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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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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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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youngjae
김영제
76314
18429
2019-12-10
지성 (知性)의 시인, 이상묵 시인의 시 세계(하)


 

 (지난 호에 이어)


유태인 시장


잉어가 걸리면/ 낚시꾼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옛날 고국에서/ 몸 보하던 생각하고/ 잉어를 사러 유태인시장에 가니/ 늙은 할머니가 /물통에서 잉어를 꺼내/ 신문지로 둘둘 말아 도마위에 놓고/ 방망이로 사정없이 머리를 친다// 눈만 내 놓고 두건 두른/ 팔레스타인 젊은이를/ 이스라엘 군인이/ 곤봉으로 마구 패듯/ 돈이 되는 일이 라면/ 나이도 잊고/ 마른 팔 높이 쳐드는/ 백발의 할머니// 잉어는 신문지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끝까지/ 두 눈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동시집 p16)

 

예 맞습니다. 이상의 두 편의 시에서, 이 시인의 시는 생각, 즉 지성에 대한 부분의 비중이 더 높아 보입니다. 하지만 현대시로서의 필요한 정의처럼, 자신의 느낌이나 감상을 절대로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상황을 지극히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이 그 상황을 상상하고 나름대로 판단하도록 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시인의 시들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을 고발하고 있지만 자신의 주관적 감상을 일부러 배제하여 우리가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게 하는 현대시의 수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석촌 선생님의 시들이 주는 매력은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던 사물을 보다 명확하게 바라 볼 수 있도록 시력을 밝게 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보통사람들이 사물이나 자연을 보고 그냥 지나치거나 미처 보지 못했던 것, 느끼지 못하던 것을 예리한 촉(觸)으로 느끼고 찾아내어 삶의 의미를 새롭게 느끼고 해석하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석천 선생님은 우리 주변의 일상을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삶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앙가쥬망의 시를 쓰신 진정한 의미의 시인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끊임 없이 배우고 변화를 시도하며 노력하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시인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후기 시에 들어서면 그의 시들은 형식적으로 (‘링컨 생가와 백두산 들쭉밭' 시8, p184) 에서 보듯 무의식의 세계를 그리듯 더욱 이미지가 풍부하여지고 표현기법이 다양화 하고 있으며, ‘파리는 누워있는 남자의 몸/ 에펠탑은 두 다리 사이에 우뚝 솟은 남근/ 샤갈의 나귀는/ 한 손으로는 제 유방을 가리고/ 얼굴 반대방향으로 엉덩이를 비틀고 있다’ (에펠탑과 나귀p. 267) 와 (열리지 않는 지퍼 p 243), (카사노바의 근친상간 p.278) 등에서 보듯 심지어sensual 하게까지 과감하게 변화하고 있고 ‘정크메일은 하나같이 세일이다’, ’그 꼴통들은’ (두 개는 공짜 p 210) 등에서 보듯 詩語에도 외래어나 비속어들을 과감히 섞는 등 어휘구사가 더욱 분방(奔放)하여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의 바닥에 깔리는 시 정신은 여전히 날카로워 현대를 사는 도시인, 서구문명 사회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풍자와 야유까지 동원하여 통렬히 비판합니다. 


20여년 전 제가 이 선배님의 시들을 처음 읽고 쓴 평론에서 이 시인의 시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타이틀을 '도시 인텔리켄차의 회오와 한계’ 라고 썼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인텔리켄챠, 그때에도 이 시인의 시들은 우리가 시를 읽고 시인이 방금 내게 보여준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를 책을 덮고 다시금 잠시 생각하게 하는 지적인 시들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제가 왜 이 시인의 시들이 지적이라고 했는지 아시겠지요?


그는 또한, 자신의 옛 시들도 계속 읽고 퇴고하고 고쳐나가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9월의 비 

 


4월에 비를 맞으며
이 하이웨이를 지날 때
나는 길가의 집들을 알지 못했다
이 아침 햇빛은 온 세상을 발가벗기고
연둣빛 유니폼을 입고 행진하는 나무들
민들레꽃은 밤새 황금 카펫을 깔아놓아
나는 달려서 세상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같은 길 따라
오늘 내가 집을 향할 때
9월 하순의 어스름 길에 깔리고
문득 불을 켜는 길가의 아파트들
거긴 들어갈 일 없는 
아무리 오가도 스쳐만 가야 하는 성벽
낯선 길 이대로 달려 
하늘과 땅이 맞붙은 저 끝 어디
불 끄지 않은 마을에 닿을 수 있을까 
표지판 없어도 환한 거리
비 그친 골목에 들어설 수 있을까

