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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기 칼럼

leesun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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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unggi
이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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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6
당신이라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知者不言(지자불언):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言者不知(언자부지):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노자 도덕경 56장에 나오는 말이다.

면접장에서 이런 포지션을 취하면 100퍼센트 탈락이다. 면접을 통해서 상대가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파악해야 하는 자리에서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해야 하는데 뭘 알고 있는지 말을 아낀다면 채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원자들은 질문에 답하려고 애를 쓴다. 면접을 자주 진행하다 보면 상대가 알고 말하는 것인지, 암기해서 말하는 것인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홍보하는데 주력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현대 회사조직에서 리더는 신분이나 계급, 카리스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좌우된다. 아는 사람은 말로 설명할 수 있고, 그 설명도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에서 팀은 문제해결을 위해서 조직되었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때 그의 말발은 조직에서 먹힌다.

따라서 신입사원이라고 해도 오래된 직원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생기고, 신참자가 해당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이 있다면 그가 조만간 그 팀의 리더가 될 수도 있다. 나이, 성별, 학벌에 상관없이 문제해결 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리더가 되면 그 조직은 성과를 많이 올리게 된다.

내가 캐나다로 이민 와서 근 30년을 일하면서 배운 이 사회의 조직문화 속에서 인정받는 리더의 조건이었다. 지금 내가 소속된 팀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없지만, 나의 연봉과 인사고과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회사경력이 적고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다. 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많이 말하고 그 의견에 수긍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는 리더가 될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된다.

한국 대선에서 이재명과 윤석열이 각종 대담프로에서 질문에 답하는 걸 보면서 내가 회사의 사장이라면 누구를 채용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을지 판단하기 어렵지 않다.

아는 사람은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있게 현안에 대하여 원인을 설명하고 시원하게 답변하는 사람과 질문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길게 말하는데 듣고 나서 해결책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지원자를 놓고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만 잘하는 것과는 다르다. 전문적인 질문에 대하여 말을 잘하는 사람은 그 사안을 이해하고 자신이 고민해보았고, 해결책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이력서를 검토하고 그가 우리 회사에서 필요한 업무경험이 있는지 과거에 어떤 성과를 냈는가를 말로 물어보고, 사실관계 배경조사를 한다. 그가 소속된 회사, 학교에 대한 조회, 그와 같이 일해 본 상사나 동료들에게 확인해보고 평가를 들어본다. 이렇게 선발하고 나서도 3개월의 유보기간을 둔다. 3개월간 일을 시켜보고 아니다 싶으면 계약해지를 한다.

대선과정이 이런 것과 그다지 차이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 후보자의 인상, 소문, 도덕성, 윤리의식, 그를 비판하는 미디어들의 해설은 판단요소가 아니다. 산적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들어보고, 그 원인분석과 제안을 평가하는 것으로 족하다.

회사조직은 리더 한 두 사람이 모든 전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러 직무를 가진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서 이성적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정치에서도 삼권분립을 지키면서 어느 한편이 특권을 가지지 못하게 장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수를 줄이고, 파멸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스템이 권력의 견제와 능력위주의 평가체제이다. 사회의 어느 한 부분도 과도한 권력을 소유하지 못하게 장치하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 일을 해보면 혼자서 하는 것보다 팀웍이 확률적으로 효과적이다. 팀원들의 다양한 재주와 견해가 문제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누구든지 발언할 수 있고 그 발언에 대한 제재나 희생을 보아서는 안 된다. 제재가 두려워 발언을 못하게 하는 조직은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해결 능력이 떨어진다.

이런 면에서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 정부보다 현대사회 조직에 더 어울린다. 지난번 친구와의 식사자리에서 나에게 "왜 이재명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의 이유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sunggi
이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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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3
2021-12-23
잘 웃지 못하는 사람

 

잘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엄숙하고, 진지하다. '흐흠' 어떤 이들은 그의 묵직함을 덕목이라고도 한다.

그는 주변에서 웃기는 말을 해도, 힘들다고 징징대도, 그 표정의 차이가 미약하다.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겨도 티가 안 나서 주변사람들이 알아차리기 힘들다. 힘든 일이 지나갔어도 그의 표정에는 차이가 없다. 이런 인상을 주는 사람들은 명절날 대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어른들로부터 무언의 인정을 받았다.

