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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삼열 칼럼

Sam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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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삼열 칼럼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과 석좌교수(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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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Yul
노삼열
106854
19834
2023-07-06
Forced Retreat (9)

(지난 호에 이어)

 

나는 강의나 토론 내용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채 흘려 버렸지만, 다양한 의견 나눔이 좋아서 공부하는 날들이 행복했다. 교수들도 진심 어린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낙제과목 없이 진학하는 것이 우리 부부 기도의 한 주제가 되었다.

여름에 직장을 찾아야 내년을 위해 조금이라도 저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민 온지 4년이 지나도록 차가 없었는데, 이젠 중고차라도 한대 구입해야만 했다. 나는 차가 없어서 VW의 Beatle를 갖고 있던 김선배의 차에 동승하여 함께 직장 사냥에 나섰다.

첫날 들린 곳이 선반에서 쇠 파이프를 자르는 작업을 하는 곳인데, 잘린 파이프가 여과없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내는 소음수위가 엄청났다. 그런데 선반마다 일하는 직공들이 여자들이었다.

"When is the first break?"

바로 옆 기계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에게 물었다.

"Me no English."

짧고 빠르게 돌아온 답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명쾌한 답이었다. 언어라는 게, 영어라는 게, 참 웃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선배와 나는 도시 남쪽 끝에 있는 조그마한 조립공장을 찾았다. 내부는 깨끗하고 넓으며 밝아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공장장이라는 자는 크지 않은 키지만 그런대로 다부진 몸을 갖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순진해서 놀려먹기 좋은 그런 친구였다. ITT 회사의 부품들을 받아 조립해 주는 곳이었다. 고속도로의 가로등이 주 품목이었다. 일감이 많지 않아 바쁘지 않았고 모든 조건이 노동직으로는 결핍 없는 곳이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주정부로부터 grant가 나왔다.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딸려있는 mature students에게 주는 그랜트였다. 2학년 등록금 전액과 생활비로 $1200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이것은 내가 1학년을 그런대로 넘겼다는 말이다. 무려 전체 평균 C 학점으로.

그런데 나는 지금도 아내가 애써가며 만든 새우튀김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 해 여름 평생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입했다. 1967년형 멋쟁이 Mercury Cougar 초록색 스포츠 세단이었다.

우리 부부는 UWO 캠퍼스를 사랑했다. 언제인가 National Geography가 아름다운 캠퍼스로 소개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도서관도 훌륭했고 커뮤니티센터의 시설도 많이 이용해서 3살짜리 아들은 이미 수영 수준이 제법이었다. 어찌됐던지 토론토 공장에서 맞은 막다른 골목에서 새삼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바라던 학교로 돌아왔으니 일단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캠퍼스 생활 재미에 그렇게 깊이 빠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아파트에서 만난 한국인 학생 가정들과의 인연이다. 우선 런던한인교회에서 H형을 만나서 처음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성장할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었다. 그는 서울 Y대학의 스승의 막내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 교수님은 소속대학과 전공은 달랐지만 나의 큰 숙부님의 동료였다. 두 분이 모두 유신체제 하에서 강제해직 당하고 김교수는 옥고까지 치렀다.

곧 H의 작은 형 CJ 가정이 UWO 아파트로 입주하여 우리의 이웃이 됐다. 그리고 1년 정도 후 CJ의 처남 T형이 토목공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아파트에 입주했다. 이 3 가정보다 먼저 CC 가정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가정들과 가까이 지나면서 1 cent 짜리 동전을 걸고 카드놀이(porker)를 했는데, 아내들이 여기에 상당한 재미를 붙이게 됐다. 언제부턴가 토요일이면 의례 모이게 됐다. 테이블 위로 오가는 얘기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특히 아내들이 남편과 동등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를 많이 좋아했다.

처음엔 어쩌다 한 가정의 초청에 따라 모였고, 아이들 취침시간이 가까워지면 헤어졌다. 조금씩 빈도가 높아갔고 헤어지는 시간도 늦춰져 자정에 가까워질 때도 있었다. 중간에 막국수 같은 야식도 등장했다. 30세 전후의 식욕은 이를 마다하지 않았고, 급기야 밤샘하고 아침까지 먹고 헤어지기도 했다.

그동안 아이들은 호스트의 침실에서 부모들의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곤 했다. 아이들 역시 형제처럼 가까워져 목욕도 함께했다. 주말이 기다려지고 한 주간의 삶이 즐거운 중, C 가정도 한두 번 참여해 보더니 곧 더 열정적 멤버가 되어버렸다.

이 모임이 오랜 기간(2년 이상) 왕성하게 계속된 이유를 설명하기 쉽지 않다. 나는 무엇보다 상식을 넘어서지 않는 개인들의 성숙한 인품과 유머로 가득한 담화력에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카드게임은 유머를 건드릴 수 있는 꺼리들을 순간순간 제공했다.

