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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배(流配)란 귀양살이의 다른 말이다. 김민선이 쓴 귀양에 관한 책 '유배'를 보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유배지는 모두 408곳. 이 중 경상도가 81곳으로 가장 많고 전라도는 74곳, 충청도는 70곳이다. 한편 유배 횟수는 전라도가 915회로 가장 많고 경상도는 670회, 충청도는 320회라고 적혀 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로 유배를 간 사람들을 모두 합하면 1,900명이나 된다니 엄청나게 많은 숫자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왕조 519년 동안 이루어진 귀양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백사(白沙) 이항복처럼 남쪽이 아니라 함경도나 평안도 북쪽 지방으로 유배를 간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숫자는 더 불어날 것이다. 유배 형벌이 가장 많던 때는 사화(士禍)가 시작된 연산군의 조선 중기와 당파싸움이 그 절정에 이르던 숙종, 영조 때의 조선 후기임을 생각하면 꽤 많은 숫자로 봐야 할 것이다. 김민선은 조선의 고등 관리 넷 중 하나는 유배를 간 적이 있다고 추정하였다.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유배에 관한 책 두 권, 김민선의 '유배'와 이중묵의 '절해고도…'를 보면 유배길에 오른 사람들은 사족(士族) 신분의 선비, 아니면 당대의 석학, 고등 관리, 왕족들이 대부분이다. 사화에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안부편지 한 번 보냈다가 역모죄에 걸려든 사람도 있다. 철저한 연좌법(連坐法)으로 아무런 혐의가 없는데도 유배형에 처해졌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을 쓰고 천추의 원(怨)과 한(恨)을 품은 채 유배지로 끌려간 사람이 많다.


 “내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恨)은 정녕 줄지 않으리…/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굳어지리라(我死骨爲灰…彌久而彌强)”


 자기 남편이 참형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먼저 목을 매달아 자결한 부인을 애도하는 이광사의 절규다. 당시 사람을 얽어매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역모 혐의를 덮어씌우는 것이었으니 오늘날의 '빨갱이', '좌파' 혹은 종북세력으로 몰아세우는 것과 같다.


 유배객들 중에는 땅이 꺼질 듯한 절망과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으로 삶의 의지가 완전히 꺾인 사람들도 있고 사흘 동안 낮과 밤을 울어도 사그라지지 않을 원한, 쌓인 울분을 토하는 슬픈 시(詩)를 남기고 죽은 유배객들도 많다.


 한편 유배 환경을 슬픔과 탄식으로만 끝내지 않고 하나의 기회로 삼아 학문이나 예술에 열중하여 큰 업적을 남긴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전라남도 강진에서 18년 유배생활을 하며 수십 권의 저서를 낸 다산(茶山) 정약용과 흑산도에서 15년 귀양살이를 하며 물고기의 생태를 조사하여 '현산어보(玆山魚譜)'('자산어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라는 책을 쓴 그의 형 정약전, 서예가요 금석학의 대가 추사(秋史)김정희, 신지도에서 15년 귀양살이를 하며 동국진체라는 서법(書法)을 완성했으나 뭍에는 발을 내려놓아 보지 못하고 죽은 조선의 명필 원교(員矯) 이광사를 꼽을 수 있다.


 유배에는 얼마나 있으면 자유의 몸이 되는지 정해진 기간이 없다. 어제 귀양을 왔는데 오늘 해금이 될 때가 있는가 하면 10년, 20년 한곳에 유배를 살다가 또 다른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모두가 임금님 마음 하나에 달린 것. 언제 풀려나는지가 전적으로 임금한테 달린 상황이니 임금을 그리워하는 시나 글을 써서 임금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의 대표적인 유배객으로는 송강(松江) 정철을 꼽는다. 어떤 현대 문인 중에는 그를 아첨문학의 대가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재정적 배경이 든든한 사람은 유배동안 비교적 편안한 유배생활을 하는 이도 있다. 예로 정다산은 주머니 든든한 외가(고산 윤선도의 해남 윤씨 종가) 덕분에 비교적 여유있고 자유스런 유배생활을 할 수 있었다.


 유배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시로 억울함을 토하고, 시로 한을 풀고, 시로 육지에 두고 온 처자식을 그리워했다. 유배자들의 꿈은 대부분이 유배에서 풀려난 후 누리는 자유에 대한 공상이었을 것이다. 자기를 유배길에 보낸 사람들에 대한 보복을 꿈꾸기보다는 어릴 때 뛰놀던 동산과 들판을 그리워하고 유배에서 풀려나면 강 언덕에 정자를 짓고 시 읊고 글 쓰는 한적한 자유생활을 꿈꿨을 것이다.


 인조반정이 성공으로 끝나고 15대 임금 광해군은 강화도에 구금되었다가 나중에 제주도로 보내져서 거기서 죽었다. 세자 이지도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가 살았을 때 교동에서 "어떻게 이 새장을 벗어나 / 녹수청산 마음대로 오갈까 (緣何脫此樊寵去 / 綠水靑山任去來)"라고 부르짖는 세자에게 고향은 하나의 피난처요 살겠다는 몸부림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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