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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남의 기획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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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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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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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제13회

 

2015-04-02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제13회

 

 

 
8월17일. 토요일. 어제처럼 덥다. 서울.


 오후 8시 30분에 의화공이 나를 방문하다. 그 왕자는 18세의 명랑한 청년이다. 미숙하고 위험한 처지가 그를 조심스럽게 관망하게 만든다. 의화공은 그의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씨를 많이 닮았다. 그는 해외로 나가는 것을 아주 두려워한다. 박영효 내각 때, 그는 일본 특사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박영효의 몰락으로 무산되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공포심때문에 아들에 대한 부성애를 잘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무얼 좀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조선에서 탈출하고 싶어한다. “희망이 없다!”고 모두 웨친다. “자아, 서쪽으로 눈을 돌려라!”란 말이 그들의 입에 달린 슬로건이다.

 

8월18일. 일요일. 시원한 아침-더운 대낮. 서울.


조선 감리교회 예배에 참석하다. 언덕위에 사는 귀부인들과 점심을 같이하다. 호레이스 알렌 박사를 방문하다. 박사가 말하기를 어윤중 같이 강직한 인재가 단지 상감의 엉뚱한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 된 것을 아주 유감스러워한다.


브라운씨와 오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그는 조선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보고 실망한 듯하다. 뒷전에서 음모 꾸미기, 앞에선 썩어빠진 아첨떨기, 급속히 늘어나는 오래된 악습 들이 아무렇지 않게 국가의 재난으로 몰아가고 있다.


민영달을 방문하다. 민씨 문중 에서는 진취적인 사람이다. 그는 내게, 서울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정말 안든다고 말한다. 최근에 민씨들이 범죄와 결탁하는 왕족의 비리가 역겨워 졌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러시아로 여행하는 게 좋겠다고 권하다. 러시아는 조선과 복합적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므로 조선을 위해서도 잘 될 것이다. 시간 문제일 뿐이다. 조선이 위대한 이웃나라의 조건과 의도에 맞는 믿을만한 이웃 친구나라를 갖는다면 조선으로서 아주 잘된 일이다.

 

8월19일. 월요일. 매우 덥다가 시원해진 날씨. 서울.


헨드릭스 감독에게, 조선을 방문하도록 편지 쓰다. 9월 말이나 시월에 방문하면 좋겠다고 말하다. 
의화공이 내게 편지로, 그가 일본 공사로 가는 일이 취소되고 이재순이 자기 대신 가게 되었다고 써보냈다.
사촌 치오의 부인과 ‘다른 여인’ (의화공 수발들어줄 소실-옮긴이)이 18일에 제물포를 떠나 일본에 가다.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소서!

 

8월20일. 화요일. 대낮엔 아주 더운 날씨. 서울.


민영달을 방문하다. 그는 내게 대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온통 옛날처럼 나쁘게만 돌아간다고 말하다. 일본이나 유럽 등의 비싼 국비연수생 25명 중에 민씨가 5명이나 된다고 개탄하다. 상감은 신원을 알 수없는 어릿광대들과 정탐꾼들에 둘러싸여있다고 한탄한다.
콜레라가 서서히 서울에서 물러가는 듯하다.

 

8월21일. 수요일. 새벽에 매우 추운 날씨. 서울.


4000 명의  병사인지 공병인지 그들에게 들어가는 국고가 가슴 속에 기어들어 온 뱀보다 더 빨리 고갈이 되어가고 있다. 정부와 대궐에서는 너무 늦게야 그 사실을 안 듯하다. 그 군인들에게 줄 임금이 바닥난 사실을 늦게야 알아챈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궁궐이 재빠르게 파멸로 치닫는 일을  도와주려는 것 같다. 아울러 일본 대표들은 조선의 제2의 파멸을 기다리며 관망하고 있는 것 같다. 

 

8월28일. 수요일. 해가 나고 구름도 낀 날씨.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궐내에 있었다. 9월 4일 현 조선왕조 건국기념일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


1. 무지막지한 소요와 군중들을 빼면 조선은 할 일이 없는 나라 같다. 그럼에도 경이로운 일은, 그 모든 큰 소요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잠잠해 지는가이다.


2. 대궐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유교의 옛날 관습, 황당함을 되찾는듯 했다. 비록 범위가 줄어들고 변화가 있다 해도.
전하는 미천한 허풍쟁이, 험담꾼, 술수쟁이, 거짓말쟁이들이 그들의 실속 을 성취하려고 상감을 구름 위에 둥둥 태우고 둘러싸고 있다.


3. 이시쓰가(石塚)와 늦도록 담화를 나누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이노우에 공 의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 조선 정부에 고문관으로 강요를 받은 사이토와 시오타루 같은 사람은 그들 업무에 적격이 아니란 것, 그리고 이곳에 주재하는 일본 대표들은 지난 봄에 차관한 300만 불에 대한 그 비참한 입씨름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4. ‘전중이’(田中)란 말은 조선말로 유죄선고를 받은 노동자란 뜻이다. 이 말이 들어 온 경로는 이러하다.14년 전 쯤에, 다나카라고 하는 한 일본인 건설업자가 쿨리 몇명을 데리고 조선에 왔다. 그는 자기 이름을 프린트한 짧은 키모노 일본옷을 입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그 쿨리들을 일본사회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는 일을 시키고,비난과 멸시의 뜻으로 다나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죄선고 받은 노동자 제도가 작년에 도입 되자, 요 몇 해동안 그 이름을 부르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당장에 그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푸른 수의에 검은 띄를 두른 사람들을 향해서.


5. 박영효가 한 때 나를 의심했다는 정보를 듣다. 그가 일본에 목숨을 의탁한 반대파이며  불한당의 한 사람으로 나를 의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쿠자와(게이오대 설립자-옮긴이 )씨와 논쟁을 벌인 다음에야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그의 정신나간 생각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8월31일. 구름 끼고 더운 날씨. 서울.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궐내에서 행사 준비하다. 창고 안에 보관한  사기그릇을 점검하는 일 등등. 그리고 상감께서 2, 3년 전에 세운 외빈 숙소등도 점검하다. 나는 조심해서 다루어도 모두 부서져버리는 비싼 가구들을 보고, 궁궐이 온통 나태하고, 먹고 자고 도적질하는 놈들만 우굴거리는 곳 같아 보였다. 그 악당들의 임무는 창고지키는 일과 뭐 그런 저런 할만한 일들이 있다.  그러나 조심해서 다루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는 대궐을 개혁하기 전엔 이 나라 개혁에 희망이 없다.


 대궐 안에서 다이 장군과 닌스테드 대령에게 음식을 해주는 사람이 한 달에 600불을 받는다고 한다.
 대령이 보고한 바로는 한 달에 300불 받는 대령이 되기보다는, 다이 장군 집의 베란다에 앉아서 일하는 숙수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이학균씨가 웨이터에게 르 젠드르 장군과 손탁 여사를 위해 맥주를 주문했다. 내가 보니(정말 보기만해도 미친 노릇이다), 키가 큰 세명의 남자가 각각 맥주를 한 병씩 들고 온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런데, 이학균의 말이, 박용화가  상감에게 둘도 없는 영향을 주는 측근이라고 한다.  

 

 

 

9월 4일. 수요일.


  지난 며칠 동안 지독하게 쏟아지던 장대비가, 운 좋게도 건국기념 축제가 열린 동안에 멈추었다.여름궁전(경복궁-옮긴이 )을 일주일동안 밝혀 줄 온갖 종류의 낮은 초롱불들을 준비했다.


오후 3시에 전하께서  수완이 좋은 외교관들 에게 알현할 기회를 주셨다. 5시에는 왕비께서도 외국 대표들 부인들과 조선 대신들과 협판들에게도 똑같이 알현을 허락하셨다. 내사랑하는 어여쁜 아내와 아기도  상감님의 큰 은총을 입었다. 전하께서는 우리 딸 로라에게 예쁜 조선 부채를 하나 하사하셨다. 어린 소녀는 상감님과 악수하는 귀한 특권을 기쁘게 누렸다.


오후 8시에 오색 등불과 일본 등, 중국 등, 조선 야등이 휘황한 여름궁전 뜰에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큰 방을 장막을 쳐서 둘로 갈라놓았다. 큰 방은 조선 신사와  외국인 신사들이 차지하고, 나머지 방은 숙녀들이 가득히 들어찼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전하께서 짧은 연설을 하심으로서 모임의 시작을 알렸다. 그런 다음 전하는 손님들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물러나셨다. 중전마마께서도 숙녀 들의 방에서 똑 같이 자리를 비켜주셨다. 사람들이 그 모임을 모두 즐겼다. 조선 사람들은 모두 춤 추고 음악에 따라 노래를 불렀다. 전통 불꽃놀이도 모두 좋아했다. 


신사들이 모인 방 안에서, 나는 전하의 하명을 받고 전하와 대신들을 위해 통역을 했다. 나는 전하가 말씀하시는 진지한 찬양의 메시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외국인들 앞에  통역해드 린 것이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웨베르공사와 씰공사가 나의 성공과 나의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한 일이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해산하다.

 

9월 7일. 토요일. 오전에 비 내리다.


이유와 대책.


1. 김학우가 암살 된 이유.

그는 어름처럼 냉철한 법무대신으로서 대원군의 큰손자인 이준용이 나라의 재산을 착복한것을 조사하게 되었다. 이준용과 공모한 자중에 두 명이 붙잡히자, 이준용이 착복한 사실이 밝혀졌다. 김학우는 당연히 김홍집 총리에게 그 자백내용을 보고했다.김 총리대신은 전하에게 보고 하지않고  대원군에게 먼저 일러 바쳤다. 그 노인은 그날 밤으로 김학우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하영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2. 전하께서 김윤식 전 탁지부 대신을 싫어하시는 이유.  

중국의 원세개 장군은 여러해 전에 무한대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인데. 김윤식이  전하를 해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 그 계획은 실패했지만, 그만큼 원세개의 영향으로 김윤식이 밀려난 것이다.(이하영의 말)


3. 이채연이  전하의 측근이 된 이유.

작년에 일본인들이 서울로 몰려 들어올 때, 이채연이 전하에게 아뢰기를, 그가 엉클 샘(미국인-옮긴이)을 보내서  임금을 구해드리게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그 말같지 않은 작전은 실패했으며, 이채연은 일본인 아래에서는 감당키 어려움을 알았다. 그래서  전하께서 그가 위기를 잘 피하게 하려고 먼 지방  관찰사로 임명해 버리셨다. 위기가 지나자 전하께서 그를 다시 불어들이셨다.


4. 이노우에가 대궐을 손아귀에 넣은 방법.                            

일본정부가 조선에 3백만엔을 꿔 줌으로서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노우에는 이것을 미끼로 조정의 큰 환심을 샀다. 


5. 내가 일본인들을 싫어하는 이유.

조선의 유일한 우방이 되겠다고 표방하면서, 조선에 와 있는 일본 공사와 영사들은 수십년전에  유럽이 일본을 가지고 농락했던 것과 똑같은 치사스런 함정을 파놓고 있다. 일본은  더 치사스럽고 쩨쩨한 방법으로 조금 더 멀리 겨냥할 뿐이다. 서울에서 같은 지역 안에 혼합거주지역법을 만들면서도, 조선인이 일본인들과 휩쓸리는 일은 피하려고 한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인들은 다루기도 힘든 가장 악질적인 인간들이다. 그들의 천박함은 우리를 우방국가로 선전할수록 더 그 천박함이 들어난다. 실천하지 않으면서 그럴듯하게 선전하지만  우리를 더 오래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9월 17일. 화요일 . 아름다운 날씨이다.   


이노우에 백작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기위해 용산에 갔다. 그는 오전 11시 30분에 용산을 떠났다. 그가 조선에 두번 째 방문한 동안 한 일이란, 조각조각 찢어진 오카모도의 옷을 풀로 붙여놓은 일에 비길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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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제12회

2015-03-27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제12회


 


7월23일. 화요일.


새벽 5시. 전하께서 나를 알현하게 해주셨다. 대궐 식구들이 내게 성의껏 대해 준다. 나는 그들을 만나 본게 10년 아니 11년 전이었는데, 다시 한 번 정답게 궐내 어른들을  뵙게 된 것이 행복하다. 
전하께서는 황감하게도 내빈인 이탈리아 왕자 일행이 묵을 장소를 위해 내게 온갖 편의를 다 베푸셨다.
오전 10시. 이상하게 생긴  종친부 건물 안에서 내빈들을 영접하다.   
오후 2시에 이탈리아 공작과 내가 공식 알현하다.
오후 4시부터 5시 30분까지 시내 관광을 한 다음, 7시 30분에 궁궐에서 만찬을 들다. 만찬장에서 소녀들의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
하루 종일 모든 관계자들과 함께 지내다. 공사관의 호레이스 알렌 박사의 친구, 이하영이 내게 친절하게 잘 해준다.