사실 아내의 수입에 전폭 의지해야 했던 우리는 entertainment를 위해 따로 경비를 쓸 여유가 전연 없었다. 다른 세 가정은 조교 수당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상당한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 1전짜리 카드게임은 4-5 달러만 투자하면 주말을 즐길 수 있는 기막힌 entertainment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babysitter 값도 아끼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재미있고 많이 웃고 친구들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세월을 보내는 사이 멤버들은 하나씩 예정된 기간 안에 학위를 받고 떠났다. 나만은 남아서 학부 공부를 계속했고, 후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무모한 도전으로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던 나는 이전과는 전연 다른 마당에서 전연 새로운 이민의 과정을 걷고 있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신념을 얻었다. 일을 벌이고 부딪쳐 보면 가늘어도 빚이 보이고, 도움의 손길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손을 잡고 같이 걷다 보면 어느 새 길의 끝자락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확신이 섰다.

물론 그 자태가 화려하거나 자랑스러운 것이 아닐지라도, 지치고 남루한 모습이라도, 완주의 고통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는 시작 전에 이미 완주에 대한 미세한 의혹도 사라지는 자신감 self-esteem과 mastery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psychological resources는 앞으로 내게 부딪혀 올 수많은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에게 모든 기적(?)은 intimate social supports로부터 시작했다. 이민 초 교회와 친척들의 supportive networks로부터 받은 도움이 위험에 처했던 나에게 구명 줄이 되어주었는데, 이제 낯선 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들은 모두 나에게 4-10년 선배들이었다) mutually supportive network을 만들고 큰 은덕을 입게 됐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특이한 life context를 공유하고 있어서 우리 사이의 supports는 그 효능이 매우 높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healthy network 안에서 나는 퍽 강도의 esteem과 mastery를 키워나가게 된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이 모두가 축복이다. 이전까지 나의 이민생활의 키워드가 무모한 도전과 불안과 초조함이었다면, 지금은 자신감과 결과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얻은 self-esteem과 sense of mastery는 오랫동안 나의 새 삶의 키워드가 되었다. 이것은 마치 기적 같은 변화다. 축복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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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Yul
노삼열
106680
19834
2023-06-29
Forced Retreat(8)

 

(지난 호에 이어)

 

우리는 웨스턴온타리오대학(UWO)의 자녀를 둔 부모 학생들을 위한 주택단지에 둥우리를 틀었다. 3층짜리 아파트 건물 4개가 둘러싸고 있어서 중심에 커다란 놀이터가 있고, 그곳에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어머니들이 근처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는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모든 unit이 같은 구조의 2 bedroom 아파트였다. 따라서 더 좋은 곳으로 가려는 경쟁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리고 대학의 직접관리 덕으로 언제나 완벽에 가까운 청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집세도 일반 아파트에 비교되지 않는 정도였으니 우리에게는 축복의 집이었다.

아내는 W 교수의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근무 첫날 W 교수가 실험과정을 시범했고 아내는 전 과정을 한번의 실수도 없이 마쳤다. 교수는 매우 만족스러워했고 아내는 한숨 돌렸다. 감이 좋았다.

W 교수는 전형적 유럽인 타입의 젠틀맨이었다. 그의 부인 캐롤은 명랑한 완벽주의 주부였다. 그들은 우리를 집으로 초대하고 연어 요리를 대접했다. 가득 찬 정성이 눈에 보이는 만찬이었다. Stained glass windows로 비추인 석양 빛이 골동품 가구들과 고풍의 차이나 셋트를 더 값져 보이게 했다.

빅토리아식 고옥에서 받은 이 만찬 하나로 당장 "캐나다인"이 되어버린 기분을 받았다. 그런데 캐나다인이라기 보다는 W 부부는 California 출신 독일계 미국인들이었다. 역시 독일계의 묵직함을 느끼게 해주는 젠틀맨이었고, 부인 캐롤은 이모의 딸,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들이 두 아이와 함께 좁다란 우리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조금 긴장했다. 연어 만찬 초청에 대한 보답으로 초청했지만 처음 겪어보는 외국인 초청이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아내는 새우와 채소 템푸라와 간장 소스를 기본으로 한 닭날개 그리고 김치를 나물과 된장국과 함께 준비했다. 밥도 준비하고 혹시나 해서 디너롤까지 준비했다.

역시 어린 아들은 밥은 피하고 롤에 손이 갔다. 성공이었다. 식사 후 접시마다 음식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리고 이 식탁은 앞으로 우리가 자주 이용하게 되는 레시피가 되었다.

아내는 조금씩 캠퍼스 생활을 익히면서 즐기고 있었다. UWO campus는 마치 잘 가꾸어진 공원과 같았다. 나는 캠퍼스 끝자락에 있던 King's College(KC)에서 첫해를 맞았다.

KC는 가톨릭 교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로써 사회사업학과가 있는 특별한 대학이었다. 그때까지 신학과 사회사업 전공을 마음에서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었던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1학년에서 철학, 종교학, 사회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사업을 택했다. 모든 강의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모두 명강들이었다, 한 과목만 빼고. 우선 한국에서 흔하던 휴강은 없었고, 교과서도 뛰어 넘지 않았다. 오히려 추가 readings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내용도 시험에 포함시킨다고 해서 더욱 힘들었다. 그렇지만 강의와 토론 시간이 재미있었다. 절반 가량은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무엇이 그렇게 좋았던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학부 1년에서 시작했던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왜 M교수가 화내면서 나무랐었는지 이해됐다. 실은 내가 최선을 다 하더라도 매주 읽어야 하는 양을 도저히 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역시 무리였네. 접어야 하나?" 혼자 여러 차례 되물었다.