 

 

죽음을 앞두고 다시 수정하여 신문에 실은 이 시는 석천 선생님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삶을 돌아다보는 마음이 절절한 아름다운 시 입니다


지성의 혜안을 번뜩이면서도 끊임 없이 변화를 시도하신 그의 시들이 우리에게 잠언적인 노래를 통하여 삶에 대한 통찰을 계속 들려주고 있습니다. 석천 선생님은 떠나셨지만 그분의 시들은 오래 남아 우리의 마음을 울릴 것입니다. (2019년 11월10일)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imyoungjae
김영제
76251
18429
2019-11-28
지성 (知性)의 시인, 이상묵 시인의 시 세계(중)

 

 (지난 호에 이어)


5. 시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생각은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것일까요?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시는 ‘사상과 감정의 등가물’, 시는 ‘생각을 노래로 나타낸 것’ 이라는 것은 결국 같은 이야기 입니다. 즉 2700년의 시간과 동서양의 공간을 넘어 동양과 서양의 시에 대한 정의는 놀랍게도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6. 그러면 feeling 과 thought 사이의 equilibrium 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는 뜻이 담긴 노래 라고 간단히 정의 될 수 있습니다. 감상을 노래하는 것이되 의미를 가져야 하고 좋은 시란 이것이 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건 무슨 뜻일까요?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자체로 우리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고 전술하였지만 시인은 자신이 시 속에서 전달하고픈 뜻이 있다 하더라고 그것을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독백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인 묘사로써 표현하여 독자가 그 의미를 스스로 깨닫거나 눈치채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시가 노래에만 치우쳐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즉 감성에 치우쳐 전달코자 하는 의미가 없거나 약하다면 공감은 줄 수 있으되 19세기 낭만파의 시들이나 유행가처럼 직접적인 감상에 호소하게 될 것이고 시인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나 주장이 너무 앞서게 되면 정치적인 구호나 캐치프레이즈로 전락하여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감성과 이성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즉 좋은 시란 어떤 자연을 보고 느낀 감정을 노래한 시인의 노래가 단순히 우리의 마음에 감흥을 일으켜 공감을 주는 것 외에, 읽고 나서 그것이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고 생각하게 해주어야 하는 뜻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을 제 나름대로 도표로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7. 이제 이상묵시인의 시를 읽어봅시다. 


 여러분은 이 시인의 시들이 균형이 잘 잡혀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어느 쪽에 더 경도되어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요?

 

 

링컨 생가에서

 


링컨의 영혼은/ 본향으로 갔겠지만/ 다 옮겨갈 수 없는 것들은/다시 이세상으로 돌아온다/ 새들이 숨어들고 있다/ 옥수수 우거진 켄터키/ 벌판에 흑인은 보이지 않고/ 디트로이트 다운타운/ 주유소 철창 유리속에 백인 한사람/ 몸 숨기고 새 모이통만한 틈새로/ 흑인들의 돈을 거두어 들인다/ 거스름 동전 속에/ 링컨의 초상/ 노예 시절 목화농장/ 목화꽃 꼭지같은 잇몸 드러내며/ 탱크에 채워지는 휘발성 자유 만큼 그들은 잠시/ 당당해하지만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자본의/ 세상에서 언제나 / 알 수 없는 것은 이윤의 크기/ 손바닥에 되돌아 온/ 일 전짜리 속에는 liberty/ 자유라는 단어도 양각되어 있다 (첫 시집 P14, 링컨 생가에서)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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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youngjae
김영제
76146
18429
2019-11-22
지성(知性)의 시인, 이상묵 시인의 시 세계(상)

<다음은 지난 11월 10일 이상묵 시인의 타계 1주기를 맞아 행한 ‘칼의 길’ 출판기념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 – 필자 주>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상묵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형식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묻고 대답하며 대화하는 형식이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상묵 시인의 시들이 ‘지성의 시’ 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여러분과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를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지난 수 천년 간 수많은 시인들이 시에 대하여 나름대로 정의하고 시는 이런 것이니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의 시의 정의에 대한 의견은 각자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에서는 수학과 달리 하나의 정답이라는 것이 없으며 그것은 자신이 정의한 것에 대해 나름대로 적절한 설명이 있다면 그 대답은 옳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는 '감성의 표현'이라고 여러분 중의 한 분이 말씀하셨는데 맞는 말씀입니다.

