 울고 또 울며 들여 보내준 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틀을 갇혀 있으며 밥을 한술도 먹지 않으니 경찰들이 이틀 만에 나를 독방에서 풀어주었다. 사실 그들 모두가 나를 안쓰러워했다. 나는 그들의 눈빛과 말투에서 그렇게 느꼈다.

그들은 나를 미워하지도, 죄인처럼 천대하지도 않았다. 독방에서 풀려난 다음날 아침 10시쯤에 갑자기 아들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엄마. 엄마 내가 왔어!”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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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1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9)

 

(지난 호에 이어)

그는 가려면 아들을 두고 나 혼자 가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들을 두고 갈 바엔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일단 나는 10살이 된 아들에게 물었다. “엄마가 먼 길을 떠나 한국이라는 나라에 갈 건데 아빠랑 집에 있을래? 아니면, 엄마 따라서 먼 길 떠나 한국으로 갈래?”

10살 된 아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내 옆에 왔다.

“난 엄마 따라 갈래?” 그렇게 나는 아들과 함께 한국 행을 결심했다. 남편은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나는 그에게 아들이 방학이 되면 꼭 데리고 올 것이라고 약속하였고 모든 재산은 다 두고 갈 테니 아들만 데리고 가겠다고, 만약 동의하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을 데리고 도망갈 거라고 통보 아닌 통보를 했다.

불쌍한 남편은 목 놓아 울고 또 울었다. 남자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고 죄책감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고 너무 아팠지만 아들에게 더 큰 미래를 안겨주기 위한 것이라고 나를 합리화 시키면서 애써 외면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내가 그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다. 나중에 형제도 없이 홀로 남겨진 그를 결혼으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고집불통인 그의 사고방식 때문에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꼭 필요한 여비만 챙기고 길을 떠났다. 은행에 있던 모든 통장과 현금들을 모두 남편에게 넘겨주었다. 그래야 떠나는 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 겨우 남편을 설득시키고 우리는 2007년 11월에 한국으로 가는 기나긴 여정의 길에 올랐다. 장거리 버스에 오른 우리는 출발해서 거의 닷새 만에 중국의 남쪽 국경도시 윈난성 쿤밍에 도착했다.

우리와 떠난 일행은 다른 탈북자 가족 3명과 우리 2명인데 어른 3명과 2명의 아이이었다. 5명 이상일 때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인원이 적으면 비용이 똑같이 들고 이윤이 남지 않아서 그런다고 한다. 쿤밍 버스터미널에는 도처에 경찰들이 널려 있었고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남한으로 가는 탈북자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경찰 제복을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철렁해 무척 긴장을 했는데 낯선 안내자를 만나서 얼른 봉고차를 타고 10시간 거의 달려 소수민족의 작은 시골에 도착했다. 그곳 아파트에 3일 정도 살게 된 우리는 허락 없이는 밖에 나갈 수 없었고 나 혼자만 그 안내자와 함께 시장에 가서 먹을 것을 사다가 밥을 해먹었다.

우리는 전화기도 압수당했고 외부의 그 누구와도 연락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 출발하는지 날짜와 시간도 알 수 없었으며 언제라도 출발할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3일째 되는 날 새벽 2시에 안내자가 들이닥쳐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했다.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는 차에 올랐는데 진흙탕 물이 넘쳐흐르는 강을 보트를 타고 건너가니 그곳이 미얀마라고 한다. 불과 100m 정도 되는 강폭은 좁지만 물살이 아주 빨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중국 국경을 무사히 건넜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사실은 이곳 중국-미얀마-라오스 국경에서 많이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 되었다는 소식을 종종 접하게 되는데, 우리는 정말 행운이었다. 그는 다른 안내원에게 돈과 함께 우리를 인계해 주었고 우리는 또 거의 2시간을 걸었다. 그렇게 걸으니 어느덧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다.

우리는 미얀마의 바나나 농장을 지나고 산속을 지나는 도중에 오렌지색 도포를 입은 승려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이 지은 독특한 집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메콩강 기슭을 따라 한참 걷다 보니 반대편 라오스를 볼 수 있었는데 안내원이 하는 말이 많은 탈북자들이 라오스에서 잡혀 북송 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라오스가 아니라, 미얀마를 통과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중국어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의사 소통할 정도는 알았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우리는 비상식량을 많이 준비했는데 초콜렛이나 건빵들, 견과류들은 이때 요긴하게 먹을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주저앉아서 먹을 수 없기에 배고프면 걸으면서 먹어야 했다. 10살 된 아들은 곧잘 따라 걸었다. 그래도 중국 국경을 무사히 넘어와서 한결 긴장이 풀리긴 했지만 여기저기 미얀마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남방의 경치와 따뜻한 날씨는 그냥 지나치기가 너무 아까울 정도였다.

그렇게 메콩강 나루터에 도착하니 작은 보트와 또 다른 안내원이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트에 오르기 전에 보트맨은 우리가 짐이 너무 많다며 짐을 꺼내어 버리게 하였다. 짐이 너무 많으면 용량 초과로 작은 보트가 뒤집어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아이 옷과 먹을 것만 남겨두고 내 옷과 신발 등은 모조리 버려야 했다.

