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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TOPIC
Hwanghyunsoo
momdeserves
2021-06-10
마미사랑에서는 산후관리 기본 서비스에 포함된 마사지 외에 RMT분들로만 구성된 마사지 전문팀을 개설하

  "전문적인 지식과 섬세한 손길로 산모의 건강한 회복과 아기의 안전을 생각하는 마미사랑"   안녕하십니까? 마미사랑 대표 인사드립니다. 산고를 이겨 낸 소중한 생명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설레이는 기쁨속에서도 다가오는 염려스러움들 충분히 이해하고 알지요. 마미사랑에서 준비한 산후관리를 사랑과 정성으로 따뜻하게 보살피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가의 소중하고 중요한 산후조리"   체계화된전문 산후관리 서비스,세련됨과 독특함, 캐나다 법에 의거한 인력기준에 준하여 관리사를 모집 교육하였습니다.   산후도우미(산후관리사)란? 출산 후, 평생의 건강이 좌우되는 중요한 시기인 산욕기(분만종료 후 6-8주간)에 산모님이 가정에서 편안하게 산후관리를 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기 위해 산모 영양/건강관리, 신생아 돌보기 등 전문교육을 수료하고 가정방문 산후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인입니다.   산후관리사는 산모님이 가정 내에서 안정을 취하여 조속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며, 신생아의 건강을 보살피고 산모의 건강관리를 지원함으로써 고객님의 행복한 가정생활이 원만히 유지되도록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마미사랑에서는 산후관리 기본 서비스에 포함된 마사지 외에 RMT분들로만 구성된 마사지 전문팀을 개설하였습니다.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여성은 호르몬으로 인한 뼈와 근육의 위치, 혈액의 흐름 변화 면역체계 혼동등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게됩니다. 이 변화로 인한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도 육아를 해야하는 상황에서 마미사랑 마사지팀은 산모님의 회복을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저희 마미사랑 마사지팀의 RMT 분들은 오랜경험으로 일반 마시지외에 다양한 케이스의 산후 마사지, 가슴 마사지를 하신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께 자신있게 권해 드립니다.   #산후마사지#마사지#출산#토론토#산후조리 ??산전, 산후마사지가 필요하신 산모님 ??기본 마사지와 더불어 Facial 마사지 혹은 피부관리를 필요하신 산모님들 ??젖몸살로 고생하시는 산모님들 ??육아로 인해 피곤에 지쳐있는 엄마와 아빠를 위한 커플마사지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단유를 계획하고 계신 산모님들 ??빠른 회복을 위해 Remedial Exercise와 근육 Stretching 이 필요하신 산모님들 ??배 앓이( baby colic)나 성장통을 겪는 우리 아기들을 위한 성장판 베이비 마사지   산모님들의 회복과 행복한 가정을 위해 더 연구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wanghyunsoo
ywlee
2021-06-10
침묵은 굴복이다-분명한 의사표현의 중요성

     이민생활 21년째. 그동안 내가 가장 피부로 느껴온 것 중 하나는 이민자들과 현지인들의 말하는 습관과 태도의 차이다. 이곳 현지인들이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데 비해 이민자들은 대체로 느릿하게 떠듬거리며 말한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가장 크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문화적 관습과 개인의 성격에서 오는 면도 크다고 본다.    예로부터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온 우리 한국사람을 비롯한 동양계인들은 어려서부터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배워왔다. 심하게 말하면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을 강요당해왔다. 그래서 말과 관련한 금언과 속담도 많다. 세치 혀를 조심하라, 어른에게 말대꾸하지 마라, 밥상앞에서 말을 하지 말라,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이밖에 ‘저 사람은 왜 그렇게 말이 많지?’ 단어에도 반말, 빈말, 존대말 등 그야말로 여러 말이 있다. 감언이설(甘言利說), 교언영색(巧言令色) 등 한자어도 많다. 그런데 말과 관련한 대부분의 말들은 부정적인 말들이 많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말조심을 하게 되고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것이 습관처럼 됐다. 회의나 모임에서 동양인들이 대체로 수줍어 하며 말을 아끼고 주로 남의 말을 듣는 것은 이런 문화적 관습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의를 중시하고 언행을 조심하는 습관도 좋지만 너무 말을 아끼고 자제하다 보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있게 자기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동양계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나 회의 때도 가급적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예의 바르고 속이 깊은 것으로 인식했다. 이래서 동서양인이 함께 모인 곳에서 대개 발언을 독점하는 쪽은 서양인이고 동양인은 그저 묵묵히 듣는 쪽이다. 과연 침묵은 금처럼 값진 것일까.   0…흔히 침묵을 칭찬하는 말로 ‘침묵은 금이다’(Silence is gold)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듯 침묵을 지키는게 값지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뜻이 강하다. 이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설이 설득력 있게 유포되고 있다.          즉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며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가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여러분도 나처럼 계속해서 말을 하세요. 침묵은 금의 가치밖에 없지만 웅변(eloquence)은 은처럼 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에는 은(Silver)이 가장 비싸고  금(Gold)은 상대적으로 값이 쌌는데, 그는 연설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사족(蛇足)으로, 유럽에서 금이 은보다 비싸게 된 것은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디딘 이후였다. 그 전엔 중국 명나라가 은값을 높이 평가해 중남미와 유럽의 은이 대거 중국으로 유입됐다. 따라서 당시 세계경제는 은본위제도였고 은값이 가장 비쌌다. 아무튼 한때는 은이 최고가치였고 금은 그 다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침묵이 금이라는 얘기는 그다지 좋은 얘기가 아님이 확실하다.        0…나는 침묵이 잘못된 습관이라고 본다. 이곳 사람들을 보면서 가장 부러운 것 중 하나는 자기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도 거침없이 마구 쏘아댄다. 얼마나 빨리 말을 하는지 미쳐 상대방이 대꾸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정치인들이 토론을 할 때 보면 상대방 얘기를 듣는 것이 아니다. 자기 주장을 속사포 쏘아대듯 한다.    솔직히 이곳에서 말을 아끼는 것은 영어를 잘못하니 그런 것이지 왜 나의 생각이 없겠는가. 결국 대화를 나눠야 할 자리에서 말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영어에 자신이 없고 또 이야기할 화제거리도 없다는 뜻이다. 한인들이 연회장에서 어색하게 천장만 바라보는 것은 화제거리가 빈곤하기 때문이다. 스포츠든 여행이든 무슨 주제라도 이야기를 이어가야 한다. 식사자리에서 묵묵히 밥만 밀어넣으면 무슨 재미인가. 계속 웃고 떠들어야 한다.       우리가 한국에서 한국말 못하는 외국인을 업신여기는 것이나 여기에서 영어를 버벅거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창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 것보다는 무슨 대화든 나누는 것이 좋다. 그러자면 현지 신문 방송을 많이 보아 상식과 화제거리를 많이 비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0…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의사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말을 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촉진시키고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물론 말을 할 때는 신중을 기하고 품위있게 할 필요가 있음은 당연하다. 다만 지나치게 신중해서 이것저것 계산을 한 나머지 침묵을 지킨다면 인간관계는 발전할 수가 없다.    대인관계에서 침묵은 때로 상호신뢰의 환경을 깨트리거나 문제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자기의 생각이나 의견을 분명히 갖고 있음에도 침묵한다면 상대방을 믿지 못하거나 다른 속셈이 있어 그러는 것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요된 침묵’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화제거리를 길러야 한다. 화제거리가 많으면 최소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는 면할 수 있다. 침묵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자칫 (자신에 대한) 굴복일 수도 있다.      (사장)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Hwanghyunsoo
2021-06-10
‘나토 골프(NATO GOLF)’ 즐기기