 

7월24일. 수요일.


7시 30분에 일어나다. 9시에 이탈리아 손님 일행을  노들 나루터(현재 한강변-옮긴이)로 모시고 가서 제물포로 가는 배를 타다.
제물포에 오후 4시에 도착하다. 공작과 함께 일행이 크리스토퍼 콜롬보라는 이탈리아 군인에게 인계하다. 거기서 그를 전송하다.

 
‘모리스 꾸랑의 서울의 추억 : 1895년에 왜놈들이 민비 암살을 진행한 거리, 1896년에 주한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꾸랑이 육조거리에서 광화문을 향하여 찍은 전경이다. (‘모리스 꾸랑의 서울의 추억’,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8월 5일. 월요일. 더운 날씨에 햇빛나다. 서울.


일 주일 내내, 밤낮으로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그치고 다시 해가 비추어 기분이 좋다.
이런 일, 저런 일들:


1. 이노우에 공사가 그의 조선 정책에 아주 색다른 계획을 내놓았다.


“내정 불간섭”이 그의 슬로건이다. 어느날 이노우에가 내게 말하기를,  임금을 감싸고 있는 의심의 구름을 헤쳐버리는 가장 최선의 방책을 실천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에 도착하여 임금님과 두 번 회담을 가졌다. 회담 중에 그는 말하기를, 조정에서 신하들을 믿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노우에 공사가 좋은 결과도 없이 언제까지 그의 계획을 끌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조선 왕비, 민 중전이 애국심을 가지고, 덜 이기적이고, 좀 더 자비롭기를 바라지만, 왕비를 설득하는 일에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왕비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남산을 옮기는 일보다 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노우에가 세운 기본적인 목표는 조선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을, 일본이 왕비의 거대한 세력을 꺾어버릴만큼 강해질 때까지, 당분간은 러시아와의 갈등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보는 것 같다. 


2. 탁지부는 언제나 “먹을 게 없다. 그리고 반 쯤은 남아있다.”사이를 오락가락 하더니 이제는 급하게 절망적으로 재정이 바닥이 나고 있다.


일본에서 3백만 불을 차관 했을때 50만 불의 자금을 따로 비축해 놓았다. 그런데 현재 겨우 6만 불 만 남아있다. 그 비축금은 3,500명의 공병을 유지하는 데 다 써버렸다.  군부가 소비하는 푼돈들이 내 마음 속에 온통 허망하게 쓸려나가는 낙엽 같다. 왜 그럴까? 군인들이 하나에서 열 명까지 모두 하는 일 없이 남의 집 식객 노릇이나 하며 소일하는 도적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 무리에 끼여 완전무결하게 쓸데 없는 시간만 허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리석게 써 버릴 돈이면, 국민학교를 전국에 세우고 보급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6세에서 15세 사이의 어린이 교육을 시행하는 것이 우리 조선의 유일한 장래 희망이기 때문이다. 


3. 지난 몇 주 동안에 서울 장안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공포에 떨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의사들을 서울에 초빙하여 건강전문 기관을 만들었다. 이 중요한 기관은 질병 예방과 치료방안에 관한 규칙을 계속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 원칙이나 규칙이 통하지를 않는다. 가공할만한 경찰력으로 무시 당하고 불결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청결대책을 도입할 계획이나 실천을 기대하느니, 스스로 병을 쫓아내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규정으로는 실행불가능한 예를 들어본다: 


 어느날 우리집 하인 하나가 콜레라에 걸려서 내장이 뒤집혔다. 나는 사동을 시켜 가까운 경찰서에 사태를 보고하게 했다. 사동이 가까운 중부서에 갔더니, 그 주재소 에서는 사동을 북부서로 보냈다. 그곳에선 또 번소(종합지서)로 가보라고 했다. 그곳에선 또 그 아이를 중앙 경찰서로 보냈다. 그곳에선 그 아이를 내무부로 뛰어가게 했다. 그곳에선 그 아이를 惠民사 병원으로 보냈다. 사동이 그곳에 도착하자 귀하신 순사 나리가 말하기를, 집에 가서 그 환자의 이름을 적어가지고 오라는 것! 이러니 사람들이 어찌 정부에 대고 욕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4. 조선은 현재 실제로 무법천지이다.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감싸줄 방법이 없다. 존귀하신 서광범 신사는 유난히 깔끔하게(혼자 자부심에 차서) 치장하고 돌아다닌다. 공동체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새 법률을 실시할 생각은 없고,조선의 옛날 법규-악당으로 혹은 방랑자로 쉽게 판정 해버리는-아예 모두 잊어버린 듯하다. 그렇다고 이런 경우에 감히 재판정에 가려고 한다거나 갈 사람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판 비용을 마련할 수도 없고 시간도 없거니와, 뱀같이 지혜로운  불한당을 손에 넣을 인내심도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달팽이들은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을 짜낼 때만 음흉하게 질질 끌려다닌다.  그 어느 누구도 돈을  꿔달라거나, 다른 자와 계약도 못한다. 왜냐하면 후자는 신용이 없기 때문이고, 전자는 그렇게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5. 정직하지 못하고 배은망덕한 조선의 노비, 특히 마부의 이야기는 놀랄만 하다.불성실 함이 전체 계급을 망쳤고, 이 야비하고 가엾은 나라마저 망쳐놓고 있다.


6. 문부대신 이완용은 문부에서 인쇄작업에 바쁘다는 보고가 들어오다. (옛날 조선식 인쇄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내가 학부에 있을 때는 이 가공할만한 음모를  내 직권으로 막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학부는 조선의 조폐공장이 필요한 게 아니라, 더 비싸고 쓸모없는 인쇄기가 필요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7. 우리 사랑하는 아기가 예쁘고 귀엽게 매일 매일, 무럭무럭 자란다. 아기가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내 어여쁜 아내는 걱정스러울만큼 서울의 더위를 잘 이겨내고 있다. 아내의 천성적인 상냥함과 헌신적인 모습은 아내가 이 곳에서 불편해 한다는 사실 마저 잊을 지경이다. (1895년 4월, 마부인이 아기를 데리고 상해에서 서울 전동 시댁에 돌아 오다.-옮긴이) 


8. 결국 일본이 조선을 개혁하려는 일은 실패로 돌아간듯하다. 그 잘못은 조선정부에 있지 일본 측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나귀를 샘가에 끌어올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하진 못한다.(물은 자기가 마셔야한다.)


9. 그렇다고 일본이 조선을 위한 친선관계 유지를 도모하는 일에 흥미를 잃은 것일까? 결코 아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일본은 조선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는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진 않았다.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차관해주는 치욕적인 속임수를 그들 자신이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해야한다. 일본은 이미 시행에 들어갔고, 만사를 일본을 믿게 하면서 그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조선에 큰 상처를 줄것이다.

 

8월11일. 일요일. 서울.   


어젯밤에 전하의 칙령으로 정부가 개각을 했다.


군부 안경수, 경무사 이윤용, 탁지 심상훈, 군부 협판 권재형, 내각 비서 이성렬,  탁지 협판 이정환.
 개각은 잘 된일이라고 해야 되겠지. 조선 조정의 개각이 자주 바뀌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슬픈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제 조정은 개각할 힘도 전진할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사물의 질서는 결국 돌고 도는 법. 이 내각은 또 언제 다시  바뀔 것인가? 


박영효가 실각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그가 자신의 편견을 버리지 못한 데 있다. 그는 의구심을 타고 났고, 완고함 마저 타고났다. 냉정한 마음가짐도 그의 유약한 다른 성격일 것이다. 그의 몇 안되는 진정한 친구에 대한 태도(아니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는 섬찟하리만치 차갑다. 그는 내가 그에게 거역 한다고 생각하며 나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애국심은 그를 회복하게 만드는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8월16일. 금요일. 서울.


샤로 보 신부와 불어공부를 시작하다. 조선 정부의 여건들이 매일 불만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왕당파 손에 약속된 권력들, 모든 중요 기관의 기둥을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를 털어내어 왕당파를 치장시키는 재주를 가진자들로 채우고 있다. 이 야비한 나라에서 도덕심, 정신력, 정치적인 부패가 바닥에 깔려 있듯이, 길거리나 지저분한 오두막 집들, 점점 부패해가는 관리들, 무시당하며 사는 사람들로 넘쳐나지않을 수 없다. 문자 그대로 점점 더 볼상사납고, 점점 더 비뚤어져 갈 수 밖에 없구나.


조선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점점 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러나 더 슬픈 일은 조선의 재건은 가까운 장래엔 전혀 희망이 없 다는 점이다.


르 젠더 장군과 다이 장군이라는 두 쓸모 없는 미국인 장군이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이  많은 월급을 받는데는 그들 자신도 놀라고 있다. 조선은 악당들이라도 해외로 수출하지 않는 한 회복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김윤식 외부대신은 유식하고 친절한 노인이시다. 하지만, 다른 사람 말에 잘 넘어간다. 그의 개인 비서인 육종윤이 그의 코를 꿰어 끌고 다니는 간사스런 자이다. 나는 그 자를 아주 경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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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11)

2015-03-20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11)

 

 

3월19일. 화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10 개 부처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도 할 일이 없다. 農部만 해도 3명이면 족한데 지금 30명이 넘게 있다. 學部에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에, 한 일본인 방문객이 내게 말하기를, 자기는 그 웅대한 대궐을 구경하러 온 그 많은사람들이 그렇게 가난에 찌들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한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인과응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여쁜 나의 보배, 내 아내에게 편지 쓰다. 존경하는 리쳐드슨 선생에게도.
자애 깊으신 내 어머님이 독감에 걸리셔서 몹시 앓고 계시다.


3월20일. 수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오후 5시에, 배재중학교에서 미국의 교육제도와 조선 교육제도의 결점에 대해 강연하다.
내 연설이 끝나자, 우범선이 내게 말하기를, 그런 연설하는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내가 외국인의 보호 아래에 있는 개인의 안전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교육과 정보는 개혁의 뿌리가 제정될 때 결국 가지와 잎사귀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도 다 시간낭비라는 것이다. 그 충고는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다. 내가  절실한 개선책을 순수한 열망으로 말한 것인데, 이기적인 동기를 제언한 것처럼 책망하다니. 우범선은 분명히 교육보다는 법률제정 쪽이 맞는 것 같다.


김노완이 내게 정보를 주다.


1. 무예청은 지금  임금님 의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다.
2. 유길준은 교활하고 위험한 인물이다. 그는 나를 상품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3. 상감께서 일본사람을 내보내고, 영어와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으로 바꾸려고 하신다. 그러나 미국대표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공화국은 일본과의 전쟁에 휩쓸리거나 영향을 받지않을 것이며, 조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3월31일. 바람이 불지만 햇빛이 좋은 날씨. 서울.


1. 지난 1주일 동안 감기를 앓고 누워 지내다.
2. 24일에 영 알렌 박사와 캔들러 박사와 맥도날 형제로부터 편지를 받다. 나의 어여쁜 아내는 소식도 없다.
3. 차관 계획이 3백만원으로 비참하게 책정되다. 반은 은화로, 반은 지폐로 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의 왜놈들은 비열하기 짝이 없다. 이곳에 주재하는 일본대표들은 조선이 얼마나 희망도 없고 도움도 제대로 받을 줄 모르는 나라인가를 실감하기에, 흔들어 털어내기 작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미국한테는 그런 치사스런 차관을 한다고 말할 면목은 없을 것이다.
4. 며칠 전에 탁지부독판(재무 대신 역자주)에게 편지를 내다.
상인들과 기능공들에게 휘둘리지 않아야 할 중대한 이유를 제안하고, 쓸데없이 비싼 임금만 축내는 관리들 수를 줄이도록 건의하다.
5. 어제 작은 아버님(윤영렬)이 강계부사로 요직에 발령나시다.
6. 27일에 캔들러 박사에게 편지 쓰다. 


(4,5,6월 일기 없음)


 

 


1895년   7월 7일. 일요일. 서울.