그리고 보트는 사람 5명만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보트맨은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안전사항을 알려 주었다. 이제부터는 진짜 위험하니 조심해야 된다고 했다. 보트는 오래 전에 사용하던 구식 보트에 엔진을 매달아 속도를 내게 하는 것인데 안전벨트도 없어 갑자기 방향을 돌리면 휙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메콩강에는 악어들이 많았고 보이지 않는 암초들이 많아 잘못 부딪치면 사방으로 날아가 악어 밥이 될 수 있다고 보트맨이 경고하였다. 우리는 보트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게 배치되어 앉았으며 양손을 보트에 붙은 손잡이를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았다.

나는 처음 압록강을 건널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때도 탈북한다며 강을 건너다가 첫 아이를 잃지 않았던가? 또다시 탈출을 한다고 압록강보다 더 위험한 메콩강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악몽의 재현인지 너무도 두려웠다.

나는 출발하기 전에 아들에게 당부했다. 만약에 암초에 부딪쳐 보트가 뒤집어지더라도 손잡이를 절대 놓지 말 것이며 빨리 보트 위에 올라와야 한다고, 손잡이를 놓지만 않으면 된다고 거듭 당부했다. 아무 영문도 없이 나를 따라나선 아들은 이런 상황들이 이해가 되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말을 잘 들었고 고개를 끄떡이며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벌써 아침 10시가 되면서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는데 길고도 긴 메콩강을 달리는데 2시간 넘게 걸렸지만 나는 그 시간이 10시간보다 더 길고 또 길어 보였다. 중간중간에는 물밑에서 살짝살짝 드러나는 암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앞에서 마주 오는 커다란 중국 여객선에는 북한 공화국 깃발이 달려있어 정말 긴장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북한 깃발을 10년 만에 눈앞에서 보게 되자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고 별의별 상상이 다 떠올랐다. 여태 잘 숨어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내가 잡혀가면 아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나쁜 생각들이 마구 떠올랐다.

암초와 악어도 무서웠고 우리를 향해 마주 오고 있는 여객선은 저승사자처럼 앞에서 우리를 위협했다. 큰 여객선들은 갑자기 보트를 멈추게 하고 단속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여객선이 마주 오자 우리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반대편에서 노를 저으면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야 했다.

한창 물놀이 흉내를 내면서 여유만만하게 노를 젓던 우리는 여객선이 멀리 지나가 버리자 다시 전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보트가 쏜살같이 달리면 무조건 세워서 신분증 검사를 하고 잡아간다는 것이다. 평소라면 물보라를 일으키며 쾌속으로 달리는 보트를 즐겨야 할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 순간을 즐길 수 없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양쪽에 끝없이 펼쳐진 숲과 수려한 암벽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고 처음 타보는 보트는 스릴만점이었지만 암초와 악어라는 두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는 태국 땅에 도착했다. 보트맨은 우리를 내려주면서 행운을 빈다고 했다. 많은 탈북자들이 보트가 뒤집혀 물속에 잠겨 죽은 사람들도 많고 특히 악어가 팔을 낚아채 물어뜯어 팔을 잃은 여자도 있었다는데 우리는 다행히 아무도 안 다치고 무사히 도착하여 행운아들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가 이 말을 출발하기 전에 했으면 아마도 우리는 보트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 때 지리수업 시간에 세계에서 가장 큰 강들의 이름을 지도에서만 보던, 이름만 기억나는 메콩강을 내가 직접 건너다니, 중국, 미얀마와 라오스 등을 거쳐야 하는 이 위험한 여정은 태국 땅에 발을 디디면서 드디어 끝났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더 이상 북송될 위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태국은 탈북자들을 북송하지 않지만 일단 불법체류자로 분류하여 난민수용소에 넣고 그들이 원하는 나라에서 받아주면 그 나라로 보내준다. 태국 땅에서는 브로커나 안내자가 없었는데 북송될 위험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자유의 몸이 된 우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계획을 세워야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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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4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8)

 

(지난 호에 이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리집 아파트 창문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그들이 나를 미행하여 내 집을 알아내고 무언의 협박을 한 것으로 나는 대뜸 알아차렸다. 나는 두려움이 앞섰고 우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걱정이 되었는데 이렇게 협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회사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상 나에게 많은 책임감과 부담감을 주고 있던 회사를 드디어 떠나기로 결심했다. 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했다. 그곳에는 4성급 호텔이 한 곳 있었는데 가격도 비쌌을 뿐 아니라 말이 4성급이지 샤워 시설도 불편하고 더운물도 잘 안 나왔으며 특히 대부분 중국음식이었고 한국어 서비스가 없어 한국에서 출장을 온 사업가들은 많은 불편을 느껴야 했다.

통역을 다니면서 많은 남한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 불편한 문제들을 잘 알게 된 나는 바로 호텔 뒤에 방 3개짜리 고급아파트를 렌트했다. 그리고 호텔의 절반 가격으로 한식과 통역을 제공하였으며 중국에 사업하러 오는 한국인들의 불편한 사항을 잘 파고들어 그들을 위한 맞춤 공략을 펼쳤다.

또한 이미 알고 지내던, 특히 회사 사장님들이 지인들에게 홍보를 해주셔서 나 혼자 정말 바쁠 정도로 고객들이 많이 생겼다. 2박 3일 사업차로 방문하는 사람들과 퇴직을 하고 친구들과 중국여행을 하러 온 동아리들도 있고, 장사한다고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소상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점은 삼시세끼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였다.