  지난 토요일에 골프를 다녀왔다. 이곳 토론토는 팬데믹으로 5월 24일부터 골프를 칠 수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골프장이 매우 붐볐다. 오후 3시 20분부터 시작한 게임이 오후 9시경, 해가 질 때가 돼서야 끝났다. 평소에는 4시간 20분 정도면 마칠 것을 5시간 40분이나 걸렸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았는데, 마침 우리 앞 팀도 청소년들이었다. 골프를 배운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모두들 골프백을 메고 공을 찾으러 왔다 갔다 하며 치는 모습을 보며 내가 골프를 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팀의 앞도 사정이 비슷하다 보니 골프장 전체 플레이가 정체된 느낌이 들 정도로 진행되었지만, 대신에 경기를 기다리는 동안 동반자들과 좋은 대화도 나눴고 김밥과 샌드위치도 맛있게 먹었다. 내가 간 곳은 레밍턴 파크뷰(Remington Parkview)라는 골프장으로 중저가 퍼블릭 코스인데 비교적 걷기 편해 시니어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토론토에서 30~40분 거리에 있고 트와일라잇(Twilight) 할 때 갔더니 워킹이 $28 이어서 부담이 없었다. 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 조금 할인을 받은 가격이다. 보통 걸어서 칠 수 있지만 그날은 날씨가 30도까지 올라갔고, 새벽부터 그 전날 얻어 온 꽃 모종을 정원에 심느라 오전에 기운을 다 빼서 카트를 타기로 했다.     레밍턴 파크뷰는 36홀로 밸리 코스(Valley Course)와 어퍼 코스(Upper Course)가 있는데, 우리 팀은 어퍼 코스를 택했고 카트비 $18은 추가로 냈다. 가격에 비해 그린이 잘 관리되어 있었고 함께 친 동반자들도 모두 좋은 매너와 구력들이 있어 기분 좋은 라운딩을 했다. 첫 홀부터 4타나 오버했는데, “첫 홀은 ‘다 파’에요” 하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원래 공치는 재미를 잘 몰랐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골프를 안치면 어디에도 낄 데가 없을 정도로 교민들이 다들 골프를 좋아한다. 그래서 잘 못 치는 실력으로 일 년에 4~5번 정도 비즈니스 모임이나 동문 골프대회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가곤 했다. 그렇다고 좀 더 잘 쳐 보겠다고 레슨을 받거나 연습할 의욕도 없으니 그리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팬데믹으로 어디 갈 곳도 없고, 골프장에 나가 파란 잔디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린 듯해서 매주 찾게 되었고 그러면서 흥미를 좀 붙였다. 하지만, 골프라는 것이 무작정 자주 친다고 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갈 때마다 점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못 할 짓이라서 나름의 원칙을 정했다. ‘시니어 골퍼로서 점수에 욕심내지 말자’는 것이다. 비단 골프뿐만이 아니라 내 나이에는 삶에 있어서도 욕심내지 말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실 이 말은 정말 말이 쉽지 어려운데, 마음을 비우고 골프를 치면 실수를 해도 크게 속상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점수에 연연하지 않으면 같이 치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방이 잘 못 치기를 은근히 바랄 필요도 없다. 대신 비슷한 나이에 대화가 되고 같은 취미를 갖고 있는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으로 필드에 나가면 된다. 골프를 시작한 지는 제법 됐지만, 아직도 에티켓과 룰을 잘 모른다. 골프는 공식적인 심판이 없고 골퍼 자신이 점수를 매기고 페널티를 주어야 한다. 골퍼 자신이 심판이기에 룰을 모를 경우, 자칫 상대방을 언짢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과 칠 때는 미리 ‘골프도 잘 못 치고, 룰도 잘 모른다’고 양해를 구하곤 한다. 오비(OB: Out of Bounds)가 나거나, 해저드(Hazard)에 빠졌을 때 벌타가 몇 개 인지 헷갈릴 때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뒤 땅’이라도 치는 날이면 내 타수가 몇 개 인지도 모를 때가 있어 당황한다. 그리고 내 꿀 팁 중의 하나가, 공 찾기가 어려울 때는 재빨리 새 공을 꺼내 벌타를 먹고 쳐서 동반자의 경기 흐름을 깨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느린 게임을 해서 동반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내 왼쪽 주머니에는 항상 공 하나를 더 넣고 다니지만, 볼 2~3개를 연속해서 잃어버리는 날에는 동반자에게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는 표정으로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다. 골프가 신사의 게임이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세상의 골퍼는 모두 거짓을 행한다’는 일화가 있다. 4대 메이저를 석권한 바비 존스(Bobby Jones)가 어느 게임 중, 숲에 들어간 공을 치다가 공을 건드렸다며 자진 신고하여 벌타를 먹고 우승컵을 놓치자, 미국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바비 존스의 정직성을 칭찬하며 찬사를 보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이것이 골프를 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 행위가 칭찬을 받는다면 강도 짓을 하지 않았다고 칭찬받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의 행위는 당연한 것인데, 이런 일화가 아직도 떠도는 것을 보면 그만큼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게다. 그래서인지, 골프 룰에 “모든 골퍼의 위반은 의도적인 것이 아닌 실수로 인정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그래서 필드에서 이루어진 모든 위반 행위는 모르고 한 것이니 그렇게 이해하고 배려하라는 것이다. 물론 아마추어 게임의 룰이지만, 알쏭달쏭 한 신사적(?)인 룰이다.   골프는 다른 운동과 달리 걷고 생각하는 시간이 9할이라면 실제로 스윙을 하는 시간은 1할 정도나 될까? 스윙과 스윙 사이의 시간이 길다 보니, 여러 잡다한 생각이 많아지고 동반자와 대화를 하는 동안 집중도 떨어지게 된다. 더구나 동반자가 은근히 신경을 자극하는 멘트라도 하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워 경기를 망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항상 조심을 해야 한다. 골프를 치다 보면 다양한 성품의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마음 맞는 골프팀을 2개 정도 가지고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성격이 유연한, 경직된 또는 도덕심이 약한 동반자를 만날 수도 있게 되는데, 나이가 들수록 유연한 사고를 가진 동반자를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 모처럼 비싼 돈 들여 긴 시간 동안 라운딩을 하는데 기분 잡칠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그런 동반자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으니 ‘나 자신이 먼저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지’하는 마음 가짐을 가져 본다. 골프 용어 중에 ‘나토(NATO)라는 것이 있다. NATO(Not Attached To Outcome)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골프를 즐기자는 의미다. 스코어는 잊어버리고 골프를 함께 치며 세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골프는 잘 못 치지만, 잔디 위를 함께 걸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으니 나름 행복한 골퍼이지 싶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youngho2017
2021-06-10
WWI 배경 영화(VII)-'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6·끝)