아침 5시. 박영효씨와 이규완, 신응희 체포 령이 내렸는데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깨어 일어나다. 안경수가 경무사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길준이 내게 어제 밤에 심각하게 문제가 된 궁내 포고문을 보내 소식을 확인해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박영효가 다시 충성함으로서 자신이 지은죄를 속죄하기를 바라며 사면해 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배은망덕하게도 음모에 가담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판부에 그를 계속 추적할 것을 명하노라. 그리고 그의 안전을 보장하며 동행자들도 함께 사면의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閏 5월14일)”


 우리는 안전하단 말인가? 박영효, 조선의 전권을 쥐고 있던 그가 어제 밤에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야반도주했다. 그의 앞에서 굽신거리던 사람들의 자비를 바라고.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내 아내 윤 부인과 아기를 커틀러 박사에게 보내서 며칠 지내게 하다. 


 저녁에, 허치슨 씨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지만, 조선에 대한 정치적인 견해는 강직한 프러시안답다. 그는 내게 다른 나라는 말고 러시아를 신뢰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난파선이 된 박영효에 대한 그의 견해는;
박영효가 스기무라 일본 공사 에게 왕비를  제거 하기 위해 50명의 일본 군사를 지원해 달라고 한 것. 러시아 공사의 지휘하에 있는 그 일본인은 감히 그 요청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는 그 일본인이 그 소식을  상감에게 알린 것이다. 러시아가 도와줌으로서 사전에 발각이 된 것이다. 전하는 어제 밤에 바로 포고령을 내리셨다.

 

7월8일. 월요일. 서울.


오늘 아침에 알렌 박사를 방문하다.
그는 박영효의 모의에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음을 말하다. 그러나 알렌은, 그의 죄목을 믿기엔 얼마나 사실과 거리가 먼지 박영효는 몰랐을 거라는 의견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이 박영효를 전적으로 내치려는 것 같다. 그리고 러시아 공사도 그를 좋아하지 않음으로 박에게서 더 이상 다른 동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문과 생각들의 난무 속에서 전체적인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있는 사실은, 박영효의 몰락에 왕비가 재치있게 손을 쓴 일이다. 왕비는 박영효를 대원군과 한 통속으로 몰아넣었다. 왕비는 또 그를 김홍집과 그 일당에게 보내서 이용한 것이다. 결국 김홍집이 박영효와 한 통속이 되게 만들었다.
파멸에 이르게 될 다음 타자는 누구일까?


조선 사람들은 누구나 반상과 나이를 막론하고 박영효의 몰락을 즐겁게 관망하려는 듯이 보인다. 피로 물든 윤오월 14일 밤은 불행한 사건의 조짐이 되기에 충분하다.

 

7월12일. 금요일. 서울.


오늘 오후에, 나는 외부 협판으로 전직 발령이 나다. 내마음 같아서는 학부에 계속 남아 있기를 바랬는데도 말이다.

 

7월16일. 화요일. 서울.


오후 2시에 임명장을 받으러 입궐하다.


1. 사람들은 이노우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가 앞서 펴낸 정책을 보면, 아직까지 그가 뭔가를 완수해놓은 건 아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배타적인 정책을 따르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하와 왕당파를 몰아냄으로서 러시아에 가까와지게 만들 것이다.


2. 일본과 러시아가 진정으로 조선에 좋은 역할을 하는 국가라면, 그들은 그들의 특권을 활용하여  임금을 지켜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각료들이 그들의 노선을 잘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3. 외국 대표들 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연합정신이 절대로 필요한 때이다. 대궐과 외국공관 사이에서 악마 같은 술책을 부리며 비열한 상거래를 하는 화적떼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도 시급한 일이다.


4. 러시아 공사가 말하기를 왕비가 졸라대고, 김홍집이 졸라대고, 대원군도 지원해달라고 졸라댄다는 것.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나?
옛날에 결심한 대로 침묵,  신중함, 확고한 태도를 지킬 일 밖에 없을 것같다.


5. 나의 갓 테가 6.3 센티미터 폭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갓 테두리의 반 이다. 군부 대신 신기선이 내게 그런 갓을 쓰고 다니는 것은 협판 격에 맞지않는다고  나무란다.


6.  당신의 속 좁은 마음자리 칫수나 따져서 말하시오. 박영효의 속 좁은 처신에 대하여 수군거리다 등등.
이제  박영효는 가 버렸다. 조선 정부 안에서 인생의 태양 같이 빛나던 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7. 사사키라는 일본 사람이 조선사람과 대화한 이야기를 쓴 것을 보았다. 그 조선사람 말이, 박영효는 음모에 말려들었다는 것. 조선사람이 이 멋진 연극 내용을 상감께 알린 것. 그래서 박영효에게 벼락이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도 안전하다고 할 수가 없겠구나.


7월19일. 금요일. 좋은 날씨. 서울.


오전 일찍 제물포에 공식 방문하게 되다.
이탈리아 왕의 조카인 아메데 공작을 맞으러 나가는 전혀 달갑지 않은  출장길이다. 덥고, 먼지 투성이에, 느리기 짝이 없는 행보.

 

7월22일. 월요일.


오후 2시에 이탈리아 왕자와 그의 일행을 모시고, 이런 경우에 전세 내는 기선을 타고 돌아오다. 강물 따라 기선 여행을 하니 기분이 참 좋다.


오후 8시에 용산에 내렸다. 가마와 조랑말들과 노비들, ‘지게꾼’들, 경찰과 군인들이 정신없이 법석 대다. 이른바 안내를 맡은 사람은 안내만 하면 된다. 나는 군중들 틈에서 수하물을 잃어버리는 등 혼란스런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남대문에 들어서자 손님들이 체류할 장소 준비가 안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영국 공사관으로 손님들을 안내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 창피하고 화가 나서 아메데 공작과 일행을 쳐다볼 ‘낯’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나는 그 일행들을 공사관 안으로 떼밀어 넣다시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사관 안에 들어서자 실망하고 지쳐버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김윤식 대신을 만나러 들어갔다.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다.그는 나를 데리고 궁궐로  가서 손님들이 내일 묵으실 수있는 숙박시설이 있는지 보러갔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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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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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3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10 )

 

2015-03-13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10 )

 

 

3월7일. 목요일. 구름 낀 날씨. 밤에는 폭우가 쏟아지다. 서울. 


(지난 호에 이어)
오늘 아침에, 동학군을 진압하러 나갔던 일본 관리들이 전투 결과를 적은 보고서를 조정에 제출하다. 군부 대신 조씨는 그 보고서에 별로 관심을 두지않는 것 같다.


알렌 박사가 내게 아직은 상해에 가지말라고 충고해주다. 지금 상황에 조정 관리 규정이 바뀌는 시기에 서울을 떠나면, 새로 임명된 나의 입장에 좋지않은 영향을 주리라는 것이다. 내가 상해로 갈 계획을 다른 날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상해에 있는 나의 보배, 내 아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여지는 듯 하구나.  


 사람들은 주인이 여러해 동안 모질게 부려 온 하인들을 노비해방시킨 법률에 찬성하고 있다. 


어느듯 조선의 계사년(癸巳年)도 저물고, 갑오년(甲午年)을 점치는 화투놀이를 한다. 화투놀이꾼들은 대대층층기치갑오 (대대層層旗幟甲午)라고 서로 불러준다. 해석하면, 갑오년에 전쟁과 방불한 작전을 연속해서 증언하게 된다는 점괘가 나온 것을 말한다.

 

 

 


나는 길 거리에서 술주정뱅이들을 많이 본다. 서울에서 3주 동안에 본 주정뱅이가 상해에서 5년 동안 만난 주정뱅이 수보다 더 많다. 

 

3월9일. 토요일.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씨. 서울.


길을 걸어다니기 힘들게 질척거린다. 어제 외삼촌 이건혁씨가  청국 산 조랑말을 끌고 오셨다. 말에 얹을 안장을 사러 일본  정착촌에 가다. 신나게 타고 돌아다녔으나, 아버님에게 버선을 더럽혔다고  따끔하게 꾸중만 듣다.


오후에 총리 비서실에서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다. 5명의 젊은여인 들이 나와서 노래하고 기악을 연주하기도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일들엔 도저히 흥미가 일지않는다.


1. 조선 여성의 한복은 일본 옷 같이 우아한 데가 없다. 그러나 청국 옷에서 보여주는 유치하게 화려한 것과는 다르게 의젓해 보이긴 한다.

2. 아마도 조선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담배를 많이 피우는  백성임에 틀림이 없다. 여인들이 유행과 관계없이, 시도 때도 없이 피워댄다. 잎담배, 줄담배, 곰방대, 큰 파이프 담배 등을 천연스럽게 잘도 피워댄다.

3. 노래하고, 춤 추고, 술을 마시고, 먹기도 하다가, 손님들 앞에서 요강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민족은 세상에 아무 데도 없을 것이다.


4. 노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방안엔 담배연기가 끊임없이 자욱하다.


5. 조선 사람들은 술을 지저분하게 마신다. 아무리 큰 잔이라도 술통이 바닥 날 때까지 일어서지 않는다. 먹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6. 조선 음악은 청국이나 일본 보다 데테르 (Detter)에 가까운 소리를 내어 곤혹스럽게 만든다. 한 소녀가 조선춤을 추면서 아름다운 발을 자랑스럽게 살짝 내미는 모습이 귀엽다.  

 

 

 

3월10일. 일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진흙, 진흙, 진흙투성이다. 오전 10시에 스크랜튼 박사와 함께 상동교회에 갔다. 내가 회중 설교를 하다. 스크랜튼 박사는 6명의 어른과 한 여성에게 세례를 주었다.


스크랜튼 박사 댁에서 점심을 들었다. 스크랜튼 박사의 어머니와 부인은 어디를 가나 똑 같이 훌륭한 선교부를 만든다. 스크랜튼 박사에겐 아주 예쁜 딸들이 있다.  조선 사람들이 ‘노마님’이라고 부르는 , 스크랜튼 박사의 어머니는 여학교(이화 학당 역자주)도 세웠다. 박영효는 이들의 교육제도를 신뢰하여 그의 어린 딸을 스크랜튼 학교에 보낸다. 박영효는 참 지각있는 일을 한 셈이다.

 

3월11일. 월요일. 구름이 덮인 날. 이른 아침에눈이오고, 밤은 아름다웠다. 서울,


조선달력으로, 오늘이 어여쁘고 사랑스런 우리 보배와 지난 해에 결혼한 날이다. 아내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오직 아내의 사진을 내 가슴에 꼭 대고 잠드는 수 밖에 없었다. 아내도 나를 생각해 줄까? 하느님께서 아내와 늘 함께 하시고 우리가 곧 만날 수 있게 은총을 내리소서.


정부 고문관 이시스까 (石塚)와 오랫동안 이야기 나누다. 그는 잘 생긴 젊은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조선 관리들이 교활한  권모술수를 부리는 것을 불평하다.


이달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원하게 목욕하다.


오늘 오후에 어여쁜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리쳐드슨 선생에게, 도쿄에 있는 사촌 동생 치오에게, 그리고 상해의 MN에 편지를 쓰다. 아내에게는 어머님의 사진 한 장을 보내다.
다음 이야기는 청국인들이 아산에서 행패를 부린 이야기이다.


삼촌(윤치소)와 관련된 이야기;


예(葉)장군과 세(攝)장군 휘하의 청국 군인들이 동학당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포악한 행위를 저질렀다. 게다가, 약탈과 겁탈을 일삼는  행패마저 저지르고는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시치미 떼고 있었다.


그  청국군 중의 한명이 참외밭에 들어가 잘 익은 참외만 따는 게 아니라 익었건 안익었건 몽땅 서리해갔다. 단지 장난인 것처럼 하면서 들어가 온 벌판의 포도넝쿨과 뿌리까지 뽑아 버린 최악의 해를 끼친 사건이 벌어졌다.


청국 장군들은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청군이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 왜놈들을 몰아냈는지 그 모험담을 들을 기회를 아깝게도 놓쳤다.


어느날 일본군이 가까이에 왔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청국군 장군들이 조선의 한 관리에게 목숨을 구해주는 대가로 황소 백필을 요구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기르던 가축들이 모두 도망쳐 버려서 조선 관아에서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관리들이 내 작은 아버지께 간청해서 가축들을 받아내려고 내 사촌, 윤치소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고맙게도 삼촌이 70마리의 암소와 황소를 주기로 보증을 해주고 나서야 청군들은 성환으로 떠났다. 만일에 청군들이 대가를 다 받지 못하면 삼촌이 대신 주겠다고 약속한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성환에서  소떼를 부리기도 전에 일본군인들이 처들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문을 듣자마자 그들은  겁에 질려서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자, 청주로  소떼를 몰고 갔다. 그곳에서 충주로 들어섰는데 또 다른 소문이 돌았다. 일본군이 그리로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소떼 임자들은 하나씩 둘씩 청국인 손에 넘기고 도망쳐 버렸다. 내 삼촌은 하는 수없이 50마리 소값을 갚아 주어야만 했다.