특히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중국음식에 냄새만 맡아도 거부감을 느껴 불편해 하였는데 나는 음식만은 아낌없이 정성을 쏟아 그들의 만족도를 높였다. 사업, 박람회, 여행 등 다양한 이유로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한식과 통역이 제공된다는 것은 정말 좋은 장점이었다.

한 번은 80세 가까이 되신 친구 3명이 함께 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공자의 생가와 태산을 구경하고 싶어했다.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든든히 하고 드디어 고속도로를 5시간 째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 분이 배고 고프다며 여기 어디 한식당 있으면 가자고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분들이 고속도로에서 뭘 먹는 걸 찾냐며 그 친구 분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사실 그 주변에 한식당은 고사하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상황이라 멈출 데가 없었다. 중간에 멈출 계획을 세우지 않아 많이 당황해진 나는 그래도 배고프다는 어르신을 그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지역 식당에 일단 차를 멈추고 나 혼자 먼저 들어갔다. 그들의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도저히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은 아니었다. 나는 그곳 식당을 몇 군데 돌면서 메뉴판을 확인하고 그 중 우리 음식과 비슷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메뉴에 없는 한식 비슷한 해물 볶음밥을 주문했다.

비록 한식은 아니었지만 새우와 오징어를 많이 넣고 볶은 볶음밥은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들 만족해하며 많이들 드셨다. 그렇게 혼자 너무 바빠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객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몇 배의 수입을 얻게 되었다.

또한 한국문화는 자연스럽게 내 몸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면서 나는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되었다. 2개 이상의 언어를 할 줄만 안다면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나는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어느덧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나는 그에게 우리말을 가르쳐야겠다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국경이라는 개념이 점점 사라지고 지구촌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 오고 있지 않은가? 언어를 많이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차려질 것이다. 일단 아들에게 우리말부터 가르치자.

우리 집에서 50km 떨어진 곳에 조선족 학교가 있었는데 그곳 학생들은 기숙생활을 해야 했고 매주 월요일에 데리러 오고 금요일 오후에 데려다 준다. 학비가 많이 비쌌는데 한 학기에 4천 위안을 내야 했다.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4천 위안을 내고 그 학교에 등록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아까운 돈만 날린 격이 되어버렸다.

 

제8장 뿌리 내린 나무

 

1. 또다시 국경을 넘어

 

때는 바로 2007년 가을에 접어들었다. 남한 돈 100만 원이면 8천 위안 정도 했는데 그래서 더 남한 사람들이 중국에 사업한다고 몰려들었던 것 같다. 나는 고객들이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들을 수없이 받았는데 그때마다 절대 중국에 사업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중국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중국 정부의 외국기업에 대한 규제와 제한으로 인해 특히 소규모의 기업들도 사실 살아남기가 힘들다. 남한의 많은 중소기업들이 중국에서 망하거나 파산해서 사장들이 야반도주를 하는 일들을 많이 보아왔다. 내가 다녔던 선풍기 만드는 회사도 그렇고 그 주변의 다른 회사들도 꽤 많이 문 닫고 철수해 버렸다.

그들은 모든 설비를 그대로 둔 채 몸만 빠져나갔다. 파산 당한 회사 정문 앞에는 노동자들이 밀린 월급을 달라며 남한 사장이 도주할 수 없게 지키고 있었고 설비들은 손도 댈 수 없게 했다. 그러니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야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갑자기 환율이 폭락했다. 100만 원에 8천 위안 하던 것이 겨우 5천 위안에 불과했고 그러다 보니 사업하는데 큰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여행객들도 줄어들고 사업차 방문객들도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루는 옆집에서 살던 언니 부부가 갑자기 남한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나도 남한에 가려고 한번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한식을 배운다고 코리아타운에 갔을 적에 만난 조선족 통역을 통해 탈북자들을 남한에 보내주는 브로커와 만나서 갈 생각을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때는 고향에 부모님들과 동생이 살아계시는 줄 알고 언젠가는 북한으로 몰래 넘어가 부모님들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절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북한과 대결상태인 남한으로 가면 그런 가능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아들을 남겨두고 나 혼자 갈 수 없었다. 어떻게 생긴 아들인데… 그 애는 내게 압록강에 묻고 온 맏아들의 환생이었고, 타향만리 이역 땅에서 흔들리지 않고 간난신고를 이겨낼 수 있었던 기둥이었다. 아들은 내 분신이다. 그러니 절대 떨어질 수 없다.

그 언니 부부와 나는 오랫동안 남한에 갈 수 있는 길을 탐색하던 중 그들과 연락이 되었다. 심지어 나도 아들을 데리고 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갑자기 찾아온 행운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바닥에서부터 내 손으로 하나씩 쌓아 올린 이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과연 떠날 수 있을까?

남편을 남겨두고 아이만 데리고 간다면 그가 어떻게 나올까? 또 중국 남쪽 국경을 넘어 미얀마, 라오스, 태국을 거쳐야 하는 위험한 길에 또 무슨 일이 닥칠지 정말 알 수 없었다. 특히 탈북할 때 나의 무지한 불찰로 인해 아들을 잃어야 했던 그 악몽이 막 떠올라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를까 봐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중국에서 더 이상 숨어서 오래 살 수 없게 된 그 언니 부부는 아들과 함께 이미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함께 가자며 나를 계속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도 남한에 꼭 가야만 한다는 것을 예감했다.

