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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토의 아름다운 세상

    반갑습니다. 먼타향에서 산지가 벌써 26년이상이 되었군요....

    오늘 어느분의 글을 읽으면서 ........

    말이란 늘 조심해야 한다♡

    마땅히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반대로 말하지 않아야 할 때 그것을 참지 못하고 털어놓는 사람은 화를 당하기 쉽다.말을 잘하면 유익하나 잘못하면 화가 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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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와 홀씨 사이(하) ~ [양경춘-재외동포 문학상 체험수기-수필 부문 가작]

[양경춘-재외동포 문학상 체험수기-수필 부문 가작] 뿌리와 홀씨 사이(하)

 

일러스트: AI 생성.

*이 글은 토론토 양경춘 씨가 한국 재외동포청이 주관한 재외동포문학상 공모에서 체험수기-수필 부문 가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상><하> 2번으로 나눠서 싣는다.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집 앞 골목에 차를 세우고 나는 한동안 시동을 끄지 못했다. 핸들 위에 이마를 얹었다. 눈물이 났다. 이유를 말하기 어려운 울음이었다. 무너진 것도, 억울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주 오래 팽팽했던 어떤 것이 그 순간 갑자기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 몇 분이, 이상하게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나는 성인(聖人)이 아니었다. 그냥 사위였다. 어디에도 없는 역할을 맡은, 그냥 한 사람이었다.

이민자의 치매에는 특별한 슬픔이 있었다. 몸이 떠나온 곳과 기억이 머무는 곳이 서로 다르다는 것. 장모님의 몸은 캐나다에 있었지만 기억은 한국의 어느 장터와 옛집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 그것이 나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몸은 캐나다에 있었지만 내 감각의 절반은 한국에 있었다. 된장국 냄새, 민들레 김치의 쌉싸름함, 주위에서 들려오는 한국어. 그것들이 없으면 나는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낮 동안 나는 차가운 영어로 버텨 냈다. 그러나 퇴근 후 마주하는 장모님의 야위어 가는 손을 잡을 때 나는 비로소 사위였다.

우리는 같은 처지였다. 어디에도 완전히 없는 사람들.

장모님이 기억을 잃어 가면서 짧은 영어마저 잃고 한국어만 남긴 것은, 어쩌면 가장 정직한 귀환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먼저 새겨진 것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다.

한번은 경찰이 장모님을 찾아 순찰차로 집으로 모시고 왔다. 현관 앞에서 젊은 백인 경찰관이 장모님 앞에 쪼그려 앉아 천천히 말을 건넸다. 장모님이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당신 참 잘생겼네.” 경찰관이 나를 돌아보았다. “She says you have a kind face.” 내 통역에 그도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 통역은 반만 맞았다. ‘잘생겼다’는 장모님의 언어에서 낯선 사람에게 경계를 풀 때 쓰는 말이었다. 무섭지만 믿고 싶을 때 건네는 말. 그 결은 어떤 영어로도 옮겨지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새로 개발된 GPS 시계를 구입했다. 장모님의 작은 손목 위에 채워 드리며 창문 너머 뒷마당의 민들레를 바라보았다. 민들레 홀씨는 바람이 데려가는 곳으로 간다. 방향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홀씨에 실을 묶으려 하고 있었다.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어디로 날아갔는지만이라도 알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전부였다.

영하의 날씨에 얇은 옷 한 겹만 걸치고 나가신 장모님이 몇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아 경찰 헬기까지 동원됐던 그 밤이 있었다. 찾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다리가 풀렸다. 순찰차 안에서 장모님은 멋쩍게 웃고 계셨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그때 처음으로 분명히 알았다. 나는 이 분을 사랑하고 있었다.

한번은 지도 위의 점이 오래 멈춘 적이 있었다. 공원 벤치였다. 장모님은 무릎 위에 손을 모으고 앉아 계셨다. 나는 말없이 그 곁에 앉았다. 바람이 불었고, 우리는 함께 풀밭의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홀씨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바람을 탔다. 그러나 결국 땅에 닿으면 뿌리를 내릴 것이다. 어디든 닿는 곳에서.

