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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반니노 과레스끼의 (나의비밀일기)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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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반니노 과레스끼(Giovannino Guaresehi:1908-1968) 의 고향이며 그의 작품의 주인공인 돈 까밀로(Don Camillo)와 빼뽀네(Peppone)가 살던 작은 마을을 찾아 밀라노 역에서 빠르마행 기차를 타던 날 퍼붓던 지난 초겨울의 빗발이 생각난다.


그 때 이탈리아 밀라노 한인회의 김택준 회장님이 나의 여행 목적을 듣고 한국 교구의 파드레 송을 만나게 해 주었다. 로마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온지 2 년 정도밖에 안 되지만, 신부 시리즈를 소설로 쓴 과레스끼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던 파드레 송이 바쁜 시간을 내어 베르디 론 골레 마을에 함께 가주기로 했다.


나는 카메라와 받침대를 들고 빠르마행 기차가 정거할 때마다 복도로 나가 사진을 찍으면서, 과레스끼가 살던 Bassa 로 흘러가는 뾰 강이 어디있는지 목을 길게 빼며 찾아보기도 했다. 뽀 강은 원래 밀라노에서 가르데 호수로 흘러내려오다가 아름다운 베로나와 만토바를 옆에 끼고 빠르마를 지나 베네치아로 흘러간다. 


햇빛이 머리를 빠갤 듯이 내리쬐는 에밀리얀 평야가 있고 일찍 날이 저무는 두메, 가을 겨울없이 내리는 비바람과 짙은 안개, 그리고 사람들의 기쁜 일 슬픈 일이 뒤엉켜 있는 곳이 바로 뽀 강이 내려다 보이는 Bassa 마을의 강둑에서 모두 이루어 진다.


빠르마 역에서 내려, 과레스끼의 집을 찾는다는 말에 택시 요금도 편도만 받고 안내해 주겠다는 운전기사를 따라 베르디의 고향 론 콜레 마을로 약 15km 들어가 “과레스끼 레스토랑”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운전기사는 식당으로 앞장서서 들어가더니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아들과 손녀, 그리고 마침 그곳에 와 있던 딸 등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기다렸던 손님이나 되는 듯 우리를 반기는 그들을 따라 들어서니, 이미 날은 저물었고 적송 빛 나무식탁과 의자 옆엔 호롱불이 밝게 타고 있었다. 


이탈리안 이상으로 유창하게 말하는 파드레 송의 통역으로 서로 인사가 끝나자, 검은 머리를 길게 땋아내린 예쁜 소녀 막달리나 양이 유명한 토스카냐의 캰티(붉은 와안)를 내왔다. 라게르 수용소에 억류 중이던 아버지 죠반니노의 꿈 속에 여러 번 찾아갔던 과레스끼의 아들 알베르띠노 과레스끼는 이미 46세의 중년이 되었고, 오빠와 함께 아빠를 찾아갔던 갓난아기 샬롯데는 43세의 건장한 중년부인이 되어 있었다.


이 “과레스끼 레스토랑”은 죠반니노 과레스끼가 생전에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설계와 내부장식에 이르기까지 손수 계획했다고 한다. 천장은 우리나라 대청의 석가래 나무 같은 것이 그대로 드러나게 지었고 단단한 테이블과 무거운 의자는, 술 주정뱅이들이 곧잘 의자를 집어던지는 버릇을 없애기 위하여 혼자서는 들 수 없게 무거운 박달나무로 만들어 놓았단다.


식탁마다 켜놓은 호롱불은 이 산골의 운치를 더해주며 평소에 작가가 원하던 따뜻함과 평화에의 갈망이 그 불빛 속에 흘러 넘치는 듯 했다. 너무나도 이 “My Secret Diary 나의비밀일기”에 나오는 장면과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죠반니노 과레스끼는 이미 가고 없었지만 책 속에서 만난 알베르띠노와 샬롯데를 보니 가슴이 찡해왔다. 


알베르띠노는 아버지를 닮지 않은 듯 말없이 와인만 권했고, 샬롯데 여사가 과레스끼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눈매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여러번 눈물을 흘리곤 했다.


죠반니노 과레스끼는 1908년, 그 당시 젊은 사회주의자들의 가슴마다 붉은 손수건이 빛나던 그런 시대에 이 마을에 태어났다. 그는 국민학교 교사로 50년을 봉직한 어머니에게서 진실한 가치관과 품위있는 질서의식을 이어받았고, 전기도 없던 시절 에 자동차를 구해서 자신이 수리해가며, 이 마을 저 마을로 여행을 즐겼던 아버지에게서는 도전적이고 이국적이며, 판타지아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가 신(神)을 알게 해 주었다면 아버지는 신(神)을 설명해준 분이었다. 아버지는 삼위일체설을 절대 신봉했고, 이웃에 살던 음악가 베르디와 절친한 친구이면서 나폴레옹을 존경하던 분이었다.


과레스끼는 법학공부를 계속할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빠르마에서 유명한 풍자화가나 출판업자가 되려고 단기학교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다. 제당공장의 수위, 대학생들의 개인교사 노릇도 하다가 지방신문의 교정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봉급이 너무나 적어서 사랑하던 여인과 결혼할 기회조차 놓치고 늦은 장가를 들고, 가족을 위해 신문과 가십란(시골 마을에서 얼어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을 맡아 기고했다.