중국에서의 나의 신분은 북한 사람이어서 언제라도 잡히면 북송될 것이다. 비록 몇 년간 오래 살았어도 말이다. 나는 이런 위험을 안고 평생 중국에서 살아가느니 남한에서 당당한 국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너무도 많은 것을 버리고 떠나자니 차마 결심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언니네가 정작 남한을 향해 길을 떠난 후부터 나는 갑자기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영영 남한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얼마나 또 후회를 하면서 살아갈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한 환율 폭락으로 인한 여행객 감소 문제 역시 나를 남한으로 꼭 가야 한다는 부추김을 더 해주었다.

거의 열흘 동안 입맛도 없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심리적 갈등에서 헤매던 나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떠나자! 중국은 내 조국이 될 수 없고, 돈은 또 벌면 되지 않는가? 아들을 데리고 떠날 거야. 아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이 있으면 어느 나라든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 않는가?

나는 남편에게 나의 결심을 말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아내와 아들이 자기를 떠나간다는 말에 남편은 생각했던 대로 결사 반대했다. 그는 내가 자기를 떠나면 절대 자기한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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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1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7)

 

(지난 호에 이어)

그리고 우리 둘은 1주일 내내 일만하다 보니 돈 쓸 시간도, 쓸 일도 없었다. 그렇게 돈은 금방 모아졌고 나는 아파트 하나 사 놓으면 나중에 아들에게 하나 줘도 되겠다 싶어 얼른 구매했다.

이 동네에 온 지 불과 3년 사이에 우리는 참 많은 기적을 이루었다. 꼬질꼬질한 난민 차림으로 처음 여기에 발을 디딜 때부터 이제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만점 시험지를 가져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 손으로 이루어냈는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당시 도시사람들도 아파트 1채 사는 것이 정말 로망이고 꿈이었고, 중산층의 상징이었다.

남편의 고향 시골에서는 아직 외지에 돈 벌러 나가 아파트 한 채 사 놓은 사람이 없었다. 시골에서는 우리가 칭다오에서 아파트 2채를 샀다는 소문이 쫙 퍼지면서 동네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특히 나는 북한에서 속옷도 변변히 없이 맨주먹으로 이 동네에 와서 온갖 고생과 가난, 그리고 그 많은 수모를 견디며 끝내 자신의 힘으로 인생역전을 이룬 전설의 대명사가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병아리 장사꾼이 제대로 맞췄다며 서로 나처럼 대문 옆에 토종 아카시아를 심는다고 난리였다. 또 어쩌다 시골에 돌아가면 서로 자기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했고 우리 집 대문 돌쩌귀에 불이 날 정도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심지어는 동네 촌장이 나를 만나러 찾아왔다. 무슨 회사에서 일하냐, 어떤 일을 하나, 자기 아들을 데려가서 취직시켜주면 안되나 등등 서로 자기 자식들을 도시로 데리고 나가 내가 일하는 한국회사에 취직시켜 달라고 부탁이 줄을 섰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돈 빌려달라며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의 부탁도 들어주지도, 들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어렵던 시절, 누구도 나를 믿어주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모두가 외면하고 비웃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눈웃음 치며 다가왔고 나를 대하는 말투가 달라졌다. 그리고 서로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한다.

내가 정녕 설움과 가난에 온갖 수모를 받으며 살던 그 여인이 맞는가? 동네 사람들은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내 남편 혼자는 절대 이룰 수 없을 거라고 한다. 그때부터 그들은 무인도에서도 무조건 살아남아 돌아올 사람이라고 나를 인정했다.

우리가 그곳에 자리를 잡으며 뿌리를 내리기까지 삼촌이라는 인물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외지인이라는 딱지를 안고 그 동네에 정착할 생각도 못했던 우리가 동네 영향력 있는 삼촌이라는 존재로 인해 지긋지긋하던 가난과 고생의 소굴에서 탈출하게 되었고 당시 중국의 개혁개방의 10대 대도시 중의 1위에 꼽히는 칭다오시에 정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그 삼촌이라는 선물을 나에게 보내준 하느님에게 무한의 감사를 드린다.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삼촌과 만남은 필연이었고 그는 나의 삼촌 이상의 존재였으며 세상이 비웃고 모두가 외면하던 나를,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의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그 후에는 아직까지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지만 미래에 그런 인연을 또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니 나도 더 크게 성공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삼촌과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7. 재회, 그리고 나만의 길
 

중국에서 만난 귀한 인연 중에 또 다른 특별한 인연도 있었다. 한국책방 주인아저씨는 나에게 북한에서 온 부부를 소개해주었다. 우리는 서로 조심이 그리고 정말 경계를 하면서 잠깐 만났는데 참 그 또한 신통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책방 바로 옆 한식당에서 주방 일을 했고, 남편은 액세서리 회사에서 일했다. 그렇게 우리는 자주 책방에서 만나면서 서서히 친해져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 왔고, 그곳 근처의 남한 기업에서 일한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젠 고생도 끝났고 돈도 잘 벌고 있는데 북한에 부모 형제들에게 어떻게 돈을 보낼 수 있는지 방법을 모르겠어요. 언니네는 북한에 어떻게 돈을 보내요?”