  (지난 호에 이어)  '닥터 지바고'를 보고나면 역시 오마 샤리프의 눈동자 연기가 인상에 남는다. 그는 이집트 풍의 용모를 바꾸기 위해 머리를 밀고 가발을 쓰고, 피부에 왝스를 바르는 등 분장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의 말없는 눈빛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白眉)다.    어느 평론가의 말을 인용해 본다. "도덕성과 열정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우수(憂愁)에 찬 눈동자와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스며있는 눈동자, 전선에서 떠나는 라라의 뒷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던 눈동자와 마지막 이별하는 라라를 얼음궁전 유리창을 통해 애틋하고 안타깝게 지켜보던 눈동자, 비밀경찰의 감시망이 좁혀오는 것을 느끼면서 라라와의 마지막 나날들을 절박하게 보내는 초조한 눈동자"… 이러한 눈빛과 웃음기 없는 연기로 악착같이(?) 살아남은 생존자 유리 지바고를 마치 그를 위해 태어난 듯 훌륭하게 연기하여 오마 샤리프는 골든 글로브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오마 샤리프(Omar Sharif, 1932~2015)는 유명한 이집트 여배우 파텐 하마마(1931~2015)와 1954년 결혼했다가 1974년 이혼한 뒤엔 재혼하지 않았다. 하마마는 절대로 키스하지 않는 배우로 유명했는데, 오마 샤리프가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 'Struggle in the Valley(1954)'에서 그와 키스를 하였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져 결혼하였다.    하마마는 2015년 1월에 만83세로, 오마 샤리프는 같은 해 7월에 알츠하이머로 병원에 입원해 투병 중 심장마비로 역시 만83세로 타계했다. 슬하에 타렉 엘 샤리프(64)라는 외아들이 있는데 그는 이 영화에서 8살의 어린 유리 지바고 역을 깜찍하게 연기했다. 타렉과 캐나다인 데비 샤리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오마 샤리프 2세(37)도 배우로 활동 중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가장 큰 빛을 발하는 인물이 지조 있고 애정 넘치는 유리의 아내 토냐였지 싶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만 이를 묻어두고 혁명 직후 불우해진 환경 속에서도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멜라니 해밀턴(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처럼 묵묵히 자신의 자리와 가정을 지키는 품위와 기품이 있는 여성! 아마도 남편 유리가 얼마나 순수하고 올곧은 사람인지를 어렸을 때부터 잘 알기 때문에 그 마음을 존중하고 믿어 준 탓이 아닐까….    한편 이 불륜은 '프라하의 봄(1984)'을 떠올리게 한다. 체코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인텔리 외과의사 토마스(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두 여인 사비나(레나 올린)와 테레사(줄리엣 비노쉬) 사이를 오가며 오로지 사랑의 탐닉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참담한 현실과 닮았기 때문이다.    유리도 토냐를 깊이 사랑했다. 토냐가 임신했을 때 라라와 절교하는 것이 그 한 예다. 토냐는 유리에게 아내이자 친구이고 후원자이자 동지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엄마였다. 유리는 라라를 '여성'으로 사랑했지만 토냐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덕목을 갖춘 이상향의 어머니'같이 그를 사랑했다. 여기서 토냐가 울고불고 하면서 둘의 불륜을 비난했더라면 또다른 전쟁(?)이 일어났겠지만 의연한 토냐 덕분에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미화된 게 아닐까. [註: 제랄딘 채플린은 토냐 역을 아버지 때문에 고생한 어머니를 롤모델로 삼아 연기했다고 술회했다.]   토냐 역을 연기한 제랄딘 채플린(Geraldin Chaplin·77)은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영국 희극배우이자 제작자이며 작곡가인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과 노벨문학상 및 퓰리처상 수상자로 유명한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Eugene O'Neill, 1888~1953)의 딸인 우나 오닐(Oona O'Neill, 1925~1991) 사이에서 캘리포니아 산타 모니카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제랄딘이 8살 때 아버지가 매카시즘 열풍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몰려 미국에서 스위스로 망명의 길에 오르는 바람에 그녀는 학교기숙사에 머물며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에 통달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미국보다는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에서 더 잘 알려진 배우이다.    8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제랄딘은 모델로도 활동했는데 영어권 첫 데뷔작인 '닥터 지바고'에 캐스팅되어 골든 글로브 신인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고, 그 후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내쉬빌(Nashville·1975)'에서 두 번째 최우수 여우조연상 후보, 리처드 아텐버러 감독의 전기영화 '채플린(Chaplin·1992)'에서 (그녀의 할머니인) 한나 채플린 역으로 세 번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유리의 이복형 예프그라프 지바고 역의 알렉 기네스(Alec Guinness, 1914~2000)는 1959년에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예술공로상으로 기사 작위가 수여되어 경(卿·Sir)으로 불린다. 그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총아로 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위대한 유산(1946)'에서 허버트 포켓 역, '올리버 트위스트(1948)'에서 파긴 역, '콰이강의 다리(1957)'에서 니콜슨 중령 역,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아랍 파이잘 왕자 역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토록 절친한 관계였던 둘 사이가 '닥터 지바고' 촬영 때 생긴 불화 때문에 단절되고, 20여 년이 지난 다음에 '인도로 가는 길'(A Passage to India·1984)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로드 스타이거(Rod Steiger, 1925~2002)는 말론 브랜도와 공연한 '워터프론트(1954)', 시드니 포이티에와 공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밤의 열기 속으로(In the Heat of the Night·1967)', '워털루(1970)'에서 나폴레옹 역, '사막의 라이온(1981)'에서 무솔리니 역 등으로 기억되는 배우다. '닥터 지바고'에서는 아마도 유일한 미국 배우였지 싶다.    끝으로 '닥터 지바고'의 촬영감독 프레디 영(Freddie Young, 1902~1998)은 데이비드 린 감독과 호흡을 같이 하여 '아라비아의 로렌스', '라이언의 딸(1970)' 등 3편에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한 영국의 저명한 촬영기사이다. 영국에 시네마스코프 영화를 처음으로 소개했던 그는 130여 편의 영화를 촬영했는데 그 중 몇 편을 소개하면 '굿바이 미스터 칩스(1939)', '아이반호(1952)', '모감보(1953)', '원탁의 기사(1953)', '열정의 랩소디(1956)', '로드 짐(1965)', 007시리즈 5편 '두번 산다(1967)' 등이다.   ※ 데이비드 린 감독, 모리스 자르 음악감독에 대하여는 2015년 8~9월 칼럼 '라이언의 딸' 참조. (끝)   ▲ 장갑을 낀 손을 호호 불며 얼어붙은 잉크를 녹여 잠을 설치며 라라를 위한 시를 쓰는 유리 지바고. 그러나 영화속에서 그의 시를 접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 시를 짓는 작업도 포기하고 비밀경찰에 붙잡혀 서로 헤어질 운명을 기다리며 불안 초조해 하는 유리와 라라.   ▲ 운명을 기다릴 때, 다시 찾아온 코마로프스키를 보고 놀라는 유리와 라라.   ▲ 지바고는 라라와 딸 카챠를 빅토르와 함께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은 곧 뒤따라 가겠다며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했던 발랄라이카를 그녀에게 건네준다.   ▲ 라라가 탄 썰매가 눈덮인 들판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보기 위해 얼음궁전 2층의 창문을 깨고 바라보는 안타까운 유리의 눈빛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된다.   ▲ 모스크바에서 유리를 발견한 이복형 예프그라프(알렉 기네스)는 동생에게 새옷 한 벌을 사주고 병원에 일자리까지 주선해 주지만….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leed2017
2021-06-10
대통령의 자질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 때가 오면 어김없이 나오는 화제의 하나는 전(前)대통령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를 따르고 좋아했던 패와 그를 싫어하고 비난하는 패로 갈라져서 자기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자기 의견을 내놓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승만과 박정희를 지지합니다. 이승만은 6.25 전쟁의 공로로, 박정희는 “우리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으로 칭하며, 그 둘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독재 경력을 들먹입니다. 나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싫어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쓴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먼저 박정희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박정희는 먹는 문제를 해결했으니 경제 대통령으로 그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나도 어느정도 그 말에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경제 대통령으로 말하자면 독일의 히틀러(A. Hitler)와 소련의 스탈린(J. Stalin)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요?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무너진 독일 경제를 짧은 시간에 회복하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정도로 튼튼한 경제 부국을 일궈냈으니 그를 제일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겠습니까.  소련의 스탈린도 빼놓을 수 없는 경제 대통령입니다. 황폐해진 소련 경제를 다시 일으켜 미국에 버금가는 강력한 군사기반을 구축한 그도 경제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내 주장의 요지는 경제, 교육, 국방 등 어느것 하나에 쏠려 대통령의 자질이나 치적을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대통령일까요? 하는 대통령의 자질에 관한 것은 사람마다 생각하는 기준이 다를 것입니다. 마치 신랑감을 고를 때 돈 많은 사람을 유일한 기준으로 고른다는 것도 문제이고, 학벌 좋다는 것을 유일한 기준으로 고른다면 그것도 문제일 것입니다. 건강, 인격, 사랑, 인간미 등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더 원만한 결정일  것입니다. 대통령을 고르는 기준도 마찬가지 경제, 국방, 교육, 문화, 의료, 스포츠 등 여러가지를 함께 고려하는 것이 무난할 것입니다.  우선 내가 생각하는 2가지 기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통령이 될 사람은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식견, 즉 영어로 비전(Vision)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앞을 내다 보는 힘을 가지고 미래가 현실이 되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둘째로 꼽고 싶은 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랄까 인권에 대한 외경(畏敬)이라고 봅니다. 사람 목숨에 대한 외경은 어느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편파적 외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목숨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외경입니다. 과거의 대통령들이 정적을 파리 잡듯 쉽게 한 것은 사람 목숨에 대한 존경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봉건시대 때 성군(聖君)으로 이름난 임금들, 이를테면 세종 같은 사람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외경이 남달리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는 반드시 자기가 그 사건을 재심사해서 신중을 기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옵니다. 수백 명의  무고한 양민을 재판없이 죽여도 좋다는 허락을 해준 이승만은 인권에 대한 존중이 없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승만이 비굴한 방법으로 자기의 정적을 제거해 버리지 않았느냐고 하면 “뭘 사람 하나 죽였는걸 갖고 그럽니까?” 하는 변명을 해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둘은 괜찮고 열 명 스무 명은 안된다는 것입니까. 내 생각에는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이나 열명 스무 명을 죽이는 것이나 그 악한 마음씨에 있어서는 다른 게 없습니다.  이승만은 젊은 시절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당시 남들보다는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되려 총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나쁜 선례를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이 권총을 들고 김구를 쏜 것은 아니다”는 것을 힘들여 강조하지만 지도자의 암묵적인 승인 없이는 이런 암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김구, 장덕수, 여운형 등 모두 6명의 정적들을 암살하고 자기의 정치목적을 달성한 이승만을 몹시 싫어합니다. 그것은 사나이의 대결이 아닙니다. 요 몇 주 전에 이승만 시절의 경찰과 테러단들에 의해 무고한 양민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이 학살당해  버려진 유골을 발굴하고 있다는 방송뉴스를 들을 때마다 이승만의 잔영(殘影)이 어른거립니다.  이승만이 정적을 제거하며 정치 목적을 달성한 것을 본 박정희는 이승만에 질세라 무고한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수많은 사람을 죽여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봉건사회나 전제국가에서는 왕이나 독재자에 대한 제어 장치는 없었습니다. 왕이나 독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해도 국민은 불만 속에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 사회를 컨트롤(Control)하는 사람들을 시한제로 정해놓고 투표를 해서 뽑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표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컨트롤을 당하는 시민들이 자기들을 컨트롤 할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그러니 민주사회에서는 시민의 뜻을 받들지 않는 사람은 다음 투표에서 다른 컨트롤러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은 미국 대통령 선거날. 한 표를 던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TV 화면을 통해 보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2020. 11. 3)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chungheesoo
2021-06-10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18)