어찌되었건 이대로 지금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학교생활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기로 마음 먹고, 우선 교수들의 사무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나와 나의 가족을 소개하고, 한국에서의 대학과 내가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동기와 목적 등 잡다한 애기를 길게 늘어 놓았다. 다섯 교수들 중 2분은 60대의 "노교수"였고, 3인은 내 또래였다. 학생들은 나보다 10년은 어렸다.

내친김에 교수들 부부를 새우튀김 식탁에 초청했다. 그리고 나는 동료 학생들 보다 교수들과 대화를 즐겼다. 그들도 자신의 아이들이나 가족생활 애기를 나와 나누었다. 심리학 교수의 아들은 우리 아들과 같은 커뮤니티 축구팀에서 주말마다 같이 운동하고, 때론 내가 그 축구팀 코치를 하기도 했다.

G 신부는 나에게 신학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가족이 있으면 경제적 생활을 가벼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했다. 물론 이 충고는 북미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다. 몇몇 복음주의 거부 목사를 제외한 북미의 신부들과 목사들은 교회에서 주는 stipend(이것은 salary와는 구별된다) 만으로 생활한다.

Dr. G 본인은 기숙사 방 하나를 빌어 살면서 학생들과 같이 식사하셨다. 특이한 분이셨다. 그 이름난(?) 새우튀김 만찬 초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S 교수는 적당한 길이의 백발에 wave를 주어 마치 슈베르트를 닮은 멋쟁이 신사였는데, 언제나 맑은 웃음을 보이며 말씀하셨다. 조근조근 속삭이듯이. 그는 클래스를 몇 그룹으로 나누어 작은 세미나에 초청한다. 미리 준 주제에 대하여 학생들 스스로 토의하도록 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신의 주장과 결론을 써서 paper로 제출한다. 세미나의 발표와 paper를 평가하여 점수를 주는데, 내 기억에 한 학기 최종점수의 30% 정도를 차지했던 것 같다.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그런데 세미나를 본인의 가정집 거실에서 한다. 우선 다과가 조금 있고 매우 낮은 볼륨의 음악을 깐다. 전등은 어둡게 한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 교수는 주제에 대한 배경을 짧게 소개하고 바로 토론이 시작된다. 나는 이 세미나 형식이 좋아서 다음 해 같은 교수의 종교철학을 수강했고, 훗날 같은 방법을 우리 집에서 내가 지도했던 대학생 성경공부 시간에 시도했는데 결과가 놀라웠다.

T 신부는 매우 열정적인 분이어서 토론 시간에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답답한 심정을 외마디 소리로 표현하곤 했다. 예를 들면 한번은 T 교수가 "누구나 죽음을 혼자 마주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어느 누구도 죽음에는 같이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절대자에 대한 신앙과 종교가 시작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신학생 하나가 반대하고 나섰다.

"I'll go with you. We have a prayers' group just for this purpose."

그 학생은 기도회에 나가는데, 그 모임은 숨을 거두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준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도무지 얘기가 진전되지 않았고 교수님은 답답한 나머지 "악-" 소리를 질렀다. 학생들이 다 놀랄 만큼 큰 소리로. 그리고 그는 carpet을 짜는데 꽤 큰 사이즈의 예술품을 만들곤 했다.

정년을 앞둔 H 교수는 사회학 담당교수였는데, 약간 엉터리였다. 미리 알리지 않은 휴강도 몇 차례 있었고, 강의 내용도 충실하지 못했다. 사회사업과 교수는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만 살아 온 Italian New Yorker인데, 교수가 되고 싶어서 50세가 넘어서 UWO까지 왔다. 완전 뉴욕 스타일로, slang도 적당히 섞어 가면서 나름 재미있는 강의를 했다.

이 교수는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과 어울려 학교 앞 "학사주점"을 찾았다. 두 학기를 간신히 넘기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그에게는 런던이 끔찍이도 재미 없었던 것 같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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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Yul
노삼열
106486
19834
2023-06-22
Forced Retreat(7)

 

(지난 호에 이어)

그저 매일 성실히 일하고 신앙을 지키며 자녀와 동생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 외에는 어떤 선택도 없었을 것이고.

나는 10살이 되면서 집을 떠나 숙부들에게 기대여 살았던 적이 있다. 옮겨 다니다 보니 국민(초등)학교도 5곳을 다녀야 했다. 부모의 품을 떠나 산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긴장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래저래 눈치를 보면서 사는 것이다. 때로는 형제들에 비하여 조금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실수를 피하고 항상 모범이 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도덕적 강박증이 자리잡을 수 있다.

이런 아동기 환경 때문일까.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이웃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무게를 털어내지 못한 채 살았다. 쉼도 돌아봄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다. 노란색 경고는 무시하고 빨간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달렸다. 이것을 깨닫고 페이스를 조정한지 얼마 되지 않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통첩이 날아든 거다.

교수들이 가장 희열을 경험하는 순간들은 자신이 쓴 논문이 유명 학술지에 실리고, 다른 학자들이 그것을 읽고 자신의 논문에 인용하는 것을 볼 때다. 이것은 교실이나 세미나 룸에서 직접 전달하는 강의와는 다른 만족감을 준다. 더구나 평소에 내가 영웅처럼 바라보던 학자가 나의 논문을 인용했을 때, 제자가 드디어 스승의 인정을 받는 것 같은 들뜬 기분에 빠진다.