시는 우리가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역사적으로 선인들에 의하여 시는 어떻게 정의되었는지를 살펴봅시다.

2. 그러면 동양에서는 시를 무엇이라고 정의하였을까요?

우리 잠깐, 시를 한자로 詩 라고 적고 그 의미를 해석해 봅시다. 시는 말씀 언 言 과 절 사 寺 의 결합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따라서 시란 말로 절 즉 집을 짓는 것이라고 말하기도합니다. 나름대로 맞는 말입니다만…

지금으로부터 2800여년전 중국에서 편찬된 시경(詩經)에 나오는 시의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시경의 모시(毛詩)의 서언 중, 관저(關雎) 편의 시언지 (詩言志) 설 (?)을 보면… 시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뜻과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 저 유명한 '시언지(詩言志)설' 입니다.

즉, 제 나름으로 해석 한다면, 절 사(寺 ) 원래 뜻 지(志)가 변형된 것으로, 즉 의미, 우리의 생각이라 할 수 있고요, 말씀이란 우리가 소리 내는 것, 즉 노래라고 할 수 있지요. 즉 한자의 뜻 풀이와 시경의 정의에서 보면, 시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노래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가요?

3. 그러면 서양에서는 시를 어떻게 정의하였을까요?

Spontaneous overflowing of powerful feeling. 모두 아시다시피 19세기까지는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처럼, 시는 시인이 대상을 보고 느낀 기쁘거나 슬픈 감정, 느낌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여과 없이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지요.

여기서 spontaneous 란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시란, 시인이 어떤 대상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쏟아져 나온 감흥을 이기지 못하여 그것을 소리 내어 노래하는 것인데 그것이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진 다른 사람의 감성을 움직이게 되고 따라서 그 사람이 그 노래에 공명하여 감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4. 현대시에서의 시의 정의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나 엘리어트(T. S. Eliot)

등 주지주의 시인들에 의해 현대시에 대한 정의가 크게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바뀌지요? 이들은 ‘시’를

  •  사상과 정서/ 감정의 등가물 (等價物)
  •  Intellectual Equivalent of Emotion
  •  Equilibrium between feeling and thought 이라 정의하지요.

이건 무슨 말 입니까? 시란 우리가 대상을 보고 느낀 감정과 그것을 통해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사이에,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니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이들 현대 시인들은 19세기에 시에 대한 정의, 우리가 보고 느낀 직접적이고 단순한 감정의 토로는 너무나 주관적이고 일방적이어서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방법론적으로 우리가 느낀 감정을 아, 슬프다 라고 직접 토로할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환치할 사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그 묘사를 읽고 독자가 그 풍경을 상상함으로써 그로부터 시인이 느꼈던 감흥을 공감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현대시의 중요한 개념중의 하나인 객관적 상관물(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 objective correlative; 감정을 객관화하거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공식 역할을 하는 대상물) 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생략하겠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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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youngjae
김영제
75868
18429
2019-10-26
깊고, 맑고, 쓸쓸한 김준태 시인의 시집 ‘가스페 블루스’를 읽고(하)

 

 

(지난 호에 이어)


 통로 없는 마음인 줄은 알았지. 눈꽃들이 에워싸도 태연히 돌아앉아 벽 줄기만 매다는 모습을 보고. 갈 곳 없는 마음인 줄도 알았어.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밤새워 기도만 하는. 오랜 숨을 몰고 온 거야 질투 모르는 착한 광물을 꿈꾸며. 단단해지자 홀로 맑을 수 있는 정신이 되자. 그렇게 꾹꾹 눌러 적으며. 찾아온 거지 이곳 들뜬 시만 꼬드기는 허튼 움막에. 소리 없이 소리 짓는 시심詩心을 보라고. 어느 한 순간을 향해 깊어가는 시선視線의 무게를 보라고. 깨쳐 일어나 창 밖을 보면 여전히 그 자리 그 음성. 얼음 속에 담긴 뜨거운 목소리인 줄을 알았지. <‘고드름 속에 박힌 물소리’ 전문, p 71> 

 