  (지난 호에 이어)  다음에는 1961년 6월 24일 Marcel Chaput 가 창립한 Rassemblement pour l’Independance (RIN) 이었다. RIN 은 확대 되어 차후에 퀘벡당에 흡수된다. RIN의 독립관은 이렇다. ‘‘Pour la reconnaissance du francais comme seule langue officielle et obligatoire au Quebec -pour une presentation de l’Etat du Quebec aux Nations unies, au Vatican et dans les grandes capitales du monde… -pour une maitrise complete des destinees economique et des ressources naturelles du Quebec en fonction des interets superieurs -pour la sauvegarde veritable et effective des groupes minoritaire en voie d’assimilation -pour la jouissance de tous les droits et toutes les prerogatives des nations libres -pour une politique de grandeur francais a l’echelle de l’Amerique du nord et du monde. Une seule solution l’Independance.’’ (Lacoursiere, p.167) (불어를 유일한 공식적 및 의무적 언어로 인정 받기 위한, UN과 교황청 그리고 세계 모든 나라의 수도에 독립국가로의 대표단을 보내기 위한, 나라 공익에 따른 경제개발 및 천연자원 관리에 대한 주도권을 위한, 자유국가로서의 모든 권한과 특권 행사를 위한, 프랑스민족의 위대함을 북미와 전세계에 알리기 위한 해결은 오직 독립만이다.)  독립주의자로 의심 받지 않은 Montreal 시장 Jean Drapeau도 1959년에 퀘벡 독립을 암시하는 선언을 해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Batir enfin l’Etat du Quebec, fort et sur de lui, dynamique et rayonnant, Voila la grande tache a laquelle nous sommes appeles.’’(Lacourdiere,p.168) (빛나고, 역동적이고 자신 있는 국가를 건립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위대한 일이다). 한편 퀘벡 독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보자. 우선 1954 년에 연방 수상인 Stephen Saint Laurent 의 의견을 들어보자. ‘‘On dit que la province du Quebec n’est pas une province comme les autres. Je ne partage pas cette opinion, je crois que la province du Quebec peut-etre une province comme les autres… Aussi long temps j’y serai, le gouvernement federal ne reconnaitra pas que les provinces sont plus importante que l’ensemble du pays.’’(Lacoursiere,p. 163) (사람들은 퀘벡 주가 여타 주와는 매우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퀘벡 주도 여타 주와 다를 바 없다. 내가 수상으로 있는 한 주(Province)가 나라 전체보다 더 중요하지 못 할 것이다.) 한편 퀘벡 독립 운동은 불어권 언론기관이 다수 건립됨으로 인해 더 쉽게 전파되었다. 1952년에 불어 국가 방송국(Radio Canada : CBC)이 건립되었고 1962년에는 민간 방송국 Tele Metropole 이 등장했다. 한편 1951년에 Vincent Massey 와 George-Henri Levesque (필자의 모교 Laval 대 사회과학대학 학장) 신부를 고등 의장으로 하는 예술-문학-과학 발전 위원회(La commission d’enquete sur l’avancement des arts, lettre et science au Canada)가 발족되었으며 위원회는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을 건의 했다. 원래1867 헌법에 따라 교육은 주 정부 권한이므로 당시 Duplessis 정권은 이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1960년에 퀘벡 자유당의 Jean Lesage 는 연방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이러한 재정지원은 퀘벡 주의 예술, 문학 및 과학 발전에 큰 도움이 되고 동시에 퀘벡 국가주의 확산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또한 퀘벡 주는 1956년 소득세를 직접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5.5 Jean Lesage 퀘백 자유당 수상 등장 1959년에 Duplessis 수상이 타계한 후 퀘벡 정계는 급변했다. 1959년 9월 11일 Paul Sauve가 Duplessis 후임으로 수상이 되었으나 이 정권은 113일 생존하여 후임에 Antoine Barette 가 등장했으나 1960년 6월 22일 총선에서 보수당 Union nationale은 물러나고 Jean Lesage 의 자유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 순간부터 퀘벡은 암흑시대에서 벗어났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minjukim
2021-06-10
뿌리 뽑힌 나무(1)

*본보는 금주부터 김민주씨의 탈북 수기 <뿌리 뽑힌 나무>를 연재합니다. 숱한 죽을 고비를 넘나들며 탈북에 성공해 중국과 한국을 거쳐 캐나다에 도착해 살아가기까지 그녀가 겪어온 고난 극복의 눈물겨운 여정을 통해 한인 이민 독자들께 꿈과 용기를 선사하길 기대합니다-편집자 주       <머리말>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당황했고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내가 북한과 중국, 남한을 거쳐 드디어 캐나다에 정착하여 살고는 있지만 내가 캐네디언은 아니다. 그렇다고 남한사람이라고 하기엔 뭔가 많이 빈약하다. 그럼 나는 북한 사람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북한 사람이 맞다.    내가 어디를 가든 어디에서 살든 나의 뿌리는 북한이다. 북한과 중국, 한국을 거쳐 드디어 캐나다에 정착하면서 그 나라들의 언어와 풍습,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과 같아지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리 해도 절대 그들처럼 될 수 없었다. 내가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해외를 떠돌며 그 가지와 열매를 맺는 모든 과정이 정말 쉽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지나온 내 삶의 뿌리를 조금씩 파헤쳐 보려고 한다.    내가 살았던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이어 김정은이 3대 세습통치를 하고 있는 나라이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체제와 통치 시스템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북한 주민들의 삶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토록 어떻게 국가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고 감시 통제되고 있는지, 왜 아직도 북한 인민의 생활은 김일성 시대보다 점점 더 쪼들리고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이해가 되길 바란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망설였다. 내가 유명인도 아니고 성공한 위인도 아니며 더구나 요즘 유행하는 SNS조차 하지도 않는 내가 자서전을 쓰다니, 과연 누가 내 지나온 이야기를 읽으려고 할까? 탈북 엘리트들이 펴낸 수기를 읽어본 적은 있지만 사회 밑바닥까지의 삶을 경험한 나와는 다른 이야기들이었다.    주변에 어떤 캐네디언들은 북한에 대해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을 하면 그 대답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방대하고 심각한 북한의 실상을 사실 한두 시간으로 다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자서전을 통해 ‘신비의 요지경’, 폐쇄국가, 캄캄한 베일에 가려져 있는 가장 비밀스러운 국가 북한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도모하고자 한다.   <제1장 나의 소녀 시절> 1. 고향 평양  나는 1972년 북한 평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6살까지 살았다. 하여 평양에서 보냈던 기억은 한정적이다. 그때는 거의 매일 공습경보(전쟁시 공습경보에 대비한 훈련)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자장가 소리처럼 들으며 자랐다. 내가 사는 한반도는 전쟁을 잠시 멈춘 정전 협정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에 대비한 훈련은 삶의 일상이 되었다.    밤에 전기가 끊기고 사이렌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엄마 품을 파고들었던 기억이 난다. 전쟁이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대피 훈련, 주민소개훈련, 폭격에 대비한 불빛 막이 훈련은 일상이었다. 북한이 1973년에 1차적으로 완공한 평양 지하철은 수도의 교통 문제 해결과 함께 전쟁이 나면 주민소개 및 대피소로 활용할 목적으로 지하 100∼150M로 깊숙이 건설되었다.    아버지는 기계공장 기사로 근무하셨고, 엄마는 고등중학교 국문학 교사였다. 부모님 두 분 다 노동당원이셨다. 북한에서 지식인들은 입당이 무척 어려웠는데 입당을 하려고 5~7년 혹은 10년까지도 온갖 어렵고 힘든 일에 앞장서며 남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당원이 될 수 있다. 노동당원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의 핵심분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당원만이 사회적인 지위에 오를 수 있고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사람 축”에 낄 수가 있다.    결혼할 때 신랑이 비당원이라는 것은 큰 흠이 된다. 비당원들은 결혼대상자를 선택할 때 부족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자식들 앞에서 부모로서 권위가 위축된다. 우리 부모는 당과 나라를 위해서 잠자는 시간 빼고 나머지 시간은 직장에서 고군분투하였다. 자녀들은 방치하였고, 가정은 뒷전이었다. 주말이나 명절에도 온 가족이 놀러 가거나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한 번도 없다. 부모님들은 아침 7시에 나갔다가 밤늦게 10시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다. 차디찬 냉방에 우리 네 형제가 여기저기 쓰러져 잠에 들면 밤 10시가 넘어 들어온 엄마가 흔들어 깨운다.    나이 60에 이르러서도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물론 돈 한푼 없이 빈털터리였다. 정년퇴직 후에 엄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서 자신들의 아까운 청춘과 인생을 다 바쳐 헌신하고 충성한 것을 몹시 후회하셨다. 나의 부모님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어른들은 다 그렇게 살아왔다.    나에게 두 언니와 남동생이 있었는데 7~8살 되던 큰 언니가 학교가 끝나면 탁아소에 들려서 나와 동생을 집에 데려오고 손발을 씻기고 먹을 것도 주었다 내가 4살 적에 둘째 언니가 내 발을 씻겨 준다며 펄펄 끓는 물을 바가지로 떠서 다리에 부어버려서 화상을 입었다. 둘째 언니도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5살짜리 꼬맹이라 끓는 물에 화상을 입는지를 알 턱이 없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의 발등과 다리에는 아직도 그 화상 흔적이 남아 있다.    한번은 큰 언니가 8살 때 학교에서 시험공부를 밤 10시에 끝내고 탁아소에 있는 나와 동생을 엄마가 당연히 데려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집에 왔더니 엄마도 막 그때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엄마는 언니가 탁아소에서 동생들을 데려오지 않았다고 너무 혼내어 큰언니는 울면서 그 늦은 밤에 탁아소에 가서 우리를 데려왔다고 한다. 그 시간까지 우리만 탁아소에 남아 보육원들이 우리를 너무 싫어했다. 우리 때문에 퇴근을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 평양에서는 석유곤로(버너)로 밥을 짓거나 구멍탄(연탄)으로 온돌도 덥히고 밥도 해 먹었다. 연탄이 떨어지면 석유로 밥을 해먹었는데 온 집안에 석유 냄새가 진동하고 온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나마 석유까지 떨어지면 밥을 해 먹지도 못하고 배고파도 참고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자애들처럼 모험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해 여름 방학이었다. 탁아소도 방학이라 문을 닫았는데 엄마는 4살 된 나와 두 살배기 동생을 집에 가두어 놓고 문을 잠그고 출근했다. 저녁에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나와 동생은 하루 종일 집안에서 놀아야 했다. 나는 심심하고 뭔가 놀 거리를 찾다가 높은 책상 위에서 엄마가 매일 아침 얼굴에 바르는 크림통을 발견했다. 그것을 얼굴에 바르면 어떻게 될까하고 갑자기 궁금해진 나는 책상 위에 직접 올라가서 얼굴에 발라 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책상이 너무 높아 나는 의자를 놓고 올라가 또 책 꽃이 위에 있는 크림통을 잡는 데 성공했다. 뚜껑을 열어봤더니 하얗고 부드러운 크림에서 처음 맡아보는 신기한 향기가 풍겨왔다. 나는 손가락을 넣고 휘젓다가 얼굴에도 바르고 바로 그 옆에 있던 손거울도 집어서 들여다보다가 별로 재미가 없어서 그만 내려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자를 밟고 내려가지 않아도 한번에 뛰어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도 그 장면은 기억이 나는데 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하나, 둘, 셋에 책상 위에서 바로 바닥으로 뛰어내렸는데 책상이 흔들리면서 크림통이 먼저 땅에 떨어지고 박살이 나 버렸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위에 무릎을 찍으면서 많은 유리 조각들이 다리에 박혀버렸고 피가 흘러내렸다. 문이 밖으로 잠겼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에 도움도 청하지 못하고 학교에 간 언니들이 귀가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학습장(노트) 종이를 뜯어 다리에 감고 실로 동여매고 언니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오후 4시쯤에 큰언니가 돌아와서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얼른 엄마가 일하는 학교에 날 데려갔다. 그리고 나는 병원에 바로 실려 갔는데 의사 선생이 살에 박힌 무수한 유리 조각들을 다 뽑아내고 엄청나게 벌어진 상처를 실로 끄러 맸는데 칼을 잡고 있던 의사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4살밖에 안 되는 애가 아프다고 울지 않고 견디는 것을 보고 의사 선생님이 크게 놀랐다고 한다. 나는 상처가 아픈 것보다 엄마가 아끼던 크림통을 박살 내버려서 엄마한테 혼날 것이 더 무서웠고 걱정이 되었다. 그 당시엔 크림 한 통 사기가 힘들었고 한 통으로 아끼고 아껴서 오래오래 써야 했기 때문이다.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7월 한 여름날, 집안에서 동생과 놀다가 심심해진 나는 장롱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donyoo
2021-06-10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 (25)-제임스 매디슨(2)