고등학교 조회시간에서부터, 군대 연병장에서, 회사에서 방송으로 나오는 회장님의 신년훈사에서도 이런 엄숙한 태도는 표준이 되었다. 이런 표정에서 벗어나기 힘든 사람들에게 없는 것은 뮤지컬이다.

감동, 격한 공감, 슬픔, 분노, 좌절, 희망을 속으로만 가지고 있지 않고 주변에 알려주는 태도이다.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고, 타인을 도와주고, 의견을 말하고, 상대가 알아듣도록 기다려주고, 남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미리 들어주는 태도이다.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데, 그것을 노래와 춤과 커다란 표정과 제스처로 하는 것은 삶을 뮤지컬로 만들어준다.

그 반대는 너무 표현이 큰 사람들이다. 상대의 기분에 맞추어 크게 리액션을 해주어서 다소 깜짝 놀라기도 하고, 혹시나 이 사람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이다.

혹은 말이 많은 사람,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어떤 심리상담가는 이런 사람을 조증에 걸린 사람이라고도 한다. 노홍철이 떠오른다. 이런 하이퍼가 있어 보이는 사람은 내가 사는 캐나다에서는 흔하게 본다.

방송을 진행하는 앵커는 표정이 살아있다. 크게 눈을 뜨기도 하고 대담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커다란 제스처를 짖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가족이 모이는 명절날 나이 드신 어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언제나 즐겁게 떠들고, 커다랗게 웃기도 하고, 불끈 화도 내기도 하는 사람은 차리리 솔직하다. 말수가 적고 종종 아빠 미소만 듣는 금불상 같은 사람은 잠시 화장실 가느라 자리를 비워도 언제 사라졌는지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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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unggi
이성기
92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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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6
조용한 성탄절

 

한참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남성중창단의 감미로운 노래에 빠져들었다.(https://youtu.be/g4fvMgNfN0I)

오 거룩한 날... 올 12월에는 캐롤 송이 들리지 않는다. 성탄절이 2주가 채 안 남았는데도 캐롤을 들을 수 없는 이유가 무얼까? 통근기차타고 토론토 시내로 출퇴근 하던 코비드 이전 시기에는 아침에 차 시동을 걸면 11월 말부터 라듸오에서 캐롤이 들린다.

GO Train에서 내려서 Union 역지하 아케이드를 통과하려면 갖구운 빵 내음새, 각종 커피 상점들, 곳곳에 성탄장식들과 버무려진 캐롤 송을 아침부터 저녁 퇴근까지 지겹게 듣는다. 스타벅스 앞에 장식들, 가게들의 화려한 방울들까지 모두 넘쳐난다.

재택근무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다 보니 집안에서 내가 캐롤 음악을 틀지 않는 한, 성탄시즌을 보내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부지런히 쇼핑센터로 나가서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지 않는 한, 성탄절은 쥐구멍 쪼이는 작은 햇빛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민 1세대에게 성탄절은 같은 또래의 아는 사람들 가족들과 저녁모임을 가지는 것이 유일한 성탄절 이벤트이다. 게다가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언제 격리가 강화될 지 모르므로 너무 많이 모이는 것도 조심스럽다.

The Gentri의 캐롤 비데오에서는 일년은 목욕을 안한 것 같은 예수닮은 사람이 나온다. 가족끼리 성탄준비로 바쁜 와중에 길거리에서 혼자 겨울을 보내는 홈리스들 사이로 불쌍한 눈을 한 한 남자가 세상을 돌아본다.

그 눈빛이 계속 신경쓰인 중산층 남자는 결국 남자의 행방을 쫓게 되고, 그가 빈민구호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 닮은 그 사나이는 성탄절에 자기 가족만 돌보지 말고 혜택을 받지 못한 불우한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메세지를 보낸다.

그것은 지극히 예수님답다.

 

시장경제의 도시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에게 개인주의와 각자도생은 오랫동안 굳어진 철칙이다. 더우기 코로나로 물리적으로 격리된 상태로 제한된 사회적 접촉을 할 수 밖에 없는 이번 성탄절은 더욱 조용하다.