조선 조정이 지난 여름에 노비제도를 폐지한다고 공포했을 때 종을 데리고 있던  많은 주인들이 방면 된 종 들에게 참혹하게 모욕을 받았다! 또 어떤 경우엔 자유를 얻은 종들이 전 주인을 모욕하고 두들겨 패거나, 자기 마누라와 딸을 가마에 태우고 옛 주인이 강제로 메고 가게 했다 


3월12일. 화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오늘 조정에서 회의하다. 일본정부가 조선에 3백만 엔을 지폐로 차관 할것이라고 선포해서, 일본 공사와 꽤 까다로운 토론을 벌이다. 어윤중 대신이 강력하게 반대하다. 일본이 진심으로 조선을 도울 생각이라면,  그렇게 형편없는 제안을 해선 안된다.

 

3월14일. 목요일. 눈오고, 바람 불고 춥다. 무릎까지 묻히는 진흙창. 서울.


지독하게 불쾌한 오늘의 날씨는 우리 조선의 참혹한 현실과 딱 들어 맞는다.
아침 일찍 어윤중 대신에게 편지쓰다. 일본 정부의 차관 조건에 대한 의견서다.


1. 차관금은 은화로 받을것, 은화를 지폐로 환산하면 백만엔 만큼 더가치가 있으므로 4백만엔을 받는셈이다. 따라서 지폐로 3백만을 받는다면 백만엔을 적게 받는셈이 된다.


2.일본은 그들의 안정된 금융시장에서 은화가 빠져나가면 신용이 타격을 받을거라고 핑계를 댄다. 만일 금융제도에 영향을 받을 거라면 조선사람들에게는 비관적이며 도움이 되지 않을 3백만엔을 아무런 상환 보증도 없이 꿔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3.조선은 지폐로 3백만엔을 꾸기 보다는 차라리 은화로 2백만엔 만 받아오던지 아니면 백오십만엔 은화와 태환권(국제 금융시장에서 바꿀수 있는 正貨-옮긴이)으로 오십만엔을 받는것이 더 낫겠다.

 

3월19일. 화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조선 사람들은 거의  벼슬을 좋아한다.  벼슬하기를 바라는  이유는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황당하고 이기적이다. 어떤 사람이 어느날 내게 말하는데, “난 지금 30세가 다 되도록 돈도 없고, 벼슬도 없고, 아들조차 없습니다. 난 맨날 무시당하고 어리숙하기만 한데, 나를 제발, ‘주사’(主事)가 되게 해주십시요.”
또 어떤 사람은, 자기는 관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100살이 되셨기 때문이란다.
10 개 부처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도 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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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6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9)

 

2015-03-06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9)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극약 같은 그리고 파멸을 초래하는 이‘행세’가 개인과 국가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본다. 아버님 말씀대로‘행세’를 해야 한다면 정직함, 정의감, 고상한 목표와 이상적인 목적들과는 결별 해야 하리라. 조선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최선의 길을 가려면 나의 아버님은 내가 아버님과 같은 길을 따르기를 바라신다. 내가 만일 아버님이 말씀하시는‘행세’를 하고 싶어한다면, 내 명예와 도덕의 원칙을 모두 내다 버려야 할것이다. ‘행세’는 아버님 말씀대로라면 정직함과 명예심과 보조를 맞추지는 못할테니까. ‘행세’ 함으로서 얻는 것은 오직 영예와 재물 취득일 뿐이다. 오직 천박하고 사악하기만  한 그 성취를 위한 결말은 조정의 관리가 되는 일 외엔 모두 무의미하단 이야기이다…
너무나 고적함을 느끼면서 나는 잠자리에 들어가 아기처럼 소리내어 울었다. 내 아버님은 정말 나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구나.


  

 


 
2월23일. 토요일. 하루종일 눈이 오다. 아주 춥지 않은 날씨. 서울.

 당황하신 상감께서 이 당돌한 대답에 그 말의 뜻을 다른 대신에게 묻지않을 수 없으셨다. 이에 한 노인이 대답하기를,


“전하의 신하는 지금 70세의 노인입니다. 제가 6세 때 처음으로 배운 것은, 부귀와 명예를 위해서는, 세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안가 14, 15세가 되자 집안이 세도를 펴기 시작했습지요. 그리고 십 년이 흘러 처분에 따라서 혹은 어명에 따라서 권력과 금력의 한 가운데 서게 되었습죠. 집안의 광영과 소득은 오직 이 처분에 따라서 였습니다. 이 제도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왔지요. 저는 처분대로 세도의 반열에 그리고 노령에 이르렀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는 세상에서 권력을 차지하는 것외엔 처분대로 성장한 것입니다. 재능과 덕목은 인간의 성쇠에 달린 게 아닙지요. 그러므로 저는 자자신이 스스로 향상을 한다거나 학문으로 직분을 높일 걱정을 한 일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오로지 전하의 충실한 종일 뿐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지금와서 어떤 계획도 배운 적이 없는 개혁을 한다는 것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뿐입니다. 개화에 대한 한 가지 소망은, 장차 저희 자손들에게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때에나 조정과 백성이 개혁을 하도록 할 수있으리라 사료됩니다.”


2.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극약 같은 그리고 파멸을 초래하는 이‘행세’가 개인과 국가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본다. 아버님 말씀대로‘행세’를 해야 한다면 정직함, 정의감, 고상한 목표와 이상적인 목적들과는 결별 해야 하리라. 조선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최선의 길을 가려면 나의 아버님은 내가 아버님과 같은 길을 따르기를 바라신다. 내가 만일 아버님이 말씀하시는‘행세’를 하고 싶어한다면, 내 명예와 도덕의 원칙을 모두 내다 버려야 할것이다. ‘행세’는 아버님 말씀대로라면 정직함과 명예심과 보조를 맞추지는 못할테니까. ‘행세’ 함으로서 얻는 것은 오직 영예와 재물 취득일 뿐이다. 오직 천박하고 사악하기만  한 그 성취를 위한 결말은 조정의 관리가 되는 일 외엔 모두 무의미하단 이야기이다.


3. 박애심, 자기 부정, 정직한 동기, 성실성, 사랑 등  내가 배워 온 숭고한 목표 등에 대해서나, 내가 집을 떠나 있었던 십 년동안 쌓아 올린 공적도 아버지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버지는‘행세’를 잘 하는 법을 배우는 일 외에는 모두 가치가 없음을 강조하실 뿐이다.


너무나 고적함을 느끼면서 나는 잠자리에 들어가 아기처럼 소리내어 울었다. 내 아버님은 정말 나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구나.


4. 아버님은‘풍속’이라는 관습을 내세워 나를 굴레 씌우려고 하신다. 틀림없이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위로 나를 밀어부치실 것이다. 하지만 내 이성과 양심에 따라 더 이상 복종할 수가 없구나.


5. 조선 사람은 누구나 똑똑한 사람이나 능력있는 사람을 쫓아 다닌다. 그러나 조선이 원하는 것은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애국심과 정직성 뿐이다. 조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그동안 낭비한 지옥같은 음모술수 대신에 국가의 복지 방향으로 능력과 활력을 돌린다면, 개혁은 앞으로 큰 성공의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이다.


6. 서광범이 내 작은 아버님께, 미국에서 십년 이상 살았어도, 자기 아버지의 말을  믿지 못 했으리라,고 말했다. 거짓말이 하도 성행하므로 누가 정직한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7. 서울인구 중에 열의 일곱은 식객노릇으로 더부살이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힘께나 쓰는 사람집에는 으례히 게름뱅이 들이 모여들어서 온종일 쓸모없는 소리나 지껄이며 담배 피우고 먹고 자는것이 일이다. 이런자들은 세월이 좋을때는 얻어먹고 입을것 까지 받다가도 주인이 역경에 처하면 잽싸게 떠나버리거나 비난하기가 일쑤이다. 


8. 지각있는 사람은 일본인들이 조정의 관리직을 맡고 오만하게 지시하는 수모를 견디어내는것을 부끄러워 하는것이 당연하다. 조선의 관리들이 백성을 억압해도   하인 처럼 아첨하며 길들여지는 것을 본 왜놈들과 되놈들이 이를 본받아 불쌍한 서민을 억압하려드는 것이다. 개인이건 단체이건 모두 썩어빠진 조선사회 현실에 넌더리가 난다.  

 

2월27일. 수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1. 동학란을 진압하는 관군들이 오히려 무리를 지어 약탈을 일삼다.어느  장터의 장사꾼이 허세를 부리는 관군에게 물었다 “이번에 재미좀(돈) 봤어?”돌아오는 대답은 “그럼 돈 좀 벌었지”또는 “아무것도 못 건졌어” 이 대화는 마치 장사꾼이 멀리 장사하러 갔다와서 하는 내용과 같은 것이다. 이런 사실은 관군들이 합법적으로 도둑질하거나 살인하도록 허가 해준 격이다.


2. 대원군이 빠져들어 꾸미는 잔인한 계획은 상상을 초월한다  
김학우를 살해한 자객이 잡혔다.자객들은 늙은 대원군에게 고용되어 박영효, 서광범,김홍집,김가진을 제거하도록 했는데 불행하게도 김학우가 당한것이다 


3. 아버지는 노비 방면 이나 사회적 신분을 다른 정책과 연계한 대안도 없이 폐지 하는것을 반대하신다. 아버님은 蔚山兵使로승진 하셨고, 나는 政府參議로 발령이 나다.


 

 

3월1일. 금요일. 서울.


 아름다운 날씨지만, 거리엔 물과 눈이 질퍽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다.  상감께서 베푸는 사은식(진급 신고식-옮긴이) 행사에 참석하려고 대궐에 들어가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한 건물안에 들어가 기다리며 시편 23편을 읽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정말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님도 하늘에 계신 주님께 우리 식구가 평화롭게 모여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해 오셨다. 이제 하느님은 우리의 이 요청을 들어주셨다. 더욱이 아버님과 나는 승진까지 되었다. 아버님이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기적이 말할 수 없이 크구나.”하고 감격하신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어여쁜 내 사랑하는 아내와 자매를 그리워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내 어여쁜 보뱃덩이가 내 옆에 없다면 얼마나 불행하겠나. 하지만 언제, 어떻게 아내를 이곳에 데려올 수 있단말인가?


조선에서의 생활은, 이곳에 나와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고장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같이 마음 속에 짜증이 나게 만든다.

 

3월2일. 토요일. 구름 낀 날씨. 서울.


어여쁜 내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다. 귀여운 자매에게서도 왔다. 2월 20일에 부친 편지다.
나 자신을 조선이라는 틀 속에 개혁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상투를 올리는 문제만 해도 내가 작년 3월에 청국에서 겪었던 것처럼 짜증이 난다. 신발은 왜 그리 뻣뻣하고 꼴 불견인지! 한복은 전혀 활동하도록 만든 옷이 아니다. 버선은 흰 색이고, 갓은 아주 뭣같이 묘하게 생겼다. 한복에 얼룩이 지지 않게 하고, 버선을 잘 신으려면 하루종일 온 정신을 옷과 버선에만 신경쓰며 지내야 한다.

 

3월7일. 목요일. 구름 낀 날씨. 밤에는 폭우가 쏟아지다. 서울. 


오늘 아침에, 동학군을 진압하러 나갔던 일본 관리들이 전투 결과를 적은 보고서를 조정에 제출하다. 군부 대신 조씨는 그 보고서에 별로 관심을 두지않는 것 같다.


알렌 박사가 내게 아직은 상해에 가지말라고 충고해주다. 지금 상황에 조정 관리 규정이 바뀌는 시기에 서울을 떠나면, 새로 임명된 나의 입장에 좋지않은 영향을 주리라는 것이다. 내가 상해로 갈 계획을 다른 날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상해에 있는 나의 보배, 내 아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여지는 듯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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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7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8)

2015-02-27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8)

 

(지난 호에 이어)


5. 이노우에 공사와 어제 나눈 대화로 미루어보면, 그는 조희연과 그의 동료들을 김가진이 사사건건이 적대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위의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조선 사람의 특징중의 하나는 물건들을 비싸게 사버린다는 점이다. 꼴사나운 모양새를 한 옷들을 보면 손수건 한 장 넣을 주머니 하나도 달려있지 않았다. 잘 정돈된 집들은 미국의 ‘ 서부의 황야 Wild  West’라는 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집처럼 휑뎅그러니 넓기만 하다. 나는 아직도 보편적인 서울의 큰 집들 보다는 평균치의 미국 오두막집이 훨씬 더 좋다. 내 집은 여자하인, 남자 하인들로 붐빈다. 그 하인들은 혼자 사는 일본인이나 외국인 하인 보다 훨씬 일을 잘 한다. 