  (지난 호에 이어)   당의 분쟁  1890년 이후 무소속인 워싱턴의 내각은 남부 농산지역을 대표하는 친프랑스계 제퍼슨과 매디슨의 민주공화당과 북부 상공업지역을 대표하는 친영파 해밀턴과 애덤스 제이의 연방당으로 나뉘어지고 두 당은 심한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해밀턴의 중앙은행 설립을 극구 반대하는 제퍼슨과 매디슨을 포함한 민주공화당원들에게 워싱턴은 반대를 위한 반대보다 국가이익을 위한 건설적인 분쟁을 종용했다.  1793년 제퍼슨이 워싱턴 내각을 사임하게되어 매디슨은 민주공화당 당수직을 맡았다.   국무장관(1801- 1809)  매디슨은 제퍼슨 내각의 국무장관직을 맡아 제퍼슨의 정책을 완수하며 워싱턴의 고별사 지침을 따라 영국과 프랑스간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농업을 중시하는 민주공화당 정책에 따라 향후 미시시피강 서부지역의 넓은 토지가 필요할 것이라는 제퍼슨의 지시를 따라 1803년 매디슨은 루이지애너 토지구입을 목적으로 제임스 먼로를 프랑스 특사로 보내 라버트 리빙스턴 주프랑스대사와 함께 나폴레온과 토지구매 흥정을 성공시키게 도와 주었다.   미국무장관(1801-1809) 토마스 제퍼슨 제3대통령 재임시 8년간 국무장관직을 맡았던 매디슨은 제퍼슨의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가장 큰 업적은 나폴레온 전쟁을 이용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를 갈라놓고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또한 루이지애너로 알려진 미시시피 서쪽지역을 프랑스나 영국이 차지할 경우 미국은 피바람 부는 전쟁에 말려들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하였다. 라버트 리빙스턴 프랑스주재 대사관을 보강하기 위해 제임스 먼로를 특사로 보내 나폴레온과 직접 매매흥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도와주었다. 매디슨은 국가의 이익을 위한 상업적인 결정은 위헌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미 4대 대통령(1809 –1917) 1808년 11월 미 대통령 선거에서 매디슨은 122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어 47개의 챨스 핑크니 연방당 후보를 가볍게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1809년 3월 4일 취임식을 마친 매디슨은 초당정책으로 각 지역의 정치인들을 골고루 선택하여 내각을 편성했다. 국무장관에 알버트 캘러튼을 선출했으나 상원의 반대로 라버트 스미스를 택해야 했다. 매디슨은 무능한 스미스 국무장관을 2년 만에 제임스 먼로와 교체했다. 매디슨의 탕평책은 연방당 계통의 내각은 물론 민주공화당 내각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여 논쟁을 피하는 매디슨은 주로 갤러튼 재무장관과 정책을 세웠다.   1812년 미영전쟁 나폴레온 전쟁으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 간의 교역을 지렛대로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했으나 도리어 양대 강국으로부터 협공을 받게 되었다. 미국이 프랑스로 향하는 미 상선을 영국으로부터 보호한다면 영국으로 향하는 미 상선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나폴레온의 제의를 받고 영국을 설득하려 했으나 영국은 계속 미 상선을 나포하여 울분에 찬 국민은 영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중론에 휩쓸렸다. 헨리 클레이와 잔 캘훈은 상원을 설득하여 매디슨으로 하여금 1812년 6월1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게하여 1812년 미영전쟁을 일으켰다. 매디슨은 영국의 통치를 받는 캐나다지역을 공격하였다. 온타리오 지역산물을 퀘벡지역으로 운송하지 못하게 하여 영국의 공급망을 차단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캐나다의용군들은 영국정규군 및 인디언과 힘을 합하여 미군을 계속 격파시켰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budongsancanada
2021-06-10
온주 경제 봉쇄해제 1단계 진입…식당 패티오-비필수 업소 제한 영업

경.조사 등 실내 정원의 15%까지…백신접종 속도전으로 집단면역 빨라질 전망          코로나 사태에 따른 온타리오주의 경제봉쇄가 오늘(11일)부터 해제돼 식당 패티오 영업과 비필수 소매업소들의 제한적인 영업이 허용된다.    이에 따라 실외 모임은 10명까지 허용되며, 식당 패티오는 테이블당 4명까지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또 야외에서 3미터 간격을 유지한 채 10명까지 모여 체육활동을 할 수 있다.    결혼이나 장례식 등 경조사, 종교행사 등도 정원의 15%까지 허용한다. 일례로 한맘성당의 경우 미사에 90명까지 참여할 수 있다.    야외 공연이나 극장의 영화 상영도 가능하나 방송 또는 녹화, 연습 목적에 한한다.    경제재개 2단계 일정도 오는 7월2일(당초 7월4일)로 이틀 앞당겨졌다. 2단계에서는 실외활동의 허용 범위가 넓어지고 소규모 실내 모임이 가능해진다.    식당 패티오는 테이블당 6명, 실외는 25명, 실내는 5명까지 모일 수 있고, 미용실도 영업하게 될 예정이다.    경제재개 3단계가 오는 7월23일 시작되면 식당 실내영업, 실내 체육시설, 종교행사 및 경조사 인원제한 등이 없어진다.    이러한 일정은 주민들의 백신접종률에 의존하게 되며, 온주정부는 전 주민의 70%가 1차 접종을 마치고 20%가 2차 접종을 마치는 시기에 2차 재개, 70~80%가 1차 접종을 마치고 25%가 2차 접종한 시기에 3차 재개를 하게 된다.    현재 캐나다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백신접종에 따라 집단면역 달성이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다. (김효태 부장 | [email protected])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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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토론토서 월세 가장 비싼 동네는…로즈데일-무어팍(2,308불, 14%↓)