내가 박사학위 과정을 시작하던 그 해는 word processor가 대중화 되기 이전이었다. 컴퓨터의 효능 역시 오늘과 비교되지 못했다. 이런 조건에서 논문 한편을 마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T교수와 나는 매년 계획에 2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물론 나의 계획은 아니다.

매년 여름에 있는 미국 사회학 정기 학술대회(American Sociological Association Annual Conference)에서 2편 이상 발표하고, 거기서 얻은 feedback을 반영해 교정하여 학술지에 투고하는 것을 연례 계획으로 잡고 있었다. 당시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 년 2편의 논문이 나오면 훌륭한 성공 케이스였다.

후에 모든 조건이 좋아지고 학생수도 늘어나면서 이 계획안은 크게 수정됐다. 우선 연례학회 참여하는 수가 늘었다. 미국공중보건학회(American Public Health Association(APHA)와 International Stress Research Conference와 같은 곳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일년 예상 논문 숫자가 두 자리 수에 달했다.

내가 쓴 첫 논문이 발표된 것은 박사학위 과정 4년 차 되는 해였다. 당시 HCRU에 근무 중이었고 나의 활동이 많은 조건하에 얽매여 있어서 논문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중 나는 논문 한편을 혼자 다 마쳤다. T교수에게 넘겨주고, 교수는 수정하여 한 유명 저널에 접수했다. T교수 자신을 lead author로 접수했다.

이 후 나는 박사학위논문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6개월 후 논문의 첫 draft를 (cover to cover) committee에 제출했다. T교수는 사무실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지만 2개월이 지나도록 논문에 대한 말이 없었다. 그래서 공동지도 교수 Dr. B은 이미 읽고 수정해서 나에게 돌려줬다고 흘렸다. Dr. B의 국제적 명성은 T교수가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을 넘어선다. 그리고 2주 후 T교수는 교정할 곳을 지적하여 돌려주었고, 2개월 후 심사에 들어갔다. 나는 논문 준비를 시작한 후 예정했던 대로 12개월 만에 모든 것을 끝냈다.

내가 갑자기 12개월의 deadline을 정하고 스스로 올가미를 씌운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여러 번 되풀이 해 말했듯이 나의 이민생활이 무리한 도전을 계획하고 그것이 지나면 또 더 큰 도전을 시도하는 식의 무리수의 연속이었다. 그런 중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나 보다.

어느 날 아침 샤워 도중에 갑자기 논문 준비가 생각보다 늦춰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늦춰진 이유가 내가 심리적으로 그 과제와 마주하기를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12개월 이내 끝내지 못하면 영영 끝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 스스로 그만큼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피하려면 6개월 안에 논문 첫 draft를 표지에서 표지까지 마쳐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3달은 defense, editing, 그리고 대학원의 절차와 논문 프린트 등으로 틈새 없이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3개월 안에 thesis advisory committee의 수정과 수정에 대한 나의 대응 등 준비과정을 모두 마무리 해야 한다. 급하다.

염려했던 그대로 2개월이 지나도록 내 논문은 책상 위에서 먼지만 collect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B교수 얘기를 흘렸고, 그 효과는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아마 그 때 마치지 못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 아니 두렵다.

두려웠던 그만큼 지금 나에게 학위는 값진 것이다. 그만큼 힘들게 숨가쁘게 치러진 값의 대가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엇보다 너무 긴 세월 동안(10년) 학업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던진 도박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끝내지 못했다면 손실이 학위 하나로 끝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세월이 지날수록 손실에 대한 미련은 줄지 않고 재생되어 돌아왔을 것이 분명하다. 이 후회의 세월은 매우 비관적이고 파괴적일 수도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social support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민 초창기에 좌절에 가까운 곳에서 뜻하지 않았던 분들로부터 사랑의 손길을 느끼며 용기를 얻었던 것처럼, 학위에 대해 cynical 감성에 빠졌을 때 누구보다 나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수긍도 하며 기다려 준 아내의 affective support의 힘은 기적처럼 위대했다. 나의 결정에 대해 이견을 달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 아내는 내가 지쳐있었지만 모든 것을 다 버리지는 않을 것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인내하며 희망을 놓지 않았다.

Affective support는 우선 상대의 결정이나 판단에 토를 달지 않고 수용해 주는 acceptance가 필요하다. 그래야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trust가 필수 조건이다. Trust가 없으면 수용(acceptance)도 희망적 자세(hopefulness)도 가능하지 않고, 인내(endurance)함으로 기다릴 수 없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곧 사랑을 말한다.

이 회고록에 잘 드러나 있듯이, 만 18세에 서울에서 아내를 만난 후, 38세에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20년 동안 몇 차례 다시 태어나는 것과 흡사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내와의 만남 중, 첫 5년 동안에 (서울에서) 나는 상실되어 있었던 정체성 (identity)을 찾았다. 이민의 첫 5년은 나에게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성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10년은 이런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의 과정이었다.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성숙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인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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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5
Forced Retreat(6)

 

(지난 호에 이어)

나의 방문 중 한국은 경제적 급성장의 단맛에 빠져들면서도 극단의 군사정권 독재를 향한 공포와 전쟁의 불안이 엉켜있었던 혼란의 시기였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은 그 혼란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전두환 정권으로 군사독재는 이어졌고 언론과 기업의 강제 통폐합으로 사회는 불안했다. 다시 광주 학살 사건으로 혼란이 연이어 정점을 찍었다.