경쟁적으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성탄절은 이제 그만 쉬라는 기간이다. 차마,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밀려온 비데오 속의 주인공은 회사일도 손에 안 잡히고, 가족을 데리고 귀가하는 중,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빈민구호소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예수님 닮은 사람인 주인공을 은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어느 한 곳을 응시한다. 그 시선은 계단에 두 아이를 데리고 피신온 어느 젊은 엄마에 멈춘다.

오 거룩한 날. 그날에....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leesunggi
이성기
79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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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처절한 시기에 우리는 남이다

 

 관계는 무난한 시기와 처절한 시기에 따라 민낯을 드러낸다. 미국 인구의 약 12%가 흑인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두가 미국인이지만, 처절한 시기에 백인들로부터 흑인은 차별을 받는다.

 

이런 경우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도 나온다. 남편 이태호의 아들 준영이 새엄마 여다경의 집에 같이 살게 된다. 다경은 자신이 준영을 잘 키우겠다고 데리고 오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다경은 준영을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좋은 옷을 사주면서 잘 지내보자고 보듬어준다. 무난한 시기이다.

 

파티로 집안에 손님이 많이 온 날 여다경의 딸의 울음소리가 난다. 다경은 부리 낳게 달려와서 같이 있었던 준영을 보고 소리친다. 다경은 준영이가 딸을 때리거나 울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놀란 준영이가 변명을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준영은 울면서 엄마 지선우에게 전화해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한다. 처절한 시기이다.

 

너는 이제 우리 팀이야, 가족이야, 같은 시민이야, 라고 하지만 처절한 시기가 오면 바로 뒤로 젖히고 밀쳐내고 내버린다. '우리'라는 테두리는 공감의 울타리에 머무는 관계이다. 다경에게 딸은 '우리'라는 테두리에 머무는 연장된 '나'이지만, 남편의 아들은 '남'이라는 테두리에 머물기 때문에 준영의 마음에 거의 공감하지 못한다. 의도적으로 노력해보기 전에는.

 

사람들은 '나'라는 테두리를 쉽게 주변으로 확산해서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기도 하는데, 집단생활을 오래 해왔던 전통적 사회가 그렇다. 어떻게 하다 보니 '나'는 오로지 '나'에만 머물 때 같은 가족, 오랜 친구일지언정 상대의 '고통'에 공감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럴 때 처절한 시기가 오면 나만 살리고 나머지는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랑 비슷한 사람들을 '나', 확장된 개념으로 '우리'에 포함시킨다. 외모, 말투, 직업, 소득, 성격, 출신지역 등등, 쇼윈도에서 마네킹을 슬쩍 보듯이 자기와 비슷한 혹은 호감이 가는 대상을 '우리'에 포함시켜 버린다. 이런 대충 하는 과정이 '우리'와 '남'을 구분한다. '남'이란 내가 공감하지 않는 대상 전부를 칭한다.

 

어떤 사람이 나를 '남'으로 대하는지를 알려면 나를 보는 눈빛이나, 나에게 말하는 태도를 보면 된다. 무심히 바라보는 눈빛, 자기 말에만 급급한 태도, 내 말을 상대가 짧게 결론 내려고 하는 태도, 이런 사람은 나를 공감하지 못하고 '남'으로 대하는 사람이다.

 

나를 지극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내가 하는 말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말 추임새를 넣어주는 사람은 마음을 열고 나를 안아주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같은 사람이 공감을 해주는 때도 있고 바쁘다고 무시하는 때도 있다.

 

타인과 우리의 경계선은 종종 춤을 추기도 하고 사안에 따라서 변경되기도 한다. 평화로운 가정, 일터, 사회가 되려면 우리라는 테두리가 확대되고 타인의 세계가 감소되어야 한다. 남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전달되는 집단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온기가 있다. 반대로 '엄마가 내 고통을 알아', '당신이 내 입장을 헤아려 보기나 했어' 하는 장소에는 싸움만 있게 된다. 처절한 순간이 오면, 죽게 내버려 둔다.

 

고통이 심하면 가까운 사람을 타인의 범주에 넣어버린다. 영화 <기도하는 남자> (https://youtu.be/l3-88zn-fcc) 주인공인 개척교회 목사는 장모의 수술비 5천만원을 마련하려다가 협박, 강도모의까지 하게 되고, 사모인 아내는 고교 동창에게 하룻밤 몸을 파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목사는 절망과 혼돈 속에서 이 모든 것이 장모의 수술비에서 시작된 고통이니 장모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먹게 되고, 아는 외국인 노동자를 시켜서 청부살해를 시도한다. 처절하면 장모는 '타인'으로 치부된다. 오로지 내 가족만 살려고 방해가 되는 장모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전날, 자신의 생일이라고 장모가 음식을 장만해주었는데도 말이다.