  가장 싼 곳은…사우스 팍데일(1,669불, 20%↓) 임대료 부담 적어 가장 큰폭 하락은 영-세인트 클레어(39%↓)    토론토시에서 임대료가 가장 비싼 동네는 로즈데일-무어팍(Rosedale-Moore Park)으로 올해 1~4월 평균 2,308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작년 동기대비 14% 하락한 것이다.    TorontoRentals.ca에 따르면 같은 기간 월세가 가장 싼 곳은 사우스 팍데일(South Parkdale)로 평균 1,669달러(20%↓)를 보였다.    또한 토론토시에서 임대료가 1,800달러 아래의 상대적으로 부담없는 지역은 North St. James Town, East End-Danforth, Forest Hill North, Cabbagetown-South St. James Town 등이었다.    한편, 공간에 비해 월세가 상대적으로 가장 낮은 동네는 Dufferin Grove로 평방피트당 2.57 달러에 거주할 수 있었다. 반면 Casa Loma는 평방피트당 3.29달러의 가장 높은 공간비용을 기록했다.    지난 1년간 임대료 하락이 가장 적었던 곳은 High Park North로 단지 3% 내려가는데 불과했다. 이에 반해 가장 큰폭의 월세 하락을 보인 동네는 Yonge-St. Clair로 39%나 떨어졌다.    만일 토론토시에서 임차해 생활하고자 한다면 자신에게 가장 효율적인 동네를 찾는데 도움될 것이다. (김효태 부장 | [email protected])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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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온타리오 런던서 무슬림 일가족 4명 차량테러에 희생…어린이1명 중태

  각계 추모 집회 열고 “지긋지긋한 인종증오범죄 이젠 멈춰야” 한목소리로 규탄   용의자 20세 청년 체포    지난 6일(일) 온타리오주 런던에서 픽업트럭이 인도로 돌진해 길가던 무슬림 일가족 4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특히 이 사건이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계획된 증오범죄로 판단, 가해자에게 테러 혐의 적용을 검토 중이다.     사건 당일 오후 8시40분께 런던 하이드 파크/사우스 캐리지에서 차도를 달리던 트럭이 갑자기 인도로 돌진했다. 이 사건으로 74세 여성, 44세 여성, 46세 남성, 15세 여성이 현장에서 숨졌다.    유일한 생존자인 9세 소년은 크게 다쳐 입원했다. 이 소년은 졸지에 고아가 됐다. 이들은 모두 14년 전 파키스탄에서 이민온 무슬림 가족이었다.     트럭운전자는 사고 후 차를 타고 재빨리 달아났으나 사건 현장에서 6km가량 떨어진 쇼핑센터에서 경찰에 체포했다. 런던 경찰은 가해자인 너새니얼 벨트먼(20)을 일단 4건의 살인 혐의와 1건의 살인 미수 혐의로 기소했다.    경찰은 밸트먼을 조사하던 중 희생자들과 일면식도 없으며, 단지 이들이 이슬람을 믿는다는 이유로 공격한 계획된 범죄 정황를 포착했다. 경찰은 이에 따라 그에게 테러 혐의 적용을 검토 중이다. 다만 그가 어떤 구체적인 증오집단에 속해 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이번 사건은 고의적인 행위로, 피해자들이 이슬람교를 믿었기 때문에 공격 대상이 됐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어 "사건이 사전에 계획됐고 증오가 범행 동기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고 설명했다.    사건의 목격자 중 한 명은 "대혼돈과도 같았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뛰어다녔다"며 "곳곳에서 팔을 흔들며 비명을 질러댔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한편, 런던을 비롯한 온타리오 각지에선 무슬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인종증오 범죄를 즉각 멈출 것을 촉구했다.    저스틴 트뤼도 연방총리는 “캐나다에서 인종증오 범죄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앞으로 더욱 강력한 조처를 취하겠다”고 다짐했다. 덕 포드 온주총리는 "증오와 이슬람 혐오는 온타리오에서 설 자리가 없다"면서 "이런 악랄한 폭력행위는 즉각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 에드 홀더 런던 시장은 "이번 사건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증오에 뿌리를 둔 집단 살해"라며 "3대가 사망한 가족의 희생을 애도한다"고 전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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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6.25 참전 캐나다 공군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어언 6.25전쟁이 발발한지 71년이 지났습니다. 캐나다군은 6.25전쟁시 UN군 16개국 중 미국.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 했습니다. 그 당시 캐나다군은 여력이 충분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총병력 2만6791명을 파병했으며, 부상1212명 전사 516명의 희생을 감수 했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캐나다군이 6.25전쟁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희생을 한 것을 알고 있으나 공군이 파병되어 싸웠던 내용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6.25전쟁시 캐나다 공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1) 캐나다 공군 파병 현황  제1차로 해군 구축함 3척을 UN해군 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캐나다 정부는 그 뒤 한국의 전황이 계속 나빠지자 제2차로 1개의 항공수송대를 파병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캐나다 공군당국은 1950년 7월21일 제 426항공수송대를 정상임무로부터 해제시켜 미국의Mccord 공군기지와 일본의 하네다 공군기지 사이를 왕복 하면서 병력 및 군보급 물자를 수송케 하였습니다. 제426항공수송대 한국전 참가는 비록 후방지원의 형식을 취하기는 하였으나 UN군의 전력증강 문제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또한 캐나다 공군당국은 항공수송대대 이외에 공중전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조종사 22명을 선발하여 미 공군에 파병 근무케 함으로써 UN군의 제공권 확보에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2) 제426 항공수송대대  1950년 7월초 캐나다 정부는 한국에서의 UN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공군 제426 항공수송대대를 미국 항공수송단(Military Air Transportation Service)의 작전 지휘하에 넣어 한국전쟁에서 필요한 병력과 장비의 공수임무를 담당케 할 것이라고 공식으로 발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캐나다 공군 당국은 이 특별한 작전을 "Hawk" (매) 작전이라  명명하여 제 426 항공수송대대에 출동을 준비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미공군 당국과 협의하여 미국 워싱턴주 Tacoma근방의 Mcchord 공군기  지를 "Hawk" 작전기지로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한편 출동준비에 착수한 제426 항공 수송대대(대대장 C.H.Mussels중령)는 연일 철야근무를 계속한 끝에 7월 중순까지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7월25일 대대(4발 수송기 6대로 편성)는 대대장 Mussels 중령의 지휘로 몬트리얼 Dorval 공항을 이륙하여 의례적 행사를 치르고 다음날 26일 Mcchord 기지에 착륙하였습니다. 초기 Mcchord 기지는 무척 혼잡스럽고 질서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초 1개 전투기 대대가 주둔하던 이 기지가 미국군 항공수송단이 운영하게 된 후부터 갑자기 수많은 장거리 공수작전을 위한 대형 수송기들의 발착지로 변하자 모든 근무시설은 초만원 상태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제426항공수송대대가 이용할 수 있는 시설과 미국측으로부터 제공 받을 수 있는 지원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의 항공정비 기술자들은 오직 Dorval 공항으로부터 휴대한 장비로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격납고용으로 할당받은 건물도 간신히 수송기1대가 들어갈 정도여서 대부분의 정비작업을 노천에서 비를 맞아가며 실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에 부여된 임무는 너무나 과중하였습니다. 이행 작전계획은 기대하였던 것보다 2-3배 과중하게 짜인 것입니다. 6대의 수송기와 12명의 승무원들이 하루1만 마일에 달하는 장거리 왕복비행을 하여야 했습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각 수송기마다 매월 300시간 이상을 비행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보병부대와 바주카로켓 등 무기를 날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전은 1954년6월9일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1954년 6월9일 공수번호 제 599기의 왕복비행을 마지막으로 ‘Hawk’ 작전을 끝낸 제426항공수송대대는 Dorval공항에서 작전 임무완수를 축하하는 의식을 했는데 여기에 참석한 국방장관Brooke Claxton은 대대장병들이 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훌륭한 업적을 이룩하여 캐나다 공군의 전통을 빛나게 하였다고 극찬을 하였습니다. 실로 캐나다 제426항공수송대대가 4년간에 걸쳐 이룩한 공수업적량은 적지 않았으며 총599회의 왕복으로 3만4000시간을 비행한 끝에 1만3000명의 완전 무장한 군인과 7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군수화물 및 우편물을 운송 하였습니다. 그리고 흔히 수송과정에서 발생하기 쉬운 병력손실 및 화물의 손상도 전혀 없었습니다. 실로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3) 캐나다 F-86 조종사의 활약상 캐나다 공군당국이 제 426항공수송대대를 UN군의 공수작전에 투입한 경우와는 달리 Sabre(F-86형 제트전투기)의 조종사들의 파병은 그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 특이 하였습니다. 캐나다 공군당국은 조종사들을 파병하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실전경험을 얻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한때에 1-2명씩 한국에서 작전 중인 미 공군 전투폭격기여단에 순번제로 모두22명을 파병하였습니다. 당시 여력이 없었던 공군당국으로서는 이외의 적극적인 지원 방법을 취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파병동기가 어찌되었던 파병된 캐나다 조종사들이 한국전선의 상공에 출현함으로써 UN공군의 전력을 증강시키고 이들이 ‘MIG 출격항로’(MIG Alley)에서 소련의 신예기인 MIG-15기를 상대로 공중전을 전개한 끝에 최소한 9대를 격추하고 10대 이상을 파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에 파병한 캐나다 조종사들은 미 공군 당국과의 협약에 따라 6개월을 복무하게 되었는데 이기간 내라도 50회의 출격임무를 완수하면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종사들은 그들이 배속된 김포공군기지의 미 제4전투폭격기여단과 수원의 미 제51전투폭격기여단의 ‘MIG Alley’ 출격작전이 쉴새 없이 이행되는 가운데 대부분 6개월이 되기 이전에 50회의 출격 임무를 끝내었습니다. 이들 Sabre 조종사들은 대부분이 제2차 대전에 출전하여 많은 전투경험을 쌓은 조종사들이지만 한국에서는 그 전력이 일절 무시된 채로 한 편대의 평 조종사로 새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 안 가서 대부분의 미 공군 조종사들을 능가하는 우수한 기능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1952년 5월에 수원 미 제51전투폭격기여단에 배속된 J.C.A.Lafrance대위는 8월5일 첫 출격에 나섰는데 적기2대중 1대를 즉시 격퇴시키고 나머지 1대를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성공 일보 전에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의 비상한 솜씨와 용맹성은 즉시 인정되어 그는 당일로 편대장으로 승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예로, 1952년7월에 역시 수원 미 제51전투폭격기여단에 배속된 J.D. Lindsay 소령은 제20회 출격에 앞서 편대장이 되었는데 그는 50회의 출격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에서 MIG기 2대를 피격하고 또 2대를 격추함으로써 동료들로부터 ‘MIG자석’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캐나다 조종사들의 이와 같은 놀라운 능력 발휘가 가능했던 것은 물론 그들이 제2차 대전에서 체득한 실전경험과 평소의 훈련의 결과라고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그들의 우방에 대한 지대한 임무완수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용맹과 희생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MIG-15기를 한 대라고 더 격추시키겠다는 강한 일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MIG기의 독무대인 ‘MIG Alley’로 출격 하였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 10위권에 오를 수 있고 현재 행복하게 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잊어서는 결코 안되겠습니다. 이에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한국전 참전용사의 희생을 감사하고 한번쯤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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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5월 일자리 6만8천개 감소, 실업률 8.2%로 상승