캐나다 역시 오일 파동과 경제불황을 겪으면서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그사이 이민정책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캐나다는 매년 20만 정도의 새 이민자들을 초청했다. 그만큼 사회적 변화의 속도도 규모도 급 부상했다.

특히 토론토의 피부색은 일년이 바쁘게 변하고 있었다. 1971년 토론토 인구의 96%가 백인 혹은 유럽인들이었는데, 10년 후 10%가 줄었다. 동시에 인도와 주변의 South Asian은 10배, East Asian은 2배 가량 늘었다. 음식과 의상과 미디어에도 서서히 색깔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복합문화정책(multiculturalism)이나 다문화 사회(cultural diversity)란 단어가 흔하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회변화에는 반대가 따르듯이 반이민 정책 혹은 백호주의 감정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사회적 갈등이 완연히 증폭했다. 보수와 진보적 정당들은 더욱 극단적 대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New Democratic Party(NDP)와 Parti Quebecois(PQ)가 득세하는 등 생각하지 못했던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나는 retreat도 reflection의 여유도 없이 전진하려는 조급한 생활을 계속했다. 이방인으로가 아니라 캐나다의 주인으로 자리매김을 위한 도전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이민 1세대의 운명이려니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빨간등 신호도 지나쳐 버리면서. 이번에 내게 내던져진 것은 신호등이 아니라 통보인가? 위험 신호기가 과용으로 고장 나버리고 최후의 통첩이 내동댕이쳐진 것 같다. 그래도 은퇴를 결심한 후 지난 10년간 나에게 전진을 위한 강박이 없었다. 여유있고 balanced life style을 잘 지켜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문제는 1970-2010에 걸친 40년의 행군이 무리였다고 생각된다.

이민 8년만에 연구소 근무를 시작했고, 토론토에서 겪었던 노동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조건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stranger의 신분에서 벗어나 Canadian family의 주인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지시하는 것을 따라야 하는 직원들이나 대학원 학생들의 언행에 묻어있는 차별의식을 발견할 때나, 그런 행동을 나의 보스가 눈감아 주거나 은근히 동조할 때 나는 이방인임을 다시 느끼곤 했다.

나는 오히려 행군의 속도를 끌어 올렸다. Full-time 연구소 근무를 계속하면서, 저녁 식사를 마치면 다시 연구소 사무실을 찾았고 학업을 이어갔다. 인도인 security guard는 새벽마다 만나는 나에게 왜 그렇게 사느냐고 고개를 까닥이며 입술을 쩍쩍이기도 했다. 그렇게 몇 해를 버티고 내 손에 학위를 쥐었다. 그때 돌아보며 그 인도인처럼 물었어야 했나?

"내가 왜 그랬을까?"

"무엇을 위해서?"

연구소장 T 교수가 나의 학위 논문 advisor 였다. 그는 나를 neurotically upwardly mobile Korean 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는 학부 1, 2년 학생인 자신의 아들과 딸, 그리고 아들의 여자친구까지 연구소에 파트타임 자리를 주고 나에게 지도하도록 했다. 그들이 내 지시를 제대로 따를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 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정말 neurotically upwardly oriented 되어있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도전을 이어갔다. 연구소를 떠나 교수직으로 이적했고, 상당한 봉급인상 제의를 받고 타 대학 scout에 응해 이적했고, 3년 후 NIH 후원 연구소 설립에 협력해달라는 제의를 받아 이번에는 오하이오로 옮겼다. 그러나 나에게 제의했던 S 교수가 가정과 건강의 문제로 은퇴를 선언하는 바람에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토론토에서 집을 팔고 미국에 새 집을 짓고 이주한 마당에 매우 난처했다. 마침 토론토 대학에서 endowment 교수 자리가 생겼는데 그 자리에 신청하고 돌아오는 것을 고려해 보라는 연락이 있었고, 결국 나는 2년만에 같은 대학과 병원 연구소에 더 윗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받았다. 5년 사이에 3번 이적하고 두 차례 국경을 넘고 4차례 집을 옮겼다.

왜 이렇게 부산하게 살았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사이에 나의 몸은 몇 차례 노란등 신호를 보냈던 것 같다. 허리를 다쳐서 누워있기도 했고, 거의 매해 겨울에는 심한 flu를 겪었고, 혈당 수가 치솟아 B형 당뇨병 진단도 받았다. 위에 궤양이 보인다고 매년 위시경 테스트를 해보자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비 신청과 연구비 심사위원으로 일은 늘려갔고 연구발표와 특강으로 매년 몇 개월씩 대륙을 넘나드는 여행을 감행했다. 왜 그랬을까?

한인동포 사회에서도 도움요청이 많았다. 캐나다 전역에서 그리고 뉴욕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한인 커뮤니티에서 강연이나 세미나 부탁이 많았다. 그런데 그 바쁜 일정에 지쳐있으면서 왜 커뮤니티의 요구를 사양하거나 거절하지 못했을까?