 

살인은 막았지만, 장모는 교통사고로 죽게 되고 마지막 순간을 목도한다. 숨이 끊어져가는 장모는 사위가 119에 신고하려고 하자 손을 잡으며 말린다. 목사는 장모를 남으로 생각했지만, 장모는 목사를 사위로 생각했던 것이다. 딸과 함께 앞으로 잘 살아가야 할 가장으로 말이다.

 

이것으로 남의 죄를 대속하여 죽은 예수님을 오버랩시킨다. 예수님은 자신을 남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면서 하나님이 저들을 용서해주기를 기도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남이 아닌 '우리'로 인식했다.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남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은 굳이 흑인만 해당하지 않는다. 그 땅에 사는 남미 사람들, 아시안들 모두의 삶이 중요하다는 말이 되어야 한다. 한 가정에서부터 국가 그리고 전 세계까지 평화롭게 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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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unggi
이성기
78672
18093
2020-05-21
사회를 짝사랑하며

 

토요일 Mono Cliff Provincial Park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 공원을 그간 자주 방문해보았지만, 매 산책로마다 사람들이 5미터 간격으로 마주치는 일은 드물었다. 그날은 달랐다. 온타리오 주에서 주립공원 방문을 재 허용한 어제는 Victoria 연휴 첫날이기도 했거니와 그간 아이들과 집에서 풀리지 않은 날들을 보내야 했던 가족, 친구들과 만나지 못했던 청년들이 그나마 토론토에서 제일 근접한 주립공원을 찾아 나선 것이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면에서 반갑고 안심이 된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3.5킬로 하이킹을 하고 나서 바로 나와버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왔기 때문에 전염병이 걱정되었다. 백신이 개발되어서 코로나 면역력을 모든 사람들이 가지게 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 가까운 접촉을 멀리하게 될 것이다.

 

은퇴하면 도시 한복판으로 이사 가서 살 것인지, 아니면 호젓한 교외로 이사를 갈 것인지 고민했었다. 소박하고 자연주의적인 삶에 매료되었을 때는 사람이 없는 숲 속에서 살고 싶었지만, 그 생각을 접은 것은 '심심'을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서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이 더 꽉 찬 삶이라는 방향으로 생각이 변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샾에 나가서 책을 보던 글을 쓰던 적당히 북적거리는 공간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상점들도 보고, 저녁에는 맥주집에 가서 흐트러진 사람들 속에 젖어보는 생활을 하는 것이 숲 속 생활보다 더 나에게 어울려 보였다.

 

도시에 머물러야 친구들을 만나서 대화도 할 것이다. 친구들이 없는 삶은 더운 욕조에 한 번도 안 들어가고 세수만 하면서 사는 것과 같다. 살 수는 있지만, 욕조 맛을 알고 나면 주기적으로 담그고 싶다.

 

재택근무를 일주에 며칠을 할 수 있는지 신경 쓰면서 살다가 평생 재택근무 모드로 변하고 나니, 회사생활이 그립다. 귀찮기도 하지만 동료들과 어깨를 맞대고 농담하고, 질문하고, 커피 마시고, 점심 먹고, 얼굴 표정의 변화를 시시각각 바라보면서 지낸 시간들이 떠오른다.

 

대면 사회 faced society에 익숙하게 살아왔다. 이제는 아침에 일어났다고 머리 감고 헤어 드라이를 하지 않아도 되고, 전날 와이셔츠를 다리지 않는 생활을 한다. 캐주얼을 넘어서 외모에 신경을 덜 쓰는 재택 생활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을 제거한 내성적인 생활이다.

 

많은 것을 안 보여주어도 되고, 오로지 문자와 음성만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제스처도 볼 수 없고, 외모가 주는 인상도 알 수 없다. 따라서 호감도, 불쾌감도 감소한다. 코로나 사태는 은퇴 후 어디서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하게 만든다.