     캐나다 고용시장은 지난달 코로나 3차 봉쇄로 6만8,000개의 일자리가 감소하면서 실업률이 8.2%로 상승했다.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이 기간 일자리는 전달인 4월(20만7000개↓)에 이어 2개월 연속 감소, 실업률을 월간 0.1%포인트 끌어 올렸다.    그러나 경제전문가들은 코로나 백신접종이 가속화되고 있어 곧 고용시장이 활기를 찾을 것으로 전망했다.    국내 실업률은 코로나 발발로 작년 5월에 역대 최악인 13.7%를 기록한 후 꾸준히 개선되다 지난 4월에 3차 확산에 따라 8.1%를 기록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2월의 실업률은 5.7% 수준였다.    지난달 구직포기자는 4만9,700명으로 2019년 평균인 2만2,000명보다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이 기간 감소한 일자리 중 대부분인 5만4,000개가 임시직였고, 정규직은 1만3,800개에 불과했다.    직종별로는 제조업과 건설업의 일자리가 많이 감소했다. 제조업에서 전달에 비해 3만6,000개 사라지면서 작년 4월 이후 처음 줄었다. 건설업에서는 1만6,000개 일자리가 사라졌다.    코로나로 큰 타격을 입은 숙박 및 요식업 일자리는 작년 2월 이후 36만4,000개(29.8%P↓) 증발, 전체 일자리 감소의 63.8%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달 주별 실업률은 온타리오가 9.3%(전달 9%), 노바스코샤 9.8%(8.1%)까지 뛰었다. 반면, 사스캐처완은 6.3%(6.6), B.C 7%(7.1)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전문가들은 "6월에는 코로나 백신접종 가속화와 경제재개로 고용시장이 활기를 찾으면서 실업자가 크게 감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효태 부장 | [email protected])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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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토론토대 세계 26위, 맥길대 27위…MIT 1위

   영국의 대학 평가기관 QS(Quacquarelli Symonds)가 발표한 ‘2022년 세계 대학 순위’ 에서 토론토대학이 26위로 캐나다에서 가장 좋은 대학으로 평가됐다.    QS 대학평가는 총 6가지의 지표 ▶학술·학교 평판(40%) ▶교수 1인당 학생 수 비율(20%) ▶논문 피인용 회수(20%) ▶졸업생 평판(10%)▶외국인 교수 비율(5%) ▶유학생 비율(5%) 등을 토대로 조사하며, 올해 순위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1300곳의 대학이 평가대상이 됐다.    토론토대는 100점 만점에 85.3점으로 평가됐는데, 학술·학교 평판 부문(99.5점)과 졸업생 평판 부문(98.2%)에서 특히 점수가 좋았다.    토론토대의 교육 관련 학과는 세계에서 3위로 평가받았으며, 도서관 정보 관리 학과와 스포츠 관련 학과도 세계 탑5 안에 들었다.    맥길대는 지난해보다 4단계 상승하며 토론토대를 바짝 잇는 27위에 올랐다. 유학생 비율(96.6점)과 졸업생 평판(94.4점) 부분에서 우수한 평점을 받았으며, 특히 광산 공학과는 세계 4위 수준이었다.    UBC는 1년 전에 비해 한 단계 하락한 46위에 자리했다.    미국의 메사추세츠공대(MIT)가 10년 연속 세계 대학 1위에 올랐으며, 그 뒤를 옥스포드, 스탠포드,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이 이었다.    한국 대학은 서울대(36위)와 카이스트(41위)가 50위 안에 올랐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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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jgh
2021-06-10
캐나다 농업용 토지에 대한 투자(12)

  2. 캐나다의 농업용 토지관련 정책 2.1. 캐나다 연방 및 주정부의 농업용 토지관련 정책 캐나다 연방정부가 농업분야정책에 관여하는 내용과 그 정책적 목표는 역사적 시기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여왔습니다. 캐나다가 연방국가의 형태를 갖춘 이후에는 서부지역의 영토확장과 농업기반의 안정화를 이루기 위해서 다양한 지원을 해왔습니다. 농업부문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민들의 먹거리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안보적 가치에 주목하지만, 1990년에 들어서면서 국제무역질서의 개편과정에서 국가간의 자유무역 확대를 위해 수입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낮추고, 농업분야에 대한 연방정부 차원에서의 정책적인 지원(수출보조금, 소득보장프로그램 등)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각 주별로 이루어지는 농업부문에 대한 지원정책은 상대적으로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 연방정부는 전국의 농지에 대한 토양관리체계를 세우고, 농사에 필요한 수자원을 관리하며, 병충해나 제초제 등에 대한 관리, 농산물에 대한 품질관리 및 검사, 종자공급에 관한 제도, 식품안전관리시스템 등을 운영합니다. 그리고 수출 및 각 주 사이에 이동되는 농산물에 대한 마케팅에 관여합니다. 그 외에 농장의 운영과 투자, 그리고 매입과 관련한 여러가지 자금지원 프로그램들도 운영됩니다. 각 주별로 이루어지는 농업부문의 농가소득 안정화, 신용 제공, 작물 보험 등을 중심으로 한 농업정책은 연방정부의 지원정책이 약화되는 틈새를 메우는 역할을 합니다.  한편, 농업용토지에 대한 정책은 한 때 캐나다 헌법조항을 따질 정도로 연방정부와 각 주정부 간에 소관논쟁이 있었지만, 지금은 연방정부가 주정부들에게 위임한 형식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농업용토지에 관한 정책에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엉켜있습니다. 외국인 또는 외국기업들의 캐나다 농지매입과 같은 문제도 있고, 대도시에 인접한 농업용토지가 도시확장에 따른 개발에 밀려 해마다 그 면적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또한 농산물 공급시장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소규모의 농장들은 대규모 농장에 팔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으며, 농지가격이 해마다 큰 폭으로 오르면서 젊은 영농인이 농업부문에 새로 진입하기 어려워지는 문제점, 그리고 농장을 다음 세대로 이양하는 데 필요한 후계자양성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주정부들의 노력은 도시계획에 따른 토지사용규제나 외국인에 대한 토지매입허가 등에서 나타나듯이, 서로 일관성이 없고, 정책지원 정도나 규제 내용에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연방차원에서의 정책조율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쓴이의 홈페이지 : http://www.valuehome.ca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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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steve
2021-06-10
모기지 Q&A(1)