새벽이면 장모님은 외투를 입고 현관 앞에 서 계셨다. “아들네 호텔에 가야 한다.” 처음에는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기억 속 현실은 논리로 설득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곁에 앉아 있었다. 현관 바닥의 찬 공기가 발끝으로 스며들었다. 이 나라에서 내가 경험한 가장 이상한 종류의 친밀함이 그 바닥 위에 있었다.

장모님의 몸은 점점 가벼워졌다. 그러나 침대로 안아 올릴 때마다 더 조심스러워졌다. 무게 때문이 아니었다. 온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몸은 생의 끝으로 갈수록 무게보다 온기가 먼저 느껴진다. 그 온기가 손바닥에 잠깐 머물다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욕창을 발견한 날이 있었다. 엄지손톱만 한 붉은 상처. 내가 잠든 사이 생긴 것이었다. 그날 이후 두 시간마다 체위를 바꾸는 일이 시작되었다. 내가 출근한 낮엔 아내가 하고, 퇴근 후 밤엔 내가 맡았다.

새벽 두 시, 네 시, 여섯 시.

어둠 속에서 거실로 내려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드리면 장모님이 잠시 눈을 뜨곤 하셨다. 계단을 올라오다 눈물이 차오를 때가 있었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돌본다는 것의 가장 오래된 모습과 잠깐 마주친 느낌 때문이었다.

식사는 점점 느려졌다. 밥이 죽이 되고, 죽이 미음이 되었다. 한 숟가락을 삼키는 데 십 분이 걸리는 날도 있었다.

어느 주말 아내가 미음 그릇을 들고 들어가자 장모님이 낯선 얼굴로 바라보셨다.

“당신 누구요?”

아내는 굳어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나 몰라? 딸!”

그날 밤 아내는 부엌 싱크대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물이 넘치고 있었지만 아내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수도를 잠그고 그 옆에 앉았다. 아내가 한참 뒤에 말했다.

“엄마 기억 속에서 나까지 지워질 줄은 몰랐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아내는 딸이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간병인으로 살면서도, 어머니가 딸의 얼굴을 잊은 날에도. 나는 그냥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말이 필요 없는 자리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어느 봄날이었다. 거실에 앉아 계시던 장모님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나는 말없이 그 곁에 앉았다. 한참 뒤 장모님이 아주 희미하게 웃으셨다.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짓는 웃음이었다. 병이 앗아간 것들—이름, 얼굴, 언어, 시간—그 모든 것을 가져간 뒤에도 끝내 가져가지 못한 어떤 것이 아직 당신 안에 있었다.

기억이 사라진 사람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2022년 겨울, 장모님은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내가 울었고, 처남들이 울었고, 나도 울었다. 12년 동안 고여 있던 시간들이 그제야 천천히 흘러내렸다. 1990년 첫 겨울도 이처럼 눈이 많이 내렸을 것이다. 처음과 끝이 같은 계절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장례를 마친 뒤에도 한동안 새벽이면 눈이 떠졌다. 이제는 달려갈 방이 없었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간병이 끝난 자리에 남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낯선 적막이었다. 12년 동안 나를 일으킨 것은 전화벨 소리였고, 문자 진동이었고, 새벽에 방문 열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들이 사라지고 나니, 오히려 그 소리들이 얼마나 나를 살아 있게 했는지를 알았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모님은 떠나셨다. 그러나 봄마다 민들에는 피어났다.

낮게 엎드린 잎새들 가운데 유달리 노란 꽃등을 높이 켜 올린 민들레 한 송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밟힌다. 나는 한동안 그 꽃 앞에 서 있었다.

장모님이 호미를 들고 웃으시던 그 표정이 떠오른다.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찾아내어, 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의 표정. 어쩌면 그것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분다. 흔들리던 민들레가 기어이 하얀 홀씨를 멀리 날려 보내고 있다.

이제 나는 그 홀씨를 붙잡지 않고, 다만 그것이 닿을 어느 따뜻한 흙을 상상하고 있다.

<끝>

양경춘/토론토

출처 : https://torontokjournal.com/news/42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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