그의 장기長技는 한편으로는 해독이 어려워 보이는 독백처럼 쏟아내는 이런 산문시에 있다. 툭툭 앞뒤를 끊어내는 듯한 어눌해 보이는 어투 속에 그러나 깊고 참신한 비유와 맑고 깊은 의미와 정신이 울림으로 다가와 우리가 그의 시를 다시 읽어보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벽에 매달려 손바닥에 얼굴 묻고 기도하는 고드름. 그 속에 들어 있는 물은 우리의 사유 속에 갇힌, 어느 한 순간을 향해 깊어가는 시선의 무게와 같은, 외형에는 보이지 않지만, 속에 들어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 원형 또는 시를 짓는 마음, 단단해지고자 홀로 맑을 수 있는 정신이 되고픈 마음, 얼음처럼 찬 외형 속에 담긴 뜨거운 열정 같은 것이 아닌가 하고 시인은 고드름 속에서 물을 보며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의 시들 중에는 감성이 부드럽게 풀어져 비교적 편하게 읽히는 시들도 있는데 다음의 ‘가스페 블루스 3’을 보면,

 

오늘 바다에 와서 나, 우네. 시퍼레서 너무 깊어서. 실연기失戀記 푸른 봉인 위에 입을 맞추며. 불러 보네, 빈 방에 두고 온 마음아 곱사등이 사랑아. 가을이 벌써 몇 번, 눈 퍼붓는 겨울은 또 몇 번. 눈 감으면 사방 은밀해지고 너만 오롯할 줄 알았는데. 내 사는 허허벌판엔 온종일 망각의 바람만 불어. 잊고 살았네 방향 없이 헤실 바실 걸었네. 비밀이 사라진 목숨이란 참 이상도 하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아. 낙엽은 저물도록 혼자 맴돌다 멎고. 표정 없는 눈발만 겨우내 펄펄. 어지러워 자꾸 어지러워 달려온 바다. 파도 텅텅 울리는 바람 절벽에 서서. 오늘 나, 시를 쓰네 기도를 하네. 살자 다시 목 놓아 펑펑 울자. 눈을 들어 바라보니 쪽빛 하늘, 검은 해안에 살포시 너울지고 있네. <‘가스페 블루스 3’, 전문, p.81>

 

함께 밤새워 울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한 릴케의 말이 생각나는 시이다. 시인은 자기 삶의 끝자락과도 같은 캐나다 최북동쪽 끝단의 가스페 해안의 밤 바닷가에서 빈방에 두고 온 마음, 곱사등이와도 같은 사랑을 생각하며 자기 삶의 절벽 끝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고 시를 쓰며 펑펑 우는, 처절한 자기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의 처절한 극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눈을 들어 검은 해안에 살포시 너울지고 있는 긍정의 쪽빛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듯 그의 대부분의 시는 현실의 괴로움, 벼랑 끝에선 절망을 노래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위의 시들 중, 마지막 구절, ‘말간 시냇물이 흘러가고 있더군’라거나 ‘끝없이, 빈방 하나가/소리 없이 겨울을 연다’와 같은 표현들에서 보듯 긍정으로 삶을 포용하는 건강한 시 정신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이 그의 시들이 절망을 이겨내고 돌아와 삶을 관조하는 평상심을 회복하게 되는 이유이다.

 

숨소리 끝을 보는 것/불의 숨./바람의 숨./물결의 숨./일렁이다 지는 노을/그 울림의 한 가운데에/닿는 것./아직껏 남은/틈 사이/호사스러운 아픔마다 이별하며/다시 깜깜한 마음으로/살 박혀 들어간/수심水心/줄 하나로/보이지 않는 확연함을/새벽 안개 속에 묻는 것. <‘밤낚시’, 전문, p.50>

 

시인은 밤낚시를 하며 낚싯바늘 끝을 바라보며, 우리가 삶 속에서 바람, 물결, 일렁임 속에서 삶의 목표로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기다림 자체가 삶인지, 결국 평생을 기다려 우리가 낚는 것, 아니 낚고 싶은 것은 보이지 않는 확연함, 그것조차 안개 속에 다시 묻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만들고 있다.