정부의 각 부처는 ‘관료’들의 집단이다. 그들은 죽도록 정부의 기계가 막혀 버리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학자들은, 시간을 보내거나 그의 정력을 낭비하면서 아침 8시부터 80권 분량의 책을 들고 큰 거위처럼 어기적거리며 학습한답시고 돌아다닌다.


11시에  감리교 학교 아침 예배시간에 참석하다. 어떤 조선사람이 열 명의 소녀들을 않혀놓고 설교한다.  그의 예화는 너무 허풍스럽다. 그러나 내 조국에서 우리 구세주의 평신도 제자 가운데에 앉아있다는 사실은 여간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없다.


아펜셀러 목사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다. 그에겐 사랑스런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이 있다. 알렌 박사와 한 시간 가량 함께 지내다. 그는 내게 일본이 워싱턴에 있는 조선 공사관을 폐쇄하도록 요청했다는 정보를 준다. 하지만 그 제안은 미국 선교부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오후 3시에 외국인 예배가 있는 교회에 참석하다.
김홍집 총리가 보자고 해서 그를 방문하다. 그는 신구 정당들을 공평하게 이끌기 위해서도 제발 이 내각 안에 직책을 맡아달라고 사정한다.


아버지께서 시골에서 올라오시다. 이렇게 아버지를 다시 만나뵙게 되다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아내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은 것에 실망하신다. 작은 아버님(윤영렬 역자주)도 뵙게 되어 기쁘다.

 

2월18일. 월요일. 서울.


눈과 비가 밤 사이 내리더니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 온 동네가 ‘흰눈 산과 얼음 바다’가 되었다.


오전 11시에 박영효를 방문하다. 그는 내게, 학부에 직책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내가 참의 직을 먼저 받고나면 곧 협판으로 진급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일본을 방문하는 계획서를 만들어 놓았다. 내가 참의가 되려면, 일본의 교육제도를 실습해야만 한다는 것. 그는 말하기를, 유길준이 나를 자기의 당파로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총리가 유길준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상해에 있는 영 알렌 박사와 어여쁜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님이 가족회의를 하신 다음 내가 알게 된 것은,


1. 동학당이 아버지를 괴롭혔는데, 돈을 착취하려는 목적 외엔 아무런  명분 이나 동기가 없었다는 것. 내가 일본어를 전하에게 강요했다는 것이 그들의 큰 구실이었다. 아버지는 산 속으로 도피 하시고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 고통스런 세월을 참고 지내셔야만 했다.


2. 동학 혹은 ‘동방 종교’는 최제우가 시작한지 몇 해 된다. 동학은 북학 혹은 ‘북방 종교’와 분리되고, 남학 혹은 ‘남방 종교’와 불교, 서학 혹은 서양종교 혹은 가톨릭 교회와도 구분이 된다. 동학은 유교와 5개의 항목이 연관이 된다. 불교의 선험적 이론은 도교의 이적과 마법에서, 그리고 가톨릭교에서 하느님, 천주 등의 용어와 연관되어있다. 동학의 이교도적인 양태 속엔 알게 모르게 모하멧교의 강요와 충동적인 실천을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의 종파는 개방된 복수심 속에 억압과 핍박으로 충동을 자극 받는다. 그들은 어디를 가던지 양반에 대항하는 깊은 증오심을 보여왔다. 동학군이 양반을 다루는 잔인한 수법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의 고상한 상류층이 당하던 유혈전쟁을 생각나게 한다.


3. 우리 시골 집과 가족과 마을 전체가 청국인과 일본인과 동학군의 복수전의 갈등사이에서 피해가 없이 지키게 된 것은, 순전히 우리 작은 아버님의 지혜와 작은 아버님이 평소에 평판이 좋았던 덕분이었다.


4. 시골 집 아산과 근방 마을에 청국 병정들이 가장 야만스런 방법으로 살인과 강탈과 겁탈을 일 삼았다고 한다. 

 

2월19일. 화요일. 매섭게 춥다. 굵은 눈발이 오후 내내 쌓이다.


오전에  이노우에 공사를 방문하다. 조정의  관직을 받아 들이라고 말한다. 그 직책의 급여 여부는 중앙정부가  안정된 조직이 되기 전에는  기대할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의심’하는 일은 조정에서 가장 치욕적임을 말하다.

 

2월22일. 금요일. 서울.


매우 춥다. 너무 추워서 일분동안 손을 밖으로 내놓았다가는 동태가 되어버린다. 
오전 10시에 김가진을 방문하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유길준이 이끄는 구당파가 제멋대로 구는 바람에 반대파인 신당파 각료들이 결국  퇴진한 다고 한다. 그러나 이노우에 공사가  중재하여 한 번 더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 회의를 소집하여 두 당파 사이에  새롭게 우정을 다지며 협력 하기로 했다고 한다.


1. 저녁 식사후에 가족회의를 하다.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은 ‘행세(行勢)’하는 법, 혹은 세상에 나가 자수성가하는 기술 등에 관해 원탁 강의를 하시다. 두 분이 쌍포문을 열어서 내게 말씀하시다. 즉, 나의 비현실적인 언사와 미국에서  경험한 가치관은 조선 사회에서는 쓸모가 없는것이므로 내가‘행세’를 제대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두 분의 목표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금언을 들어, 최대한 약삭 빠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말씀을 채우고 계셨다. 내 아버님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비범한 분이다. 그의 예리한 관찰력에 의하면, 강자나 뛰어난 명민성만이 한 인간을 어떤 사회에서나 살아남게 만든다는 것이다.


2. 아버지의 관찰력이 대단하신 한 예를 들어보자. 어느날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시기를, “집을 떠나 내가 능주에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었지. 그곳에 언덕이 하나 있더구나. 언덕위에 서울 집보다 조금 작은 벽이 남아있더라. 그곳에 살던 원주인은 그 벽이 귀한 골동품인것을 모르는 거야. 어떤이들은, 그 벽은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 세운거라고도 하고, 어떤이는 왕씨 왕국 혹은 고려 시대에 요새로 쓰던 성벽이라고도 하는구나.
나는 그 바위 틈새에서 굉장히 많은  깨진 도자기 쪼각을 발견했는데, 도기와 자기로 만든 화병쪼각들이었다.그 쪼각들은 훌륭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지. 연대나 어디서 나온것인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


 하지만 내 생각엔, 그 요새는 어떤 약탈자에게서 뺏은 요새터로  조선 왕조의 창건 이전에 요새화 된 것같았다. 주민들이 그 평야에 다시 정착한다면 쪼각들을 찾아 다시 건축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주민들의 변화가 그 시대 사람들이 사용하던 도구에도 변화를 가져오겠지.”


3. 조선에 관한 모든 것-조정과 백성과 빈약하기 짝이 없는 집들과 헐벗은 산들을 총망라해서 글로 정확하게 남기기엔 너무나 절망이 앞 선다.


4. 작은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동학란이 일어나기 전에 서학 혹은 가톨릭에 반대하는 변란이 먼저 일어났다고 하신다. 충청도에 있는 가톨릭교회 외국인 사제들을 추방하고, 동학란 이전에 몇해동안 억압과 폭력이 횡행 했었다고 하신다.


우범선씨가 오후에 방문하다. 그는 말하기를 유길준은 악당이고 분당질에, 야심가에,이기적이고 질투와 오만의 화신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애퐁자매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2월23일. 토요일. 하루종일 눈이 오다. 아주 춥지 않은 날씨. 서울.


6인치의 눈. 근래에 가장 큰 눈이라고들 한다.
오후에 외부의 이중응 참의가 아버지와 나를 방문하다.


갈등이 생기는 두서없는 이야기들:


1. 오늘 아침에 나는 아버지께, 6법의 예의지방(禮儀之邦)과 행세(行勢)가 조선과 청국을  망쳐 놓았다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내 말을 수긍하시면서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지난 해 7월에 일본공사 오도리가 전하와 조정에 처음 운을 떼며 한 말은 ‘개혁’이었으나, 조정이나 상감은 무관심하게 들어 넘기셨다. 청국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 조선의 장군들이 그들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다. 조정은 왜놈을 겁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아침에 상감이 그의 대신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개혁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대신들은 그 자리에 선 채 무슨 말씀인가 하고 멀둥멀둥 서로 바라보았다. 나이가 많은 정 대감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오, 전하. 무슨 개혁이나 개화를 하라는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저와 전하의 모든 신하들이 전하의 어명을 복종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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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0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7)

2015-02-20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7)

 

1895년 2월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직책


(옮긴이의 주석)
 

유길준: 대신급 관료, 정무 비서관 격으로 연립내각의 실권자, 미국외교관으로 부터 (미국의) 도움을 받고 유학을 하고 왔는데도 배은망덕한 인물로 비난을 받고 있음


박영효: 갑신정변의 주역, 갑오개혁에 사면을 받고 귀국해서 연립내각의 신파 지도자, 내부대신, 인사권을 갖고 있음.


이노우에(井上): 조선공사로 부임한 일본 원로 정치인, 명치유신과 조선책략의 주역


호레이스 N. 알렌 박사: 미국공사관 외교관이며 의료선교사, 제중원 설립, 갑신정변 때 자객의 칼에 맞은 민영익을 치료해준 미국 의사로서, 고종의 신임받음/ 윤치호 일생의 은사인 상해 중서서원의 영 J. 알렌과 구별된다. 


윤참의: 국장급, 교육부 학무국장 격


협판: 차관급


조희연: 군부대신


감리교 학교: 배재학당

 


 


2월14일. 목요일. 좋은 날씨. 서울.


12시 까지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자애 깊으신 어머님은 말씀하실 때마다, 나를 바라보실 때나 나를 만져보실 때나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맘껏 드러내신다. 어머니는 내게 가족간의 불화, 아버지의 소실 때문에 겪는 곤혹스런 일들을 얘기하신다. 그리고 이춘식과 이병휘씨의 불성실한 점을, 김정우씨의 개인적이고 변함 없는 충성심을 이야기 하신다. 김정우씨는 우리 아버님의 좋은 세월이나 어두운 세월에도 변함 없이 곁에 머문 사람이다. 그리고 잔인한 동학 무리들이 아버지를 해치는 정도가 아니라 살해하려고 했을 때, 그 동학군에게 눈물로 모면을 간청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또 말씀 하시기를, 사람들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이야기는 절대 입밖에 내지  말도록 다짐하신다. 나는 어머님께 범사에 감사하셔야 함을 설명해 드렸다. 만일 앞으로 더 높은 직위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내가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어쩔수 없이 오직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게 되리라는 것을 말씀 드렸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내가 존재하는 이유임을 아울러서 말씀드렸다.


오전 11시에 내각의  서기장인 유길준씨가 나를 방문하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구 당파와 신 당파 간에 서로 파멸시키는 정쟁을 막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김홍집 총리대신이 나를 개인 비서로  기용하고 싶어한다고 친밀한듯이 말한다.


오후 1시에 이노우에 백작을 방문하다. 생각했던 대로 그는 매우 오만하다. 내가   조선을 떠나있던 동안 부모님 집안에 일어난 소란을 이야기하자, 그는 박영효와 서광범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무뚝뚝하게 말한다.


“윤 참의는 당신 아버지가 불만이나 불평하는 일에 같이 휩쓸리지 않도록 하시오. 한 노인네의  푸념일 뿐이오.” 이 대목에 와서 그의 목소리가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기어가는 소리를 한다. 그가 소인배가 아니랄까 봐서인가?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해서 박영효와 서광범과 김가진을 들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수치심과 슬픔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치심을 느낀 것은, 상감님과 조정 대신들이 실제로 일본 공사의 손에서 꼭두각시 놀음 밖에 못 하는 것이 수치스럽고, 슬픈 것은, 국가를 선도해야할 대신들이  단합하지 않고 분열되어 가는 위험한 상태가 슬픈 일이다. 


알렌 박사를 방문하여 그에게 내 신상에 관한 일들을 털어놓다. 지성적인 그분은 성심껏 나를 동정해 주었다. 그는 내가 참의 혹은 개인 비서직을 맡는 일은   여건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박영효의 지각 없음을 걱정한다. 즉 박은 지난 여름에 500명의 일본군 병사를 거느리고 고종을 억압할 목적으로 경솔하게 제물포에 갔다는 것, 박영효는 미국공사의 개입으로  그 계획이 무산되자 미국공사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알렌 박사는 유길준의 태도가 변한 것도 말해주다.


“나는 유길준에 반대하는  좋지않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적어도 무슨 일이든 명료하게 처리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에 유길준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미국공사관에 대해 아주 배은망덕하게 말하더라고요. 미국 공사관은 그에게 언제나  초지일관 아첨하는 친구로만 보이는 모양이죠.