나는 스스로 이민 1세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규정하고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관념에 묻혀있었던 같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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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Yul
노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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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4
2023-06-08
Forced Retreat(5) -문턱에서 서성이는 이방인

 

(지난 호에 이어)

우리 부부가 이민한 후 2년이 지나지 않아 모친과 동생 부부가 토론토에 왔다. 당시 나는 공장에서 매우 힘든 노동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세대 주택에서 다른 세인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부엌과 욕실과 세탁실은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시간을 나누어 사용했다.

아내가 내가 입고 신는 작업복과 작업화를 세탁실 한 구석에 놓아두곤 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와 동생이 물었다. "세탁실에 먼지가 심한 노동복과 작업화가 있는데 누구거야? 여기 막노동 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인데 고생 많이 하네." 그날 밤 아내는 많이 울었고 나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어머니나 동생은 그것이 나의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그것들을 입고 커다란 점심통을 들고 버스를 타는 나의 모습에서 모든 것을 알게된 어머니와 동생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낙심을 겪었다고 훗날 말했다.

한국에서 spoiled 청년으로 살던 때와 너무나 다른 나의 모습이 모친과 동생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한국에서 책임이나 의무는 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주위에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예를 들면 가까운 친구들 중 ROTC 장교입대 외 일반병으로 입대한 친구가 흔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이런저런 이유로 군복무 의무를 피해갔다. 그런 국민적 의무는 불행한 자들의 몫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꼭 집어 내놓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의식도 없었다. 당연한 것이라도 여겼다.

그때는 자신에 뚜렷한 목표도 없었고 미래를 위한 계획도 없이 지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큰 걱정 없이 그냥 잘 될 것 같은 막연한 생각으로 살았다. 돌아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철부지였다. 이렇게 살던 내가 말로 다하기 힘든 정도의 생활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동생에게 낯설었는지 "엄마 내가 알던 그런 오빠가 아니야. 신경질도 없고 불평도 하지 않고 철저하게 사는 게 완전 딴 사람이야"라고 했다.

 그 시기에 나는 내면에 전연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마치 No Exit의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생존을 위한 지혜를 갈구하는 발가벗겨진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우선 내가 한 성인과 가장이 되기에 얼마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지 자신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주위의 이민자들이 나름 자신의 책임에 대비와 준비가 되어있고 목표와 계획을 갖추고 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실력의 뒷받침이 없는 자존심이란 허구일 뿐이며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동시에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왜 빈곤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의문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나는 모친의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빈곤과 고난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 자신이 No Exit의 막다른 골목 끝에 갇히고 보니 절대빈곤의 실존적 현실은 이념적 표현이 아니라 너무나 처절한 현실이었다.

우선 그들에게 빈곤에서 헤어나기 위한 노력을 할 기회가 많지 않다. 당장 생존을 이어가기 위한 영양가 없는 노력에 소모가 크다. 창조적 아이디어도 없고 후원도 결핍되어 있어 도전적 생각 자체에서 피로를 느낀다. 그저 don't worry, be happy를 노래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어쩌다 부딪쳐 보면 아예 대응이 없거나 "싫으면 말고. 네가 떠나면 돼" 처럼 잔인함으로 되돌아 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같은 경험이 되풀이 되는 동안에 이들에게 헤어나오기 힘든 심리적 현상이 자리잡게 된다. Helplessness syndrome 혹은 무기력감으로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에 대한 포기를 말한다. 이 상태에 빠지면 도전을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비관적이 된다. Helplessness와 hopelessness는 우울증의 증세만이 아니라 근본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이 syndrome에 빠지면 심리적 downward spiral의 길고 깊은 늪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내가 막다른 골목에 갇혀 있을 때 helplessness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행운 때문이었다. 그 중 가장 critical한 것은 지속적 사회적지지(social support)의 힘이었다. 특히 교인들 중심으로 잘 짜여있는 support network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새로운 기회에 대한 정보를 나누어 주었고, 자신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주저하지 않고 나누어 주었다.

때론 information and emotional support만이 아니라 실용적 tangible support 공세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외국에 나오면 모두 애국자가 되고 외국에서 외로우면 누구나 사랑을 배우게 된다고 생각했다.

훗날 내 생애 처음으로 받은 연방정부의 연구비의 중심주제가 한국 이민자들의 우울증 경험과 사회적 지지(experience of depressive symptoms and salience of social support)였다. 당시 대학 신문은 내게 나온 연구비가 우리 대학에서 연방정부 사회인문학 분야 연구위원회(Social Sciences and Humanity Research Council)로부터 받은 연구비 중 가장 큰 액수였다고 보도했다.

Dr. V는 Assistant President of Research였는데 나는 그의 대학원 연구방법론을 수강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미리 전화로 사실을 알려 줬는데 두 가지 면에서 크게 칭찬했다.

 우선 내가 시도한 첫 연구비 신청에서 $1도 깍지 않고 그대로 나온 것이 놀랍다고 했고, 다음으로는 주제가 Mainstream Canadian들에게 전연 "sexy하거나 appealing" 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당하기 쉬운 immigrant and minority mental health에 관한 것이어서 인상적이라고 했다. 교수 식당에서 점심을 사주면서 후원했다.