“돈만 있으면 보내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뭔 걱정? 우린 지금 몇 년째 그렇게 보내고 있어”

“어머나, 정말 그런 루트가 있어요? 난 아는 사람도 없고 물어 볼 데도 없고 몇 년 동안 혼자 속만 태우고 말았는데 날 좀 도와주시오.”

타국에서 만난 그 부부와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다. 그들은 외아들을 북한에 두고 왔는데 아들 걱정에 어느 하루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그들을 알게된 후부터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아들과 함께 그 언니 집에 놀러 갔다.

유일하게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들과 함께 북한 음식도 해먹고 속에 묻어둔 이야기들을 터놓을 수 있었으며 북한의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그 언니 부부는 바로 우리 옆집에 세를 들어 살았고 우리는 서로 친형제처럼 가까웠다.

그 언니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당시 대도시 들에서는 시골에 서 온 농민공들의 아내들에게 타 지역에 살 수 있다는 증명서를 요구했다. 중국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해 많은 여자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 돈벌이를 떠나 사실상 통제불가능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이 임시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집마다 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의 가족 사항과 부인의 피임 상태라는 증명서 제출을 요구했다. 응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쫓아냈다.

그 언니도 그래서 계속 시달림을 받고 있었는데 증명서가 없는 그는 그런 서류를 제출할 수가 없었고 중국어 문제로 충분한 대화를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거의 쫓겨날 지경에 이르러 경고까지 받은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동네 촌장인 삼촌과 잘 아는 관계로 부녀회장을 직접 만나 그를 나의 친언니로 소개해 증명서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도록 보증을 섰다. 그러는 와중에 북한에 있는 형제들과 드디어 연락이 닿게 되었고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부모님들과 남동생과의 직접 통화를 원했지만 몸이 불편해서 올 수가 없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나는 정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자나깨나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부모님들과 동생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니 정말 속상했다.

나는 내년엔 꼭 엄마나 남동생을 데리고 함께 오라고 언니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당장 그들을 중국에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아픈 남동생을 중국에 데리고 오면 치료도 하고 부모님들도 데리고 와서 실컷 효도를 하면서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은가?

나는 당장 고향에 돈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해 5월에 전화통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부모님들과 동생은 함께 오지 않았다. 두 언니만 함께 왔는데 계속 부모님과 동생을 걱정하는 나에게 그제야 그들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너무 충격을 받을까 봐 말을 못 꺼냈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터라 큰 충격에 며칠을 몸져누워 앓았다. 정녕 내가 부모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단 말인가? 그리고 내 남동생도 야속하게 먼저 떠나갔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내 사랑하는 남동생을 데려와 치료도 해주고 함께 한국에 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는데 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못했는가? 내가 그동안 내 코가 석자라 돈 한푼 보태 줄 수 없었지만 한시도 잊은 적 없는 동생과 부모님들은 더는 나를 기다릴 수가 없어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부모님들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토록 애타게 나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렇게 내가 잘 살면서 돈 한푼 보내지 못해 부모들이 일찍 돌아가신 것 같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부모님들과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북한은 나에게 더욱 멀게만 느껴지고 이제는 더 이상 중국에만 눌러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남한 기업에 취직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나의 착각은 그만 깨졌다. 바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노동자와 업주간의 갈등이 악화되었는데 결국 파업으로 이어졌다.

그때 통역을 맡은 조선족은 공인들과 한 편이 되어 회사측에 골탕을 먹였는데 그때부터 회사는 중요한 통역에 나를 불렀고 그러다 보니 한족들은 나를 아주 미워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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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4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6)

 

(지난 호에 이어)

사실 자수사업은 아들과 며느리가 하는 것인데 명절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나에게 며느리는 자기와 함께 자수를 배워서 일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밤새워가며 일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아이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 그들과 고용 관계보다는 그냥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남한 회사에 취직할거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맺어진 그들과의 인연은 그곳에 발을 붙이고 터전을 잡아가는데 커다란 도움과 영향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형제가 없는 남편과 혈혈단신인 나는 그들을 친정 집처럼 여겼다.

우리는 주말마다 삼촌 집에 놀러 갔고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삼촌과 그의 가족들은 먼 시골에서 온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한 번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정말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런 좋은 인성을 가진 그 지방 토박이인 그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정말 우리에겐 커다란 행운이었다.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그리고 삼촌은 동네 당서기로 이런저런 문제해결은 정말 식은 죽 먹기였다. 연휴가 끝나고 남편과 아들이 집에 돌아오자 나는 그들을 데리고 삼촌 집에 놀러 갔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늙어 보이는 남편을 보며 그들은 크게 놀란 듯 했지만 순진하고 착한 남편을 그들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명절 때마다 꼭 선물을 들고 가면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받은 선물들을 우리에게 더 주었다. 명절마다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선물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것이다.

어느 날 삼촌이 나에게 말했다. “지금 아파트단지가 다 완공되어 입주를 하고 있는데 아파트 하나 사놓는 거 어때?”

“아파트라니? 감히 우리가 아파트를 산다니요?”

이건 진짜 세상에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1년 반을 겨우 모은 돈이 1만5천 위안밖에 없었다.