 

도시에 머물더라도 사람들과 접촉이 제한된다면, 숲 속에 사는 것과 뭐가 다를까. 인터넷만 된다면, 어디서건 채팅을 할 것이고, 영화감상을 할 것이다. 여름이 되면 화단에 꽃들이 만개하고 단풍나무에 다람쥐와 새들이 늘어날 것이지만, 여전히 나는 혼자서 커피 마시고, 책 보고, 달리기 하고, 맥주 한 병 겨우 마시고 잠에 들것이다.

 

이웃들도 먼발치에서 인사를 주고받을 뿐, 집에 초대하거나 악수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청년들은 어떻게 새로운 애인을 만날 수 있고,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얼굴을 보지 않고, 우리는 얼마나 사회를 존속시켜나갈 수 있을까? 사람이 그리우면서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는 사회를 오래 살다 보면 어떻게 propose 하는지도 잊게 될 것이다.

 

'저희 집에 오세요, 식사 한번 하지요' '이번 여름에 파티를 합시다' '그러면 정기적으로 만나서 합창 연습을 해볼까요?' '우리 정식으로 사귀어 볼까?' '같이 여행 갑시다'

 

 마릴린 몬로의 사진을 보면서 사랑에 빠지듯이 평생 마릴린을 만나지 못하고 짝사랑한다. 이 코로나 전염병에서 인류를 구원해줄 독수리 삼형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인을 짝사랑하면서 살 각오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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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unggi
이성기
77175
18093
2020-02-27
‘해치지 않아’

 

 

 


 
영화 ‘해치지 않아’(youtu.be/QQokr61zKG4)에서 망해가는 동물원을 살리기 위해서 직원들이 동물의 탈을 뒤집어 쓰고 관객을 끌어 모으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람이라는 내면은 같지만, 모습은 동물이므로 방문객들은 그들 속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동물이 사람처럼 행동할 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이 콜라 마개를 따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하며 플래쉬를 터뜨린다. 


캐나다 여자가 한국남자와 결혼해서 시골에서 밭일을 도와주면서 시어머니와 지내면 동네사람들은 감탄한다. 저 서양여자가 우리처럼 살아가는 것이 신기하고 대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여자가 며느리였다면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장난이 아니었을 것이다. 백인여자가 이상한 행동을 해도 그러려니 받아주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주는 배려심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면이 곰이나 고릴라이거나, 사자라면 그 실망감과 당혹감이 높을 것이다. 


같은 외모, 고향, 학교, 성, 나이 등 동일 유형이라는 첫인상은 사람들끼리 친밀도를 쉽게 올리지만, 그 반대로 실망과 불화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이민 와서 초기에 만난 한국인들끼리 세월이 지나면서 안보는 사이가 되는 사례가 많다. 


사람들과 오랫동안 별탈 없이 잘 지내려면 상대가 나랑 같은 취향, 태도, 능력, 매너를 지닌 사람이라는 기대를 버리는 것이 낫다. 한 시간을 대화 해보면 그와 내가 얼마나 다르게 세상을 보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그렇다고 안 만나기로 마음먹으면 외롭게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탈을 쓴 동물처럼, 상대는 나와 모든 면에서 다르다는 출발점에서 관계를 맺으면, 쓸데없는 오해도 기대도 없게 된다. 상대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내가 밥을 한번 사주었으니, 그가 다음에 안 사준다고 섭섭한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 가면 간다고 말도 없이 간다고 해서 매너 없다고 투덜거릴 일도 없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는 나와 다른 동물이라고 받아주는 것과 같다. 같은 한국사람이니, 같은 일에 종사하니까, 나이 대가 비슷하니까 등으로 우리가 얼마나 통하는 사람인지를 강조하는 태도는 불안하다.  


오래 가지 않거나 마음속으로 멀어질 수 있다. 차라리 서로 다른 동물의 탈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람들끼리 만나면,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통하고 살아가는 길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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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unggi
이성기
77063
18093
2020-02-21
성격이 둔감한 사람이 좋다

 
 
"그런 질문은 품질관리 담당직원에게 물어보면 안 되나요?" 


"당신은 왜 내가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발끈한 세브리나가 받아 쳤다. 엇, 이게 뭐지. 나에게 물어보지 말고 저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한 것이 그렇게 기분이 상할 일인가? 그녀의 반응이 날카로웠다.