 

소나기 속에서 소나기에 젖지 못했다/외로운 방에서/더구나 외로운 시간을 붙잡지 못했다 <‘비 오는 마을의 오후 1’, 부분, p.17>

 

내 마음에/내가 있으니/되었다 잘 되었다 <‘1주년’, 부분, p.47>

 

나는 이렇게 근지러운 욕망이다 때론 한없이 각혈하던 정신. 몸 벗은 육상과 심상이 서로를 흘기는 날엔 기도도 말고 눈물도 말고. 홀로 잠든 상수리나무를 한 바퀴 돌아 나직이 아주 나직이. 불꺼진 들창 앞 휘이- 쓸려가는 겨울 시 같이.
<‘겨울 상수리 나무 3’, 부분, p56>

 

종일 마른 가지에 매화를 그렸다. 뭉텅 빠진 기억처럼 깜박이다 꺼지는 낮은 천장 허름한 불빛. 살긴 내가 살아왔는데 자꾸만 낯설다 이 삶이. <‘더딘 겨울 저녁’, 부분, p.77>

 

그의 시집 어느 곳을 펴보아도 처절한 자기성찰과 경구와도 같은 그의 깨달음이 도처에 널려있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삶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시가, 문학이 추구하는 바일 것이다. 그가 맑고 깨끗한 눈으로 투영하여 바라본 고통과 절망에 가득한 삶은 그러나, ‘삶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깨달음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들여다보며 찾아낸 대답이 지금까지 그의 시의 성과겠지만, 김 시인의 삶에 대한 질문을 천착하는 이러한 작업이 계속되어 앞으로 문학적으로 더 큰 성취가 있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김준태 시인의 시집 ‘가스페 블루스’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우리 모두 그의 앞날에 건강과 문운이 함께하기를 빈다. (2019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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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youngjae
김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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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9
2019-10-19
깊고, 맑고, 쓸쓸한 김준태 시인의 시집 ‘가스페 블루스’를 읽고(상)

 

 

 

토론토에서, ‘시6 토론토’의 동인이며 캐나다한인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는, 수남 김준태(樹南 金俊泰) 시인이 두 번째 개인시집 ‘가스페 블루스’를 상재(上梓)했다. 그는 캐나다한인문인협회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해왔으며 시 외의 다른 예술 영역(꽁트, 인터넷, 사진, 미술, 영화 등)에도 관심이 많아, 이들과 시 문학의 연결을 시도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열정적인 시인이자 미래의 기수이다.


시집 ‘가스페 블루스’에는 그 동안 써왔던 시 중에 65편의 시가 실려있다.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토함산, 팔당, 섬진강, 바다 등 한국을 여행하며 쓴 시들, 2부는 스카보로, 댄포스, 몬트리올 등 토론토에서 쓴 시들과 아들, 아내에게 주는 시, 이민 1주년을 맞아 쓴 시, 3부는 자신의 내적 고백과 삶에 대한 사유(思惟)가 담긴 산문시들, 4부는 ‘마을 사람들’처럼 인물 시편 등을 모은 시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사상과 정서의 등가물(等價物)’이라는 저 유명한 T. S. Eliot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란, 묘사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같은 ‘시6?토론토’ 동인으로서 평소 그의 시를 자주 접해왔지만, 새삼 그의 시에 대한 시적 가치와 기대가 깊어진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솔직하고 날카로운 지성으로 분석하고 그 의미를 재발견하여, 단단하고 치밀한 비유와 언어로 표현한 자기성찰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들은, 세상에 대한 방어가 해제된 마음 깊은 곳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떠오르는 진솔한 상태를 고백하고 있다. 그 고백은 우리의 마음에 화살처럼 직접 날아와 닿으며, 깊은 공감과 함께 진한 반향과 감동을 일으킨다. 그의 시적 정서는 매우 주관적이며 쓸쓸한 페이소스를 담고 있으나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맑고 건강하다. 우리 삶의 보잘것없음, 덧없음에 대한 연민이나 슬픔을 넘어 그 슬픔조차 담담히 껴안으려는, 달관(達觀)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그의 시편들처럼 자신의 내면을 처절하리만큼 솔직하게 열어 보이고 맑은 눈으로 들여다보며 반추(反芻)하는 성찰(省察)의 시는 별로 본 적이 없다. 그의 성품만큼이나 솔직담백하고 고뇌에 찬 그의 시들은, 그가 대결하고 천착해야 할 그 자체이다. 이 지상의 끝까지를 달려가 보지만 결국에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쓰러지는 쓸쓸함, 결국 삶은 별것이 아니라는 체념과 깨달음, 그러나 그 안에서 그 삶 자체를 껴안고 용서하고 화해하며 죽음과도 함께하고 모든 것을 넘어서는 처절한 아름다움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쓴 시 ‘펌핑 1’을 읽어보자. 조금 길지만, 이 시만큼 시인의 시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시도 없기에 전문을 인용한다.