“너희들이라고 아파트 사지 말란 법이 있나? 앞으로 여기서 계속 살거면 집을 하나 사는 게 좋지. 월세를 주고 살면 돈 모으기도 힘들고 아파트 한 채 사서 아들도 키우고 여기서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고 이젠 이 동네에 뿌리를 내려야지. 안 그래?”

나는 정말 그의 말에 동감을 하며 진짜 우리도 아파트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아파트는 서민들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부의 상징이었다.

외국기업들이 몇 년 전부터 들어오면서 건설 붐도 이제 막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대출 개념이 없어 아파트를 사려면 전액 현금을 주고 사야 하기 때문에 아파트 한 채 산다는 것은 정말 우리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지방 토박이들도 아파트 한 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그 동네에도 아파트 건설이 이제 막 시작이 되어 완공된 아파트는 한두 채 밖에 안 되었다. 아파트 한 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정말 인생 성공했다고 여길 만큼 대단한 재산이었다.

“나는 사고 싶은데 우린 모아 놓은 돈이 2만 위안도 안 되는 데 어떻게 사요? 못 사겠네요. 말씀은 정말 고마운데 우린 아직 아파트 살 능력이 안 돼요.”

“돈 부족하면 나중에 계속 벌면서 갚으면 돼. 내가 도와줄 테니 살 건지 안 살 건지 결심만 해. 얼마든지 방법은 있으니까”

아파트를 사자고 남편한테 말했더니 그는 나를 또 미쳤다고 했다.

“너는 뭐든지 생각하면 바로 저지르고 보는데 이건 진짜 아니야.”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당시 막 붐이 일기 시작한 그 동네 아파트는 6만~7만 위안 정도 했는데 우리가 가진 돈은 어림도 없었고 남편은 그 많은 빚을 어떻게 갚느냐며 펄쩍 뛰었다.

한마디로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는 고정관념에 꽉 사로잡힌 그를 설득시키기 어려웠고 우리는 며칠 동안 그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나는 과감하게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는 좋은 기회라고, 삼촌이 도와줄 거라고, 그러니 사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두려워하며 결사 반대했다.

“그러다 돈을 못 갚으면 어떻게 되냐? 갑자기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아파트 뺏기고 돈도 뺏기는 거냐?”

나는 그를 설득하기가 너무 답답한 나머지 남편을 데리고 삼촌한테로 갔다.

“우리 아파트 살 건데 어떻게 하는 건지 좀 도와주세요.”

사실 건설업자들과 동네 당서기인 삼촌과는 밀접한 관계였는데 삼촌도 한 채 사고 그의 아들도 한 채 샀으며 또 가격이 좋은 기회를 우리한테도 권유를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산 것보다 1만 위안 싸게 우리한테 준다고 했다.

아파트 지을 때 사무실용으로 쓰던 아파트여서 5만 위안에 준다고 한다. 나는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건설 사무실로 1년을 썼으면 어때? 1만 위안을 적게 주고 살 수 있다면 무조건 사야 한다.

내키지 않아 하는 남편을 이끌고 나는 은행에 가서 있는 돈을 모두 인출하여 당장 삼촌과 건설업자를 만나러 그 아파트로 찾아갔다. 콧구멍 만한 셋방에서만 살다가 방 3개짜리 아파트를 보고 나니 정말 돈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사고 싶었다. 삼촌은 건설업자에게 우리가 살 거라고 말해 두었다.

“이 젊은 부부가 시골에서 온 지 얼마 안 된다네. 그래서 현재 모은 게 1만 5천 위안 밖에 안 된대. 그걸 먼저 받게. 나머지 3만 5천 위안은 아마 2~3년 안에 꼭 갚을 거야. 정말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야. 만약 이 사람들이 못 갚으면 내가 갚아 줄게 절대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이 사람들 보증 설게.”

남편과 나는 얼어붙었다. 세상에! 과연 누가 우리를 이렇게 믿어준단 말인가? 그리고 종이 한 장도 없이 서명도 없이 오직 믿음으로 우리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안겨준 삼촌에게 나와 남편은 정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아니 나는 뜨거운 것이 가슴 속에 치밀어 갑자기 울컥했다.

지지리 못살고 가난해서 시골에서조차 도적 누명만 쓰던 내가 아니었던가? 이 광대한 도시에서 이제 겨우 안 지 몇 달도 되지 않는 삼촌이 우리를 믿고 보증까지 선다니, 과연 나라면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하느님이 나한테 삼촌이라는 귀인을 보내주셨나 보다.

이 세상 누가 나를 이렇게 믿어 준단 말인가? 정말 그는 그저 우연히 만난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하늘에서 우리에게 보내준 천사였다. 그렇게 뜬금없이 아파트를 사게 된 우리는 정말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매일 일해도 힘들지 않았으며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이제야 정말 살맛 나는 세상이 나에게 찾아왔다. 우리에게 이런 큰 믿음과 기회와 든든한 힘을 보태 주는 천사 같은 삼촌을 우리가 만났다니? 그동안 당했던 온갖 설움이 싹 가셔지는 것 같았다. 남편은 손으로 3명이 잘 수 있는 큰 침대를 뚝딱 만들어냈고 넓은 아파트에 침대 하나만 달랑 놓은 채로 우리는 서둘러 이사했다.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니 돈이 저축이 되었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으며 30평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은 아들이 뛰어 놀기에도 충분했다. 그곳에서 살아온 5년이라는 시간은 또 다른 고향집처럼 친근하고 익숙한 행복한 기억들이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 아파트를 산 지 2년도 안 되어 우리는 나머지 3만5천 위안을 다 갚았는데 삼촌과 그의 식구들 모두 정말 깜짝 놀랬다.