  Q: 변동 이자율과 고정 이자율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A: 변동 이자율과 고정 이자율의 선택은 이자율 변동 여부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상황과 계획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널티 때문인데, 짧은 기간 내에 이사 계획이나 집을 판매할 계획이 있는 경우, 상대적으로 페널티가 적은 변동 이자율을 선택하거나 짧은 기간의 고정이자율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이자율 변동에 신경 쓰고 싶지않고, 현재 집에서 향후 5년 이상 계속 거주할 계획이라면 고정 이자율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Q: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도 모기지 승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A: 가능합니다. 대신 수습기간(Probation)이 지나야 하고, 풀타임으로 샐러리를 받을 경우에 한합니다. 계약직이거나 비즈니스를 경영하시는 경우, 1차 금융권에서는 최소 2년이상이 되어야 모기지 대출 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2차 금융권에서는 심사기준의 차이가 있어서 2년이 되지 않아도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회사를 옮기고 기존의 직업과 연관성이 있는 경우, 예외를 적용 받을 수도 있습니다. Q: 소득이 없어도 모기지를 받을 수 있을까요? A: 가능합니다. 일부의 대출기관에서는 소득이 없어도 가진 자산이 많고 많은 다운페이먼트를 하게 되면 대출 승인을 내주기도 합니다. 이때 다운페이먼트의 증명은 최소 3개월 이상 되어야 하며, 소유하고 있는 자산의 증명 또한 3개월 이상 되어야 합니다. 또한 신규 이민자의 경우, 소득이 충족하지 않아도 신규 이민자 프로그램으로 모기지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Q: 보고된 소득이 적은 자영업자의 경우 모기지를 받을 수 있을까요? A: 가능합니다. 몇몇 대출기관에서는 자영업자 모기지 프로그램을 따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영업자의 경우, 보고된 소득보다 실제 소득이 높다는 것을 대출기관에서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업체의 Financial Statement (재무재표) 등을 기준으로 매출과 지출, 그리고 수익 내용 등을 판단하여 보고된 소득보다 높은 소득을 인정해줍니다. 하지만 이 경우, 35% 이상을 다운페이 해야 하며, 35% 미만으로 다운페이 할 경우, 모기지 부도 보험 (Mortgage Default insurance)를 구매해야 합니다. 그 이외에도 좀더 여유로운 심사기준을 가지고 모기지를 받을 수 있는 B lender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Q: 주거래 은행에서 모기지를 받는 것이 유리한가요? A: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주로 거래하는 은행이라고 해서 더 좋은 조건을 주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대출 승인을 되게 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기지를 얻을 때, 더 좋은 이자율을 제공 하는 대출 기관 쪽으로 알아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Q: 모기지를 갱신할 때, 기존 대출기관에서 다시 연장하는 것이 유리한가요? A: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기존 대출 기관에서 다른 대출기관보다 좋은 이자율을 제공하거나 같은 이자율을 제공한다면 그냥 연장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보통, 다른 대출 기관에서 더 좋은 이자율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고, 모기지를 옮겨간다고 해도,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모기지 계약이 만료 되기 3~4개월 전에 이자율 쇼핑을 해서 좋은 조건으로 옮겨가는 것이 좋습니다. Q: 특정 대출기관에서 승인이 거절되었을 경우, 다른 은행에서도 모기지를 받을 수 없을까요? A: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대출기관들이 큰 틀에서 봤을 경우, 비슷한 심사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다른 모기지 상품을 제공하고 있고 그에 따라 다른 심사 기준을 가지고 승인 여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A은행에서 승인이 거절되고, B은행에서 승인이 나는 경우가 꽤 많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Q: 신용 점수가 좋지 않은 경우, 어떠한 방법이 있나요? A: 대부분의 1차 금융권에서는 650-680점이상의 신용점수를 요구합니다. 만약 신용점수가 650점 미만이라면 2차 금융권에서 먼저 승인을 받은 뒤 시간을 두고 신용점수 회복을 한 이후에 1차 금융권으로 옮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hyunsoo
namsukpark
2021-06-10
꿈보단 해몽(解夢)

   캐나다정부는 COVID-19 백신접종에 있어 혈전(血栓)의 발생 위험성이 기존에 알려졌던 1/100만 보다 그 10배에 달하는 1/10만 이라는 새로운 연구결과에 따라서 특정 백신접종을 전면 중단시켰다. 때론 거절(拒絶)도 수락(受諾)으로 해석하려드는 세상이다.  백신접종 후 사망자발생 및 각종 부작용발생이 백신과 인과성(因果性)이 없다는 주장의 당위성(當爲性)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같은 백신을 여러 국가에서 접종을 중단한 상황에서, 우리만 백신 접종을 강행할 명분이 없다는 평가다.  뉘시라 완벽한 정의(正義)로 무장할 수 있을까마는,《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에 ‘새(鳥)가 숲 속에 둥지를 트는 데는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황하의 물을 마셔도 배부르면 그만(巢林一枝 飮河滿腹)’이라는 내용이 전한다. ‘어떤 일의 대부분이 숨겨져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사람들은 ‘빙산(氷山)의 일각(一角)’이라 에두른다.  아무렴 행동에서 순발력(瞬發力)이 떨어지고 상황 판단력이 헷갈리면 나이든 증거라지요. 여론조사 업계에선 진영(陣營)과 이념을 떠나 “불특정다수의 응답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開陳)하는데 ‘샤이(Shy)'하지 않다며 저마다 관심도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라디오·TV방송에선 3초(秒)만 침묵이 흘러도 방송 사고로 여긴다고 한다. 참으로 빈틈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뉴스에는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고 보도됐지만, 대통령의 행차(行次)에 불쑥 행보(行步)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갑자기 익명(匿名)의 시민들 사이에서 몸소 주문한 초코아이스크림을 들고 가게 직원과 기념사진까지 찰칵했다. 미국이 집단면역으로 팬데믹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여실(如實)히 보여주려는 메시지로 보였다.  미국은 COVID-19 백신 접종자에게 마스크 착용 의무를 면제하는 ‘노(No)마스크’ 조치를 시행했지만, 여전히 마스크 착용을 고수하는 상당수는 “사회생활에서 표정을 연기할 필요 없어 편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불평하자는 것이 아닌 익숙해지자는 뉘앙스가 묻어난다.  사회나 국가에서 상식과 정의가 무너짐은 백조(白鳥)가 오리로 전락(轉落)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팬데믹 때문에 적잖은 제약(制約)이 따랐음에도 ‘지록위마(指鹿爲馬)’를 경계하며 구동존이(求同存異)를 외치던 우리의 몸도 마음도 한결 밝아지는 듯하다.  K팝을 대표하는 방탄소년단의 알파벳 이니셜을 딴 ‘BTS(ㅂㅌㅅ) meal’을 Ronald가 반겨 맞이하는 드라이브스루에서 주문하고 픽업했다. COVID-19에 감염되지 않는 것이 팬데믹 시대의 최우선 과제에 틀림없지만,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멋진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연습할 뿐”이라는 BTS멤버들의 겸손한 말씨에 슬기로움이 묻어난다. 머리에는 지혜를, 가슴에는 사랑을, 아름다운 음색(音色)으로 오래토록 건승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獻身)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한국전쟁 참전 UN군 전사자를 기리는 제66회 현충일 추념식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당신을 기억합니다!’를 주제로 거행됐다.  허상(虛想)과 관념(觀念)에 사로잡히지 않고 비켜가는 게 바람뿐일까만, 여느 국가나 민족을 불문하고 자유와 평화는 그저 얻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다. 말의 뉘앙스가 일률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는 줄 안다. 하지만, 변함없는 여러분의 많은 사랑과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翰墨場中喚得回 桂林昨夜覺花開 暗香漏洩通消息 散作人間調鼎才” - ‘문인(文人)들의 시회(詩會)에 불려갔다 돌아오니 / 어젯밤 계림(桂林)에 꽃이 피었음을 깨닫네. / 그동안 향(香)이 흘러나와 소식과 통하니 / 세상에 흩어 재상(宰相)감으로 삼으면 좋으리.’ / -[자득혜휘(自得慧暉)/南宋, <송고(頌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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