 

몸이 가엾어지고 마음에 새싹이 나더군. 주변엔 직선 몇 가닥과 까칠한 곡선 조금이 전부였지만. 그랬네 그 창가에선, 휘장 없는 기억에 마른 연필 끝을 갖다 대면. 꽂아 두고 온 그림자마다 푸시시 몸을 일으키고 나는 또 한 움큼, 시간의 갈기를 거머쥘 수 있었지. 허튼 술잔 같은 거 말고 좁다란 골목길 젖은 연민이나 회한 같은 거 말고. 가끔 꺼내보던 실성한 마음의 틈. 비상과 추락이 함께 쓰러지며 허물던 그 빈방의 육성을 따라. 키모 칵테일을 부었어 침묵으로 무장한 인식의 육질에. 목덜미 긴 오후가 우물쭈물 옷을 벗고 눕기에 아예 속단추를 뜯어버렸지. 돌아가지 말자 다시는 거죽만 남은 울음으로 살지 말자. 보이지 않는 숲속의 바람이 불었어. 온종일 옆구리에선 네모진 펌프가 세차게 울어옛어. 열린 혈관마다 말간 시냇물이 흘러가고 있더군. 끝없이 끝도 없이 쿨-럭 쿨-럭. <‘펌핑 1’ 전문, p.68>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는 시점, 병상에 누워 화학요법 치료제 정맥주사를 맞으며 시인은 죽음 앞에 허약해진 자신의 육체를 돌아본다. 올곧음에 대한 꼿꼿한 마음과 병으로 까칠해진 성격이 전부라고 생각될 때, 체념 속에 움트는 희망을 본다. 마음에 새싹이 돋는 자신을 발견한다. 비상과 추락으로 굴곡진 삶을 돌아보며 그 속의 자기 연민과 회한을 떠나 보내고, 항암치료를 받는 현재로 돌아와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며, 아예 마음의 속 단추를 활짝 열어 죽음을 기꺼이 맞겠다는 열린 마음의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껍질만 남은 울음 같은 삶을 살지 말자고 다짐하자, 숲속의 바람처럼 평온함이 불어오고 혈관으로 시냇물처럼 항암제를 담은 수액이 흘러가는 광경을 담담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렇듯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버랩하며 뛰어넘는 아름다운 관조의 상태, 죽음 앞에선 자신을 바라보는 심경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는 이 시는 그 고백이 너무 아프고 아름답고 절절하여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그의 또 다른 시 ‘겨울 상수리나무 1’을 읽어보자.

 

배가 고프니/어두운 정신에 별이 뜬다./울 곳을 찾지 않고/통곡할 수 있는 마음 벌판,/몇 줄의 겨울 시를 쓰다가/생각한다/나, 살아 무엇을 했나/나, 살아 무엇을 하나/신분의 수직 하강 끝에/헐렁해진 의식의 바지 한 벌./줄여 입고 나선 길이/오늘 따라 멀다./참으로 살아는 보았던가/참으로 사랑은 해봤던가/게으른 휘파람./녹색 지붕 다락방 위로 첫눈 내리고/물을 길 없는 안부./빈방 하나가/소리 없이 겨울을 연다. <‘겨울 상수리나무 1’ 전문, p. 53>


 
우리 이민자들이 외국에 이민 와서 누구나 경험했던 고통과 좌절, 그 속에서 느꼈던 절망과 고독과 페이소스를 이렇게 진솔하게 담아낸 디아스포라의 시는 드물다. ‘배가 고프니/어두운 정신에 별이 뜬다‘는 구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민의 현실 앞에서 오히려 번쩍 정신 차리게 된다는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도 아름답지만 ‘신분의 수직 하강 끝에/헐렁해진 의식의 바지 한 벌./줄여 입고 나선 길’이라는 구절은 새로운 나라에 와서 고국에서의 WHITE CLASS의 신분을 잃고 낮은 BLUE COLOR 계급의 노동을 감내해야만 하는 우리 이민자의 삶의 현실을 극명하게 표현함으로써, 이민자 우리에게 공감되어 진하게 다가와 아프게 박힌다. 


그의 시들은 이렇게 어려운 극한의 삶의 현장에서 고달픈 자신을 돌아다보며 삶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것이 단순한 신세 한탄이나 넋두리, 시니컬한 풍자 또는 자기연민이 아닌 진지한 자기반성이 되어 우리에게 진한 공감을 주는 까닭은,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읊조리면서도 마지막 연에서 보듯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는 넉넉한 마음을 객관적으로 이미지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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