이렇게 빨리 갚을 줄을 몰랐다고 한다. 아들은 그곳에서 또래 친구들 많이 사귀었는데 월세를 살 때는 동네 애들이 그와 잘 놀아주지 않았지만 아파트 단지에 이사 오니 많은 친구들과 어울릴 수가 있었다.

 그렇게 빚을 다 갚은 지 2년도 채 안 되어 삼촌이 또다시 아파트 한 채 더 사 놓으면 어떠냐고 물어왔다. 같은 단지 내에 어느 당 간부가 사려고 따로 한 채 남겨둔 것인데 그걸 사라는 것이다.

가격은 2년 전보다 1만 5천 위안 더 높은 7만 5천 위안이다. 사실 채무를 다 갚고 나니 버는 돈마다 저축을 했고 남편도 일본 가구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어 월급도 꽤 높았으며 나는 그때 이미 남편의 2배 이상의 월급을 받았다.

남편은 명절이나 일요일, 또는 아픈 날도 일을 나갔고 그는 1년 내내 만근을 하여 상을 다 받아올 정도였으며 돈 한푼 쓰기도 아까워해 사실상 벌기만 하고 쓰지를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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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ukim
김민주
97100
19195
2022-07-07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

 

(지난 호에 이어)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총무 직을 맡으면 한족들을 상대하기 너무 싫으니 그냥 지금 하던 일을 하겠다고 말이다. 참 그곳 분위기는 가족처럼 화기애애했다.

나는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직원들이 원하는 음식을 해주었고, 그때마다 좋은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내가 만든 김치는 주변 남한 기업들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주말에는 다른 남한 기업 직원들이 우리 회사로 와서 무조건 점심 저녁을 먹고 갔다.

그들은 자기 회사 주방 아줌마들은 왜 그렇게 김치를 못하냐고 불평을 했다. 그리고 음력 설에는 온 직원들이 모여서 김치만두도 만들었고 야식으 로 굴 떡국도 만들어 주었으며 다른 회사 직원들도 오게 하여 함께 음력 설을 지냈다.

설에는 식당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외식 할 데도, 놀러 갈 곳도 없었다. 그렇게 좋았던 회사는 중국에서의 사업 실패로 다음해 5월에 남한으로 철수하면서 나는 커다란 아쉬움을 안고 새 직장으로 옮겨가야 했다.

회사가 철수한다는 소식에 바로 다른 회사에서 나를 얼른 스카우트를 했다. 무려 3곳에서 나를 데려가려고 했는데 세상에 내가 어디로 갈지 선택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내 월급은 일반 공인들 하루 12시간씩 일해서 받는 것에 비하면 정말 많은 돈이었다. 새로 스카우트한 회사에서는 당장 월급을 더 올려줄 테니 자기 회사에 무조건 와야 한다며 반강제로 날 데려갔다.

그들이 나를 데려가는 중요한 이유가 또 있었는데 회사에서는 주말에도 사업을 하는 중요한 미팅에 나를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다. 사무실에 조선족 통역이 있었지만 대부분 남한 사람들은 조선족 통역을 신뢰하지 않았다.

어떤 통역원들은 통역을 거짓으로 하고 때로는 거래를 중간에서 가로채기도 하고 뒷돈도 챙기며 비리를 저지르는 사례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사업을 하려면 정말 통역의 역할이 중요한데 아마 나는 같은 민족이라는 마음가짐이 그들에게 진정성 있게 느껴졌고 나를 신뢰하게 된 이유인 것 같았다.

회사 사무용품이나 물품 구매를 할 때도 10위안이라도 깎아서 절대 현지인들한테 바가지 쓰지 않도록 최대한 흥정을 했다. 사무실 책상을 사러 가면 다른 통역보다 절반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고 그래서 주말에 회사 통역이 없을 때 일부러 나를 데리고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거나 중요한 사업 미팅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남한사람들의 돈을 등치고 가격을 몇 배로 부풀려 바가지를 씌우는 현상을 사방에서 볼 수 있었고, 그런 모습에 정말 속상했다. 대부분 통역들은 뒷돈을 받으며 그렇게 거래를 해왔기 때문에 현지 물정을 잘 아는 회사 사장님은 그래서 나를 신뢰하였다.

전문용어들을 통역하는데 내가 전문적이지 않아 어려운 점이 많이 있었지만 사장님은 오히려 전문용어를 중국어로 다 꿰뚫고 있어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현장 통역도 자주 나가야 했다.

전문 통역원을 제쳐 놓고 나를 통역으로 데리고 다니자 사무실 조선족들과 현장의 한족들은 은근히 나를 경계하며 싫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까지 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회사의 이익을 위해 헌신해도 때로는 나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반대의 결과를 낳는 경우도 살다 보면 가끔 있다.

 

6. 중산층의 상징 아파트를 사다

나의 중국에서의 10년 생활을 말하자면 내가 만난 인생의 귀중한 인연에 대해 빼놓을 수가 없다. 그때는 내가 가발공장을 다닐 때였는데 첫 시작 2달을 월급도 못 받고 일하다 보니 정말 돈 한 푼이 아쉬웠다.