내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나의 짜증이 외부에 너무 쉽게 드러난 것일까? 그가 과잉 반응한 것이라고 접어버리는데 자꾸 생각이 난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못하는 나도 그렇지만, 발끈한 세브리나도 꽤나 민감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까다롭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이나 말에 민감하다. 이런 민감성은 인간관계에서 에너지 소모를 늘린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이나, 배경을 생각해보면 헤아릴 수도 있는데 드러난 반응만 가지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해롭다. Autism을 가진 사람이 외부의 소리에 지나치게 민감해서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처럼, 상대의 말이나 행동에 대하여 기준치가 높은 사람은 하루를 살고 나면 기운이 쑥 빠져버린다. 


이럴 때 부러운 성격이 둔감한 사람이다. 외부의 자극을 별로 눈치채지 못하고 덤덤하게 살아간다. 


나와 다른 타인의 행동이나 말에 대하여 또는 악풀에 대하여 약간 바보가 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밥만 잘 먹고 잠도 잘 잔다는 말은 둔감한 사람이 누리는 행운이다. 


기대, 특히 타인에 대한 기대는 최대한으로 낮추는 것이 좋고, 때로는 나의 건강이나 무드에 대한 기대도 한참 내버려 두는 것도 좋은 일이다. 반드시 행복감에 머물러야 할 필요도 없고, 별 일없이 창밖에 비 내리고 날이 흐려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반드시 이 정도가 되야 한다는 모든 기대는 자기 자신에게 부작용을 남긴다. 


둔감하고 남이 나에게 어떻게 행동하든지 받아주는 폭을 늘리면 일상을 훨씬 수월하게 받아 넘길 수 있다. 둔감하던가 아니면 내면까지 이해해주던가. 


내가 조직에서 이 정도 역할을 해야 한다는 기준이 높던가, 주변에서 나를 이렇게 대우해주어야 한다는 수준이 상세하면 어리석은 감방생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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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unggi
이성기
76908
18093
2020-02-09
화를 잘 내는 사람 상대하기

 
 
"왜 그 자료를 이 서랍에 두지 않는 거지?" 늘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직장동료가 있다. 그의 기준은 언제나 높다. 정확하고, 기대한 대로 일처리가 되지 않으면 화를 낸다. 눈빛과 얼굴 피부, 음성에서 화를 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일을 부탁하면 갈등이 생긴다는 것을 경험상으로 알고 있으므로, 나는 거의 최소한으로 상호작용한다. 처음에는 틀리고 맞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므로 선임자였던 그가 지적하는 것은 내가 익혀야 하는 것으로 말이다.


몇 번의 갈등을 통해서, 그가 다른 동료들과 다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타인의 실수나 일처리의 불완전성을 용납 못하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었다. 그런 결벽성은 정확도를 요구하는 일처리에 적합하다. 


그러나 회사의 모든 업무에 기계적인 정확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종종 그도 실수를 한다. 그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했더니, 조용히 지나간다. 미안하다는 말은 없다. 표현이 없다. 그는 자신이 실수하거나 누락한 것을 알았을 때 공개적으로 어떤 표현을 취해야 하는지 매뉴얼에 없다.  


그에게는 지시나 명령보다는 의견을 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더 낫다. 그런 성격이 이로울 때도 있다.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고자 할 때 그를 검정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의 태도 덕분에 미래의 실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다.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은 미소를 띠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과 대칭점에 서있다. 같은 직장에서 누구는 즐겁게 지내고 누구는 불평하면서 지낸다. 이것이 나에게 알려주는 교훈이 있다. 화를 잘 내는 그 친구를 보면서 그 사람이 화를 내는 사안에 주목하지 말고, 화를 잘 내는 그의 태도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의 태도이고, 그의 관점이다. 그것은 사적인 문제이지 회사 내에서의 공적인 사안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그의 말과 행동에 전염이 될 필요가 없고, 그 사안을 그가 말하는 그대로 진지하게 수용할 필요가 없다. 내가 즐겁게 일하고 싶을 때, 나는 미소가 준비된 다른 동료들과 소통한다. 그들의 관대하고, 따스한 태도에 내가 전염되도록 마음을 푹 담근다.