이 연구를 시작으로 나는 이민자들의 건강과 안녕에 미치는 social support의 영향에 대한 연구를 오랫동안 계속했다. 한번은 한인 이민자들이 이용한 social support 중에서 support 제공자가 한국인인 경우와 비한인인 경우를 비교 분석을 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한국인이 Korean network으로부터 제공받은 support가 그들의 정신건강에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비한인들이 제공한 support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특히 높은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인과 비한국인의 support가 두드러지게 달랐다.

나는 이런 연구 결과를 상황의 동질성에 근거하여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Thoits 교수는 social support가 예방과 치유의 힘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empathy가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우선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과 수혜자가 현재 처하고 있는 상황과 역사적 경험의 내용을 공유하고 있을 때 그들이 나누는 social support의 역할이 상승한다는 주장이다.

언어가 다른 사회에서 인종과 문화적 소수인으로 산다는 그 상황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 이민자들은 이같은 상황을 함께 겪고 있고, 또 같은 역사적 배경과 문화를 나누고 있다는 점이 한인들이 제공하는 사회적 지지가 엄청난 힘을 보일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연구 결과에 근거해 나는 오랫동안 한인 커뮤니티에 social support system과 network을 만들고 후원하는 것을 내 자신의 당연한 의무와 과업으로 알고 지내온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준비되지 않은 이민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뜻밖의 지나친 도움으로 심리적 syndrome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의 이민 스폰서 L 목사님과 가까운 친척들의 협력도 큰 힘이 돼 주었다. 가장 값진 것은 어려운 중에도 아무 불평 없이 나의 판단과 결정을 존중해준 아내의 배려와 사랑이다.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나는 개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풍요로움과 여유 그리고 다른 자들이 견뎌내야 하는 결핍과 구속이 결코 개인만의 능력이나 책임만이 아님을 깨닫게 됐다.

삶의 막다른 No Exit 현장에서. 후에 사회학을 공부하면 내가 거친 그 변화가 바로 C. Wright Mills 교수의 가르침이었음을 알게 됐다. 개인들의 personal troubles를 social problems로 객관화 할 수 있는 sociological imagination이다.

한 이민 커뮤니티가 비교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거나 아니면 빈약한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는가는 운명적 결과가 아니라 의도적 노력에 근거한다고 믿는다. 특히 집단의 형성 초기에 mutually supportive networks를 만드는 것이 critical issue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 개인에게 날아든 마지막 경고장을 열어 이웃과 공유하여 collective wisdom을 자극하는 것도 그 중 일부라고 생각하여 이 담소를 이어가려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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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Yul
노삼열
105942
19834
2023-06-01
Forced Retreat(4) -문턱에서 서성이는 이방인

 

 첫 8년을 지나 한국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한강의 기적이 보여주는 결과를 보면서도, 내가 캐나다 이민을 선호한 까닭은 경제적 풍요함 때문이 아니었다. 아래에서 기술하겠지만 이민생활은 결코 평탄한 것도, 만만한 과제도 아니다. 내가 캐나다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사회정의와 도덕적 성숙과 개인의 삶의 질 때문이었다

토론토에서 우리를 환영해 준 것은 도시를 온통 감싸고 있는 여름철 숲의 기운만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앞마당에 정돈되어 있는 정원들이 너무 좋았다. 햇살이 좋은 오후면 비키니를 입은 여성들이 정원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는 그 평화로운 광경을 훔쳐보며 산책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농담 아니다. 그땐 정말 그랬다. 때론 8등신의 비키니 금발 여인들이 맨발로 걸으며 hello! 하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고 지나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너무 놀랐다.

어쩌다 만나는 이웃들은 newcomer라는 말에 반기며 인사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탁하라고 한다. 뿐만아니라 백화점은 물론 동네 편의점에서도 개인 수표를 써주고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필요하면 물건 값보다 더 큰 액수의 수표를 써주고 현금으로 잔돈을 돌려받기도 했다. 그 후 이런 모습의 community trust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지만 당시 나는 그렇게 아름답고 탄탄한 social capital이 너무 좋았다.

모든 일이 서두르는 일 없이 순서와 예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평상의 여유가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이유없이 긴장하고 염려하거나 책망 받을까 서두르지 않아도 좋은 삶의 페이스와 서로간의 신뢰와 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 부럽고 자랑스러웠고 캐나다 이민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일단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경제적 정착과정은 또 다른 현실이었다. 실제 한국인 이민자들을 포함한 많은 newcomer들은 취업과 경제적 삶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언어가 가장 큰 장애가 된다.

다음은 경험이다. 많은 사람들이 Canadian experience가 있느냐는 물음에 가슴이 막혀 버린다. 지금 캐나다에서 막 시작하는 사람에게 경험이 있을 수 없었고, 그걸 묻는 사람의 얼굴이 답답하게 보이곤 했다. 한국인들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사무직이나 영업부 경력을 갖고 이민했는데, 자신의 경력에 적합한 분야에는 이미 언어 능력에서 점수가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은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노동직을 찾게 된다. 지금 2023년에라도 엔지니어링 취업에서 캐나다 경험 조건을 제거한 것은 잘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첫 취업은 그야말로 rocky road 였다. 시간당 $1.78의 캐나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처음 얻은 일은 먼지가 가득하고 소음이 심한 실내에서 8시간 동안 마스크를 쓴 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에 재료를 끊이지 않게 공급해야 한다. 8시간 근무 중 30분 점심시간과 그 전후로 15분씩 화장실 사용 시간 외에는 기계 주위를 떠나면 안된다. 변소로 달려가야 되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때론 연장 근무 혹은 주말 추가 근무를 강요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매주 근무시간(shift)이 바뀐다. 오전(7am-3pm), 오후 (3-11pm), 밤 (11pm-7am) 이렇게. 그렇다 보니 주말에는 잠 시간 조정에 들어간다. 미리 자두던지 늦추던지 하면서.