마침 추석이 다가왔다. 중국 추석은 중추절이라고 하는데 정말 음력 설과 더불어 1년 중에 가장 큰 2대 명절 중의 하나였다. 그때마다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는데 도시로 왔던 수많은 농민공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모든 회사들은 1주일씩 문을 닫는다.

나는 1주일을 쉬면서 무슨 알바라도 하고 싶었다. 남편은 나와 아들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나는 알바를 할 거니까 당신 둘이서 고향에 다녀오라고 했다. 왜냐면 버스비만 성인 1명이 150위안 정도 들기 때문이다.

평소엔 그 절반도 안 하는데 추석과 음력 설엔 부르는 게 값이고 그나마도 자리가 없어 버스를 탈 수가 없고 잘 세워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고향에 가는 버스를 타는 일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나는 그런 큰돈을 쓰면서 사이도 좋지 않은 시부모들 만나러 가는 것보다 명절 때 임시직을 찾아 돈이나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남편과 아이를 1주일 연휴를 보내놓고 나는 집에 혼자 남아 여기저기 일손이 필요한 곳을 수소문했다.

마침 동네에 나와 동갑인 아줌마가 자기 삼촌을 소개해주었다. 그녀의 삼촌은 뜻밖에도 그 동네의 당서기였는데 한마디로 그 마을의 권력자였다. 그의 아들이 작은 자수공장을 운영하는데 수출용 모자에 글자나 로고를 새기는 자수사업을 하고 있었고 언제나 일손이 부족해 밤새워가며 일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가 사는 곳으로부터 걸어서 2분 거리에 있어 이건 정말 뜻밖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그의 삼촌과 식구들에게 소개해주었다. 우리도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의 아들 며느리도 나와 동갑이고 그들에게 딸이 있었는데 그들의 딸 역시 내 아들과 같은 학급이었다.

기계로 자수를 끝낸 후 실밥을 가위로 잘라내는 일인데 수공으로 일일이 해야 되는 거라 정말 산더미처럼 일감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수백 개 넘게 실밥을 잘라도 겨우 3위안을 받았다. 한 끼 밥값도 안 되었다.

그래도 당장 다른 일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루한 일이었지만 열심히 했다. 그렇게 그들과 인연을 맺은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불면서 금세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 삼촌은 갑자기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 옥수수 밭에 옥수수를 오늘 다 따 들여와야 하는데 비를 맞으면 안 된다네. 여러 사람이 필요한데 혹시 같이 가지 않을 텐가?”

나는 동네 부자인 그들에게 옥수수 밭이 있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지만 주저없이 나섰다. 옥수수 따는 일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당연히 가야죠. 비를 맞으면 안 되니 빨리 갑시다”

그렇게 네댓 명이 동네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밭으로 달려가 급히 옥수수를 따서 자루에 넣고 차에 실었다. 나는 재빨리 옥수수를 따내고 자루를 채워서 어깨에 척척 메고 화물 적재함에 실었는데 남자들도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 삼촌과 아들은 입을 쫙 벌렸다.

“아니 김, 어떻게 그렇게 일을 잘해? 여자가 그렇게 일을 잘하는 건 처음 보네.”

나는 그의 칭찬에 씨익 웃으며 내가 주인인양 그들을 재촉했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빨리 끝냅시다. 비가 막 쏟아질 것 같네요.”

그렇게 절반 넘게 했는데 무정한 소낙비가 드디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고 삼촌은 그만하고 돌아가자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만 더하면 되는데 마저 끝내면 안 되냐며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삼촌은 비를 맞으면 병이 난다며 나를 억지로 끌고 차에 태웠다. 만약 나였으면 비를 맞으면서라도 다 끝냈을 텐데 잘사는 사람들은 병 나는 것이 걱정인 것이다. 그렇게 일을 다 못 끝내서 아쉬워하는 나를 보며 그들은 연신 나를 칭찬했다.

내가 남의 일을 몸 사리지 않고 무거운 자루를 척척 메고 다닌다니 정말 대단하다며 그 훗날에도 두고두고 그날 일을 곱씹었다. 그의 집에 돌아와 옥수수를 하차하고 나니 비가 멈추었다. 집안에 들어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삼촌이 갑자기 나에게 20위안을 건넸다.

“이건 뭔가요?”

“받아 둬. 오늘 일당이야.”

“뭐? 일당이요? 무슨 말씀을, 겨우 40분도 안 되는 일을 이웃끼리 도와줄 수 있는 거지 갑자기 웬 돈을, 난 돈 받으려고 도와준 거 아닌데, 절대 받을 수 없어요. 아니 안 받을 거예요.”

온 집 식구들이 나를 나무라며 돈을 받으라고 재촉했고, 그 돈 안 받으면 일감도 안 준다며 기어이 내 손에 쥐어줬다. 사실 20위안이면 내가 모자 실밥 뜯는 일을(하루 3위안) 1주일은 거의 해야 만질 수 있는 돈인데 겨우 40분 일하고 큰돈을 받다니 참 남의 돈을 그저 공짜로 받은 것 같은 기분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때부터 그들은 나와 정말 친해졌고 가족처럼 여기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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