사람의 스타일을 알면 인간관계의 거리 조정이 된다. 필요에 따라서 활용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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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unggi
이성기
76828
18093
2020-01-30
취업알선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사정이 딱해서 아는 사람을 통해서 취업을 알선해 주었다. 그 사람은 고마워했다. 하지만, 한달 뒤에 고용주와 불화로 그 직장을 떠나게 되었고, 소개받은 고용주는 이 일로 나와 단절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을 잘못 판단했다. 고용주와 구직자. 세상에는 해서 그리 득 되지 않지만, 잘못되면 크게 욕먹고 손해 볼 일이 있다. 지금이 그런 경우다. 그 친구가 취업을 했다고 하면 그냥,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될 뿐이지, 나에게 별다른 득은 없다. 취업시켜주고 고용주와 직원이 다투기 시작하면서 어느 편도 들지 못하는 애매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내가 취업알선을 책임진 사람도 아닌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을 해주었다가 몇 날 며칠을 골치 아프게 설득해야 했고, 신경이 잔뜩 쓰이게 되었다. 문제는 고용주도 모난 사람이고, 구직자도 모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다른 점에 대한 포용력이 부족하고 서로 공격을 했다. 마치 친구에게 딸을 소개했다가 그 딸이 시댁에서 남편과 싸우다가 사돈관계가 깨진 것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배운 것은 1. 일단 소개해주면, 그 다음에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절대로 상담해주지도 대신 중재해주지도 말 것. 철저하게 남의 문제 보듯이 대할 것. 


2. 소개해줄 때 단서를 달 것. 나는 그 사람이 좋게 보였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다른 면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채용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사장이니 보고서 최종 판단해라. 만일 잘못되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자기가 필요해서 사람 구해달라고 했는데, 내가 억지로 채용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다. 


3. 구직자에게: 남의 소개를 받고 취업을 하면 소개한 사람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라.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소개 받지도 말아라. 고용주가 내 눈에는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다른 면을 모른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판단해라. 행여나 고용주가 부당한 행동을 해도 나를 원망하지 말고 알아서 대처해라. 


좋은 사람 소개시켜주고, 소개받은 직장이 좋은 곳이라면 서로 윈-윈이다. 나는 그저 내적으로 보람을 느낄 뿐이다. 그런데 그런 보람이 꼭 있어야 하나? 없어도 내 평상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 모든 일은 잘될 가능성, 안될 가능성이 있다. 


잘되면 칭찬이지만, 사람들은 금새 잊어버린다. 잘못되면 중간에 욕을 먹고, 자칫하다간 위선자, 사기꾼, 거짓말쟁이 소리를 듣게 된다. 사람들은 일이 안 풀릴 때 원인을 자기 이외 타인에게서 찾는다. 내가 중간에 끼어서 그들의 원망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왜 이런 사람을 소개해주었어. 그래도 자넬 믿고 채용했는데. "


"왜 이런 일자리를 소개해주었어요. 선생님이 추천해주셔서 좋은 곳인 줄 알았는데, 사장이 성격상 문제가 있는 사람이에요"


손익계산이란 이득을 생각하기 전에 손해부터 계산하는 것이다. 우리는 판단에 앞서서 그 일이 잘될 경우 얻을 득을 오래 상상하고, 실은 대충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남의 일자리 소개해주었다가(그것도 아무런 중간 소개비도 없이) 일이 잘못돼서 노사간의 불화가 생기자, 나름 해결해준다고 조언을 했다가 인간관계가 모두 파손되고 말았다. 


세상일에는 할 일이 있고, 할 수 있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항상 손해가 나지 않고, 고통이 발생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물론 내가 달성할 목표라면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남의 일이라면 내가 괜히 끼여서 예상치 않은 손해를 입을 필요가 없다. 굳이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 안 해도 된다. 최소한 중간에 소개해준 사람에게 먹물을 튀겨서는 안 된다. 


"선생님은 왜 맨날 선생님 입장만 생각해요. 지금 힘든 것은 난데"


이런 말을 할 사람인줄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취업알선도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 읽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는 이렇게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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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unggi
이성기
76731
18093
2020-01-23
쓸모 있는 사람이란


 
"더 나은 위치로 가려는 것, 사회적으로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어떻게 하면 버릴 수 있을까요? 한국을 벗어나면 나아질까요? 아직도 한참 부족한 것 같은데 말이죠… 이런 생각을 버리는 것이 맞는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30세 한국청년이 말한다. 