나는 조선과 교류하는 일이라면 어떤 경우나 완벽하게 개발할 준비가 되어있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뛰어가고 싶습니다. 신문지상을 통해서라도 말입니다. 내가 이곳에 온지 10년 째인데 개선의 여지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현재 내각이 새로 구성 되었을 때 나는 아주 기뻤어요. 그래서 타운젠드씨에게 그 이야기와 관련해서 내 의견을 써 보냈어요. 그의 회답은, 새 내각이 서로 협력 할 것이냐가 문제란 것입니다. 아니면 그들은 다시 당파로 갈라 서게 된다는 얘기죠.”


아펜셀러 목사와 헐버트 목사를 방문하다. 헐버트 목사는 아주 즐겁게 사업을 운영하는 것 같다.


대원군이 자유당파를 소탕하려고 서울과 제물포에 백 명이 넘는 자객을 배치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고 있다. 온 나라가 의문투성이다. 사람들은 모두 공포분위기를 탐색하려고 들지만,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공포, 의구심, 추측만이 나라 전체를  들끓게 하고 있다. 


김홍집 총리를 방문하다. 그는 매우 사려깊게 나를 대하면서, 자신의 개인 비서가 되어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나는 아직은 아무런 공직을 맡고 싶지 않다고 말해주다.

 

2월15일. 금요일. 오전내내 비 오고, 오후에 눈이 내리다. 서울.


아주 추운 날씨이다. 내 방을 정하다.
나는 언제 쯤, 사랑과 평화가 깃든 가정에서 부모님과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안심하고 기쁘고 복된 생활에 정착하게 될까!

 

2월16일. 토요일. 매섭게 춥지만, 아름다운 날씨. 서울.


미국 공사 씰과 알렌 박사가 방문했다. 신뢰감이 넘치는 분 들이다.
오후 5시에 군부대신 조희연을 방문하다. 그는 연 전에 상해에서 조선사람들이 모두 나를 들짐승 보듯이 피해 다닐 때 내게 15불을 준 사람이다. 오늘 오후에 내가 방문하자  따듯하게 환영해주었다.
그와 함께 허심탄회하게 나눈 대화에서 다음 사실을 알게 되었다.


1. 대원군은, 동학군과 청국군을 동원해서 현 조정을 전복하려고 한 일이 실패하자 울화통이 터질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다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또 다시 악마같은 음모를 꾸미기에 바쁘다.


2. 왕비가  하고자 하는 방법에 관하여-대신들이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게 만드는 기술적인 방법으로 술책을 쓴다. 왕비의 무기는 중상모략이다. 다시 말해서 왕비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동료를 적대자로 만들거나 아니면 왕비에게 온통 헌신하게 만든다. 왕비의 이기적인 결론으로 왕국의 복지에만 총액을 쏟아 붓는 일을 진척시키는 게 일이다. 왕비는 박영효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박영효가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인사들을 신임하도록 했다. 그들은 왕비에 대적해서 ‘신당’을 만든 인사들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사람 중의 한 명을 경무사 직에 올려놓은 것이다. 왕비는 내 아버지가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잘못도 없는데  파직 시켰다.


3. 김가진은 이노우에 공사에게 달갑지 않은 이른바 구당파이다.


4. 박영효는 그의 편협함과 완고함과 억제할 줄 모르는 야심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신망을 잃었다. 그는 완전히 왕비의 손에 잡힌 바 되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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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3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6)

2015-02-13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6)

 

 Praise Him Sun and Moon... and Waters above the Heavens!Psalms148-3/Yunice

 


2월 9일. 토요일. 좋은 날씨. 나가사키, 벨록스 호.

 


기다리는 일도 끝날 날이 있나보다.
드디어 제물포로 가는 기선, 벨록스 호가 나타났다. 오후 1시 30분에 친절한 MN가족들과 로호르에게 작별 인사를 하다. 그의 여동생이 내게 아주 예쁜 돈 지갑을 주었다. 그녀가 오색 비단 조각보로 손수 만든 주머니이다.   다른 사람 들과 마찬가지로   왼손으로는 선물을 건네고 오른 손으로 내게 악수를 하며 배웅해주었다. MN과 곤도씨가 기선을 타는 데까지 배웅해주다.


꼭 십 년 전 오후 2시에, 나는 나가사키를 떠나 상해에 닿았다. 그날 밤은 서늘하고 달 빛이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밤중의 정적 속에 노 젓는 소리만 구슬프게 뱃전을 때렸지. 정다운 벗들을 멀리하고, 내게 정다웠던 사람들과    황망하게 집을 떠난 나는 비감에 젖어있었지. 나는 울고 말았지.


오늘 나는 아주 착잡하게 내 성격 속에 십 년을 두고 엮어낸 빛과 그늘의 세월을 안고 귀향하는 것이다. 나는 중국에, 미국에, 일본에도 친구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애정과 걱정어린 마음으로 내 장래를 주시하고 있다.

그들은 내가 필요할 때 친구가 되어주고 내 성실함을 알아주는 영원히 감사해야할 친구들이다. 오 하느님, 주님께서 선한 길로 예비해 주셨음을 감사 하나이다.


승객을 태우려고 만들었다고 볼 수없는 아주 초라한 벨로스 호가 저녁 6시 30분에 닻을 올렸다.
상해 사투리는, 내가 따라하기엔 어렵지만 아주 매력있게 들린다. 내 사랑하는  아내의 언어 이기에.

 

2월12일. 화요일. 좋은 날씨. 조선 제물표.


배가 어제 밤 11경에 제물포에 닿았다. 그런데 날이 너무 춥고 어두어 해안에 들어서지 못했다. 아침 9시가 되어서야 부두에 닿았다.


10년만에 내 모국 땅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날씨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당연히 나는 행복해야 하고 지금 아주 행복하다. 이곳에서는 내가 어디든지, 언제든지 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쩐담!  지금 처럼 슬픈적은 또 별로 없었거늘. 조선의 막노동꾼 들은 이상하게 만든 흰 옷에 새까맣게  쪄든 옷을 입고 일하고 있고, 중국에선 아주 지저분해 보이던 집들이  조선의 움막같은 시골 초가집과 비교해 보니 오히려 궁성 같구나. 사방에 쌓여있는 쓰레기 썩는 냄새에, 비참하게 가난하고, 천대 받고 사는  무지한 백성들, 보기 흉하게 벌거벗은 산, 무방비 상태의 조선을 잘 보여주는 이 광경들은 조선 사람의 애국심을 병들게 하기에 충분하구나. 절망스런  탄식 말고는 웃음도 나오지 않는구나.


환영하라! 그리스도인이건 다신교도 이건, 조선의 여건을 향상시키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 건 열번이라도 환영하자! 주님은 내가 도움을 구하는 이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가톨릭 교회나 영국성공회 선교부는 깨끗한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소서! 


타운센드 씨를 방문하다. 십 년전에 내가 그와 헤어졌을 때와 다름없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미국인이다. 그의 집에서 점심 대접을 받다. 그가 말하기를, 감자 몇개를 밥상에 올려 놓는 일은 제물포에선 이제 옛날 이야기라는 것이다.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이 이러한 나라에서 살아 가려면 굉장한 참을성이 필요하단 얘기다.  NCDN의 유명한 주재원에게서 배운 것은, 영국교회의 선교방침이다.


제물포에서 유일하게  명랑해 보이는 것은 일본 여성들과 일본 아이들 뿐이다. 
상해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알렌 부인에게, 본넬 교수와 리쳐드슨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제물포에서 가장 좋은 호텔방엔-아마도 조선 전국 어디서나 마찬가지 겠지만-세 겹으로 된것이 있다. 종이와 먼지와 맷트이다. 고약한 냄새가 온 방 안에 풍기고, 가구는 지린내 나는 쩌든 오줌 자국이 그대로 있고, 더러워진 놋그릇이나 나무 판대기를 담배 재털이로 쓰고 있다. 여섯 조각도 더 되는 나무조각들을 붙여서 만든 못 생긴  목침들…


타운센드씨의 소개로 김교삼을 만나다. 조선 가톨릭 신자인데 한 때 알렌의 시종이었던 사람이다. 아주 착실한 조선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지만, 알렌 박사와 타운센드씨의 전적인 신임을 받을 만큼 신실한 사람이다.

 

2월13일. 수요일. 제물포에서 서울로.


어제 밤에 고베야(神戶屋)에서 마에다(前田) 씨와 한 방에서 자다. 
6시 30분에 일어나다. 오전 9시에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는 인력거를 타고 가다. 아름다운 날씨이다. 인력거에서 내려 길을 한참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길은 걷기가 아주 나쁘고, 어떤 길은   막 일꾼 중의 한 사람이 문제가 생겨 걸어가야 할때도 있다. 보통 때도 전형적인 건달임을 증명해야만 조선 사람이 된다는듯이 구는, 조선  막 노동꾼 중의 한 사람 때문이다.


강 가에 집에서 보낸 하인이 나와서 나를 마중하다. 서울 집에 오후 4시에 도착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어머님이 건강하셔서 내가 걱정한 것처럼 늙지도 않으셨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어머니와 나는 몇 분 동안 말 문을 열지 못했다. 다만 서로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말 없는 사랑의 언어를 나눌 뿐이었다. 아버지는 시골 집에 가 계셨다.


어머니는, 작년에 아버지께서 귀양 가는 재판 받으신 이야기와 그 가혹한  과정을 간간히 들려주셨다. 나는 어머니께, 제발 그만 말씀 하시도록 간청했다.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은 끔찍한 이야기들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 7시에 미국 공사관의 비서관인 호레스 알렌 박사를 방문하다. 그는 나를 한 없이 반기며  진심으로 환대한다. 언더우드 박사와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곧  조정의 전직 관리들의 몰염치한 탐욕에 대해 정보를 주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국립병원은 처음부터 장로교 선교부가 책임지고 시작하였으며, 고종께서 연 5천불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셨다는 것. 그런데 그 돈은 한 번도 병원에 들어오지 않았고, 미국공사가 그 일로 전하에게 알현할 때마다, 통역관은 문제가 많은 관리의 횡포가 두려워 감히 사실대로 아뢰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이어서 말하기를, 원세개가 대원군의 손자(이준용 역자주)를 왕위에 옹립하려는 그의 음모에 대해 얘기했다. 그 음모는 민영익에게 발각되었는데, 민영익은 전하에게 그 사실을 말씀드렸고, 미국 공사에게도  통보했다는 것이다.


서광범을 방문하다. 그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면서, 현재 조정에 대해 몇 마디 말을 전해주다. 그의 말은, 내각은 지금 대원군 파와 왕당 파로 갈라져 있다는 것. 대원군 파는 어윤중 탁지, 김윤식 외무, 김홍집 총리이며, 서광범과 박영효는 왕당 파를 이끌고 있다고 한다. 서광범은, 대원군이 지금 자유주의 파 혹은 왕당 파에 대적할 음모를 꾸미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주다. 그리고 유길준은 대원군 파라는 것이다.


박영효씨는 내가 기대한 것만큼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았으나 친절하게 대해 준다. 그는 뭔가 주저하는 듯 하더니, 나를 학무 참의(국장급 역자주)로 임명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조정을 자신의 손 안에 쥐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참의가 된 것이고 그렇게 여기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바랄 게 뭔가! 이것이 남자로서 내리막 길에 있지 않고  출세길에 올랐으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게 아닐까? 적어도 내가 공직에서 모범적인 일을 할 수있다는 가정을 제외하고는 공직에서 더 바라는 건 없다. 그러면 내가 이 직책에서 잘 하려고 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오늘 오후 내내 들은 이야기들은, 결코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볼수 없다. 내가 이곳에 와서 기쁜 일은 오직 사랑하는 어머님과 함께 있는 일 뿐이다.

 

 

1895년과1896년 일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당시의 나이와 상황) 



우범선 38세 (1857-1903) 무관

민비시해 가담자. 일본으로 피신중 고영근에게 피살, 우장춘박사 아버지


이두황 37세 (1858-1916) 무관

                                    
이주회 52 세 (1843-1895) 군부협판

민비시해 조선쪽의 주동자로 사형


金鴻陸  나이 미상: 러시아공사관 통역관                                    

함경도 천민출신, 웨베르공사를 따라와서 10여년을 통역관으로 재직하는동안  매관매직,이권개입, 갈취등으로 미움을 받다. 웨베르가 공사직을 떠날무렵 간계를 써서 외부협판으로 임명되려는것을 윤치호가 막았다. 파면당한 후에 앙갚음으로 임금과 세자를 독살 하려다가 들켜서 참수 당함.(김홍육의 독배사건)

 

                                      대관식 사절단원                                                

 

단장: 특사 민영환 35세 정1품, 해천추범 남김

    
수원: 윤치호 31세 학부협판 종2품


참서관:김득련 46세, 중국어 역관, 문장가, 중국문화예찬자,환구음초 남김 

   
통역관:김도일 우라디보스토크 출신 젊은 통역자, 조선말을 잘 못함


사동: 민영환공의 심부름하는 소년

 

                                    통상교섭 사절단 2진                                            

 

단장:성기운 49세(1847-1924) 대관식 특사와 별도로 파견됨, 통상전문가, 도중에 배멀미로 귀국함, 친일로 전향하고 일본 작위받음.