회사에서는 최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회유했다. 그리고 휴가비나 의료보험 역시 부실했다. 공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회사 정문 이용을 금했다. 트럭들이 물건을 내리고 싣고 하는 곳으로 들어가 화장실 안에서 출퇴근 카드를 찍으며 드나든다.

수백 명 노동자들이 동시에 좁은 공간을 이용할 수 없어서 부서별로 나누어 점심 (혹은 저녁이나 새벽 참) 시간이 배정되었다. 후에 나는 조합형성의 대화 기회를 미리 막으려는 정책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직을 원했지만 어떤 이들은 공장에서 필요한 기술(기술이란 것도 못 되는 숙련)을 익혀서 조금씩 인상되는 임금에 기대어 여러 해 혹은 수십 년이 넘도록 다니고 있었다.

정착과정의 어려움은 다른 곳에도 도사리고 있었다. 노동 환경이 이러니 노동자들 사이에는 캐나다 태생 백인들이 많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동안에 근무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David이라는 20대 친구가 내가 속한 팀의 supervisor로 승진하여 어느 날부터 넥타이 맨 차림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작업 보고서를 읽고 작성할 능력을 갖춘 9학년 중졸 노동자는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공장에는 대졸의 학력을 지닌 한국인들이 여럿 있었다. 평가에서 중졸 백인 청년에게 밀린 것이다. 언어와 소통의 문제라고는 말했지만 나는 내심 엄연한 인종주의적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내가 알기로는 공장장 역시 능력은 인정 받았지만 국졸이라고 평이 나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후 나는 일이 끝나면서 작성하는 데일리 보고서에 그날에 있었던 사소한 일들까지 가능한 상세히 기입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작성을 위한 연습도 했다. 이처럼 신규 이민자들은 첫 취업 과정에서 언어와 인종차별의 피해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나의 관심은 여전히 경제적 안정보다는 학업에 치우쳐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뚜렷하지 않았다. 우선 캐나다를 선택한 이상 평생을 일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무리가 되더라도 학부 1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지혜로운 투자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보다 솔직히 나는 한국에서 모범생이 아니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내가 좋아했던 영어 수학 기하 같은 과목만 공부했고, 한문 독일어 자연과학 같이 부지런히 외우고 노력해야 하는 과목들은 철저히 피했다. 과락을 받기도 했고. 말하자면 spoiled 철부지였다. 대학시절에는 아내와의 연애에 빠져 있어서 공부를 소홀했었다.

결국 과거의 죗값을 치르는 마음으로 학부 1년에 입학하기로 정했다. 마침 아내가 한 대학에 취업하게 되었고 우리의 계획은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었다.

공장생활에 지쳐있던 나는 곧 사직(?)를 작심하고, 다음 날 아침에 전화로 사의를 전했다. 조금 당황하는 듯한 그는 "다음 주 너를 supervisor로 임명할 텐데…" 내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냐고 물었고. 나는 대학공부를 다시 시작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축하해 주고 행운을 빌어 주었다.

경제적 정착과정이 어려웠던 것처럼 학업의 시작 역시 쉽지 않았다. 같은 대학에 계시던 한국인 M교수는 나에게 호통쳤다. 내가 영어를 얼마나 잘 하길래 건방지게 공학이나 자연과학도 아니고, 문과 공부를 그것도 학부 과정을 시작하냐고 야단이셨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고?

차라리 한 학기 2과목 수강하면 되는 대학원을 할 것이지 5과목씩이나 해야 하는 학부 문과공부는 유학생들에는 지옥같은 길이라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 고생시키고 결국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장담했다.

 L교수는 내가 문과(사회학) 공부를 한다니 양손을 잡고 흔들었다. 당시 몹시 불쾌했었는데, 학부과정을 시작하고 난 후에야 나는 M교수 L교수의 염려가 무리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듯 나의 정착과정은 길고 험하게 이어져 갔다. 훗날의 동료 Beiser 교수가 말 한대로 많은 비유럽계 non-European immigrants and refugees 들은 열린 캐나다의 문턱에서 outsiders or strangers at the gate로 서성이고 있다. 훌쩍 들어서지도 못하고 뒤돌아 떠나지도 못한 채.

어느덧 8년이 지나고 두 개의 학위를 손에 쥐고 첫 한국방문 길에 올랐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몇 사람을 만났다. 대학의 연구소를 방문할 기회도 있었고, 한국에 들어와서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하자는 제의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캐나다를 선택했다.

Stranger로서가 아니라 family member로 환영 받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떨어내지 못한 채, 선택의 여유 없이 내리는 선택이다. 이것은 소수민족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이런 삶의 context는 이민자들에게 묵상reflection을 위한 휴식기간 retreat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지막 빨간등이 켜지고 난 후에야 결과를 알게 되고, 그러면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는데.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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