캐나다의 동부 노바스코샤의 해안가에서 자동차정비소를 운영하는 남자가 있다. 오후에 딸이 학교에서 오면 양동이와 삽을 들고 갯벌에 나가서 조개를 판다. 많은 벌이는 안되지만, 그런대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정비소라서 동네에 고정고객들이 있다. 이 남자는 부인과 딸을 데리고 별 힘든 일이 없이 살아간다. 


그에게 더 나은 위치로 가는 것,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의식주가 마련되고,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을 더 추구해야 할까? 시의회에 나가면 더 보람 있게 사는 것일까? 도시에 나가서 대기업에 취업하면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일까? 


여기서 두 가지 목표가 보인다. 사회적인 사다리에서 더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 심지어는 기자들이 일년에 한두 번씩 인터뷰하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아는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를 출세에 둔다면 존중과 공감을 놓칠 수 있다. 반대로 이웃들의 사회적 수준과 별 차이 없이 지내더라도 그들이 울타리가 되는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커다란 대과 없이 중년이 돼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경제적으로 가난의 덫에 빠지지 않고, 나이 먹어서 연금으로 아내와 동네 산책하면서 사는 삶을 목표로 둔다면, 루저로 사는 것일까? 평균적인 삶을 가지면 허전할까?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하지 못해서? 


왜 사회적으로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야 할까? 그 사회란 무엇인가? 신문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인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인맥들인가? 쓸모란 남들이 나로 인해서 득이 되는 상황이다. 


내가 서울대 갈 실력이 되지만, 서울대입학을 포기하면 다른 학생이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다. 그러면 남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 역전에서 100명의 노숙자가 밥을 굶고 있는데, 그날 자신이 벌은 수입을 모두 털어서 그들에게 떡국을 대접한다면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닌가? 


쓸모 있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정하는 것인가 내가 정하는 것인가? 100명이 주위에서 밥을 굶고 있는데, 내가 그들을 위해서 철야기도를 한다면, 그 쓸모는 그들이 정한 것일까 내가 정한 것일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업을 벌여 돈을 많이 벌어야 할까? 아니면 박사를 받고 책을 써야 할까? 뭐가 뭔지 모른다면 무조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런 나를 사용하는 사람은 이 땅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인가?


무엇 때문에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더 나은 위치에 가야 하는가? 진정 남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기를 위해서인가? 내가 올라가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욕구의 저변에 깔려있는 잠재적인 욕구는 타인 이전에 나 자신 속에 있다. 바로 다른 사람의 '섬김', '존중'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나 이만큼 이루었으니, 이제 나를 좀 봐달라. 불특정 다수의 호감을 받는 것보다, 가족들로부터 호감을 받는 것이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타인들의 존중을 받고 싶다면, 내가 잘난 사람이 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내 주변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생존을 위해서 멀리 타지에 가서 기술을 익히지만, 은퇴할 때까지 이렇게 현장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기원은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노는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배고프면 사냥을 가고, 배부르면 잠을 청했다. 사냥하는 시간보다 무위도식하는 시간이 많았다. 


현대 시장 사회는 구성원이 무언가를 계속 사고 팔면서 교환하기를 기대한다. 교환이 많을수록 국민 총생산이 올라간다. 앞집 아저씨가 와서 세탁기를 고쳐준 대가로 식사대접을 하면, 세금 신고할 것이 없다. 하지만, 아저씨에게 수리비를 지급하고 세금영수증을 받고, 식사대접 후 세금 영수증을 준다면, 경제는 활성화되어서 국민소득증대에 기여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냥 주고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돈을 주고 사고 팔고 했다는 상징성만이 존재한다. 


시장사회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재고, 그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므로 개인의 행위는 사회적 행위가 된다. 사람의 노동을 시간대로 구매하므로 시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하므로 자유롭지 않다. 시킨 일뿐만 아니라, 더 열심히 해서 일인자가 되라고 한다. 


유능한 사람이란 공부 잘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집에 많은 월급을 가져오는 사람이라고 한다. 생존을 위해서 누구나 필요한 경제수단은 끊임없는 도전의 길이 아니다.

조금 노력해서 가족을 부양할 정도의 돈을 벌고, 아는 사람들과 알콩달콩, 공감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이 TV에 유명인사로 나오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을까?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과 주위사람들과 살갑게 사는 것은 함께 갈 수 없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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