        

단원: 주석면, 함경도 중인 출신으로 러시아 공사관 통역관, 출발 직전 에  학부참의 로 임명, 귀국후에 지방관찰사, 협판직 에 이르렀음

단원: 민경식, 민영환과 정치성향이 다른 친러진영의 사람

                                     


좌옹 윤치호 연보(年譜)


 
1865년 해평 윤씨(尹氏) 웅렬(雄烈)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에서 출생
1881년(17세 때) 신사 유람단원 어윤중의 수원으로 일본에 가서 동인사에 입학하여 1년간 일본어를 배우고  다시 1883년 1월부터 다섯 달 동안 영어를 배움.
1883년(19세 때) 초대 주한공사 푸트공사의 통역으로 귀국
1884년(20세때) 10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통역직 사임
1885년(21세 때) 상해로 건너가 중서서원에 입학하여 4년간 영어와 수학 등을 배우다.
1887년( 23세 때)세례받다.
1888년 미국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에 입학. 
1891년 에모리(Emory)대학에 입학.
1892년 과 1893년여름방학 동안  조지아와 남부지역을 순회하며 연설.
1893년  에모리대학을 떠나면서 Candler박사에게 선교기금200 불을 맡기다. 
1894년 3월에 상해에서 중국인 馬秀珍과 결혼.
1895년 귀국하여 학부參議
1895년 외부협판(外部協辦)(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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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6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5)

2015-02-06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5)

 

1895년과1896년 일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당시의 나이와 상황)    

 

 


고종 임금 43세(1852-1919)      

                                                 

민비가 시해(1895년10월8일)당한후 친일파들에게 왕궁에 감금. 김홍집 내각은 민비를 폐서인으로 격하시킴.웨베르공사와  언더우드박사 에게 구출요청.(이듬해 이범진이 웨베르공사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금과 세자를 구출함)

 

세자(순종) 21세 (1874-1926) 

 

민비가 시해당한후 임금과 함께 감금상태 (이듬해 러시아공관으로 탈출). 

 

민비(명성황후) 44세 (1851-1895)

 

국정을 주관, 일본과 대치, 일본낭인들에게 시해당함

 

義和公18세 (1877-1955) 

 

강제로 출국, 도쿄에 억류, 패기넘치는 제2왕자, 이강공, 의친왕, 일본의 견제를 받았으나 미국 유학한 후에 독립운동


윤치호 30세 (1865-1945) 

 

외부협판, 춘생문사건으로 언더우드집에 피신중 유길준과 함께 어윤중 수원으로 일본에감. 동인사, 미국공사통역관, 상해중서학원, 미국 밴더빌트,에모리대 수학, 기독교정신의 자유 평등 개화사상가 외부협판을 거쳐 학부협판때  민영환 수원으로 대관식 사절단.독립협회,독립신문, YMCA 총무, 송도학원설립, 애국가 작사, 남감리교 한국에 도입, 에딘버러 선교대회 참석. 105인사건의 주모자로 복역, 60년간의영문일기 남김.

 

윤웅렬 55세 (1840-1911) 

 

무관, 상해 리드선교사집에 피신, 윤치호의 아버지,  1880년 김홍집 수신사를 수행하여 일본 다녀옴, 임오군란때 임금을 보호하여 고종의 신임을 받음. 갑신정변때 군부대신, 유배당함, 관찰사역임. 춘생문사건(국왕구출계획)을 주도하다가 실패하여 상해의  리드선교사 집으로 도피함


삼촌 41세 (1854-1939) 

윤영렬, 무관, 강계부사, 포도대장, 윤보선의 조부

 

이건혁        

윤치호의 이모부, 통천댁, 송도의 유지, 남감리교 선교부지 주선, 윤치호 후원자


윤치오(致旿).26세(1869-1949)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일선박사 아버지, 일본 게이오대 졸업, 의화공 후견인, 대한제국 학무국장, 중앙학교 교장역임, 친일노선, 윤치호와는 불편한 관계


김홍집 53세(1842-1896) 

총리대신, 1880년 수신사로 일본다녀옴, 개화정책. 갑오개혁 주도, 친일노선에 치우침. 민비시해 관련으로 1896년 군중들에게 타살,


유길준 39세 (1856-1914) 

연립내각 서기장, 실권자, 박규수 문하생,1881년 어윤중 수원으로 일본에갔다가 남아서 게이오의숙. 1883년 민영익 수원으로 미국 갔다가 남아서 Governor’s Academy 와 Boston Univ.에서 수학한 최초의 미국유학생, 서유견문기 남김. 개화사상가, 갑오개혁을 주도하고 김홍집연립내각의 실권자로서 친일노선, 민비시해의 배후주모자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1907년 순종황제의 특별사면 받고 귀국한후 흥사단을 조직. 윤치호를 잠재적 경쟁자로 여기며 경계했음


어윤중 47세 (1848-1896) 

탁지부 대신, 1881년 일본 시찰단원, 유길준과 윤치호를 수원으로 데리고 감.김홍집과 더불어 친일진영에 속함. 1895년 여름에 면직되었다가 민비시해 사건 직후 복직. 아관파천후에 고향에서 피살됨


민영환 34세(1861-1905)                                         

고종의 외사촌동생, 민겸호의 아들, 각부대신 역임,개화사상가, 강직한성품. 주미공사로 발령받았으나 민비시해로 무산됨. 이듬해 러시아황제 대관식 사절단에서 윤치호와 갈등. 을사조약을 비관 자결, 충정공 추서

 

민영익 35세(1860-1914) 

상해에 체류, 민비의 친정조카, 민씨가문의 중심인물, 별명 황태자, 1883년 미국 보빙사로 미국에 감, 갑신정변때 자상을 당했으나 알렌박사의 치료를 받음. 민비시해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상해로 떠난후 귀국하지 않았음. 순종황제 비의 친정오빠.


이노우에 59세(1836-1915) 

 

일본공사, 내부대신 역임 일본귀족, 메이지 유신 주역, 對朝鮮 책략가, 이등박문의 선배


미우라 48세(1847-1926) 

일본공사, 민비시해를 주도한 인물, 군인, 일본육사교장 역임. 일본귀족    

 
니오    

탁지부의 일본 재정고문관, 의화공의 해외출장비 지출을 거부하다


알렌 박사 (서울) 37세(1858-1932) 

Horace Newton Allen의사, 1884년에 한국에온 의사이며 선교사, 민영익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고종임금의 신임을 받음, 제중원 설립, 윤치호 후원자, 1905년 외교관직을 끝으로 귀국했음


알렌 박사(상해) 57세 (1836-1907) 

Young John Allen 중서학원 교장, 남감리교 선교부의 상해 중서학원 교장, 윤치호가 평생동안 존경한 선생


본넬 교수     

중서학원 선생, 윤치호에게 세례 베품


로호르    

알렌 선생 후임으로 온 중서학원 선생


Sientsung 24세 (1871-1905) 마부인, 본명 馬秀珍

윤치호 부인, 2남2녀 아들 영선, 광선, 딸 로라,헬렌


Laura 1세(1894-    ) 

鳳姬, 윤치호의 첫딸, 尹愛芳


E-Fong    

Sister, 마부인의 절친한 친구, 韓愛芳  

 
나가미(永見)    

중서학원 일본인 동창생, 나가사끼 거주


袁世凱 36세 (1859-1916) 

위안스카이, 청국 사령관, 임오군란 명목으로  주둔하며 내정간섭, 중화민국 2대 총통


언더우드 박사 36세 (1859-1916) 

Horace Grant Underwood, 1885년에 한국에온 장로교 선교사, 연희전문 설립자, 고종임금과 절친한  관계, 윤치호의 후원자.


언더우드 박사 부인 44세(1851-1921) 

Lillias Horton, 언더우드 보다 8세 연상, 의사, 알렌박사와 동역, 윤치호를 돌봐줌.


Greathouse  

미국인 장군, 법률고문, 내각의 법률고문, 민비시해 사건 담당 특별검사

씰 공사    

주 한 미국 공사, 고종이 구출요청했으나 겁을내며 소극적 이었음. 언더우드와 윤치호의 지탄을 받음. 


웨베르 공사 54세(1841-1910) 

러시아 초대공사, 1885년에 초대 공사로 부임. 각국공관장들의 협의회장, 고종임금이 가장 의지했던 외교관, 고종임금을 러시아공관에서 1년간 보호했다.


李完用 37세(1858-1927) 

학부대신, 미국공사관에 피신중 친미에서 친러로 바꿨다가 친일로 전향한 문신,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을 주도한 사람. 이윤용의 이복동생. 자존심과 우월감이 유난히 강했던 양반, 국왕 구출계획(춘생문 사건)이 실패하자 미국공사관으로 피신


李允用 41세(1854-1939) 

경무사, 미국공사관에 피신중  이완용의 서형, 대원군 서녀와 결혼함,  대원군과는 다른 개화파, 각부 대신과 관찰사를 역임, 이완용과 더불어 친미, 친러, 친일노선을 바꾸며 출세한사람, 일본작위 받음.국왕구출계획(춘생문사건)이 실패하자 미국공사관으로 피신


이범진 43세(1852-1911) 

법무대신,경무사 겸직 광평대군파 왕족 . 각부대신역임 고종임금을 측근에서 보호함. 아관파천 이후 정적들을 과격하게 보복했음. 주미공사와 러시아공사 역임. 한일합방후 독립운동을 지원함. 이위종의 아버지. 1911년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자결. 

   
이하영 37세 (1858-1929) 

대신, 미국공사관에 피신중 청년시절에 동래에서 일본을 왕래하며 장사하던중 알렌박사를 만나 개인 보좌관이 되어 윤치호와 더불어 미국공사관에서 근무하였음. 자수성가한 문신, 친미 개화파에서 후에 친일노선으로 변신. 1904년에 외부대신이 되고 윤치호를 협판으로 영입하였는데 제1차 한일의정서 체결할때 병을 핑게삼아 윤치호가 대신 서명하도록 했다.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종찬장군의 할아버지, 일본작위, 국왕구출계획(춘생문사건)이 실패하자 미국공사관으로 피신   

 
현흥택 

나이 미상, 군인, 미국공관에 피신중 副領, 친위 제1연대장(경호처장), 임금을 최측근에서 경호하던 장교, 1883년 보빙사절단 특사 민영익의 경호원으로 미국에 감. 민비시해때 윤치호를 의심했으나 춘생문 사건을 계기로 친밀해짐,    국왕 구출계획이 실패하자 미국공관으로 피신함, 종로YMCA 회관 신축부지를 기증함, YMCA총무 현동완의 아버지


안경수 41세(1854-1900) 

군부대신, 경무사, 독립협회장 역임, 역모죄로 1900년 사형당함.


민상호 25세 (1870-1933) 

미국공사관에 피신중 민비의 총애 받음.미국유학, 미국주재 공사로 발령받은 민영환의 보좌관으로 미국으로 가려던차에 민비시해로 무산됨


김윤식 60세 (1835-1922) 

외무 대신, 유길준 과 친일진영. 민비 폐서인 조치에 앞장섬.


박영효 34세 (1861-1939) 

일본으로 도피, 철종의 사위,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갑오개혁으로 사면받고 연립내각의 내부대신 재직중에 역모의 혐의 받고 1895년에 일본으로 도피    


서재필 박사31세(1864-1951) 

당시 내각 공보 고문관  Dr. Philip Jaison 으로 개명, 윤치호의 친구, 갑신정변이후 미국시민권취득, 의사, 갑오개혁으로 사면받고 귀국해서, 독립신문, 독립협회 주도 하다가 1898년에 다시 미국으로 간후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함.


서광범 36세 (1859-1897) 

법무대신, 갑신정변의 가담한 개혁정치가, 미국망명중 갑오개혁으로 사면을 받고 귀국해서 연립내각의 법부대신을 하였으나 김홍집,유길준과 대립하다가 1895년에 주미공사로 감. 1897년 미국에서 병사함. 서재필과 친척.