집에서도 대부분 책상과 씨름했으나 아내와 두 자녀에겐 자상하고 다정한 남편이며 아버지였음을 샬롯데 여사는 강조했다. 샬롯데 여사는 자신이 겨우 25세 때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참담해진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교황 요한 23세도 “돈 까밀로 시리즈”를 애독한다는 것을 알고, 과레스끼는 그 중의 한 시리즈인 <Il Compagno clon Camillo: 신부님, 러시아에 가다>에 요한 23 세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헌정사를 쓰기도 했다.


가족들도 아버지의 책들을 몇 십 번씩 읽었으며, 읽을 때마다 삶의 희망과 위로를 얻는다고 했다.


과레스끼는, 빠르마 사람들이 별로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자신이 대도시 밀라노의 Bertoldo 잡지사를 인계 받아 편집장으로 성공하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벌판과 뽀 강둑 위로 늘 서려있는 안개와 폭우 속에서 매력있고 소박하고 너그러우며 유우머 감각이 뛰어난 마을 사람들을 사랑했다. 


1935년 2월, 밀라노의 Santo Francisca 성당의 꽃과 촛불이 휘황한 제단 아래에서 증인 네 사람을 세우고 마르게리따와 화촉을 밝혔다.


1942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우울증에 빠져서 심한 알콜중독자가 되어 방황하던 중 밀라노 경찰에 체포되었다. 지하운동 혐의를 받아 서류와 가방을 압수당하고 풀려난 후에도 1942년 11월에 당국은 과레스끼를 그 운동과 격리시 키려고 그를 군대에 징집했다.


당시 뭇솔리니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는 독일의 동맹국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반 나치운동도 극렬하게 표면화되었고, 그 운동 때문에 체포된 사람 중엔 군대에 강제 동원된 사람도 많았다. 과레스끼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입대한 다음 해 9월,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독일 군은 비록 동맹국이라고 하지만 좀더 확실한 약속을 얻고 싶었는지, 어느날 독일어와 이탈리어로 이탈리아 군대에 회람을 돌리고 이에 동의 선서하는 서명을 하게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라도 독일과 서유럽의 승리를 위해 바칠 것을 맹세한다.”


여기에 서명하지 않는 이탈리아 장교와 사병들은 곧 독일의 수용소로 호송되었다. 결국 이탈리아의 반 나치주의자들은 동맹국가인 독일의 포로가 된 셈 이다. 이 때가 1943년 9월 13일 오후 5시 30분이었고, 이 때부터 과레스끼의 생애에 가장 극렬한 시대가 펼쳐지며 Alessandria 에서부터 비젠돌프 수용소를 떠나기까지 꼭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My Secret Diary, 나의 비밀일기>는 그 당시의 암흑시대를 수첩에 적어놓았다가 귀향한 다음에 다시 정리하여 출판한 책이다.

 

 

 

 


과레스끼가 2년 간 지낸 라게르 수용소의 경계선 울타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다. 즉 현세에서의 죽음의 울타리였다. 그러나 사념과 신념을 제한하는 울타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시간과 공간을 한껏 초월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가장 비참한 전쟁이야기를 익살스럽게 풍자하며 쓴 그의 드라마 같은 일기 속에서 그가 가장 갈망한 것은,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었다.


죽는 편이 차라리 더 쉬운 라게르 수용소의 생활은 “파도 위에 떠 다니는 귤 껍질”만큼이나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지만, “결코 죽지 않겠다”는 인간 존엄에의 생명의 원천이 그의 가슴 속에 살아 있었다.


어둠은 빛을 잉태 하듯이 그의 격렬한 암흑시대가, 평화에의 갈구와 인도주의 사상, 2 차 대전 후의 사회상 -좌익과 우익의 대립, 실직과 파업의 문제, 정치와 종교의 대립, 부자와 가난한 자의 투쟁 등- 을 파헤치는 사실주의 작가를 탄생시켰다고 본다.


환상적이면서 해학이 넘치는 그의 작품들은, 또한 예시적(豫示的)인 데가 있다. 그것은 그가 그리는 영원한 고향이며, 신부 돈 까밀로와 공산당 읍장 빼뽀네가 일치 할 수 있는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집에서 레론꼴레 마을로 나가는 조용하고 하얀 신작로 길 위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돈 까밀로와 빼뽀네가 서로 투덕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오고 있다.


언제쯤 우리 사회엔 기독교적인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만은 않다. 


 아무튼 이 책을 번역한 1986년은 내게 뜻 깊은 해였다. 우리 부부가 은혼의 밤을 지낸 곳이기도 한 이탈리아에서 과레스끼의 가족들과 환담을 나눌 수있게 해준 송 베드로 신부님께 다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멀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책의 영문판 “My Secret Diary”를 기어코 찾아 보내주신 한진구 선생님께, 날로 발전하는 영한문화사의 진관섭 사장님의 큰 수고에 두루 감사를 드린다.


아름다운 론 꼴레 마을의 죠반니노 과레스끼 가족은 “My Secret Diary”속에 죠반니노와 함께 살아서 돌아온 23인의 용사들을 기념하는 <Club dei Ventitre 23인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작품 중에 <신부님 러시아에가다>, <신부님과 지옥의 천사>, <나의 비밀일기> 등 3편을 번역한 나에게도 회원자격증을 보내주어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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