대원군 75세 (1820-1898) 

고종의 아버지, 쇄국 정책, 민비와 갈등, 천주교 탄압, 고종을 폐위시키고 자기의 장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음, 민비시해때 일본군에 이용당함


李載冕(이재면)

50세 (1845-1912) 대원군의 장자 , 흥친왕, 고종의 형


李埈鎔(이준용)

25세 (1870-1917) 이재면의 아들, 대원군의 장손,永宣君, 고종의 정치적 라이벌,고종을 폐위시키고 임금이 되려했던 계획이 발각되어 처벌받음.


이재순 44세 (1851-1904) 

철종의 조카, 예조,형조 판서 역임, 일본 주재 공사, 충생문 사건 가담.


헨드릭 감독  

미국 남감리교 감독, 윤치호의 요청으로 최초로 한국에 온 미국 남 감리교 감독 

           
리드 선교사 46세(1849-1915) 

윤치호의 요청으로 1895년 최초로 한국에 온 남감리교 선교사.  개성에 선교부 설치  

   
김학우(1862-1894) 

무대신 당시 피살, 이재면의 부정을 처리 하려다가 대원군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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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0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4)

2015-01-30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4)


개화의 선각자 윤치호 일기 제4권
1895년 외부협판 윤치호가 쓴 민비시해와 춘생문 사건
역술(譯述) 윤경남 Yunice K. Min (국제펜클럽본부 회원)
yunicemin@gmail.com

 

 

*사진;윤웅렬 장군과 윤치호 부자(1882년)  

 

 

<1895년 1월의 상황: 역자 주>

1.윤웅렬 장군 부자는 10년 만에 사면을 받고 윤치호는 10년간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개화의 꿈을 안고 귀국한다.
2.조선은 갑오개혁을 시도했으나 재정파탄으로 일본으로부터 300만 엔을 차관한다.   
3.동학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일본군은 청국군을 몰아내고 조선에 진주한다.
4.이노우에 공사가 조선정부에 20개 조건을 제시하고, 실질적으로 내정간섭을 시작하다.
5. 상해 남감리교 선교부의 속사정을 기록하다.


 

1월11일. 금요일. 구름이 끼고 아주 추운 날씨. 상해 


북풍이 요 며칠을 두고 불어대어 난로불도 소용없게 만든다. 애퐁 자매의 집에서 몇 시간을 즐겁게 지내다. 아,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사랑하는 아내는 그 자매가 내게는 아무것도 아닌양 터놓고 맡기는구나.


오후 5시에 옌 부인을 방문하다. 옌부인 집을 빌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러 갔다. 시엔숭은 내가 없는 동안 부모와 함께 지내기로 했기 대문이다. 옌부인은 영어를 아주 잘한다. 그녀는 자기 둘째 아들을 내게 인사시킨다. 외국에서 공부 하고 와서 못 쓰게된 중국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다. 나는 미국 남부에만 있었다고 말했더니, 그는  경멸하는 태도로 말하기를. “당신은 뉴욕에 가봤어야 하는데. 남부에서는 뉴욕보다 더 큰 도시가 없지요.”하면서, 난로 앞에 있는 안락의자를 차지하고 앉는다. 그의 발엔 맵씨나는 스립퍼를 꿰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서. 그의 어머니는 내가 샹해 사투리를 못알아 듣는줄 알고 나를 잘 대접하려고 애쓰면서, ‘희망에 부풀어 있는 젊은이’에게 말한다.


“넌 어째 벙어리처럼 거기 앉아 있는게냐? 에미보다 네가 영어를 더 잘 하쟎니. 어서 손님을 즐겁게 해드려야지.”


아들은 아무 말도 안한다. 그 젊은이는 내가 영국이나 뉴욕에 가본 일이 없다고 나를 깔보고 가련하게 여기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도리어 내게는 그가 우습게만 보인다. 그리고 아들이 런던이나 뉴욕에 정말 가 본것으로 알고있는 착한 어머니가 측은해 보인다.


리쳐드씨와 저녁나절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그가 말하기를, “당신 나라의 구호를 ‘전진과 박애정신’으로 하면 어떨까요. 난 중국인의 국민성은 별로에요. 기독교문화에서 좋은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 그네들이 선량해서가 아니라 중국이 외국의 세력에 스스로 대항하기 위해서 라고요.”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머뭇거리더니, 저녁식사로 중국 음식을 함께 먹자고 한다. 음식은 쌀밥에 생선과 야채 한 공기를 중국식으로 요리했다. 그는 깡통에 데운 소흥주를 마셨다. 나는 다루기 힘든 친구와 신경쓰며 밥상에 마주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와 함께 간단한 요리를 대접 받은 것이 더 즐거웠다. 

 

1월12일. 아주 추운 날씨. 이따금 희미하게 햇빛나다. 상해.


미야게(三宅)씨를 방문하다. 대화 중에 그가 내게 물었다. 


“ 청국이 조선을 중국의 일개 주로 포함시켰다면 전쟁이 터졌으리라 생각합니까?”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다시 말해서,  청국이 그렇게 비켜간 것은, 나라의 어둡고 쓸모없는 정책이나 방어할 힘조차 없는 조선의 여건 때문이 아니라, 일본과 다른 세력들과  전쟁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겁니다.


게다가, 아무에게나 감정을 상하지 않고도 침략해서 착복하면 조선반도가 공식적으로 먹혀들어올텐데,  청국이 무엇때문에 아무한테나 감정을 건드리겠습니까?  구걸하는 조선 정부에 돈을 조금 꿔 준후에 관세나 통신기등의 중요한 것을 담보로 잡고  저주받고 운명이 다한 조선의 목을 서서히 그러나 지긋이 곧장 조여왔지요. 이런 식으로 조선은 몇해를 두고 왕과 조정이 들어내지는 않았어도  청국의 속국이 되고 있습니다. 청일전쟁이  청국의 계획을 깨 버린거지요.”


“그러면 당신은  청국이 시도한 일들을 일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확신하는겁니까? 당신은 조선정부가 일본한테서 5백만엔을  차관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들으셨지요? 조선의 남쪽 3개 도의 쌀을 속국공물로 바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나는 아주 확신하고 있어요. 일본이 조선의 개혁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한은 조선을 도우리라는 점을요. 일본의 개입이 조선에  고마운일이 될지 저주가 될지는 전적으로 조선의 조정이 지혜로운 애국심을 발휘 할것인지 아니면 어리석게 이기주의 를 택할것인지에 달렸지요. 조선은 이제  상황을 개선할 좋은 기회를  맞았습니다. 만일 조정과 국민이  올바른 정신으로 성실하게 실천하지 못하면 이 절호의 기회를 모조리 망칠 가능성이 있지요.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라를 지킨들 무슨 송용입니까”


F씨가 인도하는 가정기도회 모임에 참석하다. 그후에 헬렌 선생과 오랫동안 환담을 나누다.

 

1월13일. 일요일. 상해.


 어제 밤엔 무척 추웠다. 대야에 담은 물이 1인치 이상 바닥까지 거의 얼어붙었다. 주일학교가  종강하게 되어  본넬 교수가 학교를 떠나는 강연을 하다. 그는 많이도 옮겨 다녔다. 그는 가벼렸지만, 지난10년 동안 그의   젊은 제자들에게 좋은 영향과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가 필요하게 느껴지는 이 시간에, 그에게 나의 사랑에서 울어나오는 중요한 기념표시라도 보여줄 힘이 있으면 좋겠다.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낮잠 자다. 곧바로 중국인 교회의 저녁예배 시간에 참석하다. 알렌박사댁에서 저녁을 들다. 친절하고 어머니 같은 모습을 한 알렌박사 부인을 보고 나는 내 모든 고충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알렌 박사와 그의 가족들과 따뜻한 난롯가에 앉자 나의 귀국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간 사실이 믿어지질 않는다. 그때,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로호르 씨가 내게 영문법을 공부했는가 물었었지. 알렌 박사는 <뉴스>지에 실리지는 않았으나 내가 쓴“조선의 대화”라는 제목의 논문을 높이 칭찬 해주었다.

 

1월14일. 월요일. 춥고 구름 낀 날씨. 상해


오늘 아침에 본넬 교수가 내게 편지 한 통을 보여주다. 난킨 대학의 퍼거슨 씨가 그 학교에서 본넬교수에게 한 자리 주겠다고 제안한 내용이다. 본넬 교수가 그 제안을  제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랄 뿐이다. 


오후 늦게 미야께(三宅) 씨가 나를 방문하다. 그는 내게 조선에서 관직을  받는다면 유길준  보다 낮은 직위를 받지 않도록 충고한다. 그가 중국으로 오기전에 김옥균에 의해 조선으로 갈때 이야기를 처음으로 내게 말하기를, 비밀 특사로서 지낼만한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가르쳤던 두 소년이 내게 바나나와 귤을 세 바구니나 가지고 왔다. 나는 그 선물을 아주 고맙게 여겼다. 애퐁 자매의 집에서 저녁을 먹다. 자매의 계부 피터 중씨가 와 있었다. 그는 아주 명랑한 사람이다.


15일. 화요일. 비교적 개인 날씨. 해가 나다.


아침 11시에 학교 교사와 장학생들 모두 학기 말 종강 예배를 보기 위해 예배실에 모이다. 알렌 박사가 외국인의 시각으로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짧은 인사말을 하다. 그리고는 상금으로 7불에서 1불 사이에 해당하는 돈을 각기 다른 학급에 맞게 시상하다.


그 시상제도는 본넬 교수가 도입한 제도였다. 알렌 박사와 L씨는 이번 학기만 지나면 그 제도는 없앨라거라고 한다. 내 생각에 이 제도는 학생들에게  사기 를  높이기 위해서도 지속이 되어야 할텐데, 생각한다.
오늘은 애퐁자매를 두 번이나 봤다. 지난 주에 매일 자매를 찾아간 일은 내게 기쁘고 신선한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자매를 보러 갈 때마다 내 발 걸음이 빨라진다.

 

1월17일. 목요일. 거친 바람-몹시 추운 날씨. 상해.


 견딜 수없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하루 이틀이 지나,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내 사랑이 12시 경에 매킨타이어 홈에 도착하다. 그녀가 온다는 기쁜 소식은 ‘인력거’로 매킨타이어 홈에 달려가는 시간보다 더 빨리 내게 전해졌다. 사랑하는 아내는 개더 부인의 서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아름다운 그녀의 몸이 내 팔 안에 던지듯 안겨왔다. 창백한 얼굴, (엄청) 아름답고 고운 모습, 나를 무아경에 빠지게 하는 더할 나위없는 그 미소를 띄고  안겨 왔다.  내가 10년만에 귀국하는 계획을 뒤로 돌려 놓는듯한 느낌이다. 오, 하느님,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내 어여쁜 아내와 아기를 다정하게 돌보아 주소서!


오후 2시에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내 방은 북풍이 부는 듯 너무 추워서 난로도 소용없을 지경이었다. 


밖에는 한 겨울 삭풍이 윙윙 거리는데, 나는 편편찮은 내 방에 앉아 있네.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여인,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지쳐있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네. 
나에게 온통 매달려 있는 그녀의 불안함과 고통과 마음 씀씀이를 생각 하면서, 
내가 지금 달려가고 있는 불확실성과 모험을 깊이 깊이 생각해 보았네. 아무도 헤아려 주는 이 없이 오랫동안 내 사랑이 나 없이 홀로 겪었을 외로움과 불안감을 깊이 생각해 보았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저런  상념 속에 휩싸여 앉아 있네. 


 그 어느 누구도 사랑이 넘치는 ‘시’의 의미를 전혀 몰랐으리. 인생의 ‘산문’이  이런 것임을 발견하기 까지는. 

어여쁜 내 사랑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나는 춥고 배고픈 곳이라도 기꺼이 달려 가리라.

 헤이굿 선생에게서 즐거운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받다. 하느님, 고귀한 저 여인을 축복하소서!

 

1월18일. 금요일. 맑은 날씨. 바람이 불고 몹시 춥다.-하루 종일 땅까지 얼어붙다. 상해.


 나가미에게서 편지를 받다. 도쿄에 있는 내 사촌(치오)이 내게 우편으로 보내준 60불을 받았음을 알려주다.
우리들의 귀여운 친구가 나의 보배인 아내와 함께 하루를 지내다. 아내와 그의 자매 애퐁! 이 두 여인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오, 하느님, 내 사랑 시엔숭과 그의 자매 애퐁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HR양을 방문하여 50불을 꺼내어 맡기다.--그녀의 이름이 적힌 영수증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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